회관에 걸린 사진 속 사람들 / 정선례
농촌은 보기에는 고요하고 한가롭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늘 분주합니다. 예전 우리 마을에는 스물한 가구 스물여덟 명쯤 되는 주민이 밭고랑에 씨앗을 심고 가축을 돌보느라 하루해가 짧았어요. 마을 일을 묵묵히 챙기는 손길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부녀회일입니다. 빈 병과 고물을 팔아 회관 주방용품을 사고 헌 옷을 수거해 화물차에 싣고 가서 커다란 고무 대야로 바꿔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드는 낡은 냉장고 교체는 쉽지 않았어요. 새해가 밝자 부녀회에서는 기금을 마련하자는 안건으로 회의를 열었어요. 그때 전임 부녀회장인 백양댁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더군요.
"마을에 빈 땅이 많으니 작물을 심어 수익을 내는 건 어떨까요?"
모두가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양댁은 이어서 "이런 사업을 하면 기술센터나 농협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지도 알아볼게요."라고 말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비어 있는 땅에 콩을 심기로 했습니다. 그 비탈 밭은 원래 내동댁이 일구던 땅이었지요. 참깨와 콩, 감자농사를 지으며 이곳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살아온 내동댁. 그러나 연로하여 자녀들을 따라 서울로 떠나면서 그 밭은 점점 주인의 발길이 끊겼고, 이내 칡넝쿨이 우거진 묵정밭이 되었답니다. 그 땅을 마을 청장년들이 예초기로 정리하며 잡목과 칡넝쿨을 걷어냈어요.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삼촌이 회관 창고에서 석회를 가져와 뿌리고 트랙터로 땅을 갈아주었답니다.
기계의 도움을 받아 마을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어지요. 비 예보가 있던 날, 부녀회원들이 한 줄로 앉아 노란 메주콩을 심는 광경은 이제는 다시 보기 어려운 풍경이겠죠? 회장과 총무는 자주 밭을 찾아 콩이 잘 자라는지 살폈어요. 간격을 좁혀 콩을 세 알씩 심었는데도 새들이 쪼아 먹었는지 싹이 듬성듬성 나왔더군요. 그 소식이 마을 회관에 전해지자 회원들은 남은 씨앗을 챙겨 다시 밭으로 향했어요. 이번에는 토끼가 이파리를 뜯어 먹고, 여름 가뭄까지 겹쳐 콩 꼬투리가 제대로 맺히지 않았습니다. 제초제도 쓰지 않고, 땡볕 아래서 김을 매며 정성을 들였지만 수확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만약 일꾼을 사서 농사를 지었다면 큰 손해를 봤을 거예요. 부녀회원들과 그들의 남편까지 힘을 합쳐 울력으로 일한 덕분에 품삯이 들지 않아 적자는 면할 수 있었죠.
그다음 해부터는 결명자를 심었어요. 동물과 병해충에 강하고 비료 없이도 잘 자라는 작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름 장마 전후로 두 번이나 밭을 맸어요. 땅을 호미로 일구어 공기가 잘 통하게 해주자 노란 꽃이 피어나고 아카시아 닮은 둥근 잎 사이로 말괄량이 삐삐 머리처럼 긴 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렸지요.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꼬투리는 갈색으로 익어갔습니다.
마침내 수확하는 날이예요.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신기댁, 다리가 불편해 기우뚱거리며 따라오는 농암댁, 걸음을 멈추고 한 번씩 허리를 뒤로 젖히는 좌천댁까지. 스물두 명의 부녀회원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가파른 밭을 오르셨어요. 그분들의 살아온 고된 세월이 뒷모습에서 고스란히 드러났어요. 그래도 볕 좋은 날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은 덕분에 수확은 반나절 만에 마무리되었어요.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꼬투리째 사흘간 밭에서 말린 결명자는 막대기로 털어내고, 풍로를 이용해 이물질을 걸러야 합니다. 가마니가 수북이 쌓여 그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회원들의 노력 덕분에 고장이 잦던 작은 냉장고를 마침내 양문형 냉장고로 바꿀 수 있었고 회비를 걷지 않고도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죠. 통영의 한려해상국립공원 소매물도로 떠난 당일치기 여행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새벽에 출발해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서도 넘치는 흥을 주체하지 못했답니다. 차 안에서는 음악에 맞춰 관광버스 춤을 추느라 버스가 들썩거릴 정도였지요.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술과 안주를 권하며 통로로 이끌어 흥을 돋우느라 주거니 받거니 나눈 술잔에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어요. 좁은 좌석에 끼여 서로의 팔이 닿을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고 몸을 부딪치며 신나게 흔들다 보니 다음 날이 되어서야 여기저기 멍이 든 걸 알았어요. 의자에 찧어도 아픈 줄도 몰랐던 것이지요. 요즘에는 사라진 위험천만한 광경이었지만 추억 속 한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그날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단체 사진이 아직도 회관 한쪽에 걸려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부녀회원의 숫자는 절반으로 줄었어요. 몸이 불편해지신 어른들은 자녀 곁으로 가시거나 아픈 몸을 이끌고 요양원으로 떠나셨습니다. 산에 묻혀 마을을 내려다보는 이들도 여럿 계십니다. 이제는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네요.
그 밭은 언제부턴가 다시 묵정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꼬투리에서 떨어진 씨앗 덕분에 밭 가장자리에 저절로 자란 결명자가 해마다 열매를 맺네요. 그곳에서 부녀회원들과 함께 흘린 땀과 웃음이 마치 오래된 옛이야기처럼 느껴지죠. 한나절 일을 마치고 회관에 모여 갓 지은 쌀밥에 시큼한 파김치를 얹어 맛나게들 먹었어요. 노동의 허기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한입 가득 베어 물던 순간 서로를 바라보던 따뜻한 눈빛은 마치 어제 일처럼 아직도 생생합니다.
첫댓글 재미있지만 마음 한 켠이 서늘해지는 글입니다. 시골이든 어디든 사람이 없는 현실이 걱정이네요.
마을 사람이 마음을 모아 잘 해내고 그 보상으로 여행도 다녀 왔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어 추억으로만 남겨야 하니 안타깝네요.
이제 마을에 공동체 의식이 희미해져 가고 있어 안타까워요.
선생님이 모두 함께 한 그런일이 이제는 없는 것 같아요.
시골 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져 우리 마을을 보는 듯해서 읽으며 여러번 울컥했습니다.
훌륭한 부녀회장님! 감동했어요.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는 시절의 이야기군요.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그려집니다.
자기 일 많은데 그런 생각을 했다니 대단하세요. 그 추억이 큰 힘이 되셨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