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예리고 착한목자 성당
착한목자 성당에서 독서를 읽는 모습
2024. 3. 11.
여호수아기 1장~5장까지!
(여호 2,21)
라합은 “당신들의 말씀대로
그렇게 합시다.” 하고는
그들을 떠나보냈다.
그러고 나서 창문에다
진홍색 줄을 매달아 놓았다.
묵상ㅡ
통수권자가 바뀌었다.
유언까지 남기고 장렬히 운명하여,
백성들은 한달동안 큰 소리로 애도했다.
그런데 왜 나는, 모세할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걸까.
너무 정들었나. 그도그럴것이
탈출기부터 신명기까지 단독
주인공으로 출연하며,백성들과
울고웃던 모습들이, 집안의
큰 어른처럼 느껴져서 나모르게
의지가 된 것같은 느낌이랄까.
서열 1위 통수권자가
죽을똥살똥 고생만하다
가나안땅엔 가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은 것도 안타깝다.
제 2의 통수권자,
여호수아가 서열1위로
전격 발탁되어, 주님께서 입지를
높여주시며,
"내가 모세를 어떻게 도우며
이끌어왔는지 다 봤지?
니들 똑똑히 들어.
이젠 여호수아가 내 오른팔이야.
서열 1위, 열두지파의 총책,
두목이란 말야.
그니까 니들도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답게 깍듯이 대하고
잘 복종해야혀!"
그러믄서 야매 홍해바다
사건을 요르단 강에서 재현하신거다.
여호수아를 높이시려면
당신의 강함과 특별함이
먼저 드러나야 하거든.
명석하신 주님이시다.
(여호 3,8)
너는 계약 궤를 멘 사제들에게,
‘요르단 강 물가에 다다르거든
그 요르단 강에 들어가 서 있어라.’
하고 명령하여라.”
(여호 3, 17)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
예리코 근처의 세례터
세례터에서 발 담그는 예식을 하려는 순례자들
발담그는 예식을 하려고 요르단강에 서있는 사제.
(여호 3,15~16)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이 사진을 보면서 위 말씀 구절이
더 생생하게 상상이 되었다.
예리코라는 지명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이스라엘 순례때의
사진들을 찾아본 것이다.
하여튼 여호수아가 모세의 빈자리를
채워가는 모습이 등장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모세가
그립고, 빈자리가 허전하고,
또 여호수아가 모세할아버지만큼,
크고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백성들을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돌보고 다스릴수 있을까,
솔직히 염려스럽다.
내 안에 크게 자리잡은 모세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 때문인지, 내 마음이 그렇다는거다.
20부작 미니시리즈에 출연한
주연배우가 마지막 엔딩장면을 찍고,
그 다음주부터 볼수없게 되었을때
느끼는 섭섭함과 허전함같은 그런 상실감,
하물며 40년을 광야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예언자로
희생한 분인데, 어찌 쿨하게
잊을수 있을까나!
그렇단거다.
그나저나 오늘 묵상할 대목은
라합이 창문에다 진홍색 줄을
매달아 놓는 장면이다.
예리코에 잠입시킨 두명의 정찰대가
라합의 집에 숨어들어서 몸을 피하던 중,
"이 일을 발설하지 않을테니 맹세 하나
합시다. 우리 부모와 형제, 가족들을
죽이지 말고 지켜주시오."
라고 목숨값을 협상하자,
두 전령이 "그러마" 약속하면서
대신 그 표로 진홍색 줄을 창문에
매달아 놓으라고 한다.
나는 그 많은 내용에서 왜 하필
이 구절에서 마음이 멈추었을까.
작가랍시고 시각화 능력이
뛰어나서 창문에 매달린
진홍색 줄이 막 상상이 되는 거라면,
그 장면 뒤엔 어떤 장면이 편집되어
방송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을 터!
하느님의 어떤 계획에 앞서
내 맘이 먼저 이끌려가는
조급함 같은 게 생겨난거다.
예고편이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같은거.
대하극의 클라이막스를 위해
라합과 전령이 한 약속이 지켜지지않고
더 꼬이고 얽혀서 복잡하게 되거나,
뭔가 오해가 생겨서 일이 잘못될것같은
두려움, 그래서 라합의 가족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감. 외면당하고
버림받을것 같은 걱정, 라합 따위랑
한 약속이 뭐가 중요해 라고 할까봐,
또는 진홍색 줄이 바람에 날려서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하는..
드라마를 너무 본게야.
내 그런 마음의 동기를 살펴봤다.
그것은 다름아닌 여호수아에 대한
불신같은 거 아닐는지.
만일 모세였다면 두말할것도 없이 괜찮아,
당연히 약속은 지켜질거고 목숨걸고
좋은일을 한것이니 그에 대한 보상도
해줄거야. 라고 말했을 거다.
약속에 대한 책임감,
과연 모세처럼 잘해낼수 있을까 하는
부정적인 선입견,
이런 걱정은 나만 하는걸까.
백성들 중에도 나처럼
선입견을 갖거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도
쉽지 않은 적응의 시간을
겪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힘있고 든든한 권위자의 모습을
동경해왔던 내 그림자가 투사된 거다.
가족을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모든것을 책임져주는 존재,
내가 모세에게 마음이 끌렸던 이유,
모세가 해냈던 중재자, 보호자,
해결자, 책임자 역할. 바로 그거였다.
내눈에 약자로 비친 창녀 라합의
약속을 과연 지켜줄것인가!
창문에 매달아놓은 진홍색 줄이
대롱대롱, 화면을 가득 채운
그 장면이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을 정도다.
내겐 그만큼 중요한 메시지였던 거다
다른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갔을
대목일수 있는데 나는 여기서
확, 마음이 붙잡힌거다.
외롭고 슬프고 두려웠을 여인 라합을,
나라도 뭔가를 해서 책임져주고 싶은
마음의 역동일수도 있겠다.
나 역시 오랫동안 부모사이의 중재자,
힘없는 엄마의 보호자, 불안한 상황에 대한
해결자, 누군가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책임자 역할.
오늘은 예고편도 없이 끝났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미리
앞당겨 읽지는 않을거다.
기다려보는 거다.
창문에 진홍색줄 매달아놓고
'우리를 구하러 올까?
우리를 죽이러 올까?'
마음 졸이며 하염없이
기다렸을 라합처럼 말이다.
무작정, 뭔가를...
어떤 약속이나 기대가
충족되기를 바라며,
하염없이 기다리던 내 그때
그 마음과 감정이 되살아 났다.
공감되고도 남는,
라합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다.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라합, 가족은 하느님께서
도피성읍을 세워 숨겨주실테니,
이젠 당신 인생을 살아요."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픈 말이기도 하다.
"그때 너, 많이 외롭고 막막했겠구나.
나도 몰랐던 나의 마음이,
여호수아기 2장,
라합의 진홍색 줄을 통해 밝혀진거구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대신하여 라합처럼 애가 닳았을
그때의 정서가 투사된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며,
내 과거의 애씀들을 위로해주시는
주님께서, 성경통독을 통해
은총으로 갚아주신 것 같았다.
그 치열하고 절박했던 나에게,
위로와 화해를 말을 건네본다.
"미안하다. 정말!
애썼다. 견뎌내느라고.
고맙다. 잘 기다려줘서.
라합은 아마 두 전령을 믿기보다,
그 전령을 보낸 여호수아와 하느님을
더 믿고 기다렸을거야.
왜냐하면, 라합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깊었기 때문이야. 이런 말을 그들에게
남겼거든."
(여호 2,11)
주 당신들의 하느님만이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십니다.
"너도 그랬잖아. 그렇게 믿고
기도하며 지금 여기까지 온거잖아.
장하다 장해 내 안의 또다른 나,
희망과 용기의 요셉피나."
모세의 기도(가톨릭출판사 2층 계단 위 전시)
예리고에서 가까운 유다 광야
첫댓글 묵상글 잘 보고 갑니다.
묵상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