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차 씨름
이상호
사람들이 날 보면 어릴 적에 무척 개구졌을 것 같다는 말을 한다. 내가 놀이를 널리 알리는 일을 오래 하다보니 그런 인상을 줬나 보다. 그런데 나를 비롯해 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 대부분은 사는 곳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겠지만 개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슷하다. 요즘 아이들 너나없이 핸드폰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는 학교, 동네 공터, 골목 등 놀이하느라 왁자지껄 했고 그 속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오징어 놀이, 고무줄 놀이, 공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사방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말타기, 동그란 딱지, 콩주머니 던지기(일본말로 오자미), 진치기(일본말로 다방구), 깡통차기, 핀치기, 소꿉놀이, 긴줄넘기(꼬마야~), 허수아비 ......
나는 당시 체구가 작았기에 힘쓰는 놀이보다 재빠르게 움직이거나 기술이 필요한 놀이를 선호했는데 때에 따라 특정한 놀이가 유행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거기에 따라야 했다. 아이들이 모두 구슬치기를 하는데 나만 딱지를 들고 다닐 수 없는 노릇이다.
아마도 5학년 때 였을 것이다. 운동장 구석에 있는 모래사장에서 틈만 나면 씨름을 했다. 샅바도 없이 서로 허리춤을 잡고 넘어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입고 있던 바지는 헐렁한 고무줄로 허리띠를 대신하던 때라 잘못하면 바지가 내려가는 상황이었다. 고의성은 없어도 종종 바지가 벗겨져 주위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처음엔 자신이 없어 피했는데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와 덩치가 비슷하고 평소에 조심성이 많은 친구가 자기랑 한 판 붙자고 했다. 해 볼만하단 생각에 응했는데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연거푸 졌다. 오기가 생겨서 매번 도전했고 그러다가 점차 나도 요령이 생기고 힘도 붙어서 승률이 비등해졌다. 하다 보니 그냥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가 왼쪽으로 힘을 주면 타이밍을 맞춰 그쪽으로 넘어뜨리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오른쪽으로 힘을 주는 척하면 상대가 오른쪽에 힘을 주게 되고 그때 왼쪽으로 힘을 몰아 쓰면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기도 했다. 자신감이 붙자 나보다 덩치가 큰 아이와도 겨루게 되었다. 승률은 떨어지더라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특히 여자아이들이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젖 먹던 힘에 그간 터득한 요령까지 총동원했다.
한번은 반끼리 겨루게 되었다. 선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나올 수 있는 열린 판이었다. 우리 반은 4반이었고 상대는 7반이었다. 4반에서 누구나 나올 수 있고 그에 대응할 상대가 나오는 식이다. 처음엔 덩치가 작은 아이가 나오면 상대편에서도 맞춰 나온다. 이기면 계속 남아 있고 진 쪽에서 새로운 선수가 나오는 것이다.
나는 덩치는 작았지만 기술을 인정받고 있어서 대기하고 있었다. 상대반 아이 중에 덩치는 작은데 우리 반 아이 3명이 맥을 못추고 나가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내 등을 떠밀어 등판하게 되었다. 허리춤을 잡고 허리를 숙였는데 마치 돌덩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되겠다 싶었는데 결국 나가 떨어졌다. 이후 우리 반 아이가 연거푸 지고 그 아이가 지쳤을 때 덩치가 큰 우리 반 아이가 겨우 넘어뜨리게 되었다. 결국 우리 반은 더 이상 나갈 아이(선수)가 없어 패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반에서도 도전했는데 7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중심에 돌덩이 같은 아이가 있었다. 자기보다 훨씬 큰 아이에게도 밀리지 않고 버티다가 틈을 노려 넘어뜨릴 때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1980년대 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덩치 작은 이만기 선수가 거구의 이봉걸 선수를 넘어뜨릴 때 갑자기 그 아이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지워내기의 확장판~ 씨름판!
나중에 놀이를 공부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겨루기 형태가 예전부터 행해지던 겨루기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워내기란 것이다. 우리는 승부를 가릴 때 토너먼트나 리그를 떠올린다, 토너먼트는 지면 끝이고, 리그는 져도 승률을 따지는 방식이다. 그런데 마을대항 씨름대회에선 지워내기 방식으로 승부를 가렸다. 예를 들어 양촌, 음촌 마을이 겨룬다면 각 마을에서 선수가 정한 수 만큼 선발된다. 만약 5명씩 나왔다면 음촌의 첫 번째 선수가 양촌 5명을 모두 이기면 끝나고 반대도 가능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을 보낼 것인지 작전도 중요했다. 작전은 주로 마을 어른들이 했고 청장년이 출전했다.
황소를 걸고 벌어진 큰 씨름판은 지워내기의 확장판이다. 선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나올 수 있고 겨루어 이기면 계속 하고 지면 탈락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힘센 사람이 나오면 주위 사람이 계속 도전하기에 수십 명을 이길 수 없다. 따라서 잘하는 사람은 뒤에 나올 수밖에 없다.
씨름판이 벌어지면 자연스레 아이들이 나선다. 이를 애기 씨름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가 많은 청소년이 나와 힘겨루기가 펼쳐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청년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씨름판이 펼쳐진다. 새로운 사람이 이기고 또 다시 새로운 승자가 등장하면서 점점 분위기가 고조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과 선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누구든 상대를 이길 수 있다 싶으면 나설 수 있다. 이런 열린 판이기에 구경꾼은 좀 더 몰입할 수 있고 모든 이가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었다.
연거푸 이겨서 도전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면 심판이 “판막음 합니다”라고 외친다. 이때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우승자가 되고 그에게 장사란 칭호와 함께 황소가 주어진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두세 번 외쳐서 판막음을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다시 판이 벌어지고를 되풀이해서 정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짜 장사가 되어 황소를 타게 되는 것이다.
장사가 되는 일은 개인에게 영광이기도 했지만 마을의 자랑이기도 했다. 또한 일반인과 다른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품값도 2~3배 쳐주고 농사일이 많은 지주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경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장사가 되려고 요즘처럼 운동만 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일상 속에 놀이가 있었고 노는 것이 일상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이들은 꼴을 베다가, 미역 감으려고 물가에 갔다가, 나무 하러 갔다가 묏등에서 틈틈이 서로의 허리춤을 잡고 힘과 재능을 겨루었는데 이런 과정이 곧 단오나 추석에 벌어지는 씨름판의 실력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상대와 몸을 부대끼며 놀던 씨름
요즘 아이들이 노는 것을 살펴보면 몸과 몸이 직접 닿는 것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활동이 주된 개뼈다귀나 오징어놀이, ㄹ자 놀이를 일부러 하게 하면 재미없다고 안한단다. 재미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거부감으로 읽어야 한다. 누군가와 직접 몸과 몸이 부대끼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다. 이런 상황에서 씨름은 불편함 내지 거부감의 정점에 있는 놀이라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명절 즈음에 텔레비전에서 선수들만 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는 냄새가 있다. 씨름하다 승부가 나지 않아 힘이 빠진 상태에서 친구 등짝에 머리를 얹혔을 때 솔솔 풍기던 땀 냄새와 그 친구 특유의 냄새를 말이다. 겨루기 위해서라지만 몸과 몸이 닿으면 왠지 모를 끈끈한 정이 흘렀고 그래서 단짝이란 정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고구려 각저총에 그림으로 남아 있는 씨름, 5월 5일 단오를 비롯한 여러 명절의 단골 메뉴인 씨름, 마을 내지 고을 단위의 큰 축제 마지막 날을 장식하던 씨름, 지금은 주목받지 못하는 천하장사 씨름대회 등 옛날부터 현재까지 쓸 이야기는 많은데 그것보다 씨름하면 떠오르는 것은 40여 년 전 틈만 나면 서로 몸을 부대던 그 친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란 생각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