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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19장22~30절
제목 : 전대미문의 사건
이방 지역보다 더 따뜻한 환대를 기대한 기브아에서 레위인은 참담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는 잔혹한 방식으로 열두 지파에게 이 참사를 알립니다.
1. 비류를 악행과 첩의 죽음(22~25절)
1) 성읍의 불량배들이 와서 그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합니다(22절).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레위인과 노인의 만남(16:21절)을 다룬 본장의 이야기는,
롯이 소돔 성에서 천사를 만난 이야기(창 19장)와 유사합니다.
특히 본문22~24에 기록된 기사는 창19:4~8절의 기사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본서 기자가 창19장의 기사를 인용하여 본문 속에 삽입한 것(interpolation)이라고도 주장합니다.(Wellhausen).
그러나 전후 문맥이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또한 시대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으므로 본문의 사건을 결코 삽입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Cassel).
그 성읍의 불량배들.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베네 벨리알'로서 `벨리알의 자손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벨리알'은 `무익한', `무가치한'이라는 뜻의 형용사로서 주로 사람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삼상1:16에서는 `악한 여자'로,
삼상25:25에서는 `불량한 사람',
삼하16:7에서는`비루한 자'로 각기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 벨리알을 사단이나 거짓 예언자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 여기서 `두들기며'에 해당되는 원어 `미테두페킴'은 강조형 동사로 `스스로 흥분하여 매우 세게 문을 두드리는'모습를 묘사한 말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이렇게도 번역했습니다.
"그 비류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갈 모양으로 문에 달려들어 두들기고 있었다"(G. R. Driver).
이와 같이 기브아 비류들이 온건한 태도로서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레위인을 끌어내리려 했기 때문에 집주인은 문을 열고 그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23,24절).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듣지 않았는데(25절), 이런 일이 후에 기브아와 통치자들에 의해 어떠한 정죄함이나 책벌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브아 성읍 백성들 전체가 암묵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 여기서 `관계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는 분명 `성 관계를 가지다'는 뜻입니다.
즉 기브아 비류들은 레위인을 끌어내어 남색(男色)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방 성읍을 피해 이스라엘 지경으로 왔는데 소돔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과거 소돔 인들의 음란한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을 초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사해(死海)가 형성되었습니다(창 19:4-26).
한편 이 사해는 기브아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브아 사람들은 자주 그곳을 지나다녔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소돔보다 더 악하게 행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동성애자를 미화시키며 사회적 관점이 아닌 생리학적 관점에서 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2) 집 주인이 그들에게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합니다(23절)
“[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하네발라' 역시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7)이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신 22:21)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성적범죄를지칭합니다(삼하13:12).
*삼하13:12 “[12]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13]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3) 지기 딸과 첩을 욕보이고 레위인에게는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24절).
“[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있은즉. - 노인은 기브아의 비류들이 워낙 완악하여 말로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자기 딸과 그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를 잘 반영해 주는 실례입니다.
당시에는 남성의 권위로 말미암아 여성이 학대받거나 능욕을 당한다 해도 여성은 말없이 순종하여야 했습니다(11:39,40).
*삿11:39,40[입다의 딸] “[39]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40]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그러나 노인이 취한 방책은 최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하나의 악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악을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공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상황논리에 급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끝까지 비류들을 대항했어야 옳았던 것입니다.
죄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입니다.
4)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았습니다(25절).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 자신의 딸을 내어 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은 비류들에 의해 거절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같은 경내(境內)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는 해를 끼치려 하지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들은 남녀 간의 성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비정상적인 남색(男色) 행위에만 관심을 둔 듯합니다.
*레18:3~4 “[3]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4]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그 사람'은 노인을 가리킨다고 봅니다(Keil, Goslinga).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여기서 `그 사람'이란 분명히 `그 레위인'을 가리킵니다.
그 레위인은 노인의 제안이 거절 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자신과 자기의 첩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즉 비록 사랑을 고백하며 설득하여 장인에게 데려온 아내 였지만 (3-10절),
이 레위인은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비류들에게 내어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이기주의 성향을 보게됩니다.
레위인은 가장의 역할을 포기한 채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에 바빳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반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은 없을 것이라고 교훈 하셨습니다(요15:13).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 기브아 비류들이 요구 한 것은 레위인의 첩이아니라 레위인 이었습니다(22절).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의 첩에게만 행음하고 만족하였는지 의문시 됩니다. 아마 그 비류들은 첩의 뛰어난 미모에 만족하였을 지도 모릅니다(Cassel).
욕보이다가.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알랄'은 `지나치게 하다' `철저히 실행하다'는 뜻입니다.
Living Bible은 이를 `교대로 겁탈했다'(taking turns raping her)로 번역 하고 있습니다.
가장이 가장 빛날 때는 가족을 위해 희생할 때입니다.
지도자가 가장 빛날 때는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2. 잔혹한 사건을 열두 지파에게 알리다(26~30절)
1)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있습니다(26절)
“[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밤새도록 비류들에게 욕을 당한 그 첩은 거의 초 죽음이 된 자신의 육신을 끌고 가까스로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 문 앞에까지 기어와서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분노 때문에 행음하였으나(2절주석 참조),
여기서 볼 때 그녀가 그 레위인보다 더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비록 자신을 내어버린 남편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이같이 사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2)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27절)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내어 몰았던 이 비정한 레위인은 간밤에 당한 공포 스런 일을 생각하며 일찌기 그 성읍을 떠나 위험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최소한의 관심조차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볼 때 이 레위인에게는 그의 첩에 대한 육적인 사랑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사랑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앞서 그의 장인이 계속해서 떠나려는 이 레위인 사위로 하여금 자기 집에 하루라도 더 묵도록 한 것도 아마 자기 딸에 대한 이 레위인 사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5-8절).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 새벽 미명에 홀로 도주하려고 허겁지겁 하던 레위인은 그의 아내가 엎드러져 그 두 손을 문지방에 올려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문지방에 손을 올려놓는 행위는
당시 고대 근동의 미신적 풍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즉 당시 가나안 인들은 문지방 밑에 그 집 안 사람들을 보호하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미신을 잘 알고 있던 레위인의 첩은 거의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 손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으면서 자신이 소생(蘇生)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삼상5: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3) 그의 첩이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시체를 싣고 집으로 갑니다(28절).
“[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 레위인은 눈으로 보아 그의 아내가 죽은 것을 금방 알아 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아내와 동일한 미신적 사고 방식에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깨웠을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가 비참한 모습으로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 자기 아내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4) 그 집에가서 시체를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냅니다(29절).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그 마디를 찍어 열 두 덩이에 나누고. -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즉시 아내의 시신을 각을 뜨듯이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이같이 시체를 절단하여 지파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 이스라엘 앞에 공개하며 응당한 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Keil and delizsch).
사울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소 한 겨리를 각을 떠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성을 촉구한 적이 있습니다(삼상11:7).
*삼상11:7[사울이 암몬 사람을 칠때]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이와 같이 이것은 당시 중앙 통제 기구가 없었던 시절에 본문과 같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습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고대 그리스에서 볼 수 있었던 인보 동맹(隣保同盟)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지파 간의 결속이 해이해지고 중앙 통제 기구가 결여된 상태였기 때문에 본문의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고소할 만한 대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12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류들의 죄상을 강력히 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 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불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 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입니다(마7:3-5).
*마7:3~5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5)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는 전 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30절).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 레위인이 전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는 전 이스라엘 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마도 이런 엄청난 죄악은 소돔 성에서 일어난 사건(창19장)과 유사 하였기에 더욱 큰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에 보다 신중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의 총회(總會)를 소집하기에 이릅니다
상의한 후에 말하자. - 혹자는 이 구절을 레위인이 이스라엘 각 지파에 사자들을 보낼 때 그 사자들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같은 해석은 본문과 잘 부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절은 어디까지나 레위인의 사자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말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의 '말하자'는 베냐민 사람에 대한 거국적 차원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기브아 사람들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회개 운동을 일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20장).
훗날 선지자 호세아가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타락의 극치로 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볼 때(호9:9;10:9) 기브아 사람들의 행악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감 할 줄 모르는 남편, 공동체 지도자, 회사의 대표들 때문에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무정과 무자비 그리고 이기주의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레위인 처는 소모품에 불과 했습니다.
성적 쾌락을 위하여 데려온 여자였기에 감정도 사랑도 생각도 나누지 않습니다.
이런 레위인이야 말로 진정한 성중독자입니다.
불량배들은 겉으로 들어난 성 중독자라고 한다면,
레위인은 신앙으로 종교로 앝게 위장한 점잔한 성중독자인 것입니다.
그에게 인간관계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성행위를 위해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럴듯 다장 다감 하지만 성행위를 한 뒤에는 냉정하게 돌변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안도의 한숨과 즐거움도 잠시,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쳐 레위 남자를 요구합니다(22절).
그들에게 레위인 일행은 섬겨야 할 “객”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체울 “객체”에 불과했습니다.
“환대”를 기대한 곳에서 그들은 “폭행”을 당합니다.
이방 성읍을 피해 이스라엘 지경으로 왔는데 소돔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정한 가나안 백성의 삶을 답습하는, 이방인보다 더 악한 이스라엘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선민이라 자부하지만(12절) 성민다운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2) 불량배들의 요구에 노인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합니다(23~24절).
손님을 필시적으로 보호하려는 고육지책이지만, 악으로 막으려는 어리석은 타협에 불과합니다.
또한 이것은 기브아에 우거하는 노인도 얼마나 그 성읍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체제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행하게 됩니다(21: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돈”과 “윤리의 실종”을 낳습니다.
내게는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불의가 없습니까?
3) 밤새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인은 새벽에야 악한 무리에게서 놓입니다(25~28절).
자신의 첩을 비류들에게 넘겨주고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레위인은 첩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도 태연히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비겁하고 비정하고 비열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별된 레위인들을 통해 그가 속한 곳이 정결한 땅이 되기를 바라시는데, 도리어 이 참극이 방관자와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이 비극적 결말은 언약을 배반하고 망령된 행위도 서슴지 않은 가증한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종일 것입니다.
4)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쪼개서(삼상11:7)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어 이 잔혹한 사건을 알립니다(29~30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지 않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신앙의 타락(17,18장)에 이어 윤리의 추락까지,
어느 곳 하나 성한 데가 없을 만큼 총체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의 가련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거룩되고 경건한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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