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를 읽을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젊었을 땐 무슨 의미인 줄 알려고 노력했다. 여러 주석을 읽으면서 도움을 청했다. 개념을 갖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계속해서 읽었고 도움을 받았기에 어느 정도 개념 정리는 가능했지만, 문장과 그것에 담긴 그의 의도를 찾기엔, 아니 전체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기엔 미흡한 것도 있었다. 인생을 그만큼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스스로 위로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깨달으며 삶에 실천하며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확신하는 것은 말씀을 따라 제대로 걷는다는 놀라운 은혜이다.
새벽기도회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허락하실지 늘 기대한다. 특히 욥기만 아니라 앞으로 이어질 시가서들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알고 있고 배우고 익숙한 신앙 교리가 하나씩 접목돼 실체를 드러나는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말씀 의미를 깨닫게 하려고 전해준 신앙고백서를 제외하면 성경의 의미를 찾는 중요한 길잡이를 놓친 셈이다. 과거에도 고백했듯이 난 누구보다도 성경을 읽었다고 자부했고, 의미를 찾으려 성경신학을 했고, 교회 역사만 아니라 철학과 조직신학까지 겸비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한가 신앙고백서 한 장, 한 항만 아니라 한 단어를 해석하는데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줬다. 그래도 나에겐 하나의 위안 된 것은 <기독교강요>를 통해 성경의 전체 내용만 아니라 믿음의 도를 깨닫는 방식을 배운 것이다. 칼빈의 이 책은 명실공히 고귀한 진리의 길잡이다. 이것을 알고 배움에도 불구하고 신앙교리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년 전이었다.
신앙고백서가 성경 읽기, 즉 해석의 길잡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 걸린 시간도 오랜 세월이었다. 성경구절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너무나 중요한 사항이다. 그래서 주석, 배경, 원어, 총론 등등을 통해 연구한다. 하지만 빼놓은 것이 있었는데 바로 신앙 교리였다. 신앙 교리는 조직신학이 아니었다. 신앙 교리는 성경 읽기 길잡이다. 그리스도교 항목이라고 단순히 말하기에는 너무나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 해석의 길잡이다. 그 길잡이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다. 믿음으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그분을 그리스도와 구세주로 수용하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이고, 믿음으로 의롭다 여긴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 종노릇하는 데서 그리스도로 구속자로 수용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믿음이 단순히 하나의 항목이 아니라 수용하는 그 자체이고, 그 수용은 선택에서 나온 것이고, 그 선택된 자에게 수용하게끔 성령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선택도, 수용도, 깨달음도 모두 은혜이다. 그후 새 사람이나 새 피조물로 사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라는 의미는 자신의 과거 모습, 옛 사람, 옛 습성, 세속성, 인간성을 평생 포기와 부인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너무나 힘들기에 십자가 지는 삶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신앙 교리를 숙지하다 보면, 이전에 알았고 인식했던 구원의 진리에서 대전환이 일어난다. 과거엔 몰라서 불가능했고 갈등했던 엉킨 실타래가 하나의 실마리를 당겨 풀린다. 이것은 말씀의 깨달음이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가능하다. 인간의 노력인 세상 학문을 통해 얻으려고 했지만 불가능했지만 성령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로서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고 세상의 것을 깡그리째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여러 것을 이해할 수 있으나 의존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나 종속돼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산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성질을 물타기하는 자신의 오류를 너무나 많이 경험하곤 한다. 자신을 비우거나 부인하는 것은 신앙을 핑곗거리로 삼아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점차 변화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키가 자라고 세상 지식의 자라나는 것과 신앙의 성장을 다른 면모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가는 것은 평생이고, 지속이고, 꾸준하고, 촐랑거리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