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 皇帝のもとに行く事になる。(2022년 11월 13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25:8-7
행 25:8 바울은 "나는 유대 사람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황제에 대하여 아무 죄도 지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여 자신을 변호하였다. 9 그러나 베스도는 유대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여, 바울에게 묻기를 "그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재판을 받고 싶지 않소?" 하였다. 10 바울이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황제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나는 유대 사람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11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12 그 때에 베스도가 배심원들과 협의하고 "그대가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니, 황제에게로 갈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8. パウロは、「私は、ユダヤ人の律法に対しても、神殿に対しても、皇帝に対しても何も罪を犯したことはありません」と辯明した。9. しかし、フェストゥスはユダヤ人に気に入られようとして、パウロに言った。「お前は、エルサレムに上って、そこで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わたしの前で裁判を受けたいと思うか。」10. パウロは言った。「私は、皇帝の法廷に出頭しているのですから、ここで裁判を受けるのが当然です。よくご存じのとおり、私はユダヤ人に対して何も悪いことをしていません。11. もし、悪いことをし、何か死罪に当たることをしたのであれば、決して死を免れようとは思いません。しかし、この人たちの訴えが事実無根なら、だれも私を彼らに引き渡すような取り計らいはできません。私は皇帝に上訴します。」12. そこで、フェストゥスは陪審の人々と協議してから、「皇帝に上訴したのだから、皇帝のもとに出頭するように」と答えた。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의 악을 추구하는 속성은 변하지 않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흔들리거나 낙심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과 본분을 분명하게 지켜 나아가는 바울의 용기와 태도를 또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를 둘러싸고 고소하고 고발하는 이들에게는 바울을 죽일 수 있는 그 어떤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절망케 하고 낙심케 하는 갖가지 지식과 정보들은 결코 우리를 죽이거나, 멸망하게 할 증거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복음의 약속으로만 언제나 소망 가운데 기쁨과 흐뭇함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서는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과 여건에서도 사람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이유를 동정심과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로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그러므로 누군가 사람답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쩌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생존하는데 사랑은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꼭 죄사함을 얻어 거듭난 사람만이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원초적으로 무엇인가를 사랑하기에 생존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사랑이, 그 사랑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사랑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데 남용이 되거나, 오용 된다면 과연 그 사랑은 가치 있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하되 사랑답게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하나님이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현실의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단지 생존을 위해 사랑을 오용하고, 남용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랑이 사랑답게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생존을 위한 사랑, 생활을 위한 사랑을 뛰어넘어 생명을 낳는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하는 것이 곧 생명을 위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람이 사랑으로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은 어떠한 ‘의미’로 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지 내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동정심을 베풀고, 혹은 자기중심적인 의도에서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사랑이라면 과연 그 사랑은 생명을 위한 사랑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지요.
예전에 어떤 개그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에피소드인데요. 어느 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여학생이 선배 복학생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합니다. 이런저런 언행으로 대쉬를 하는데요. 남자 선배는 그 여학생에게 관심이 없지요. 묻는 말에 대답도 대충하고, 어서 다른 곳으로 가라는 사인을 보냅니다. 그러자 선배에게 토라진 여학생이 선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배 마이너스 100점! - 자신에게 점수를 잃었다는 말이지요. 그 때 선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고~ 의미없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에 점수를 매기고,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인간은 사랑으로 생존하고 생활하지만,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을 통해서 사랑할 때, 생존과 생활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생명까지도 지켜 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는데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한 가치를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1)
여기서 보물이란 꼭 돈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인 돈을 포함하여 자신에게 있어서 가치가 있고, 소중하게 여기는 어떠한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존재를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물로 여기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매여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가 ‘보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결국은 육신의 삶까지도 모두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가치를 분별하고 보다 의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제게 주신 주님의 마음이라고도 믿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라도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의미가 있을 일을 위해서 삶이라는 인생의 시간의 기회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여겨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가치와 의미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사용할 때 지킬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자신의 사명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엡 3:7)
자신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세속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책망이나 혹은 거리낄 것이 없는 일상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의 율법에도, 성전에도, 가이사 즉 황제를 대하여도 전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스스로를 교만하게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정도로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떤 욕심이나 사심이나 탐욕의 마음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속적인 것과 관련하여 손익을 다투어 계산할 그 어떤 여지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조금이라도 사심을 갖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면 그 사소한 욕심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고발에 걸려들 빌미가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의 수많은 중상모략에도 유죄를 받을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의와 타협하고, 부조리를 용납하고 용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필요악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불의와 함께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동행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고후 6:16a)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영이 따르는 가치관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없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고전 10:21)
그런데 실은 이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당하게 자신은 율법에 대하여도, 성전에 대하여도, 또한 황제에 대하여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이 무죄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이런 바울의 당당함과 담대함을 배우고 또한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수 있으려면 자신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속의 보물을 얻기 위해서 갈망하고 애태우던 일상에서... 이제는 주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자신의 소유와 재능과 명성과 좋은 것들을 섬길 수 있는 용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간구하는 일상으로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구요. 또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교생활에 매진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수시로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며 기도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 삶이 쌓이면 결국 바울처럼 용감하고 담대한 태도로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아멘!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재판을 받지 않겠느냐는 베스도의 제안을 거절하고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황제에게 가겠다는 말은 바울이 황제를 인정하고 황제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갈급해서가 아닙니다. 더욱이 그가 지금 자신이 처한 위험과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꼼수를 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게 될 것임을 성령으로부터 감동을 받은 상황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천부장에게 붙들렸을 때에 주님의 영이 감동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최고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옥에 갇혀 있었어도... 온갖 오해와 음해 그리고 모략에 둘러 싸여 있을 때에도... 절대 주눅 들지 않고, 위축되지도 않았던 것이지요.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의 무죄임을 주장하면서도 황제에게 상소하여 ‘피의자’로서 로마에 갈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용감한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세속의 가치 연연하거나 미련을 두지 않고 그 어떤 거리낄 것도, 걸림돌이 될 것도 없이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세속의 가치와 충돌하여 발생하는 어떤 고난과 환란에도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 진정한 대인배의 마음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고 큰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울을 본받아 그리스도인답게, 아름답고,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고 영원한 생명이 현실이 된 천국의 감동을 온전히 누리며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세속적인 보물에 그 어떤 미련도, 가치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세속적인 가치에 속을 일도, 또한 죄를 범할 여지나 유혹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를 이기적인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두는 존재입니다. 이 땅에서의 아쉬움과 미련, 혹은 불의와 부조리, 그리고 환란과 갈등 속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깊고, 영생의 가치가 있는 존재가 바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생에 합당한 가치와 의미를 구하고 갈망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자기 육신의 욕망과 탐욕, 그리고 정욕과 재미를 위해 살던 태도와 자세를 회개하고 복음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마음에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의미도 없고 허무하다고 하시는 것에 갈망하는 무가치한 일상으로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생의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고, 모든 순간에 주님과 손잡고 행복하게 동행하면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