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량형
상고시대
한국의 도량형은 상고시대부터 통일된 도량형제도로 실시되고 있었음을 우리나라의 옛 기록과 유물 및 유적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 때까지도 양전의 표준척인 양지척이 중국 선사시대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성인 남자의 지폭을 사용하고 있으며, 부피의 표준량도 성인 남자의 양손을 모아 담은 곡물량을 표준량으로 한, 1되[升]의 150배를 1섬[石]으로 한 인체를 기준한 원시 농경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표준량제도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기 史記〉 하본기에서나 볼 수 있는 무게의 표준량인 칭이란 단위도 조선시대까지 통용되고 있음을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상고시대의 도량형제도는 중국의 선사시대 때 사용되었던 도량형제도와도 서로 깊은 관련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사〉에서 밝히고 있는 평양외성의 기전은 세종 때까지 계속 양지척으로 사용되고 있던 지척과는 다른 것으로, 길이 35.51cm의 기전척(일명 고구려척)을 양지척으로 하여 은나라 제도로 밝혀지고 있는 4진법과 10진법의 복합단위제도로 구획되고 있었다.
삼국 및 통일신라 때에 이 기전척이 지척과 더불어 관척이 되고 있었으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까지도 전수되고 있었던 표준량기도 이 기전척을 기준한 1입방척이 되게 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고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도입되었을 것으로 인정되는 주척, 한(漢)의 관척과도 관계된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고대 한국의 척도
양·형 제도의 개혁
상고 때 중국의 표준용적량은 한국과 같이 성년 남자의 양손에 담긴 곡물량을 1승[掬]으로 정했던 것을 춘추전국시대 제(齊)의 시조 태공 화(太公和)에 의하여 1승의 양을 100:64의 비율로 도량형제도를 개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00승 부피의 단위량이었던 1석은 150승인 15두로 고쳐졌고 석이란 부피단위명은 120근이란 무게단위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생기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한 섬은 15두로 정해졌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당나라와의 문물교류가 빈번하게 되어 681년(문무왕 21)에 양형제도를 당의 제도와 근사하게 표준량을 2배로 증강 개혁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1석량도 종래량의 2배가 된 것이 한말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따라서 전래의 표준량기인 기전척 1입방척 표준원기의 부피는 개혁신량의 7두 5승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그것은 1석의 절반량이 되었다.
한국 고대 양제 일람표
고려 문종의 양체제 개혁
고려의 문종은 성종이 제정한 3등급전에 대한 차등조세법이 복잡하여, 이것을 옛 조세법과 같이 단일조세법인 동과수조법으로 개혁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서, 1053년(문종 7)에 제가량제도라 할 수 있는 양체제개혁을 실시했다.
즉 전래의 표준량은 미곡계량용 표준량제로 정하고, 이것과 동가인 4종의 계량물용의 미곡과 대소두곡, 말장곡, 패조곡이란 표준량기가 제정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호전조로 바쳐야 했던 대소두계량용 대소두곡의 표준용적은 미곡의 절반값에 해당하게 용적이 제정되고 있었음이 특징이다.
이것은 문종이 동과수조법을 실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양체제개혁을 실시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4종의 곡기의 크기를 표시하고 있는 양기척은 당대척이었다.
세종대의 도량형제도 통일
나라의 백물제도를 획일화시키기 위해 먼저 그 기준이 될 도량형제도의 표준량을 정확히 제정·통일·보존하게 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세종이 집현전에 명하여 표준척도들을 제정하게 했는데, 1430(세종 12~31)년에 주척을 비롯하여 황종척·영조척·포백척·종서척·횡서척 등의 표준척들을 제정하고, 이미 허조(許稠)에 의해 제정된 조례기척까지 합하여 세종대의 표준척은 7종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주척은 세종 이후 양전 및 이정의 표준척으로 사용되었으며, 상의례 및 그밖의 기준척으로 사용되었던 관척이다.
황종척은 당악인 세종아악의 기본음인 황종음고를 정확히 낼 수 있는 황종율관을 만들기 위하여 박연에 의하여 만들어진 악률척인데, 이 척도로 세종악의 12율음을 삼분손익법으로 제정한 기준척이다.
또 황종율관은 세종형량의 표준기가 되기도 했다.
영조척은 세종 이후의 건설용척이 되었으며, 1446년(세종 28) 이후로의 표준량기척이 되기도 했다.
포백척은 포백 및 의복재단용 기준척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조포용 관척이 되었다.
조례기척은 제례용·제기제작용 기준척이 된 것이다.
따라서 그 길이가 정확하게 보존되어야 했던 관척은 주척·포백척·영조척·황종척이었는데,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의 도량형기에서 주척장을 오기하여 후대인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되자 순조 때 이것을 고쳐 원래대로 바로잡게 했다.
1446년에 양체제를 개혁한 후 표준관척들을 정확히 보존시키기 위하여 동제 표준척을 전국관부에 보내 보존하게 했으나, 관원들의 관리소홀과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삼척부의 포백척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망실되었다.
이로 인해 1634년(인조 12)에 분급된 일등양전척의 신장이 주척 길이의 신장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세종 때 주척과 구분하기 위해 이 주척을 갑술양전주척이라 하며, 이 주척의 실질적인 길이는 순조 때 재건된 수표교에 각입된 것이 현존하고 있다.
고려 문종 때 제정된 제가량제는 세종 때까지도 계속 사용되었으나, 양기척인 당대척이 세종영조척으로 개용됨과 동시에 토지제도도 개혁됨에 따라 1446년 영조척을 양기척으로 한 문종 이전의 양제도와 같은 단일량제도로 체제개혁이 실시되었다.
따라서 1승량은 681년에 개혁된 표준량으로 환원되었다.
다만 관례에 따라 15두 1석을 평석 또는 소곡이라 했으며, 20두 1석을 전석 또는 대곡이라 했음이 특징이었다.
세종 때 곡두승합의 용적1)
세종 때에 통일한 표준형량은 통일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세종 때까지 전수된 형량제도를 계속 사용하면서 표준형량을 삼척부가 보존하고 있었던 저울을 택했으며, 그 형량표준을 보존시키기 위하여 박연이 제작한 황종율관에 가득 채운 우물물의 무게를 88분으로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서 세종 때의 1근은 641.95g이었음이 확인된다.
세종 때 형량의 크기
1902년의 도량형 개혁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 세종 때의 표준량도 되찾기 힘든 문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한 도량형제도 개혁이 실시되었는데, 이때 미터법과 일본의 도량형 표준량들이 도입되게 된다.
척도의 표준으로서는 일본의 곡척인 길이 30.303cm를 영조척으로 취하고, 주척은 곡척 6촌 6분, 포백척은 곡척 1척 7촌으로 정했으면서 실질적인 관척으로서는 곡척만이 제작공급되자 표준척은 곡척으로 정착되게 되었다.
양제의 표준량인 1승은 일본 양제의 표준량인 1,803.9㎖가 제정되었으며, 형량의 표준량인 1근도 일본표준량인 600g으로 제정·실시되니, 이때의 도량형제도 개혁은 일본의 도량형제도로의 개혁이었다.
따라서 여기 따른 백물제도들은 일본식 제도화가 되었다.
미터법으로의 개혁
1963년 도량형제도는 미터법으로 개혁되었는데, 종래의 관례에 따라 용적의 표준량은 2l을 1승, 10승을 1두, 10두를 1석으로 하고 있으며, 형량도 1근을 600g으로 시중에서는 통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