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우 창 남
고향은 물리적 실체이면서 동시에 본질적 그리움이다. 고향을 일찍이 떠난 이들은 고향에 대해서 깊은 정을 품고 늘 고향의 포근함을 그리워한다.
우리에게 고향이란, 태어난 곳이거나 자란 곳이거나 떠나온 곳이거나 돌아가야 할 곳이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엔가 고리를 걸어, 우리는 고향을 떠올리고 그리워한다. 그런 의미로 한정한다면 나의 부모님에게는 고향이 있을까. 더군다나 아버지는 태어난 곳이, 자란 곳이, 젊은 날을 보낸 곳이 다르고, 돌아가셔서 묻힌 곳이 다르다. 핏줄의 어른들이 묻혀 잠들어 있는 곳,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핏줄의 고향이 없다.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으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오래전 KBS에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이북에서 내려온 분들이 고향을 찾지 못하는 애끓는 사연과 처지가 얼마나 아픈가를 온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넉 달 넘게 계속된 방송을 보며 온 국민은 전쟁이 남긴 상처에 함께 울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방송을 아예 보시지 않으셨다. 이북에 살아 있을 당신의 여동생에 대해 여쭸다.
“이산가족 신청할까요?”
“하지 마라!”
“안 보고 싶으세요? 궁금할 텐데?”
“지금 만나서 뭐 하겠느냐, 또 헤어져야 할텐데….”
병주고향幷州故鄕, 오래 살던 타향이 제2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싫어 당신의 고향을 잊으면서 마산을 병주고향으로 만들고 계셨다. 그래서 내 고향은 어머니의 병주고향인 마산이다. 마산이 고향이 된 건 완전히 아버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 고향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마산이 아버지의 고향이 아니었던 만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긴 해도 이곳에는 친척 붙이가 없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안 돼 돌아가셨기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돋보기 속은 희미하다. 아버지는 늘 침대에 누워 계셨기에 그 아버지의 팔에 안겨서 귀여움을 받은 기억도 없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구성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처형 당하는 걸 보고 할머니 품에 안겨 만주로 피신했다가 해방된 후 서울로 들어와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다. 우리 가족은 6·25로 인해 이모를 따라 부산으로 피난 가서는 이모 댁에 얹혀 살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머니의 뜨개질로 겨우 밥은 먹을 수 있었다. 전쟁 통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달빛으로 뜨개질을 하여 국제시장에 내다 팔고 돈이 모이면 달러 장사도 하였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피난 생활로 인해 가난과 영양 부족으로 몸이 허약해지면서 결핵에 걸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결핵 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변변한 치료 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다. 마산은 근대의 이른 시기부터 결핵 요양의 최적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는 결핵 요양에 필요한 자연적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끼고 있어 습도가 높은 물, 연중 온도 차가 적은 따뜻한 기온, 산소 공급이 풍부한 산림 등의 요건이 그것이었다.
아버지는 마산 국립신생결핵요양원에 입원하셨다. 지금과 같이 결핵 치료에 효과적인 항결핵약제가 개발되어 있지 않아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환자의 저항성을 길러 간접적으로 치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염성 때문에 장기입원 치료를 권장해 왔는데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부산 이모댁과 마산 병원을 오가면서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하셨다. 부산에서 뜨개질로 돈을 마련하여 첫 기차를 타고 마산으로 와 닭을 고아서 아버지께 드리고, 당신은 병원 뒤에 자리하고 있는 용마산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기차로 부산 이모댁으로 돌아갔다. 그러기를 1여 년, 당시 결핵 3기로 진단받아 오래 못 살 것이라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거의 완쾌되어 퇴원하셨다. 퇴원 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산으로 가시지 않고 마산에 방을 구해 터전을 잡게 되었다.
우리가 살면서 모든 게 마음대로 술술 풀리는 일은 드물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턱없이 많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불안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먼저 느낀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의 의지와 감성을 시험당하는 것이다. 이 어쩔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힘을 가리키는 아름다운 말이 ‘기다림’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기다림의 박물관이다. 인생의 모든 결정적 전환점에 기다림이라는 마음의 정거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기까지의 기다림, 걸음마를 떼고 옹알이를 할 때까지의 기다림, 어엿한 성인이 돼 한 사람의 몫을 하기까지 또 기다린다. 사랑을 찾고 직업을 찾고 인생의 진정한 소명을 찾을 때까지 가다리고 기다린다. 이렇듯 삶의 뼈대가 되는 원초적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일상을 구성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다림들이 인생의 피와 살을 이룬다. 신호등이 바뀔 때까지, 버스가 오기까지, 은행 창구에서 내 번호를 부를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기다린다. 기다림이 없는 곳엔 삶의 온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다린다는 말은 견딘다는 뜻이고, 견딘다는 것은 ‘혼자’ 견딘다는 뜻이다. 혼자 견디는 기다림은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럽다.
방금 칼에 베인 상처는 끔찍하게 아프고 시리지만, 시간이 오래 흘러 상처가 아물면 그곳엔 원숙한 주름처럼 자연스러운 시간의 흔적이 아로새겨진다. 깊게 베인 상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넉넉한 주름으로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 남편이 낫기를 바라는 아내의 마음, 제자가 깨닫기를 바라는 스승의 마음일 것이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설렘이 사랑으로 바뀔 때까지, 봄의 새싹이 가을의 결실이 되기까지, 천지 분간 못하던 아이가 어느새 지혜와 열정으로 가득한 성인으로 자라기까지 기다림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밤은 낮을 기다리고 낮은 밤의 기다림이다. 그리하여 하루가 흘러가는 것이다. 겨울은 봄을 기다리고 봄은 겨울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일 년이 흘러간다. 일 년이 흘러가서 세월이 되며 세월이 흘러가서 영원이 되는 것이다. 삶은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은 삶을 기다린다.
내 아버지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내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의사들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남편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온전한 반쪽으로 결혼식 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 것을 이루신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 부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병들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항상 사랑할 것’이라고 한 맹세 말이다.
내 어머니는 머리 숙이고 피는 꽃이었고, 떨어져서는 하늘을 바라보는 꽃이었다. 상처로 기다리는 자리 자리마다 문신처럼 새겨진 그 꽃, 피었다가 후드득후드득 꽃이 지고 나면 꽃 뿌리에 스며드는 물처럼 어머니의 눈물이 길을 만들어 사랑의 무게로 희망을 피웠다. 이제 그 기다림이 그친 자리 새로이 나의 기다림이 시작돼 언젠가 다시 어머니를 뵐 날을 그린다. 먼 후일 어머니를 만나면 나의 삶은 온전히 어머니가 기다림과 인내의 결실로 키워내신 열매임을 고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