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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전서 7장1~16절
제목 : 결혼에 대한 교훈과 권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분쟁, 음행, 소송문제” 등을 시정해주기 위한 것과,
둘째는 그들이 제기한 질의(質疑)에 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1~6장을 통해서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부터 다루었습니다.
문제들을 복음에 입각해서 치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7장부터는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1절)하고,
편지에서 질문한 것에 대하여 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1) 기혼자의 부부관계(1절),
(2) 홀아비와 과부문제(8절),
(3) 이혼문제(10절),
(4) 부부가 합심되지 못했을 경우(12절) 등에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권면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1. 부부의 의무를 다하라 (1~7절)
1~7절의 내용은 성생활에 관한 권면입니다.
1) 고린도교회에 부부의 관계(1절).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린도교회에 성적 방종이 심했습니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서신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난제들을 물어 본 것이 명백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부부의 제도를 반대함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의 특수 사정에 비추어 표현된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결혼관을 보면,
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나,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28절).
② 결혼하게 되면 마음이 갈라져 흐트러진다고 말합니다.(35절)
③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한 것이라고 합니다.(38절)
④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40절)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한 사정하(事情下)에서 독신 생활이 필요하게 된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하여 바울이 독신 생활을 장려하나, 그것을 교리화(敎理化)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가까이 하는 결혼 그 자체를 나쁘거나 죄악스러운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혼인을 하나님의 제정으로 믿습니다.
(1) 그것은 하나님 중심한 것입니다(창2:18절).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부부를 이루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혼인은 하나님 중심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 존재(存在)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으니
부부(夫婦)를 이루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7:29).
유대인들은 결혼할 때에 신랑 신부가 마신 잔을 깨뜨려 그들이 얼마 후엔 죽음으로 인하여 서로 갈리게 될 것을 기억시킨다고 합니다.
부부는 가정을 이루어 사는 동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됩니다.
(2) 그리스도 중심한 것입니다(엡5:22~33절).
사도 바울은, 엡 5:22-33에 부부가 지킬 도덕을 말하였습니다.
곧, 남편 된 자는 아내 된 자를 사랑하여야 될 것과,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 뒤에 그는 말하기를 "이 비빌이 크 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엡 5:32).
부부 생활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교회 생활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부부 생활을 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몸 버려 피흘려 주신 사랑을 기억하여야 됩니다.
그리고 속죄(贖罪)의 결과로 나타난 성결을 기억하야야 됩니다.(엡 5:25-27).
가정은 저렇게 머리된 남편의 사랑과 지체된 아내의 복종(服從)으로 성립됩니다.
기독자의 가정에서 매일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티나 주름 잡힐 것이 없는 교회의 성결입니다.
(3) 혼인은 이렇게 신성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은 이를 귀히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히13:4에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신24:5에 말하기를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부부의 생활을 가지라(2절).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였습니다.
"음행의 연고로" 부부(夫婦)의 생활을 가지라 함은,
부부의 목적이 음행방지(淫行防止)를 위함에만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이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 좋으나
그 일로 인하여 도리어 음행이 생긴다면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음행이 생길 우려가 있는 한(限)엔 차라리 부부생활이 장려되어야 합니다.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둔"다 함은, 헬라식 자유주의 방탕과 불신 유대인들의 다처주의(多妻主義)를 반대하는 말씀입니다.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제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말 2:15에 말하기를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3)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다할 것을 말씀합니다(3절).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하였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믿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생활을 불결한 것으로 여기고 기피하는 쪽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로 “금욕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특히 신령한 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칼빈(Calvin)과 기타 학자들은, 이것이 양자 간에 성적 책임(性的責任)의
균등이행(均等履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4) 바울사도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일단 결혼한 다음엔 각기 자기 몸이 아니고 그 상대자인 타성(他性)에 속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4절).
“[4]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이 말씀이 역시 일부일처(一夫一妻)의 필연성을 내포(內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각기 제 몸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이 된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각기 제 마음대로 할 몸은 다시없습니다(但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부부 생활을 악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5) 분방하지 말라(5절).
부부생활을 하던 자가 별거(別居)하다가 성욕(性慾)을 이기지 못할 때에 사단의 유혹을 받으면 음란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분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5]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심기도(專心祈禱)함에 대하여 모든 다른 일들을 방해하는 것들이 됩니다.
그것은, 그 일들 자체의 악함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별거하는 자로 하여금 그것을 경계(警戒)하라고 합니다.
6) 바울 사도는 이 말이 명령이 아니고 허락이라고 말씀하십니다(6절).
“[6]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여기 "이 말"이란 것은 앞 절의 "다시 합하라"는 말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것이나 또는 잠시 후에 서로 다시 합하는 것이 명령이 아니요 허락(권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부 생활에 대한 명령은 모두 강조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으나 결혼에 대한 견해, 즉 결혼을 할 것이냐 독신으로 살 것이냐에 대한 견해는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기를 원합니다(7절).
“[7]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 이것이야말로 결코 명령이 될 수 없는 '권고'요 '하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당시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본절의 문자적인 뜻은 '나와 같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으로 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요청이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 뜻은 다음 구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각자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은사를 따라 결혼하거나 독신 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는 바울과 같은 독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은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결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결혼의 은사를 받은 자만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결혼이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각 자에게 주시는 선물(膳物)로서,
하나님 편에서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은사입니다.
결혼이 완전한 결혼으로서 육체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듯이,
독신도 완전하고 성결한 삶으로서 영위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삶의 형태를 취하든지,
음욕의 유혹으로부터 그들의 거룩한 신분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은 결혼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은 독신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순결한 삶을 유지할 때 비로소 '바울과 같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독신의 삶이 순결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타락한 고린도의 상황 속에서
'나와 같기를' 바란다. 라고 말한 바울의 표현은,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실제적인 삶에서 음란한 유혹으로부터 순결을 유지했던 삶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결혼한 자들이 바울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질서한 방종으로부터,
결혼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해(8~11)
1) 과부와 홀아비에 대한 권면(8~9절).
(1)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8절)
“[8]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이는 처녀 총각에 대한 권면이 아니라 “과부와 홀아비에 대한 권면”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거칠 것이 없는 자유로운 신분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부탁합니다.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합니다.
이것은 물론 명령이 아닙니다(6절).
이렇게 말씀함은 재혼을 불결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결혼하게 되면 독신보다는
“육신의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하)
둘째는, 염려 없이 주를 섬기기 위해서(32~33)입니다.
(2) 정욕을 제어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습니다(9절).
바울이 독신 생활을 권장한 것은, 독신 생활자체가 윤리적(倫理的)으로 결혼 생활보다 우수하다는 의미에서 그리한 것은 아닙니다. 9절입니다.
“[9]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만큼 이제 어떤 사람이 독신 생활에서 절제할 수 없는 경우라면 도리어 종교 윤리적(宗敎倫理的)으로 손해를 볼 뿐이니 독신 생활을 지속(持續)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2) 혼인한 자들에게 권면(10~11절)
“[10]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11]“(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사도 바울이 여기서는 권면으로 말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으로 말합니다.
(1)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그 말씀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계실 때에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는 것은 남편이 칠계(七誡)를 범한 일이 없이 또는 억지로 이혼을 주장하는 일이 없이는 갈리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이 종종 부부간의 성격상 부조화(性格上不調和)나 어느 한편의 잔인성이나 질병이나 범죄나 또 그와 같은 것들로 인하여 이혼을 성립시키는 법률을 가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륜상(天倫上)으로 혼인 계약을 깨뜨림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깨뜨린다면 그것은 그 깨뜨리는 자 측에서 범죄 한 것입니다.
(2)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11절 말씀은 여자 측에서 정당하게 갈릴 이유 없이 부득이하여 갈려져 있는 경우에는 다른 데 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혹은 남편과 다시 화합하든지 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부의 제도에 대하여 바울이 이렇게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은
수다한 신본주의(神本主義) 입장에서 하나님의 제정하신 법리(法理)를 존중시하는 것 뿐입니다(말 2:14-16).
(3)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남편 된 자 측에서도 아내에게서 갈리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독신이던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자들과 과부들에게 자신처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욕을 절제할 수 없거든 정욕으로 인한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하라고 말합니다.
결혼했다면 남편과 갈라서지 말고, 아내를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부부가 만일 갈라섰다면 그대로 지내든지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어떤 방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죄하지 않고, 다만 신앙적으로 권면합니다.
결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형식에 담긴 내용입니다.
3. 믿지 않는 배우자를 거룩하게(12~16)
“그 남은 사람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합심되지 못한 부부에 대한 언급입니다.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 배우자일 경우는 어찌해야 하는가?
1) 이제 바울은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에 대하여 설명합니다(12~13절).
“[12]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여기 부탁하는 말이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 부탁이 하나님 말씀 권위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교훈(使徒的校訓)이 역시 하나님 말씀인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7:40).
물론 애초부터 결혼의 대상을 찾는 기독자가 기독신자를 택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이 명하는 것입니다(고전 7:39).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끼리 이루어진 부부 중에 그 어느 한 편이 후에 개종하였으면 본절(12)의 말씀에 해당하는 결정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한 문제로서 선교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특히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 그가 당시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 음란한 성적 방종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피차 '버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교도 배우자에 대한 이혼 문제는 앞의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의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 있어서 이혼 문제는 이교도인 배우자에게 달려 있는데 만약 그가 결혼 생활을 계속하기를 '좋아하면'(쉬뉴도케이) 믿는 배우자는 능동적인 자세로 이혼을 요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 기꺼이 응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15절).
따라서 본 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믿는 배우자들에게 소극적(消極的)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불신 배우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는 의미를 포함 합니다(16절).
2) 배우자를 통하여 상대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14절).
“[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이 말씀은 위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에게서 갈리기를 원치 않는 경우에 아내 된 자가 그 남편을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렇습니다.
곧, 그 남편이 그 아내의 종교에 순응(順應)하려는 동기에서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순응은 적어도 외부적(外部的)인 순응을 의미한 것이니 그 가정이 그만큼 거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는 가정생활에 있어서 그렇게 세상의 향락이나 만족을 목적함보다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을 알게 하는 것을 더욱 요긴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 말씀에 나타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곧, 믿는 환경을 보존할 수 있는 가정에서는 그 자녀들도 적어도 외부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종교에 순응하게 되겠지만, 그런 환경이 아니면 자녀들이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란 의미입니다.
여기 이른바 깨끗하다든지 거룩하다는 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신정 국가(神政國家)에 있어서 외부적 종교의식(外部的宗敎儀式)에 순응하여 거룩한 백성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가리라(15절)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갈리는 경우에는 근본 약속을 깨뜨리는 것인 만큼, 그대로 갈리도록 하여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15절).
“[15]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그 갈리는 의도(意圖)가 복음신앙을 배척(排斥)하는 데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런 때에는 더욱 그로 하여금 갈리는 자유를 사용하게 두는 것이 합리(合理)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합니다.
이 말씀은 가능한 한 이혼을 막아보라는 뜻입니다.
부부가 서로 갈리게 되는 것은 그 비록 합리로운 원칙(原則)에 있어서도,
최대한도(最大限度)의 화합(和合)을 힘써야 될 일에 대하여 가르침입니다.
4) 믿는 자를 통해 믿지 않는 배우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일수 있으니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고 하십니다(16절).
“[16]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성도가 불신 배우자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불신자와 결혼하여 개종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이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은
욕구 불만과 불필요한 긴장감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오히려 본절에 나타난 불신 배우자의 구원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즉 그들은 14절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며 평화와 인내를 통하여 계속된 결혼 생활이 불신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을 기피하는 행위는
선교적 기회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절의 주제가 이미 '불신자와 결혼한 자들에 대한 충고'라는 것과 불신자가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이라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12절) 염두에 둘 때 이와 같은 견해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으로 불신자와의 결혼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의 결혼 생활에 관해서도 규범적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남편이든 아내든 불신자가 신자와 살기를 원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배우자는 상대를 버리지 말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불신 배우자가 신자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자녀도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불신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이 경우에 신자가 구애받지 않고 헤어져도 되지만, 하나님이 신자를 그리스도의 화평 안에서 화목하게 하는 자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15절; 고후 5:18~19 참조).
불신 배우자와 결혼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초점은 불신 배우자의 구원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불신 배우자와 자녀를 주님께로 인도해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성생활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서로 의무를 다하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하였습니다.
이 말은 결혼이 완전한 결혼으로서 육체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듯이,
독신도 완전하고 성결한 삶으로서 영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나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을 하라고 하십니다.
결혼했다면 남편과 갈라서지 말고, 아내를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부부가 만일 갈라섰다면 그대로 지내든지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대한 권면은 서로 버리지 말고 갈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일수 있으니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살전4:4~6절에서 “[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5]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6]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부부간에 바르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름다운 가정 이루어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성적인 방종과 극단적 금욕’이 공존하던 고린도에서, 바울은 성과 결혼에 대한 교인들의 그릇된 이해와 태도를 교정합니다(1~6,9절).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하되, 서로에게 성적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한 몸’의 연합과 성결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성적 욕구를 존중하고 서로의 영적 필요에 민감하게 섬기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가족이나 사회 유지의 핵심인 결혼 제도의 신성함을 침해하고, 혼전 관계나 불륜, 신중하지 못한 결혼에 관대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성적인 정결과 가정을 지킬 수 있을까요?
2) 바울은 자신처럼 독신을 권하면서도 결혼과 독신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기에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7~9절).
그러니 획일적인 모방이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에 대한 독단적인 판단은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절제의 은사’없이 독신을 고집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은 성적 유혹에 취약한 젊은 이들로 방종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성과 결혼에 대한 세상의 풍조를 성경에 비춰보며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입니다.
3) 바울은 서로 갈라서지 말라고 호소합니다(10,11절).
결혼 제도를 두신 하나님의 뜻(창2:20~25)과
이혼을 금하신 그리스도의 명령(막10:1~12)에 따른 권고입니다.
이미 이혼한 경우에는 다시 합하거나 그대로 사는 것이 낫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편만 아니라 모든 남녀에게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성도에게도 결혼의 위기는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장담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늘 자신을 살피고 배우자를 지키며 주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4) 배우자의 불신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12~16절).
불신자와 산다고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자의 거룩한 삶에 영향을 받아 배우자와 자녀도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 없는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이혼을 허용합니다.
맹목적인 이혼 금지가 이혼보다 배우자와 자녀의 삶에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