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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지나칭칭나네
이홍사
-아! 이 환장할 여명.
내 몸 모든, 감각과 감성이 발기한다-
이런 상태를 두고 어느 시인은 그렇게 절묘한 시어로 노래했던가? 정말이지 환장할 여명의 새벽이다. 환장할 기분으로 사무실 디지털 열쇠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문을 여는데 문득 떠올린 가락이 있다. 바로 쾌지나 칭칭 나하네~ 다. 아니다. 떠올린 가락 아니라 저절로 떠오른 한 소절이다. 고요에 젖어 잠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전등 스위치를 올리며 그 가락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쾌지나 칭칭 나하네~
난데없이 내 입술을 비집고 나온 그 가락에 사무실과 집기들이 깨어나는 걸 내 눈으로 정확히 보았다. 숨을 죽이고 있던 사무실의 집기들이 그 소리에 깨어 드디어 숨을 쉬기 시작했다. 사물이 숨을 쉰다? 말이 되는 소린지 모르지만 그 역동성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집기들이 숨을 쉬는 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저마다 숨을 쉬는 소리가 달랐다. 책상은 책상대로, 접견실 의자는 의자대로, 컴퓨터는 컴퓨터 나름대로 저마다 지닌 특유의 숨소리가 있었다. 숨소리를 들어보니 사무실의 모든 집기는 정물이 아니라 역동성과 생동감을 지닌 물건이라는, 사물을 보는 관념이 달라졌다.
남남한 게 복덕방이라고 영양가 없는 손님, 옆 건물의 파리바게트 사장이나 뒷골목에서 모텔을 하는 김 사장이 와서 자장면 내기로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럴 때는 집기가 내는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 새벽의 사무실은 혼자 즐기기 아깝도록 투명하고 청명하다. 마치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거품이 방울방울 이는 사이다처럼 신선하고 청량하다. 사무실 집기가 저마다 지닌 특유의 호흡으로 숨을 쉬는 소리를 들으며 그 가락에 맞추어 다시 확인하듯 아버지의 가락을 읊조렸다.
-쾌지나 칭칭 나하네~
다시 읊조려보니,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라 영락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난데없이 아버지께서 흥이 나면 즐겨 부르시던 이 가락이 왜 불쑥 내 입에서 나왔을까? 그것도 아버지의 음성으로.
쾌지나 칭칭 나하네~, 그야말로 환장하도록 미적 감각과 감수성을 지닌 가락! 끝자락을 한껏 늘어뜨리고 살짝 올리며 누군가 후렴을 붙여주기 좋도록 아버지의 목청으로 여백을 남겼다. 후렴을 붙여줄 이는 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어떤 말로 후렴을 붙여할지 당혹감을 느끼고, 바로 중절모에 정갈한 흰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그 가락을 부르시며 골목을 들어서시던 아버지의 옛날 모습을 떠올렸다.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을 때의 모습이고, 골목에서 내 왔노라고 식구들에게 알리는 아버지의 기별 수단이었다. 누이와 나는 방에서 제각각 호작질을 하다가도 그 가락이 들리면 얼른 책상에 책을 펴고 앉았다. 쾌지나칭칭나네는 당신께서 가장 유쾌할 때 흥얼거리시는 가락이다. 삽짝을 들어오시는 모습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척하다가 나가서 인사를 올리면 아버지께선 우리 남매를 마루에 앉히시고 일장 훈시를 하시는 게 묵계다. 한참 이어지는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을 듣고서야 우리 남매는 꿇어앉아서 저린 다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코끝에 침을 찍어 발라 종아리를 풀며 방으로 들어가 책상머리에 앉는다.
그 말씀 가운데 오늘 아침에 기억의 표면으로 솟구친 내용은, 세월의 봄은 시간이 가면 오지만 마음의 봄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쾌지나칭칭나네로 살아가라고 하신 말씀이다. 물론 취중에 하신 말씀이지만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듬뿍 실린 일체유심조와 상통하는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여태 스스로 만든 봄을 만끽한 기억은 없다. 항상 위로만 견주고, 앞만 보고 달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입에서 쾌지나칭칭나네가 나왔기에 불쑥 그 말씀이 떠오른 것일 터이다. 울컥, 그리운 아버지의 생각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버지께서 별이 되신지 이십 년!
나는 늘 아버지께서 별이 되셨다고 생각한다. 집에서도 베란다 밖으로 별이 보이면 가장 먼저 아버지를 떠올리고, 고비사막 여행 중에도 별을 보면 아버지께서 그곳까지 따라와 계신 것 같고, 심지어 여름날 아내와의 방사 중에도 창이 열려 별이 보이면 기겁하고 창을 닫는다.
이 새벽에 무슨 조화일까? 어릴 적에 듣던 그 가락을 잊고 살았는데 느닷없이 아버지의 음성으로 아버지의 가락이 주문처럼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 다음이 뭐더라? 후렴을 붙여야 하는데 붙일만한 그럴듯한 서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가락에 후렴을 붙이지 못한다는 건 천하에 없는 불효처럼 여겨졌다. 콕 집어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턱을 고이고 한참 궁리 끝에 한 가닥을 잡았다.
-가~을 들판 나락이 풍성하아네~ 쾌지나 칭~칭 나하네~
그렇게 후렴을 붙여보았다. 서사야 괜찮지만 가락이 어딘가 어색한 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라고 중얼거렸다.
-청천하늘에는 별도 많소~ 쾌지나 칭칭 나하네~
이것도 아니다. 후렴이 어쩐지 앞소리를 따라잡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역시 아버지를 능가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나이 탓인가? 오십 고개에 올라서니 그런 가락이 불쑥 입에서 튀어나오고 그 가락에 붙여지는 서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것은, 오늘 뿐이 아니다. 어쩌다 차에서 듣는 라디오에서 우리의 소리나 민요가 나오면 싫지가 않고 관심이 가는 게 흥이 나고 그 노랫가락에 붙여진 서사의 의미를 새긴다.
쾌지나칭칭나네!
쾌快자로 시작하는 말은 나쁜 말이 없다. 예컨대, 유쾌, 명쾌, 상쾌, 통쾌, 쾌청, 쾌유, 쾌차, 쾌활, 완쾌, 쾌락, 쾌거, 심지어 똥을 누는데 조차도 쾌자를 붙이면 쾌변이 된다. 다 열거하기 힘들지만 일단 쾌자가 들어가면 모두가 좋은 말이고 기분이 쾌한 말로 둔갑을 한다. 이렇게 쾌자를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깔끔해진다. 쾌지나칭칭나네도 이런 쾌활하고 유쾌한 기분에 의미와 어원을 둔 말일 것이다. 내 집무용 책상에 앉으면 마주보이는 창에 한문으로 사쾌四快 라고 A4용지에 한문으로 큼직하게 프린트하여 그 용지를 코팅하여 붙여두었다. 나는 그 글귀를 보며 마음을 컨트롤하지만 그 의미를 아무도 모른다. 오늘 아침에도 쾌지나칭칭나네를 부르고 그 글귀를 보며 마음을 정갈하게 씻었다.
어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손님이나 지인들이 오면 그 글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그 사람들 생각으로 도저히 풀지 못하는 난해한 글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 나는 엉뚱한 대답한다.
내 책상에 앉으면 길 건너편 법무사 사무실 유리에 큼직하게 써놓은 업무내용 중에서 민사, 형사, 등기, 이혼, 파산, 중에서 이혼, 파산이라는 글귀가 정면으로 보는데 그 글귀를 매일 보고 앉아있자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 문구가 보이지 않도록 붙여두었다고 둘러댄다. 보통 사람들은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따지고 들기를 좋아 이들은 다시 묻는다. 붙인 위치는 그렇다 치고 사쾌가 무슨 뜻이냐고, 그러면 할 수없이 나는 그 뜻을 풀어준다. 유쾌, 상쾌, 통쾌, 명쾌! 내 생활의 슬로건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뜻을 지녔구먼!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아차리고, 더러는 한마디 덧붙인다. 공인중개사 일처리가 명쾌해야 손님이 많지! 그렇다. 나는 공인중개사, 옛날로 따지면 복덕방 중개쟁이다.
그 중개쟁이에게 오늘은 경매 대행업무가 하나 들어왔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내가 새벽에 사무실에 나온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아침 일찍, 서류와 도장을 가져온다고 어제 만났던 사내는 누누이 ‘아침 일찍’을 강조했다. 감사기간이라 일찍 출근한다면서 사무실 문을 좀 일찍 열고 만나자고 당부했다.
일요일인 어제 아침에 꼭 보아야할 땅이 있다며,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생면부지인 사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이 땅을 좀 보라 가자는 것이었다.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아내와 함께 산행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오후에 만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그때 가서 보면 너무 늦다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사무실 앞에서 기다릴 터이니 당장 나오라는 것이다. 어지간히 성질이 급한 작자다. 이렇게 급한 작자를 만나면 일이 의외로 쉽게 성사된다는 사실을 공인중개사 십 년에 이미 터득을 하고 있다. 아내에게 급한 손님이라고 둘러대고 등산복차림으로 사무실로 나왔다. 그 사내는 이 십분 이상 사무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담배를 줄기차게 피우고 있었다.
명함을 받아보니 L전자의 총무부 과장이었다. 경매로 난 땅이 있는데 같이 가서 지가 분석을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도 명함을 내밀고 같이 앉아 경매 사이트를 훑어 그 사내가 찍은 땅의 지번을 찾아내고 대충 어느 지점이라는 걸 알고 공시지가와 감정가, 그리고 주변시세를 비교분석하고 최종낙찰가를 검색했다. 한 번 유찰 된 물건이라 가격이 만만했다. 내가 직접 낙찰을 받더라도 그 가격이라면 발품과 고리대금에 붙여지는 이자 이상은 가만히 앉아서 받을 수가 있는 땅이었다. 커피 한 잔을 간단하게 마시고 그 성질 급한 사내와 직접 그 땅을 둘러보고 밟아 보았다.
땅을 사려는 목적은 은퇴하고 난 다음에 전원주택을 짓고 싶다고 했다. 둘러보니, 주위 환경으로 보아 전원주택지로는 그만이다. 지적도 상으로 포장된 농로를 물고 있고 옆에 있는 자연부락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조용하며, 평수도 350평 정도면 노후에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기에 무리가 없고 아래로는 큼직한 저수지과 있어 풍광 또한 나무랄 데가 없는 정남향이다. 정말이지 탐이 난다. 경매 사이트를 자주 훑어보는 내가 왜 이 땅을 보지 못했을까? 아깝다고 한탄하고 있을 때 성질이 급한 그 작자는 대충 얼마정도를 쓰면 낙찰을 받을 수가 있냐고 자문을 구했다. 나는 경매에 대한 내 소견을 풀어놓았다.
한 번 유찰되었다고 만만히 보면 송아지 물 건너간다. 한 번 유찰에 30%가 다운되는 경매라고 최저가를 기준으로 삼으면 그건 분명 남의 물건이다. 어쩌면 처음 감정가 이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아무리 적어도, 마음에 들고 꼭 사고 싶으면 유찰되기 전 최저가에서 95% 이상은 써야 내 물건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지 말고 중개사 선생께서 내일 대리인으로 응찰하여 주시죠. 저는 내일부터 감사기간이라서........ 족집게 낙찰자라고 소문이 났던데요.
공인 중개사인 나에게는 가장 듣기 좋은 말이다. 그 어떤 멜로디보다 매혹적인 언어다. 사내의 성격으로 미루어 낙장불입,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운이 좋아 그렇지. 족집게는 아닙니다. 제가 경매를 보아서 낙찰 받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2등을 하는, 다시 말하면, 차 순위 응찰자와 오차 범위를 좁히려다 보면 그런 일이 생깁니다. 이 정도 물건이면 감정가를 오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원주택을 짓고 싶어 하는 게 이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꿈이죠. 땅은 마음에 드는데 돈을 아끼려다 떨어지면 어지간히 서운하겠군요. 이 땅도 알려졌으면 엄청 몰릴 겁니다.
-관계없습니다. 제 땅이 되지 않으려면 그런 수도 있는 법이지요.
되도록 가격을 낮추라는 의미다. 그렇게 하여 중개사로는 일요일에 제법 큰 건수를 하나 올렸다. 잘하면 아파트나 빌라 전세 열 개를 소개 하는 것 보다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건이다. 속칭, 소개쟁이에게는 대리인 자격의 경매응찰은 큰 건에 속한다.
나는 인터넷을 켜고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다시 그 물건이 무슨 문제가 있나 살피며 감정가와 오늘 써야할 금액을 대충 산출하며 느긋하게 담배를 물었다. 이렇게 대충 산출해보고 계획을 세우지만 입찰 금액은 경매장에 가서 눈치로 낮출 수도 올릴 수도 있다. 일단 내가 찍은 물건에 대해서 응찰자가 얼마나 붙느냐에 따라서 금액이 달라진다. 그건 경매 직전에 눈치로 감을 잡는다. 경매를 오래 보다보면 입찰자가 웅성거리는 복도에서도 분위기로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어떤 초보자들을 보면 단독 응찰임에도 불구하고 왕창 써서 낙찰을 받아놓고 가슴앓이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이란 그렇게 간사한 짐승이라서 같은 금액에 차 순위가 되면 아깝고 억울하다고 난리겠지만 단독 응찰로 낙찰을 받으면 헛돈을 버렸다 싶어 펄쩍 뛴다. 시세보다 싸게 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세에 비교를 하지 않고 최저가에 눈높이를 맞춘다. 특히 여성일 경우에는 정도가 심하여 얼굴에 단박 표시가 난다. 아마도 그런 여자는 집에 가서 몇 끼는 수저를 들지 못할 것이다.
예정 낙찰가를 짚어보는데 노크도 없이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성질 급한 어제 그 사내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일찍 나오셨네요? 저는 제가 먼저 와서 기다려야 될 줄 알았습니다.
-손님과의 약속인데 일찍 나와야죠.
나는 담배를 문 채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인사를 했다. 이런 사람은 너무 반가운 척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성과급이 적을 수도 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큰소리치며 응대하여야 한다. 소파를 가리키며며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훑어보던 것을 마저 훑어보고는 느긋하게 사내가 기다리는 응접 소파로 가서 사내가 내미는 서류를 챙겼다. 그는 들고 온 가방에서 이것저것 내가 불러주는 대로 빠짐없이 서류를 꺼냈다. 어제가 일요일인데 인감증명을 어떻게 떼었나 싶어 확인하니 무엇에 쓰려고 떼었는지 벌써 한 달 전의 날자가 찍힌 인감증명이었다. 나는 용도 란에 ‘경매 대리인 선정용’ 이라고 볼펜으로 적어 넣고 다른 서류와 도장을 받고 입찰보증금을 보니 급하게 현금인출기에서 뺀 돈이 틀림없다. 만 원권으로, 백만 원씩 고무줄로 묶은 일곱 다발이었다. 입찰보증금 봉투에 들어가지 않을 양이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이면 돈을 두 번 이상 헤아려보았을 것이다. 다발 수만 확인하면 된다. 만 원권이라 부피가 많지만 상관없다. 법원에 가서 입찰하기 전에 법원 구내에 있는 은행에서 자기앞수표로 바꾸면 된다. 내 책상으로 다시 가서 영수증을 한 장 떼어다가 입찰보증금을 받은 영수증을 적으려고 하자 사내는 손사래 치며 만류했다. 저녁이면 다시 만날 건데 무슨 영수증이 필요하냐면서, 커피나 한 잔 달라고 했다. 영수증을 밀쳐놓고 종이컵을 뽑아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두 잔 받아 일회용 믹스커피를 두 잔 탔다. 그리고 쟁반도 없이 양손으로 한 잔씩 들고 와서 마주 앉았다.
-농지를 택지로 전용하는 데는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사내는 미처 어제 묻지 못했던 말을 물었다.
-명심하십시오. 아직 낙찰을 받은 게 아닙니다.
일침을 가하자 사내는 뜨끔해 했다. 그 순간을 포착하여 나는 사내를 달래듯이 설명을 했다.
-전용은 다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집 지을 만큼, 한 백 평 정도면 충분한데 공시지가의 25% 전용비가 듭니다만 이렇게 경매로 낙찰 받을 경우에는 공시지가를 적용하는 게 아니라 낙찰가를 적용합니다.
-개발 분담금 같은 건 없나요?
-그건 사업용도의 목적일 때 생기는 분담금입니다. 주택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농사용 전주가 입구까지 들어와 있고 수도는 없지만 지하수를 개발하면 되지요. 그런 건 낙찰을 받은 뒤에 얘기합시다. 너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다가 놓쳐버리면 데미지가 컵니다.
사내는 알았다며 잘 부탁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일종의 파이팅을 외치는 태도처럼 보였다. 악수를 하고 사내는 시계를 보더니 가야겠다고 일어섰다.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사내는 나가고 난 뒤에 돈뭉치를 쇼핑백에 넣는데 사내는 다시 문을 조금 열고 입찰결과가 나오면 바로 전화를 좀 해달라고 했다. 성격으로 미루어 오늘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작자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경매 1계의 입찰 시작은 열 시다. 이제 겨우 일곱 시!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이 도시에는 법원이 없다. 등기소는 있지만 경매법정이 있는 법원은 바로 인근 도시에 있다. 이십 년 전까지는 그 도시가 인구가 이 도시에 비해 배나 되고 훨씬 컸다. 그렇더라도 큰 불편함은 없다. 법원까지 가서 은행에서 돈을 바꾸는데 한 시간을 잡더라도 두 시간이나 남았다. 집에 들러서 아침을 먹고 가기에도 어중간한 시간이다. 돈과 서류, 그리고 대리인의 서류를 다 챙겨서 다시 확인하고 옆에 있는 24시 편의점에서 아침으로 때울 빵과 우유를 사러갔다. 이 년 째 24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대생은 바코드를 찍으며 나에게 농을 했다. 성격이 활달한 처녀다.
-사장님! 사모님에게 쫓겨나셨나? 이른 새벽에....... 아침으로 때우시려는 거죠?
-너 나이트 했니?
-예. 이제 교대시간이 다 되었어요.
-잠을 못자서 눈이 충혈 되었구나. 쉬어가면서 해라.
내가 먹을 빵과 우유를 사고 그 학생이 먹을 바나나우유 하나를 추가했다. 바코드를 다 찍고 계산을 한 다음 바나나 우유를 꺼내 카운터에 놓으며 말했다.
-속이 쓰리지? 이거나 마셔라.
-사장님! 땡 큐! 씨 유 어게인!
바나나 우유를 밀어놓고 편의점 문을 나서는데 내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쾌한 아침이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들어가 쾌지나칭칭나네의 어원을 찾아보았다. 역시 정보의 바다다.
쾌지나칭칭나네에 대한 글이 수없이 올라와있었다. 쾌지나칭칭나네는 남도지방에서 불리던 소리다. 풍어를 기원한 데서 유래가 되었다. 고기를 ‘괴기’ 불리던 지방에서 ‘괴기’의 괴에 흥을 돋우기 위해 센 발음으로 하다 보니 쾌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지녔다. 어쨌거나 쾌지나칭칭나네는 풍어, 풍년을 기원하는 소리고 가락에도 흥이 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쾌지나칭칭나네를 찾아보고 또 다른 사이트에 들어가서 그 노래를 듣곤 했다. 남도라도 경상도 가락과 전라도 가락은 달랐다. 경상도 가락은 구성진데 반해 전라도 가락은 경쾌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시간은 여덟 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막내처남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어젯밤 집에서 벌인 술자리에서 모종의 계획에 녀석과 계획을 세웠는데 녀석이 늦잠이라도 자는 날에는 낭패다. 철학과를 나와 이 시대에 가장 치열하고 힘겨운 전쟁이라는 취업 대란에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펼치며 피 터지는 격투를 벌였지만 패잔병이 되어 절망으로 점철된, 절룩거리는 세월을 이 년간이나 보내던 녀석이었다. 보다 못한 아내의 종용으로 작년에 겨우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중개업소를 전전하며 발판을 구축하는 애송이다.
벨이 세 번 울리자 녀석은 전화를 받았다.
-일어났어? 준비는 다 되었지?
-예. 지금 아침 먹고 있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고 경매장에서 만나자. 열 시다.
-알았다니까요.
녀석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썩 내키지 않는 일을 내가 시켰나? 어젯밤 술기운에 괜한 만용을 부린 아닌가, 짚어보았다. 어젯밤 집에서 벌인 간단한 술자리에서 내가 탐나는 경매 건이 있다고 하자 녀석이 먼저 힌트주면서 제안을 했고, 구체적으로 철저하고 치밀한 계획을 내가 세웠다. 모종의 계획을 세우는데 듣고 있던 아내가 만류하자 녀석이 오히려 제 누나에게 화를 내며 ‘수컷의 생존경쟁에 암컷이 나서지 말라, 는 투로 신경질을 부렸던 녀석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어차피 생존은 경쟁이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도덕성과 양심에 좀 걸리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데 녀석은 아침부터 왜 신경질이야? 밑천은 이익을 잉태한다고 큰소리치던 녀석이었는데........ 그냥 녀석에게 전화를 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결정하지 못하고 녀석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왜? 마음에 내키지 않는 거야? 그럼 없던 일로 하자. 나 혼자 경매를 보고 올게.
-매형! 무슨 소리예요. 어제 술이 취해서 하신 말씀이에요? 이런 기회가 어디 있어요. 저를 팽 시킨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네가 내키지 않아하는 것 같아서.........
-아니라니까요.
-알았다. 그럼 이따 보자.
할 수 없다. 일은 벌어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서류가방과 돈이 든 쇼핑백을 들고 나왔다. 좀 일찍 나서서 경매장 분위기를 훑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경매법정에 도착하니 장거리 원정을 온, 몇 사람이 경매법정 입구에서 서성거릴 뿐, 대체로 썰렁했다. 나는 돈이 든 쇼핑백을 들고 구내식당을 지나쳐 은행으로 갔다. 언제 바뀌었는지 은행은 농협으로 바뀌어 있었다. 드디어 농협이 법정까지 점령했군! 투덜거리며 들어서자 이제 막 문을 연 농협에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창구 여직원에게 돈뭉치를 내밀고 자기앞 수표를 바꾸는데 한참 걸렸다. 그 돈다발에 묶인 고무줄을 풀고 기계로 다 확인하는 것만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수표 한 장으로 바꾸어 지갑에 넣고 나왔다. 농협을 막 나서 구내식당 모퉁이를 돌아 나오다 막내처남과 마주쳤다. 녀석이 먼저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아내의 통장으로 입찰 보증금을 찾으러 가는 중이다.
-팔백만 원 정도를 찾아라.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얼마를 쓸까요?
-그건 이따가 분위기를 봐 가면서 일러줄게.
경매법정으로 오니 그 사이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시계를 보니 열 시가 조금 넘었다. 더러는 안면이 있는 중개사들도 끼어 있었다. 인사를 하고 어느 건을 보려왔느냐고 인사치레로 물었다. 대충 대답은 구경을 왔다거나 다른 건이었다. 그걸 믿으면 안 된다. 정확히 어느 건을 보러 왔다고 말해주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복도와 법정을 돌며 눈치로 그 건에 대해서 응찰자가 몇이나 되나 감을 잡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성질 급한 그 사내다. 참 어지간히 성질이 급하군! 나는 현관을 나와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입찰 하셨습니까?
-이제 은행에서 돈을 바꿨습니다.
-돈을 바꾸다니요?
경매를 한 번도 구경조차 하지 못한 완전 초보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되면 결과가 나오면 일러줄 텐데 그 사이를 못 기다리는 모양이다.
-아침에 가져오신 돈을 자기앞 수표 한 장으로 바꿨다는 말입니다. 만 원 권으로 칠백 만원이 입찰 보증금 봉투에 들어가겠어요?
-아! 그렇습니까?
-이제 제가 전화드릴 때까지 전화하시지 마세요. 법정에 들어가면 전화를 꺼야 합니다. 낙찰결과는 열두 시가 넘어야 나옵니다. 결과를 보고 제가 전화를 드리지요.
-알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근데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 땅이 꼭 마음에 드십니까? 꼭 사고 싶으시냐는 말씀입니다.
-그걸 왜 묻지요? 꼭 사고 싶으니 대리인을 구하고, 땅을 보고 응찰을 시킨 게 아닙니까?
-꼭 사야겠다면 좀 안전한 길로 가려구요. 눈치를 보니 그 건에 대해서 엄청 몰리겠는데요. 일단은 알았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사내의 마음을 떠 볼 건 다 떠보았다. 성질 급한 사내는 그 땅을 제 것으로 확고하게 굳히고 싶은 심정이다. 어투로도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제대로 된 공인중개사가 되려면 그런 통찰력은 지녀야 한다.
열 시 정각에 경매 사무관들이 입찰 설명을 하고 곧바로 입찰은 시작되었다. 초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눈치작전이다. 오늘 경매 물건은 약 40건 정도 된다. 어느 작자가 어느 건에 응찰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건 입찰을 종료하고 결과를 봐야 안다. 열한 시 쯤에 나는 입찰 용지 뒷면에 숫자를 적어서 복도에 서성거리는 녀석에게 주었다. 6840이라고 적힌 쪽지다. 그 금액에 응찰하라는 말이고 보증금은 690을 넣으라는 소리다. 그리고 나도 바로 입찰서류를 작성했다. 성질 급한 작자의 인적사항을 적고 보증금 봉투에는 700짜리 자기앞 수표를 넣고 봉인을 한 다음 입찰함에 넣고 확인증을 받았다. 내가 확인증을 받고 나오니 처남이 서류를 작성하여 입찰 사무관 쪽으로 갔다. 우리는 지나치면서 무표정했다. 여기서는 모르는 작자들이다.
한 시간 쯤 후 경매법정에서 방송이 나왔다. 입찰종료 오 분 전이란다. 그 방송을 듣고 복도와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잡담을 하고 있던 응찰자들이 우르르 법정으로 몰려 들어갔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고 느긋하게 들어가 맨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벌써 입찰 서류는 물건별로 분류되어 발표자의 책상에 나열되어 있었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스무건 정도 밖에 안 된다. 나머지 물건은 유찰이다. 아마도 오늘 신규 물건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얼른 보니 봉투가 하나 놓인 단독 응찰건도 서너 개가 보인다. 그런 건 아마도 아파트나 빌라의 세입자가 주인이 내놓은 물건에 전세권을 설정한 임차인이 마지못해 응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이 몰린 물건은 봉투가 약 스무 장 넘게 쌓여있다. 어느 물건인지 모르지만 어지간히 붙었다. 결과에 앞서 사무관은 양해를 구했다. 지금 법정이 복잡하니 가장 많이 응찰한 이 건부터 결과를 발표하겠다며 가장 봉투가 많이 쌓인 것부터 자기 앞으로 끌어갔다. 그리고 실내 마이크에 대고 발표를 했다.
-이 물건은 2011 타경 1245호 물건입니다. 총 22명이 응찰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존칭은 생략하고 성함만 부르겠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낮은 금액의 응찰자의 이름과 금액을 불러주었다. 물건번호로 보아 내가 응찰한 물건을 아니다. 최저낙찰가에서 만 원 더 쓴 작자부터 삼십만 원, 오십만 원 단위로 고만고만하게 오르더니 마지막 최고 응찰자는 거의 이천만 원을 더 쓴 작자가 되었다. 차 순위와는 얼른 계산해도 이천만 원 이상의 차이가 난다. 어느 물건인지 모르겠거니와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저 작자도 며칠을 두고 속이 쓰릴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낙찰은 차 순위와 백만 원 미만의 차이가 나면 기분이 날아갈 것이다. 나는 그 기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래서 족집게라는 소문이 돈 모양이다. 그 건에 대한 결과가 끝나니 좌중에 앉은 응찰자 거의 절반 정도가 법정을 빠져 나갔다. 응찰을 보러 온 사람과 더러는 따라온 작자들일 게다. 그 다음부터는 물건 순번대로 결과를 발표했다.
서너 건을 발표하고 나니 바로 우리가 응찰한 물건번호 2011 타경 0945건이다. 봉투를 보니 대여섯 장이었다. 쌓인 봉투를 보고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예상대로 최저낙찰가에서 십만 원을 다 쓴 사람의 이름이 불리어졌고 그 다음 오십만 원 그 다음 또 삼십만 원이 오르고 그 다음 또 칠십만 원이 오르고 봉투가 두 장이 남았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다음은 듣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하나는 내 것일 터이고 최고 응찰자는 처남일 것이다. 내가 짚은 대로 발표가 되었다. 그 다음 나올 말을 주시해야 한다. 목적은 거기에 있다. 그 말은 처남이 최고 응찰자 등록을 마치자 바로 마이크를 통해 나왔다.
-차 순위응찰자! 차 순위 매수자로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나는 큰소리로 하겠다. 고 대답하고 나가서 차 순위 낙찰자 매수등록을 했다. 이렇게 하면 낙찰자가 등록을 포기하더라고 유찰을 시키지 않고 차 순위인 나에게 자동으로 낙찰 통보가 온다. 완벽하게 매수자 등록을 하고 유유히 법정을 빠져 나왔다. 처남 녀석과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려 했으나 그 사이 어디로 갔는지 꽁지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차장으로 가서 차 시동을 걸며 쾌지나칭칭나네를 흥얼거렸다.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정말 기분이 쾌하다. 법원을 빠져 나와 조금 내려오다가 차를 세우고 성질 급한 작자의 번호를 터치 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질 급한 사내는 내 목소리를 확인하자 대뜸 그렇게 물었다.
-열네 명이 붙었습니다. 그만큼 눈독을 들이는 물건이라는 거죠. 아깝습니다. 제가 선생님 돈을 아끼려다 겨우 팔만 원 차이로 이 등을 했습니다. 너무 약이 오르고 아까워서 차 순위 매수자 등록을 해놓았습니다.
좀 부풀려 말했다. 그래야 몸이 더 다는 법이다.
-차 순위 매수자등록? 그게 뭡니까?
-만약에 최고 낙찰자가 일주일 이내로 등록을 하지 않고 포기하면 자동으로 차 순위인 우리에게 낙찰이 되는 것인데 그 등록을 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포기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작업을 들어가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옆에 듣는 사람이 많으니까, 조금 있다가 다시 통화합시다.
-작업이라구요?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럼.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실은 차에 혼자서 하는 통화지만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히 말하며 미끼를 끼운 낚시를 그의 궁금증이라는 바다에 던져 놓았다. 적절한 비유인가? 궁금증이 일도록 밑밥을 뿌려놓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정 궁금하면 주위에 경매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에게 차 순위 매수자등록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지........
입에서 또 쾌지나칭칭나네가 흘러나올 것 같다. 오늘은 왜 그 가락이 자꾸 머리에 맴도는지 모르겠다. 그 가락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아버지를 떠올리고 바로 여기까지 온 김에 아버지의 산소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아버지 산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 도시를 벗어나서 내가 살고 있는 도시로 내려가는 중간에 면소재지가 있다.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마암리, 바로 말바우가 내가 나서 자란 곳이다.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선산도 그곳에 있다. 선산에는 할아버지 내외를 비롯하여 사 대조의 산소가 있다. 그러나 산소에 들러본지 한참이나 되었다. 이 대 독자인 나 혼자서 선산을 관리하기에 힘이 부쳐 재작년부터 농협의 산소관리팀에 위탁을 하였다. 벌초와 주변의 잡목을 간벌해주고 수시로 들러 산소를 관리해주는 대행업을 농협에서 겸하고 있다. 물론 조합원에 한해서다. 나도 그 농협의 조합원이다. 아버지의 조합원 자격을 이름만 바꾸어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말바우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이 있다. 그 농사도 이장에게 위탁하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말바우 정미소에서 쌀과 잡곡을 받아 누이와 나눠먹는다. 물론 그런 사소한 일은 아내 몫이다. 우리가 자랄 적에는 말바우가 면에서 제일 큰 동네였다. 백오십 호가 넘는 자연부락이었는데 지금은 도회로 다 빠져나가고 겨우 사십여 호가 살고 있다. 그나마도 절반정도가 노인네들 혼자 사는 독신 가구다. 나이 육십이면 젊은 축에 속한다. 내가 나서 자란 집도 폐허가 된 채 집터만 남아있지만 나이가 들고 은퇴하면 집을 다시 지어서 들어갈 생각이다.
시내를 벗어나는 곳에서 차를 세우고 슈퍼에 들러 간단하게 예를 올릴 수 있도록 술과 오징어, 종이컵, 등속을 샀다. 그리고는 바로 말바우 선산으로 핸들을 꺾었다. 지금은 농로가 포장이 되어 있어서 선산 바로 아래까지 차가 들어간다. 강이 훤히 보이고 바로 농지에 접한 야산이라 차를 세우고 십분 정도 걸으면 바로 산소다. 농로 삼거리에 차를 세우고 술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벼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논을 몇 자락 지나고 산 아래 붙은 밭을 몇 뙤기를 지나 산소 초입을 들어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성질 급한 사내다. 무슨 부적을 몸에 지녔는지, 아니면 그의 모친께서 무슨 태몽을 꾸고 낳았는지 이렇게 성질이 급한 작자는 처음 본다. 나는 들고 가던 비닐봉지를 풀숲에 놓고 아예 길가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주저앉아 느긋하게 폴더를 열었다.
-전화 받으시기 괜찮습니까?
-예. 막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그 거짓말을 합리화시키려면 또 다른 거짓말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젠 거리낌 없이 술술 잘도 나온다.
-그 말씀하신 작업이라는 게 뭡니까?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입찰보증금을 칠백만 원 가져 오셨잖아요. 그럼 아무리 많이 써도 칠천 만원 밖에는 쓸 수가 없어요. 그런 건 알고 계시죠. 오늘 그 건에 붙은 사람들은 열네 명인데 거의 다 부동산 전문가들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좀 많이 쓴다고 육천팔백삼십이 만원을 썼지요. 그 정도면 넉넉하다고 장담했지요. 그런데 결과를 보니 제 위에 육천팔백사십 만원을 쓴 작자가 있더라구요. 팔만 원 차이로 차 순위로 밀렸으니 얼마나 아깝겠어요. 그 작자가 안면이 있는 공인중개사입니다. 시세차액을 노리고 직접 응찰을 한 거죠. 그래서 바로 차 순위 매수자 등록을 하고 따라가서 명함을 받았습니다. 공인중개사가 직접 응찰할 적에는 취득세와 등록세, 그리고 적당한 임자가 나타나면 팔아서 양도소득세까지 낼 각오하고 뜬 금액입니다. 그 만큼 좋은 물건이라는 말이죠. 작업이라는 말은 그 중개사에게 등록을 포기하라고 작업을 한다는 얘기죠. 농지취득자격 증명을 떼어서 일주일 이내로 등록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입찰보증금이 몰수되고 자격이 차 순위인 우리에게 자동으로 넘어옵니다. 대충 알아들으시겠죠?
-그 사람이 얼마를 요구합니까?
-아직 그런 것까지는 말을 꺼내면 안 되죠. 그러면 호가가 자꾸 올라갑니다.
-통상적으로 룰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 룰은 없습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도 없구요. 그 사람이 공인중개사니까 분명히 팔 물건이기에 작업을 해보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육천팔백사십 만원을 썼으니까 보증금을 아무리 적어도 칠백이나 팔백을 넣었겠죠. 그 사람이 포기하면, 보증금 곱하기 이! 그러니까 입찰보증금의 두 배는 준다고 하면서 접근해야할 겁니다. 그 사람이 팔백을 입찰보증금으로 넣었다면 천육백을 준다고 하고 접근해야 됩니다. 그 금액으로 안 된다고 할 가망이 많지만 그 금액부터 시작을 해야죠.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 공인중개사니까 알 건 다 압니다. 절대로 자기 이름으로 등록하지 않고 전매할 수 없다는 걸, 등록세와 취득세, 교육세, 그리고 팔고나서 양도소득세까지 생각하면 손도 안 대고 코 풀었다는 기분으로 넘겨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야 천육백이라는 돈이 들지만 그 사람은 팔백 밖에 못 가겨가죠. 보증금 팔백을 몰수당하니까요. 계산을 해봅시다. 우리가 육천 팔백 삼십에 찍었죠. 거기다 천육백을 더하면 팔천 사백정도 되네요. 그러면 다시 계산해 봅시다. 잠깐! 계산기 좀 꺼내고요.......
전화를 끊지 않고 뜸을 들였다. 성질 급한 사내는 죽을 맛일 게다.
-삼백오십 평이라........ 팔천 사백에 성사가 된다, 치고......... 잠깐만요, 그러면 평당 이십사 만 원 정도 나오네요. 주변 시세가 거의 사십만 원하는 땅인데. 그 중에서도 금싸라기 땅인데 작업이 잘 되면 반값에 그저 줍는 거죠. 그러나 곱하기 이로 말이 먹히려나 모르겠네요. 만약에 작업이 안 되어 일주일 이내로 그 사람이 등록을 하면 우리가 낸 입찰보증금은 송금수수료를 떼고 우리 계좌로 바로 들어옵니다,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농지취득 자격증명은 어떻게 떼나요? 저는 농지 원부가 없는데........
-그건 우리에게 넘어오고 나서 생각해도 됩니다. 경락받은 땅이 있는 소재지 읍, 면에 가서 농지담당에게 직장은 따로 있지만 주말농장용으로 낙찰을 받았다고 하면 바로 떼어줍니다. 거리가 삼십 킬로미터 이내니까 가능합니다.
통화는 그쯤에서 끝났다. 디시 비닐봉지를 들고 일어나 아버지의 산소로 올라갔다. 산소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장마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웃자란 풀이 없이 깨끗이 정리 되어 있었다. 농협의 산소 관리팀이 장마가 지나면 위탁받은 산소들을 대충 한번 정도는 순례하며 웃자란 풀과 잡목을 정리하는 모양이다. 합장을 한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에 술을 두 잔 부어서 올리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불을 붙여 봉분에 꽂아두고 산소 앞 잔디에 앉아 멀리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담배를 지독히 좋아하시는 애연가, 속칭 골초셨다. 아버지께서 즐겨 피시던 담배의 이름도 잊지 않는다. 갑에 누런 금빛이 나는 색깔의 ‘청자’ 다. 대학 다닐 적에 궁하면 몇 갑 훔쳐서 피워보았기에 정확히 안다. 하루에 그 독한 담배를 두 세 갑을 피우시는 당신께 살아생전 그렇게 담배를 끊으시라고 잔소리를 하던 나였지만 이젠 오히려 담배를 한 대 올리는 게 효자다운 일이다.
아버지의 파일을 그대로 백업받은 나 역시 담배가 늘어 하루에 두 갑을 피우는 골초다. 나는 올 적마다 담배를 올린다. 그리고는 아버지께서 담배를 다 피실 때까지 잔디에 앉아 굽이치는 강을 내려다본다. 오늘따라 강이 참 여유롭다.
담배가 다 탈 동안, 아니 아버지께서 담배를 다 피우실 동안 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처럼 바쁜 마음이 사라지고 푸근하고 편안하다. 늘 그런 마음을 느끼지만 여기 앉아 있으니 자꾸 눕고 싶어진다. 나는 윗도리를 입은 채 그대로 잔디밭에 누웠다. 누워서 가만히 보니 허공으로 흐르는 적요와 함께 가을이라는 계절이 밀려오고 있었다. 참으로 푸근하다. 누워있으니 일어나기가 싫다. 내 등에서 허연 실뿌리가 삽시간에 돋아나 잔디와 함께 어우러져 땅 속 깊이 박히고 나는 일어나고 싶어도 뿌리가 박혀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으면 좋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담배를 다 피우시는 걸 보고 불씨와 꽁초를 정리하고, 반이 남은 술병과 컵, 젓가락을 챙겨 비닐봉지 담아서 들고 산소를 향해 읍을 올리고 산을 내려섰다. 빵 한 조각으로 때운 아침이라 시장하다. 얼른 가서 시장기를 때워야겠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 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혁이가? 아부지 산소 댕겨오는 겨?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낮의 들판은 조용하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이상하다 잘못 들었나?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서 참깨 밭에서 ‘여기여’ 하며 일어서는 노인이 있었다. 준식이 아버지다. 키가 큰 참깨에 가려 보지 못했다. 어른은 밭 저쪽에 쪼그려 앉아 낫으로 참깨를 쪄서 눕히고 있던 참이었다.
-아, 아버님, 밭일 나오셨군요.
-아까 니가 올라가는 걸 봤다. 너그 아부지 산소 둘러보고 오는 길이쟈?
-예.
-아직 점심 전이쟈? 이리 온. 같이 먹자. 니가 올라가는 걸 보고 먹으려다가 아무래도 니가 점심 전인 거 같아 지달렸다.
-아이쿠, 아버님 제가 뫼시고 소재지에 가서 점심을 대접해야 되는데........
-아니라니께, 여그서 묵는 밥이 더 맛있는 벱이여. 어여 들어와여.
다정다감하게 나를 부르시는 어른은 친구의 부친이자, 부친의 친구가 되는 분이시다. 아버지 살아생전 단짝이셨고, 내 친구 준식이....... 초, 중, 고등까지 십이 년 동기 동창이다. 고등학교는 대구로 유학을 갔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학교에 배정을 받아 같은 단칸방에서 삼 년이나 함께 자취를 했던 친구다. 성적과 취향이 달라 대학은 따로 갔지만 일학년을 마치고 입대 전까지는 늘 친한 동아리 친구를 데려와 소개시켜 주던 녀석이었다. 일 학년을 마치고 입대하여 일병도 달기 전에 작전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로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간 녀석, 준식이 아버지다.
-아버님 혼자서 뭐 하려고 밭일을 하셔요? 집에서 그냥 쉬시지.
밭으로 들어서며 내가 타박했다. 연세는 아버지와 동갑이니 지금 일흔 아홉, 팔순의 문지방을 견고하게 깔아둔 둔 상노인이지만 기력은 여전히 좋아보였고 목소리도 카랑카랑 힘이 실려 있었다.
-늙을수록 몸을 움직여야 하는 벱이여. 일이 있으니 월메나 좋아? 집에서는 맨날 하늘만 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걸!
어른께서 이끄는 대로 밭으로 들어서 밭둑에 있는 감나무 아래로 갔다. 감나무 그늘아래는 어른께서 타고오신 스쿠터와 점심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벌써 참깨를 찔 때가 되었습니까? 아직도 푸른데.......
-참깨는 맨 밑에 있는 것이 벌어지기 전에 쪄야 하는 겨. 밑에 게 벌어지면 늦은 겨. 그 때 찌면 아까운 것이 다 흘러! 지금 쪄서 단으로 묶어 말리면서 털어야 혀!
-힘드실 텐데. 농사를 남에게 맡기시죠.
-기계로 하는 논농사야 다 맽겼지. 달랑 이거 하나 소일거리로 하고 있어.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지. 어여 묵자.
어른은 목에 걸친 수건에 손을 닦고 주섬주섬 플라스틱 바구니에서 점심거리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꽁보리밥에 반찬은 고추장이 묻은 장아찌와 묵은 김치, 오이를 쓴 것과 날된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수저는 두 벌이고 밥은 넉넉해보였다. 온전한 고향의 맛으로 보여 군침부터 돌았다.
-혼자 오시면서 수저를 두 벌이나 챙기셨네요?
-혼자 밥 먹는 게 제일 싫어서 늘 그랴. 들에 있는, 누구든 보이면 불러서 같이 먹곤 혀. 잠은 혼자 자도 라디오를 틀어놓고 자니까 괜찮은데 밥은 혼자 먹으니께 너무 처량혀서 자꾸 목에 걸려!
들일이라면 늘 같이 다니시던 준식이 어머님은 벌써 사 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곤 줄곧 혼자 사시는 것이다. 준호 형과 형수가 자주 들락거리지만 준호 형은 애가 탈 것이다.
-적적하실 텐데, 준호 형 댁으로 들어가시지 그래요?
-거기 아파트에 가서 뭐하며 시간을 보내겠노? 난 여기가 좋아.
-너는 댕기던 은행에 그대로 댕기쟈? 지점장이 되었겠구먼!
-아닙니다. 벌써 그만 둔 지 십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랴? 그라믄 지금은 뭐하노?
-복덕방을 하고 있습니다.
-공인중개사 말이가?
-예........ 밥이 참 맛있습니다.
-그랴. 너하고 먹으니 나도 맛이 그만이구먼!
사실 내가 다닌 곳은 은행이 아니라 마을금고였다. 과장으로 진급하니 실적에 눌려 받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금고에 돈이 남아도 실적을 따지고 금고가 비어도 실적이 뒤통수를 쳤다. 살인적인 인내력을 요하는 자리였다. 그 때 부동산 열풍이 불었고 나는 이때다 싶어 짬짬이 공부하여 공인중개사 자격을 따고 남의 돈이나 주물럭거리는 마을금고를 박차고 나왔다. 퇴직금으로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차리니 딱 맞아떨어졌다.
-아버님! 여기 술이 남았는데 한 잔 올릴까요?
-술? 좋지........ 내가 너그 아부지 술을 오랜만에 얻어먹는구나.
술병을 열었다. 종이컵에 반잔이 조금 넘도록 부우니 한잔 가득 부우라는 지청구가 날아왔다. 나는 잔이 찰찰 넘치도록 술을 따루었다. 종이컵을 잡은 어른의 야윈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어른께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집행위원장이셨다. 상주였던 나는 나이도 어리고 그런 일을 접한 바가 없기에 어른께서 시키시는 대로만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전문 장례식장 같은 게 없던 시절이라 집에서 장례를 쳤는데 어른께서 간섭하지 않은 곳이 없다. 면 소재지의 장의사를 불러 대렴을 하고 문상객들이 먹을거리와 제물은 농협에 시키고 상여 앞소리꾼과 산에서 좌향을 볼 풍수어른까지 직접 섭외를 하셨다. 그러시면서 상복을 입은 나만 보면, 힘 들쟈? 힘 들쟈? 외동은 이때가 젤로 힘든 벱이여! 하시며 나를 위로하시던 분이다. 어른께서도 술잔을 받으면서 친구인 아버지를 생각하신 모양이다.
-너그 아부지 술 한 잔 먹어보자.
그렇게 혼잣소리를 하시고 어른께선 받은 잔을 주저 없이 원 샷으로 들이키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시고 안주도 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이 밭에만 오면 너그 아부지 생각이 짠하다. 일을 하다보면 여기저기서 쾌지나칭칭나네가 들리는 것 같혀. 어딘가 싶어 둘러보면 너그 아부지가 누운 저 등에서 나는 소리여. 한 소절 불러볼까?
-예....... 오랜만에 듣는 가락입니다.
-쾌지나 칭칭 나하네~ 왔네 왔어 혁이가 왔네~ 쾌지나 칭칭 나하네~
아버지의 구수한 목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밥을 자시다 말고 부르시는 어른의 소리를 들으며 그 가락에 맞추어 고개를 주억였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국립현충원에 잠이 든 준식이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니다. 녀석은 국립현충원이 아니라 어른의 가슴에 묻혀 있다. 가슴 속에서 아문 상처를 들추기가 싫어 밥을 먹으며 애써 농사이야기, 농산물 시세 이야기, 마을을 떠난 동네사람들 안부를 묻는 둥 다른 이야기로만 돌리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점심 맛있게 먹었다며 가보겠다고 인사를 드리자 비수 같은 한마디가 날아왔다.
-니가 올해 꼭 쉰이쟈?
준식이 나이를 확인하느라 물으시는 말씀이라는 걸 알았다.
-아, 예........
-그랴........ 얼라들은 잘 커쟈?
어른께서도 애써 준식이를 언급하지 않고 애써 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른은 아직도 아이들을 아기로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아........ 예.
대답을 얼버무렸다. 큰 녀석이 올해, K대를 전면 장학생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이야기까지 해버리면 또 준식이와 나를 비교하실 것이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어른을 뵈면 죄스럽다. 준식이 장례는 보지 못했다. 그 때 나는 다른 사단에서 군번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신참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보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소식조차도 늦게 들었다. 준식이와 사귀던 여학생이 눈물로 얼룩진, 깨알같이 쓴 편지로 알려주었다. 그 편지를 받고 며칠이고 울고 다니다 고참에게 걸려 속칭, ‘빠질대로 빠졌다, 고 뭐가 빠지도록 맞았다. 첫 휴가를 나와 지금은 어디서 늙어 가는지 모를 그 여학생을 만나 같이 현충원에 가서 녀석의 묘비를 보고 거수경례를 올리며 참배한 게 마지막으로 녀석을 본 거다.
지금도 그 녀석을 생각하면 콧날이 시큰하다. 농로를 걸어 나와 차에 앉아 시동을 걸자 전화벨이 울렸다. 성질 급한 사내인줄 알았는데 처남 녀석이었다. 이야기가 잘 되어 가냐고 물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된 건지 성질 급한 사내보다 더 급하다.
-어이, 신참 공인중개사님! 설익은 밥을 먹기 싫으면 뜸을 들여야 돼! 좀 느긋해져라.
타박을 놓자 녀석은 알았다고 신경질을 부리며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오늘 경매 건에서 낙찰자와 차 순위인 우리야 짜고 친 고스톱이고, 삼위를 한 자와 금액이 오십 만원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연구 분석하고 응찰자의 심리에 대해서 공부 좀 하라고 말하려는 찰라, 녀석이 먼저 끊어버린 것이다.
한참 녀석을 씹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막 차를 롤리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차를 돌리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성질 급한 사내였다.
-작업을 하려면 입찰 보증금 곱하기 이라고 하셨죠.
역시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거두절미하고 제가 묻고 싶은 것만 묻는다. 이런, 지금 누가 성질 급한지 내기를 하는 거야 뭐야?
-예, 그 정도는 제시하며 말을 꺼내고 접근해야 할 겁니다.
-좋습니다. 그 천육백하고 중개사 선생님 성과급으로 사백을 더해서 이천만 원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퇴근하면서 바로 사무실에 들를 테니까 작업에 들어가십시오. 천육백에서 더 들어가는 금액은 중개사 선생님 성과급에서 보태서 작업을 하시든가 선생의 수완이 좋아 천육백이 덜 들고 성사가 되면 그 차액도 중개사 선생의 성과급으로 생각하시오. 그 금액에서 작업이 안 되면 깨끗하게 포기할 겁니다. 지금 마누라에게 돈을 찾아놓으라고 했으니까, 퇴근하면서 바로 들리겠습니다. 그럼.
성질 급한 사내는 제가 할 말만 결연하게 뱉어놓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모양이다. 밀고 당기고 할 게 없다. 저런 성질은 낙장불입이라, 저녁이면 분명히 돈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이야기가 잘 안 되면 처남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양도소득세를 좀 많이 맞더라도 매물로 내놓을 생각이었는데 일이 쉽게 풀리자 오히려 서운한 감이 들었다. 열흘쯤 후에 차 순위가 아닌 최고 낙찰자 등록을 위해 경매 1계에 다시 들러야할 것이다. 저녁에 돈을 가져오면 성과급이라고 말한 부분을 공제하고 나머지는 뒤늦은 결혼을 하여 집장만이 숙제로 남아있는 처남 녀석에게 몽땅 주어버릴 것이다. 법적으로야 하자가 없는 일이지만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돈도 아니다.
나에게는 떳떳치 못한 돈을 처남에게 날려버리는 게 마음이 편하다. 아내도 잘했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 되면 또 한 가지 이익이 발생한다. 경매를 여러 번 보았다는 전문가들도 잘 모르는 부분이다. 그건 최고 낙찰자가 등록을 포기하고 기한을 넘겼을 경우, 입찰보증금이 오백이 넘는 고액이면 무슨 사연으로 등록을 포기했는지 법원의 경매 담당관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그게 한 달이나 두 달 쯤 후에 법적으로 등기가 완료되고 국고로 몰수 직전에 오는 전화다.
중요한 건 그 때 말을 잘 해야 한다. 낙찰이 되고 나서 부도를 맞았다든지, 경락잔금 대출이 어려워졌다든지, 적당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마음이 변했다거나 시세 차익을 노렸는데 판단 착오라고 설명하면 전액을 몰수당하는 반면, 그 물건을 꼭 받고 싶었는데 피치 못할 사연으로 기한을 넘겨 차 순위 낙찰자에게 순번이 넘어갔다면 사무관들은 그렇게 서류를 작성해서 판사에게 올린다. 법에도 틈이 있고 인정이라는 게 있는 법, 재판 없이 판사의 재량으로 입찰 보증금 일부를 반환선고를 내린다. 그 금액이 보통 20%에서 30%정도가 된다. 처남 녀석도 그런 부분까지는 모른다. 그런 것도 이젠 가르쳐 주어야 한다. 우리가 팔백을 보증금으로 걸었으니까 약 이백 정도가 공돈처럼 굴러온다. 그런 돈을 받으면 철이 지나 옷장에서 작년에 입던 옷을 꺼내 입었을 때 주머니에서 불쑥 집히는 뭉칫돈처럼 기분이 묘하다. 그런 기분을 오늘 녀석에게 일러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이 쉽게 풀렸다고 말하려는데 녀석이 먼저 말을 막았다.
-매형! 지금 낙찰 받은 그 땅을 보고 오는 길인데 이 땅을 제가 직접 등록하고 싶어요. 등록세와 양도소득세를 맞더라도 임자 만나면 곱빼기 장사는 되겠는데, 제가 매형에게 소개비 드리고 등록하면 안 될까요? 제게 양보하시죠.
느닷없이 말문이 막혔다. 더듬거리면서 되물었다.
-너.......네가 그만한 돈이 어디 있어서?
-경락잔금 대출받으면 되잖아요. 쉽게 팔수가 있겠어요.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드는 기분, 가슴이 답답했다.
-너 지금 사무실로 바로 오너라. 얘기 좀 하자.
녀석을 사무실로 불렀다. 녀석은 아마도 제게 떨어지는 금액이 아파트 전세 소개비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 속내를 털어놓고 그래도 설익은 생각으로 고집을 부리면 빗자루로 뒤통수를 때려버릴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할 것이다.
중개사는 중개업 본질에 충실해야지 욕심을 부려 투기꾼으로 전락하면 언젠가는 수렁에 빠져 쪽박을 차게 된다.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말을 명심해라 이 자식아!
그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기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화가 나서 과속운전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쾌지나 칭칭~ 나~하네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고 있었다. 이 가락이 어디에서 들리는 걸까? 차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중량물을 실은 대형트럭이 경적을 심하게 울리며 과속으로 지나쳤다. 이이쿠,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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