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9일
사순5주일, 대한성공회 애은성당 김민식 멜기세덱 부제 설교문
눈물을 흘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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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기독교는 부활과 천국에 대한 이해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뒤 어떤 ‘모습’으로 부활해서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지가 다릅니다. 하나는 죽음과 동시에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오고, 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이 세상 밖에 준비되어 있는 낙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 죽어서 천국을 다녀왔다고 하는 ‘사후 세계 경험’들이 대부분 이에 속합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어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새로운 육체’와 함께 사람들이 부활하게 되고, 새롭게 창조된 ‘이 땅’에 영원한 주님의 낙원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맞을지 아니면 진짜 방법이 따로 있을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초대교회 전통은 두 번째 방법에 좀 더 기울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배와 예식에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보면, 그 말미에 명확하게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을 알려주기 위해서인지, 특별히 오늘 사순5주일의 독서들(1·2독서, 복음)은 모두 이 “몸의 부활”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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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몸의 부활”은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바랐던 많은 소원들 중 하나였습니다. 구약을 보면 예언자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고,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엘리사가 죽은 뒤에는 엘리사의 뼈에 닿았던 시체가 살아나기도 합니다. 이사야서와 다니엘서는 이미 죽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카베오서에는 이를 신뢰하며 순교한 일곱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독서 에제키엘 37장은 “몸의 부활”에 대한 가장 유명한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 “마른 뼈”에서 ‘마르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야베쉬]는 본래 ‘부끄럽다, 수치를 당하다, 실망스럽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뼈 자체가 너무 바싹 시들어서 살아날 수 없을 지경이라는 의미와 함께, 이 뼈가 상징하는 ‘이스라엘 온 민족’이 당시에 이렇게 처참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에제키엘서 전반부인 6장 5절 [이스라엘 백성의 주검이 너희가 섬기던 우상들 앞에 내던져지고, 너희의 뼈가 제단 주위에 흩어질 것이다.]에서 표현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처참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야훼는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야훼 하느님처럼 오늘 요한복음서의 예수님 역시 부활의 기적을 이루어 주십니다. 라자로가 죽은 지는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시체는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전혀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자로야, 나오너라!”는 부르심에 라자로는 부활해서 나왔고, 이를 본 많은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소원인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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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유명한 시사평론가들 중 김어준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한 정치색과 성격, 강도 높은 입담 등으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분이신데, 저는 이 자리에서 그 분의 시사발언이나 논란, 의혹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어서 그것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루는 김씨가 교회를 다녔던 지인의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장례를 주도하던 한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혼을 내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울 일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셨는데 왜 슬퍼합니까!' '울지 마세요! 아 울지 마시라니까요?! 기뻐하세요! 기뻐하세요!' 이 모습을 보던 김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목사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목사 귀에 대고 “기뻐하라고? 이 XXX아?”라며 욕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저 일화에 나오는 목사님이나 신자들과 비슷한 기독교인들이 제법 있는 듯합니다. 나는 이미 천국행 구원을 확정해놓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쁘고, 하느님께서 세상적인 축복도 부어 주시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불행과 저주를 들먹이면서, 자기는 세상의 아픔과는 분리된 방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더니 당신도 이 안락한 방주 안에 들어오면 된다고 전도합니다. 이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욕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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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국교회 특유의 문화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베다니아로 출발하시기 전부터 라자로가 부활할 것을 알고 계셨고, 그 라자로를 직접 부활시키실 예수님께서 막상 베다니아에 도착하신 뒤 비통함 마음이 북받쳐 우셨다는 부분을 혼란스러워 하거나 아예 기억도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랑하는 오빠이자 베다니아 주민들의 친구인 라자로를 부활시키러 갔는데... 깜짝 선물을 준비한 사람이 왜 기뻐하거나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지 않고 울고 있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려고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로 인해 우리와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결국에는 승리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그 때까지 일어나는 과정 하나하나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냥 넘겨버리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놓치지 않으시고, 모든 고통을 당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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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을병에 걸렸고, 떨어진 거리가 2km 정도여서 걸어서 30분이면 도착할 것을 이틀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찾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이미 라자로가 죽어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임을 알고도 가셔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르다는 만나자 마자 원망 섞인 표현을 하고, 마리아는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님을 맞이하지도 않았습니다.
섭섭하셨을 법도 합니다만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울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와 고통’이 만들어내는 ‘슬픔과 절망’에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오르셨습니다. 마치 ‘마른 뼈’와 같이 슬픔과 실망, 수치와 절망이 가득해서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내 고통이 너무 크다보니 성서말씀은 이해되지도 않고 주님의 얼굴마저도 보기 싫게 만드는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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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을 대할 때, ‘몸의 부활’과 같은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직자들은 하느님에게 복을 졸라야 한다고 설교하기도 합니다. 이 아픈 세상 속에서 우리만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내 요구를 들어주셔야만 한다는 고집을 부리면서, 주님의 수준을 낮춰버리고 ‘우리를 위해 울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혼란스럽게 여깁니다.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제가 종종 보는 한 블로그에서는 최근 신천지와 함께 개신교의 비협조적인 행동들을 비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천지는) 기복신앙의 말로야. 신을 위해 기도를 해야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가짜 신도니까 가짜 종교에 놀아나지...”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과 슬픔을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을 위해 기도하고 있나요?
주님은 지금도 동일한 심정과 눈물로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당신을 믿고, 죽음의 동굴 가운데서 새로운 신앙의 몸을 입고 걸어 나와 이 세상과 이후의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누리도록 말입니다. 이 심정을 알아드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울어주셨던 주님을 위해 잠깐이라도 기도드릴 수 있는 사순5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