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박애주의(humanitarianism)를 외치고, 안녕을 위한다고 외치고,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외치고, 인간다운 삶을 외치고, 편익을 위해 외치지만, 오히려 인간을 살상하는 일에 더 신속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뭣인지도 모른 채로 이익을 위해 동기부여를 받기에 누구도 누구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산다. 무인 자동차, 무인 서비스 로봇, 무인 글라이더, 즉 드론 등등을 만들어 내서 자신의 재능을 뽐내면서 이후의 어떤 일이 발생할는지 예상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대로 사용한다. 젊은 육체를 사용하여 즐길 수 있는 쾌락을 일시적으로 가지는 데 더할 일이 없다. 평생 후회하며 지낸다. 평생 약을 동봉하지 않으면 죽지 않으니까 사는 것이고, 죽은 후 공포의 지옥에 대한 생각으로 죽고 싶지 않으니 미련 속에 여생을 살아간다.
현재 유크레인에 이어 가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현재까지 3천 명가량이 죽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학살이 일어날는지 모른다.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일이 훨씬 많다. 왜 인간은 이다지도 복수심을 감성적으로 처리할까? 그것에 대한 대가는 처절하지만 왜 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로 악용당하고 악용할까? 인간에 대한 부정의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은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간다. 있으면 있는 대로 산다. 인간은 적응하는데 능숙한 동물이다. 본능으로 살아가는 동물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이성, 즉 본성의 빛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은 동일하게 영을 받았다. 그래서 생각하고 지식을 저축하고 행동하지만, 차이점은 분명히 두 가지, 즉 그분의 형상과 이성을 지닌 것이다.
본능이란 느끼고 보는 대로 행한다. 배우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몸이 저절로 반응한다. 기술 터득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지만 미술의 기교를 지니거나 물건을 해체하고 수리하고 정리하는데 익숙하다. 이것은 유전인 동시에 본능이다. 동물은 자신에게 해로운 것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만족하면 쉰다. 욕심과 저축도 하지 않는다. 그저 현상을 만족하며 살아간다. 늑대의 먹이가 되는 동물을 보면 측은하게 여기지만 본능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토끼와 같은 가축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자연피해를 초래한다. 이것을 인간이 간섭하면 안 된다. 동물의 세계는 자연스럽게 본능으로 행하기에 그것을 제한하면, 고스란히 인간 세계에 피해를 촉발한다. 산돼지가 마을에 출몰한다 하여 사람들이 힘들어한단다. 자신의 터전과 먹이를 인간이 축소시키기에 먹을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인간이 산돼지의 영역을 침범하니 자연스럽게 그들은 본능에 따른 행동을 취한다. 인간은 그들이 자신에게 위협된다고 하여 사냥한다. 인간이 저지른 만행은 전쟁에서도 볼 수 있지만 작은 일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박애주의를 부정하거나 자연보호를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그것보다도 더 우선으로 취해야 하는 행동은 인간이 본능에 일단 충실해야 한다. 이성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기적 욕망에 따르는 것을 자제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성이 부패하고 나니 극단적 이기성으로 첨단의 길을 걸어 이익을 보려고 한다. 본능에 먼저 충실한다는 것은 것은 자신의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먹을 만큼 먹고 누릴 만큼 누려야 한다. 냉장고가 없는 세상에 살아봤기에 가스렌즈나 마이크로 웨이브가 없는 세상에 살아봤기에 인간의 편익을 위한 전자 제품이 얼마나 인간을 부패시키는지 잘 안다. 노동해야 하는 시간에 여유를 누려서 쾌락을 즐기려 하지만 그 대가를 톡톡히 받게 된다. 적당히 해야 하지만 인간은 부패한 이성으로 적당하게 만족하지 않는다. 게다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상태에서 무슨 절제가 있을까? 그리스도인이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세상에 얼마나 버티면서 인간의 본능, 이성과 형상에 따라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