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장례 박소원 시집 / 곰곰나루시인선 13
박소원 지음 | 곰곰나루 | 2021년 12월 15일 출간
2004년 ‘문학선’ 신인상에 ‘매미’ 외 4편 당선으로 등단한 박소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가족사에 깊이 뿌리를 댄 의식의 내면을 서사와 서정이 교직되는 언어로 드러낸 「피의 가계 1973」, 「꿈꾸는 자세」, 「즐거운 장례」 등 58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시간적으로는 가족사의 흐름을 더듬고,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을 오가는 여정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미적 성취로 이끈다.
작가의 말
시집 원고를 정리하는 동안 용영 오빠와 ‘작은어머니’의 죽음이 있었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서 다 털어내지 못한 가족사는 이번 시집에도 상당하다.
“슬프고 잔혹했던 동시에 거친 아름다움을 지닌”(C.G.융) 핏줄의 고통이 자석처럼 끌어당기거나 서로를 밀쳐냈던 시간들, 적막 속에 한 주먹씩 풀어놓는다. 잘 가.
앞으로 나의 문학이 가능한 개인사를 벗어나서 소외받는 개인이 어떻게 현실을 견뎌내는지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 2021년 12월 박소원
목차
시인의 말 5
제1부
피의 가계 1973 13
편지 - 아버지1 14
어떤 평화주의 16
11월 17
오지 않는 편지 18
말복 - 아버지2 20
불 21
동창생 24
즐거운 장례 26
아버지의 손 28
길 30
제2부
무제 39
붉은 새벽 40
인사동 길 위에서의 하룻밤 42
이름 하나 외우며 4 44
고사목 1 46
고사목 2 48
고사목 3 50
고사목 4 51
고사목 5 52
가로등 3 53
가로등 4 54
가로등 5 56
제3부
꿈꾸는 자세 59
묘지 산책 60
눈물로 오는 사랑 61
모르는 거리에서 62
초대장 64
불면 66
너밖에 없었다 68
기울어지는 뼈 70
이민자 72
최후기도 73
죽음 시대 76
제4부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며 81
시베리아 벌판에 비가 내린다 82
예니세이 강가에 서 있었네 86
예니세이 강가에서 부르는 이름 88
알혼 섬에서 쓴 엽서 90
공원에서 - 2010, 프라하1 92
광장을 지나며 - 프라하2 94
프라하의 낮 - 너를 보내고 95
더블린의 예이츠학회 건물 방명록에 너의 이름을 쓴다 96
코타키나발루 해변에서 - 김수복의 「저녁은 귀향歸航 중」을 보고 98
북경공항 터미널에서 100
이르츠크와 알혼섬을 오가는 배 안에서 103
제5부
고흐의 무덤 앞에서 109
빈센트 반 고흐 112
성 폴 요양소 앞에서 114
오베르의 교회 먼지 희뿌연 방명록에 116
발자크박물관 방명록에 낯선 내 이름을 쓴다 118
카리카손의 밤에 쓴 엽서 120
섬 122
칸느의 비 오는 거리 124
클리아스 강에서 부르는 노래 126
아무르 강가에서 130
프라하에서 온 편지 132
해설 그리운 남쪽, 그 이후 ㆍ 고봉준 135
추천사
박덕규(시인, 문학평론가)
어떤 상처는 날이 가면 겉이 멀쩡해지는데도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그 아픔도 겉을 울리지는 않고 속으로만 퍼져 온몸을 휘젓고 다닌다. 그걸 덮고 살자니 이젠 머지않아 속이 다 해져버리고 빈 껍질만 남을 것 같아 그 상처의 진원지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 박소원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 시는 그 몸 안으로 들어간 내시경이다. 상처에 ‘핏줄’이 겹을 이루고 겹과 겹 사이에서 핏물이 마구 뿜어지니 그 내시경마저 자주 멈칫하고 서서 울음 운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다 하고 버티고 섰다 다시 피울음 씻고 시간의 위벽을 훑어간다. 아, 끝이 보일 것 같다. 박소원의 시는 그 면면한 ‘핏줄’의 사연을 온몸에 두르고 몸 밖으로 나와 세상 속으로 걸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몸 안을 끌고 몸 밖으로 나가기, 그 벅찬 과정이 바로 이 세 번째 시집의 큰 열림이다.
책 속으로
꿈꾸는 자세
많이 그리우면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잔다
더 많이 그리워지면 그 꿈속에서도 얼굴을 돌리지 않는다
애벌레처럼 돌돌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피의 가계 1973
잦은 살생의 죄는 내게 물으시고 밀양 박씨 종부인 내 며느리 상한 데 없이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원컨대 내 며느리 몸에 든 죽음을 작년에 죽은 박쥐에게 백년 전에 죽은 들쥐에게 나눠 주소서
해 떨어지는 소리들 대나무 밭 가득 차오르면 할아버지는 깃발처럼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단칼에 분리 된 오리 몸통과 목 사이에서 분수처럼 솟는 따뜻한 피, 내가 들고 있는 막사발을 채운다 병이 깊은 엄마가 창백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막사발을 받아 든다
동서남북 한 차례씩 절을 올린 할머니는 피 묻은 오리털로 며느리의 머리와 가슴과 얼굴과 등과 두 팔 마른 다리와 발등을 꼼꼼히 쓸어내린다 오리 몸통이 가마솥 안에서 끓는 동안 아궁이마다 장작 타는 소리들 요란하고 안방 구들장 데워지는 기운들 뒤란까지 훈훈하게 돌아간다
즐거운 장례
요양원살이를 하던 오빠가
마침내 죽었다
강원도 주문진에 사는 맏누이와
경기도 동탄 수원 발안, 전라도 광주에 사는
남동생 넷과 여동생 넷
심지어 시애틀에 사는 동생까지
한밤중에 장례비 각출을 했다
다섯은 본명으로 다른 다섯은
이미 개명한 낯선 이름으로
‘작은어머니’ 통장에 숫자로 찍혔다
살아서 애물단지의 죽음이
뿔뿔이 흩어져 살던 핏줄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다
장례비는 오빠의 응급실 병원비부터
그리고 화장터 사용료와
꽃값 설렁탕 값 운구차 운임
운전기사 팁 식대까지
지불하고 지폐 몇 장 남았다
붉은 새벽
어머니는 2남 5녀를 낳기 전에 삼 남매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단명短命이 가족력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불안이 줄곧 붉은 기운으로 따라 다녔다
어머니는 제삿날 생일날 새벽이면 밤새 준비한 음식을 들고 집안 곳곳에 숨어 있는 신들에게 바쳤다 따끈한 팥 시루떡과 백설기와 인절미들…… 부엌신과 변소신 토방신 장독대신 심지어 꽃밭 꽃신들에까지 집안 곳곳 손 미치는 신마다 떡 접시를 놓았다 나무 의자 돌계단 화단에 꽃, 마당 수돗가에 물, 창고에 호미 낫 빗자루 곡괭이 마루 밑 어둔 구석구석, 부엌에 젓가락 숟가락 밥그릇 대접 아궁이에 불, 긴 골목 입구에, 대나무밭가 등치 큰 아카시아 나무 밑에…… 보이는 것마다 절을 하며 자식들 제명까지 살게 해달라고 빌고 빌었다
남은 떡 접시들 차곡차곡 채반에 받쳐 이고 그 길로 가난한 시골동네 이 골목 저 골목을 죄다 돌아다니고 새벽길을 두루 누비고 돌아오는 어머니. 가냘픈 등 뒤로 알 수 없는 붉은 기운이 따라 붙어 왔다
출판사 서평
〈전문가의 말〉
‘그리움’은 박소원 시의 주조(主潮)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의 시에서 그리움의 대상은 ‘어머니’와 ‘고향’이다. 그녀에게 ‘고향’은 곧 어머니의 세계이다. 하지만 “가지들 모든 방향을/남쪽으로 두고 서 있다/죽은 고향/죽은 꿈을 향해”(「고사목 5」)라는 진술처럼 현실에서 ‘남쪽’은 “죽은 고향/죽은 꿈”의 세계일 따름이다. 그곳에는 그리움의 대상인 ‘어머니’는 물론, “나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해주신 분들”(「기울어지는 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박소원의 시에서 ‘그리움’은 현존하는 세계가 아닌 기억 속의 세계, 상상적 동일시의 대상에 대한 감정이다.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현실을 결핍의 공간으로 경험하게 만들거니와 “그리움 한 조각”(「최후기도」)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 해설 고봉준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