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입문
두 번째 입문의 네 가지 하위 단계를 통과하고 다시 한번 고트라부(다음 입문을 받을 준비가 된 자)가 되면, 그는 세 번째 입문, 즉 문자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자"를 의미하는 아나가민(Anagamin, 아나함)이 될 준비가 된 것인데, 이는 그가 같은 현생에서 다음 입문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 단계의 힌두교 명칭은 백조를 뜻하는 함사(Hamsa)이지만, 이 단어는 "그것이 바로 나다(That am I)"라는 소함(So-ham)이라는 문장의 한 형태로 여겨진다. 백조는 물에서 우유를 분리할 수 있고, 현자는 마찬가지로 생명 현상에서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전통이 있다.
이 입문은 기독교의 상징에서는 전형적으로 그리스도의 변모(Transfiguration of the Christ)로 대표된다. 예수께서는 제자 일행과 떨어져 혼자 높은 산으로 올라갔고, 그 후 변모되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은 빛과 같이 희었다", "눈처럼 하얗게 되어 지상의 그 누구도 이처럼 더 희게 할 수 없으니". 이 설명은 영광스럽게 된 사람인 아우고이데스(Augoeides)*를 암시하는 것이며, 제 2 입문이 주로 하위 멘탈체의 가속과 관련되는 것처럼, 이 단계에서는 원인체(causal body)가 특별히 발달하기 때문에 제 3 입문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다. 자아(혼)는 모나드와 더 밀접하게 접촉하게 됨으로써 매우 진실되게 변모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인성도 경이로운 빛의 쏟아부어짐에 영향을 받는다. 상위 자아와 하위 자아는 첫 번째 입문에서 하나가 되었고, 그 일체성은 결코 상실되지 않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위 자아의 발전은 비록 상위 자아와 하위 자아가 가능한 큰 범위에서는 하나이지만, 결코 낮은 형태의 세계에서는 반영될 수 없다.
*(역주) 아우고이데스(Augoeides) : 그리스의 용어에서 비롯된 “빛나는 몸”, “영광의 몸”을 뜻한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이를 상위 자아(EGO)의 빛의 신성한 발현으로 보았다.
이같은 변모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는 또한 오래전 천상의 계획을 드러냈던 두 주요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에서도 나타났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유대의 선지자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유대의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진리에 접근하는 두 가지 계획이나 방식, 즉 율법을 따르는 일과 예언적 영감을 받는 일은 신의 새로운 계획을 막 세우려던 그리스도처럼 표현된다. 이 모든 상징들은 제 3 입문의 실제적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같은 단계와 관련된 또 다른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복음서 이야기에 등장한다. 전통적인 기록에서는 그리스도가 어린아이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것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 진보의 이 제 3 입문의 단계에서 그는 세계의 영적인 왕, 즉 오컬트 하이어라키의 강력한 수장(마이뜨레야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하며, 이 입문에서 그분은 자신이 직접 입문을 수여하거나 아니면 금성에서 자신과 함께 지구 행성에 온 그의 제자들인 세 명의 불꽃의 주님들 중 한 분으로 하여금 자신 대신 입문을 수여하게 하는데, 후자의 경우 제 3 입문이 수여된 후에 입문자는 다시 왕에게 소개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의 면전으로 나아가게 된다. 입문자의 내면에 있는 붓디는 니르바나(열반)계에서 자신의 기원과 하나가 될 때까지 상승하게 되며, 인간 안의 첫째 원리와 두 번째 원리 사이의 매우 놀라운 통일이 이루어진다.
네 번째 족쇄와 다섯 번째 족쇄
제 3 입문자인 아나가민(아나함)은 자신의 일을 행하면서 상위 멘탈계의 능력을 완전하게 소유함으로써 주어지는 모든 찬란한 가능성을 즐기며, 밤에 자신의 육체를 떠나 있는 동안 다시 붓디계에서 속하여 경이롭게 확장된 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그는 카마라가와 파티가로(kamaraga and patigha)로 불리는 네 번째 족쇄와 다섯 번째 족쇄, 즉 지상(세속)에 대한 사랑으로 대표되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과 분노와 증오의 모든 가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진리의 열망자는 외적인 것들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가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고 그가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청결한 것들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행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을 대해 고려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이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 요소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고, 자신의 일에 필수적인 긴급한 상황에서는 그것들을 전적으로 무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주 마주하게 되는 오해를 경계해야 하는데, 입문자에게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인간의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컬트 훈련으로 인해 사랑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점점 증가되고 확대되어 처음에는 한두 사람에게만 쏟아부었던 정도의 열정으로 점차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하게 된다. 하지만 제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사람들의 단순한 인성과 관련된 모든 고려 사항을 초월하게 되고, 그래서 평범한 사랑에 자주 수반되는 모든 부당성과 편파성에서 자유로워진다.
또한 그가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가지게 되면서 그와 가까운 친구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 요한과 그리스도 사이도 그렇고, 아난다와 부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들 간의 비정상적으로 완벽한 연결은 반대로 이것이 엄청나게 심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록되어 있다. 마스터와 그의 제자들 사이의 유대는 지상의 어떤 유대보다 훨씬 더 강하다. 거룩함의 길에서 번성하는 애정은 단순히 인성들 사이의 애정이 아니라 자아(혼)들 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에 감소나 변동에 대한 두려움 없는 강력하고 영구적인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