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곁의 무성한 가지
2023. 10. 29.(행복나눔축제) 창세기 49:22-26
공기가 가득 찬 공이 있다. 그 공을 바닥에 던지면 공은 튀어오른다. 아니 바닥이 딱딱할수록, 그리고 더 세게 던질수록 공은 더 높이 튀어 오른다. 그런데 유리를 던지면 박살이 난다. 더 딱딱한 바닥에 더 세게 던지면 유리는 더 세게 박살이 난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에게도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딱딱한 역경이라는 어려움 앞에 놓이면 그 역경으로 인하여 더 높이 뛰어 오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역경의 아픔 앞에 서게 될 때에 낙심하고 절망하여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삶의 역경에 부딪칠 때 뛰어 오르는가? 부숴지는가? 역경으로 인하여 더 높이 뛰어오르는 것을 회복탄력성이라 한다. 역경 앞에서 자기감정을 조절하고, 또 공감능력을 가지고 긍정성을 가진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회복탄력성은 몇 점이나 되겠는가? 일본의 3대 경영인 중에 한 사람인 소이치로 혼다는 피스톤 링을 만드는 사업을 하였는데, 2차대전 때 B-29 폭격기의 폭격으로 공장전체가 부숴져 버려서 사업에 실패한다. 그 다음에는 가솔린 깡통을 모아서 판매하는 사업을 했지만, 지진으로 또 무너졌다. 이제 돈도 없고, 또 2번이나 실패한 소이치로 혼다를 도울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빈털터리로 살아가던 혼다는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혼다가 길을 가다가 고물 자전거를 발견하여 그것을 고쳐서 팔았더니 작은 돈이 되었다. 그 후 혼다는 쓰레기 통을 뒤져서 부숴진 자전거를 찾아 고쳐서 팔았다. 이것을 하던 혼다는 이 자전거에 모타를 달아서 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전거 점포 1만 8천 곳에 기획서를 작성하여 보내었다. 그때 5천 곳에서 좋다는 답이 왔다. 그래서 시작한 사업이 자전거에 모타를 달아서 파는 것이었다. 그 모타를 단 자전거를 auto에 bicycle를 합성한 오토바이가 되었다.
이것이 혼타오토바이의 출발이 되었고, 나중에는 혼다자동차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혼다 자동차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자동차가 되었고, 소이치로 혼다는 1989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 올랐다. 소이치로 혼다의 인생에 엄청난 역경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역경을 이겨낼 때 성공이 따라온 것이다. 결국 실패와 역경 없는 성공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역경을 이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장면이다. 야곱이 요셉에게 무슨 축복을 하는지 창세기 49장 22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창 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뚜렷한 나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지 않고, 우기와 건기로 나눈다. 그래서 우기 때는 비가 와서 광야에 풀이라도 자라지만, 건기 때에는 비가 오지 않아 풀은 마르고 메마른 땅이 된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나무는 키도 작고 아주 말라 있다. 그런데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잎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 쭉쭉 뻗어져 가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담은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담을 넘었다는 말은 너와 나를 구분하는 그 구분선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함께 그늘에 쉬고, 그 열매를 나누어 먹는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축복인가? 박재연 소장의 강연을 들었다. 박재연 소장은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 할 사람이 없었다. 박재연 소장이 어렵고 힘들 때 내가 마음을 나눌 수 없는 것은 타인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났을 때 나를 보고 웃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만, 그 사람이 인상을 쓰고 있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늘 웃을 수 있도록 내가 행동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박재연 소장이 정작 자신이 힘들 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박재연 소장은 자신이 힘든 이유는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고, 외로운 이유는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고, 또 억울할 때는 내 진실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생각하였다. 타인중심의 삶을 살았던 박재연 소장은 힘든 일은 모두 ~ 때문에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랬던 박재연 소장이 아버지에게 매를 많이 맞은 아이와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때 박재연 소장은 그 아이에게 아버지에게 정말 화가 났지 하고 말했다. 왜냐하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어려운 일을 당했던 박재현 소장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박재연 소장과 다른 대답을 했다.
저는 아빠가 밉지 않아요. 다만 슬퍼요.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도움이 필요해요.
그 아이의 말에 박재연 소장은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는 비록 어리지만 현재의 감정 원인을 상대방에 두지 않고, 자신이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인된 모습이 아니겠는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지금 내 감정으로 남탓을 하지 않고, 내가 책임을 지고 또 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만 고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이겨나가는 그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셉이 받은 복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샘 곁에 심겨진 요셉은 담장 너무 무성한 가지가 되었다. 여기서 담이라고 하는 것은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는데, 요셉은 그 담을 허물어 함께 평안을 누리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은 것이다.
요셉이 받은 복이 너무 아름답지 않는가? 그런데 요셉이 받은 복이 또 있다. 요셉이 어떤 복을 받았는지 그 다음 구절도 읽어보기 바란다.
(창 49:23-24)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활을 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고대의 활은 힘있는 장수만이 당길 수 있는 아주 힘겨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힘이 센 장수가 요셉을 학대하고 적개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을 향하여 활을 쏘는 것이다.
얼마나 두렵고 힘들겠는가? 그런데 요셉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힘이 없어 활의 시위를 당길 수 없는 요셉의 팔을 하나님이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의 팔을 잡고 활의 시위를 당겨서 전쟁에서 승리케 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보통 아기는 태어나서 고개들기, 뒤집기, 앉기, 기어다니기, 붙잡고 서있기를 한다. 그리고 보통 9개월-18개월 사이에 아기는 걸음마를 한다. 붙잡고 서기를 하면서 다리에 힘이 좀 들어가면 그때부터 엄마는 섰다. 섰다는 반복시킨다. 그러다가 아이가 넘어지면서 앞으로 한발 걸으면 아이가 걸었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빠가 퇴근하여 집에 오면 아이가 걸었다고 하면서 아이에게 걸음마를 시킨다.
그때 엄마의 손이 어디에 가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아들을 낳지 못했던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첩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갈이 임신하였을 때 첩이었던 하갈이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한 것이다. 그러한 하갈을 사래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래서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못이겨 결국 도망하여 광야로 나간다. 그리고 광야의 샘물 곁으로 나온 하갈을 여호와의 사자가 만나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사래의 말에 복종하며 살아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하갈이 왜 집으로 돌아갔겠는가?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하갈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 이름이 바로 엘 로이이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다는 것이다. 여기서 감찰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냥 보고만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을 보시고, 그 고통에서부터 해결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 하갈이 집으로 돌아가서 사래의 학대를 받았겠는가? 받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하갈은 그 학대를 다 이겨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고통을 다 알고, 또 견딜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 로이의 그 하나님이 바로 요셉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 있는 장수가 화살을 겨누어 요셉을 괴롭힌다 하여도 하나님이 엘 로이의 하나님이 되어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러한 복을 받고 싶은가? 어린 시절에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신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허망해 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본 아들은 앞으로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엄마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리고 정말 어머니 속 한번 상하게 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서 결혼을 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그런데 아들은 한 번도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어머니가 연로하여서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아들은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 엄마! 하면서 어머니를 불렀다. 그렇게 아들이 다급하게 엄마라고 불렀을 때 침대에 누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나는 네가 나에게 엄마라고 불러주기를 늘 기다렸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일찍 철이 든 아들을 보는 어머니는 늘 기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철든 아들보다 엄마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해 하는 그 아들의 모습이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샘이 되어서 우리가 무성하게 자라나서 평안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또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으로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신 것이다.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초대하고 손을 벌린다. 그 품에 안기어 샘 곁에 있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