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육 죽을 끓이며-분노의 힘/변영희
섣달그믐 ,
해마다 이맘때는 설날을 준비하기 위해 아들네 집으로 가곤했다.
올해는 좀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아침 일찍 외출하는 딸애가 연자육을 한 봉지 식탁에 올려놓고 속 거북한데 죽을 끓여먹으라고 나에게 당부했다. 속만 거북한 게 아니라 나는 마음도 몹시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처럼 휴가를 만나 기분 좋은 딸에게 죽까지 끓여달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나라면 까짓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서툴지만 녹두죽도 끓여드릴 수 있고. 곁에 지키고 앉아서 잘 드시는가 못 드시는가를 근심스럽게 살펴보는 정성? 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전의 내 방식이 모두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밤새 설사와 구토로 지쳐 있었지만 죽 정도는 내 손으로 끓일 수가 있었다. 매사 타인에게 기대하거나 의지하지 않고서도 노년을 힘차게 멋지게 지낼 각오는 충분한 터였다.
내가 겪은 희한한 일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친절한 시인 선생님의 요청으로 모 문학단체에 입회했다. 몇 차례 행사와 모임에 참석하면서 드물게 묘한 인연, 아니 묘하기는커녕 악연을 만난 것일까. 악연인지 선연인지를 구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만날 때마다 '찜찜' '꺼끌' 이 지나쳐서 불쾌했다는 감정은 속일 수가 없다. 많은 형제 중 맨 가운데 태어난 탓인지, 어지간해서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일이 없고, 미련할 만치 인내력을 소지한 내가 차츰 그 모임, 그 단체장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나를 그곳에 인도한 시인이 그 단체를 탈퇴해버렸다. 나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나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만날 때마다 그 단체장을 격앙된 어조로 성토했다. 대부분 흔해빠진 비리 부정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았으면 굳이 왜 나를 그 단체로 데리고 갔던가. 나는 불만스러웠다. 내가 모임이 없어서 들어간 게 아니지 않는가. 사는 곳의 단체에 들어가는 게 좋다는 말을 선의로만 받아들인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으므로 나도 곧장 탈퇴해버렸다.
얼마 후 수많은 문학단체 중에서 나에게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오는 단체에서 그 장본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솔직히 반갑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내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고, 무조건 자기 앞에 앉으라며 반말을 사용하는 게 거슬렸다. 나에게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손녀도 있어, 어디로 보나 성희롱 따위를 당할 군번이 아니다. 그의 부당한 요구를 듣지 않으면 내 손을 무자비하게 잡아끄는데 그 기세가 험악하기 이를 데 없다. 당장 불량한 기氣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붙잡힌 내 손과 손목이 억수로 아팠다. 그래도 모른 척 인사하고 그 순간을 모면했다. 그게 한두 번인가.
그날은 특별히 더 심했다.
2020 첫 이사회를 마치고 술을 마시지 않는 동료작가들과 식사 후에 조금 지체하다가 일어섰다. 열띤 회의도중 눈빛으로만,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한 분들에게 인사하면서 출입구로 나오는데 드디어 예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 지점에 앉아 있던, 평소에 혐오감을 품게 해 선량한 내 마음에 상처를 끼치던 그 위인이 어! 하면서 반가움인지 노여움인지 모를 제스춰로 나의 오른손을 꽉! 검어쥐었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내가 울상을 짓자 그는 더욱 신이 나서 팔목까지 온힘을 다해서 비틀어 쥐고, 그 잘 생긴 면상에 비릿하고 야릇한 웃음을 띠고서 3분?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나를 놔주지 않았다. 경기도민京畿道民인 나는 사력을 다해 마수魔手를 벗어나 시시각각 변하는 서울 지리에 어두워 일행을 뒤따라가기 바빴다.
밤새 나는 신열과 설사와 복통, 구토에 시달렸다. 병명을 말하자면 극심한 인간혐오증. 급속히 생성된 스트레스에 더할 바가 없다. 이건 통상적인 악수가 아니라 일종의 고의성이 내포된 폭행 수준이었다. 나는 별로 섭취한 내용도 없이 설사와 토악질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자 몸을 추스려 한의원漢醫院으로, 불한당에게 붙잡혔던 오른 손이 퉁퉁 붓고 쑤셔서 정형외과로 비척거리며 나섰다. 이쪽저쪽 다니며 치료받느라 겨울 짧은 해가 저물었다. 딸에게는 차마 밖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바깥상황이 그 정도인가 상상할까봐 부끄러웠다. 딸은 기운 없다는 나에게 이때다! 하고 연자육 죽을 거론했다.
명색이 설날인데 근처에 사는 아들네에 엄마 없는 손자들을 보러, 맛난 음식이라도 장만해주러 가야 하는데 일어설 기력이 동났다. 주사 맞고 잠자는 약을 먹어서 밤인지 낮인지 모르게 혼수에 빠진 때문이다.
연자육을 물에 불궈 믹서에 갈아 죽을 쑤었다. 무른 음식은 질색이지만 연자육을 먹으므로 나의 영과 육 저변에 깃든 불순물을 깡그리 제거하고 싶다. 어떤 경우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불운의 단초일지도 모른다. 미워할 가치조차 없다. 순간순간이 황금처럼 소중한 시점이 아닌가. 그 인물에 대한 내 선입견이라면 선입견, 혐오를 쓸어내 버릴 당위성은 인정 한다.
경자년 설날! 새로운 날의 첫 출발이 향기롭기 위하여 연자육 죽을 끓이며 분노의 힘을 글로 풀어낸다.
첫댓글 변영희 선생님 이번에는 넘어져 다친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군요.
저도 어느 누구에게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았는가? 즐거워야할 이 설날에 반추해보며
하루가 또 저물었습니다. 마음추스르시고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변영희 선생님 !
변영희선생님,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따님의 발검음을 보면서 그래서 자식이 좋다고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없는 손자 걱정하시는 마음에서 이세상의 어머니, 할머니의 마음을 읽습니다.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