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둑의 해월의 집터. 송두둑은 ‘소나무가 많은 둔덕’이라는 뜻이다. 송두둑은 절골에서 샘골 사이에 있다. 이 마을 주민들에게 들으니 송두둑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는데 일제강점기에 학교가 들어서면서 많이 베어버렸다고 했다. 지금은 절골 입구의 장정초등학교 부근에 아름드리 소나무 수십 그루가 있다. 해월의 집터는 사진 가운데의 사과나무 과수원에서 산쪽으로 조금 위쪽에 보이는 큰 나무 옆이라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송두둑의 뒷산이 묘적봉이다. 송두둑 해월의 집은 동학혁명이 난 후 유생들이 불질렀다고 한다. 송두둑은 해월이 1876년부터 1884년까지 약 8년간 기거했던 곳으로 해월 시기 두 번째 도소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큰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
용시용활(用時用活)해야 살아있는 도(道)
절골에서 송두둑으로 이사한 해월은 동학의 재건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두둑에서 거행된 1875년 10월 18일의 천제(天祭)를 마친 후 해월은 제자들에게 ‘용시용활(用時用活)’에 대해 말했다.
대저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는 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이는 사물(死物)과 다름이 없으리라. 하물며 우리 도(道)는 오만년(五萬年)의 미래(未來)를 표준(表準)함에 있어, 앞서 때를 짓고 때를 쓰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은 선사(先師-수운 최제우)의 가르치신 바라, 그러므로 내 이 뜻을 후세만대(後世萬代)에 보이기 위(爲)하여 특별(特別)히 내 이름을 고쳐 맹서(盟誓)코자 하노라.
해월은 용시용활(用時用活)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자신의 이름까지 고쳐가면서 맹세하는 중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해월은 수운이 창도한 동학이 앞으로 5만년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때에 맞추어 도를 활용하는 살아있는 도(道)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진리라 하더라도 시대와 짝하지 못하면 죽은 물건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 해월의 생각이었다. 해월이 끊임없이 동학의 실천적 방법을 제시했던 것은 용시용활에 게으르지 않으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때 해월은 경상(慶翔)이라는 본명을 시형(時亨)으로 고쳤다. 형(亨)자는 천도의 네 가지 원리를 상징하는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따왔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이 만물을 창시하는 원(元)에 해당한다고 본 해월은 자신이 만물을 자라게 하는 여름에 해당하는 역할처럼 동학을 성장시켜야 하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해 형자를 택했다.
당시 제자들도 해월과 함께 이름을 고쳤는데 도차주(道次主)인 강수(姜洙)는 강시원(姜時元)으로, 정선지방의 동학을 이끌었던 유인상(劉寅常)은 유시헌(劉時憲)으로, 전성문(全聖文)은 전시명(全時明)으로, 홍석범은 홍시래(洪時來)로, 신봉한(辛鳳漢)은 신시일(辛時一)로 각각 고쳤다. 이밖에 최시경(崔時敬), 심시정(沈時貞), 방시학(房時學), 전시황(全時晄), 전시봉(全時奉), 조시철(趙時哲), 신시영(辛時永) 등이 각각 시자를 넣어 이름을 고쳤는데 본명은 확인할 수 없다. 해월이 시(時)자를 넣어 이름을 고치고 제자들이 이를 따랐다는 것은 한편으로 해월과 제자들이 운명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해월은 제자들과 생사를 같이 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동학 교단이 해월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종교결사로 형성될 수 있었던 까닭은 해월의 인격에서 비롯되었다. 동학의 시천주 신앙을 바탕으로 양반과 상놈의 차별과 적자와 서자의 차별 철폐를 묵묵히 실천해나가는 해월의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하나둘 해월의 인격에 감화되었다. 비록 해월이 쫓기는 몸이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떠나지 않았고 해월을 대신해서 잡혀가겠다는 제자들도 나타났다. 이처럼 해월은 늘 민중 속에서 민중들과 하나되어 있었다. 해월은 그 자신이 민중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민중의 희망이었다.
유시헌(劉時憲)을 도접주(道接主)로 임명
해월은 제례의식을 통해 도인들의 결속을 다지고 포덕을 강화했다. 해월은 고천제(告天制)라는 천제를 제자들의 집에서 돌아가면서 행했는데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정선 유시헌의 집이었다. 1875년 11월 13일 유시헌의 집을 찾은 해월은 고천제를 하기 직전에 유시헌을 도접주(道接主)로 임명했다. 동학교단은 해월을 정점으로 도차주 강시원이 교단의 업무를 총괄했고, 그 아래 도접주 유시헌을 두고 접주들을 관장했다. 유시헌은 강원도로 피신한 해월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제자였다. 유시헌이 언제 동학에 입도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해월이 영양 일월산에 있을 때인 1869년 2월 양양으로 포덕을 가면서 정선, 인제에 들렀는데 이때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유시헌은 해월이 영월 직동에 은거할 때 찾아와 도움을 주었고 이후 박용걸 형제와 함께 해월이 영해교조신원운동 이후의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집은 정선 무은담리였는데 스승인 해월에게 지극했다. 전편에서도 말했듯이 해월이 지낼 곳을 묻자 자신의 집에 있으라고 하였다. 그 사실이 밝혀져 붙잡히면 귀양 가면 된다고 하면서 해월을 자신의 집에 모셨다.
<유시헌의 집이 있던 정선 무은담리. 현재는 무릉담리라고 불린다. 사진의 양옥집 오른쪽에 유시헌의 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유시헌의 집은 불타고 별채인 기도처는 남아있었으나 동학혁명 이후 유시헌의 아들이 수명마을로 이사해 현재는 밭이 되었다. >
유시헌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 1872년 세정이 양양 감옥에 붙잡히자 장간지로 가서 박씨 부인을 피신시켜 정선 싸내로 은거시켰다. 적조암에서의 49일 기도에 동행했으며 정선접주로 임명되어 정선 일대의 도인들을 관장했다. 1878년에는 수운 시대에 있었다가 끊어진 개접(開接)을 자신의 집에서 열었다. 또 <도원기서> 편찬과 <동경대전>의 간행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유시헌은 집 뒤에 별채를 지어 동학도인들을 위한 기도처를 마련해 수시로 이곳에 동학도인들이 드나들었다. 해월은 유시헌의 집에서 49일 기도를 하면서 정선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재기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다. 무은담에 있었던 유시헌의 집은 불이 나서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 불이 났을 때도 기도처로 사용하던 별채는 무사해 동학혁명 이후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유시헌의 증손이 정선에 살아있다. 필자는 표영삼으로부터 유시헌의 증손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2007년 6월에 증손이 산다는 강원도 정선군 남면 수명마을을 향했다. 당시 천마산 기슭에 자리한 수명 마을을 찾는다고 엄청 고생을 했다. 마을의 위치를 전해 듣고 지도에서도 확인했는데 지도에는 있는데 마을로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 외진 곳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일행과 함께 몇 시간을 남면 일대에서 헤매다 간신히 사람을 만나 알려준 곳으로 갔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려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좁은 시멘트길을 따라 산속으로 올라갔다. 5분 남짓 차를 타고 포장과 비포장이 섞인 길을 오르니 제법 넓은 평원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 마을이 하나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길옆에 비석이 세 개 서있는데 차를 몰고 지나가는데 언뜻 동학(東學)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차를 후진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동학도접주(東學道接主) 정암유시헌선생행적비(旌菴劉時憲先生行迹碑)’였다.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마을로 들어가서 수소문해 유시헌의 증손인 돈생(燉生)씨를 만났다.
증손이 유시헌의 행적비를 세워
돈생씨의 안내로 행적비 설립에 관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행적비는 유시헌의 아들 택하씨의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업적을 유적비에 새겼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를 들었던 돈생씨의 모친이 평생 모은 재산을 돈생씨에게 주면서 시어머니의 유언인 조부의 비석을 세우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돈생씨와 형제들이 부족한 돈을 거두어 1999년 행적비를 세웠다고 건립 과정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또 돈생씨의 안내로 유시헌의 묘소도 답사할 수 있었다. 수명 마을의 산기슭에 자리한 유시헌의 묘에서 수운의 부인 박씨가 은거했던 문두곡 고개가 내려다 보였다. 유시헌의 아들 유택하의 무덤도 같이 있었는데 유택하는 부친과 해월을 따라 수행하며 겪었던 내용을 일기로 남겼는데 해월 시기 동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돈생씨는 동학혁명 이후 지목이 심해 더 이상 무은담에 살 수가 없어 할아버지 때 천마산 속의 수명마을로 이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하였다. 돈생씨는 천도교단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하였다. 증조부와 조부가 동학교단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했지만 천도교단에서 비석도 하나 세워주지 않은 것이 불만이라고 하였다. 그는 혼자 증조부인 유시헌의 행적을 조사해 비문을 적었다고 했는데 비문을 살펴보니 몇 군데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돈생씨는 자신의 조상이 동학을 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돈생씨처럼 동학의 후손들이 행적비를 세운 경우는 특별했다.
고천제(告天制)를 구성제(九星制)로 이름 바꿔
유시헌의 집에서 고천제(告天制)를 행한 이후 해월은 각지를 순회하면서 교세를 확장시켰다. 1876년 4월에는 강원도 인제 남면 김연호의 집에서 인제 도인들을 모아 고천제를 지냈다. 이러한 집단의식을 통해 도인들이 얼굴을 익히고 세상의 흐름을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동학도인이라는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이었다. 해월 시기에 행한 집단 제례는 수운의 탄신일인 10월 28일과 수운의 순도일인 3월 10일의 제례와 10월 상달의 고천제례가 있었다. 1877년 10월 해월은 고천제례의 명칭을 구성제(九星制)로 바꾸었다. 구성제라는 이름은 수운이 지은 <논학문>의 “하늘에는 구성이 있어 땅의 구주와 응하였다.(天有九星 以應九州)”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날의 구성제는 인제 갑둔리 김연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 해월은 단양의 송두둑을 기점으로 강원도 정선 무은담 유시헌의 집과 인제 갑둔리 김연호의 집을 오가면서 교인들을 결속시키고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해월이 구성제를 한번 지내면 49일 기도를 행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하자 도인들은 구성제를 반겼다. 농사에 전념해야 하는 도인들이 49일을 작정해 기도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구성제를 지내면 49일 기도와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하니 도인들은 서로 구성제를 자기 집에서 지내려고 하였다. 이렇게 구성제는 동학의 집단의식으로 정착되어 갔다.
<수명 마을의 ‘동학도접주 정암유시헌선생행적비’. 유시헌의 며느리 유언에 따라 후손들이 세웠다. >
손씨 부인과 재회
1876년 7월 뜻밖에 송두둑으로 해월의 본부인인 손씨가 나타났다. 1871년 갑작스런 지목으로 헤어져 죽은 줄 알았던 손씨 부인이 우연히 송두둑에 들러 해월의 집으로 갔다. 해월의 피난 후 단양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손씨와 어린 딸은 생계가 곤란해지자 마을을 돌아다니며 허드렛일을 하면서 근근히 생활하고 있었다. 손씨 부인은 송두둑으로 일거리를 찾아 왔다가 해월의 집에 들러 극적으로 상봉했다. 손씨는 매우 여위었으며 해소(咳瘙)의 병기도 있었다고 동학의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해월은 손씨 부인의 손을 잡고 그간의 고생에 대해서 듣고 6년 동안 보지 못했던 딸들과도 상봉했다. 해월은 김씨 부인과 재혼을 한 상태에서 본부인인 손씨가 나타나자 어쩔 수 없이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해월의 수난은 이처럼 뒤틀린 가족사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