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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철(歐陽澈), 진동(陳東), 동양(董養), 하번(何蕃)사현사(四賢祠) 윤지술(尹志述), 이목(李穆)
승정원일기 600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 9월 11일 을사 26/30 기사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李穆의 事蹟 등에 대한 所懷를 진달하고 歐陽澈 등의 祠宇에 合享할 것을 청하는 宋鉉徵 등의 상소
○ 京畿·忠淸兩道儒生宋鉉徵等疏曰, 伏以歐陽澈·陳東等四人, 俱以中國之太學儒生, 秉正不撓, 蹈禍不悔, 樹立卓爾, 名節凜然, 夐想遺風, 尙有生氣, 恭惟我肅考, 興感異代, 軫念於追奬, 曩在癸亥, 特降綸音, 議營祠宇, 而所以必於太學之傍者, 蓋謂四人之風聲氣節, 可爲後世之爲太學生者法也。會値年侵, 不遑興役, 成命還寢, 聖志未就, 慷慨好義之徒, 興惜者久之, 幸我殿下卽祚之初, 深追遺旨, 亟擧盛典, 祠宇旣建, 俎豆將揭, 而又命以故進士尹志述配焉, 甚美也, 甚盛也。自太學章甫, 至八路之以儒爲名者, 孰不感歎而稱頌, 聳激而興起也哉。然臣等, 竊有所慨然者, 我國家累百年培養士氣之餘, 著節於太學者, 豈獨尹志述一人, 而廷臣不能標擧而建白之, 或未及聞而未及知耶? 曩在癸亥, 議營祠宇時, 我肅考嘗下敎于儒臣, 特詢國朝以來, 太學生有節行可以合享者, 則副提學臣趙持謙等啓, 以故評事臣李穆, 德望風節, 無愧古人, 惟此人可以合享, 儻使其時祠宇遂成, 則不待群下之復請, 而必以李穆合享也, 明矣。夫殿下奬節之擧, 寔遵肅考遺旨, 而惜乎今日之廷臣, 未及以穆白也。臣等請以穆之事蹟, 仰陳之。穆自幼少時, 遊學於先正臣金宗直之門, 識見高邁, 義理透澈, 切直之言, 慷慨之節, 已爲同門之所推重, 弱冠中進士, 遊太學, 自以扶正抑邪, 激濁掦淸, 爲已任, 風采論議, 聳動一世, 老師宿儒, 莫不歛袵而委重焉。適當成廟, 有不安節, 貞熹大妃密令巫女, 設野祭, 祈禱于明倫堂後碧松亭上, 諸儒莫敢論其非, 穆獨倡義杖逐女巫, 推破雜樂, 貞熹大妃大怒, 將致之罪, 成廟命本館, 悉錄儒生姓名以啓, 諸儒咸驚怖, 而穆挺身自當, 成廟嘉之, 召大司成奬之曰, 爾能導率儒生, 使士習歸正, 以酒賞之。時尹弼商爲相用事, 會天旱, 穆上疏曰, 烹弼商, 天乃雨。弼商又勸上奉佛, 穆上疏論弼商, 目以奸鬼, 上怒, 召入親問曰, 爾何斥吾相爲鬼也。穆對曰, 所行如彼, 而人不知, 曰鬼。由是謫公州, 而穆益自奮勵, 不少撓屈, 此是穆在太學時事也。故相臣金堉所撰海東名臣錄, 車天輅所撰說林, 文正公臣金尙憲所撰墓表中具載焉, 而京畿儒生沈尙熙等丙戌之疏, 故判書臣閔鎭厚戊戌之啓, 備述焉。噫, 穆以眇然一書生, 不顧死生, 不計禍福, 逐女巫而使聖廟增重, 斥權貴而使異端不行, 鼎鑊在前, 而衛道之誠彌篤, 雷霆震疊, 而嫉惡之心不渝, 勁操直氣, 激勵乎頹俗, 峻節高風, 聳動乎後人, 臣等竊以爲, 雖歐陽澈之剛介, 陳東之正直, 亦無以過之, 今欲求節行之可以竝享於歐·陳者, 則捨穆而誰哉? 或者曰, 歐陽澈等, 以太學生死, 李穆以評事死, 今爲太學生而建祠, 而乃以評事配享, 無乃不可乎? 臣等以爲, 此大不然, 歐陽澈等太學生危言直論, 不幸而至於死, 李穆以太學生危言直論, 幸而不至於死, 其死也其不死也, 時之幸不幸耳, 豈死者, 獨可以氣節稱, 而不死者, 不可以氣節名耶? 今日之爲歐陽澈等建祠者, 以其著節於太學也, 臣等之請以李穆配享者, 亦以其著節於太學也。均是太學生也, 均是氣節也, 則死與不死, 固不論也。況穆謫公州而經年乃釋, 中魁科而官止評事, 値戊午之獄, 而遂罹極刑, 逮甲子之禍, 而僇及泉壤, 立朝不滿三年, 得壽僅二十八, 其始也抑而退之者, 權貴之爲也, 其終也構而害之者, 亦權貴之爲也, 而究其所以致此, 則實太學時二疏爲之祟也。然則穆之死, 雖在於官評事之後, 而其所以死, 則已兆於在太學時, 比之歐陽澈等, 特死有早晩耳, 其著節於太學, 豈有彼此之差殊乎。嗚呼, 穆之以氣節, 留名於一國, 蓋久矣。朝家旣贈職而賜諡, 士林又俎豆而崇奉, 豈但爲被戊午之禍而然哉? 蓋以穆之氣節, 已著於在太學時也, 故沈尙熙之疏, 閔鎭厚之啓, 必以太學時事, 爲穆之斷案, 於此益可見趙持謙等之陳達, 出於一國公共之論也。臣等亦儒者流, 聞穆之風而未嘗不起敬, 想穆之節而未嘗不興歎, 常以爲宜使太學生, 備知穆之事蹟, 而以穆爲法, 今聞歐陽澈等祠宇幾告竣, 而合享之典, 不及於穆, 臣等竊不勝慨然之忱, 謹具尺牘, 相率叫閽, 伏惟聖明, 垂察焉。噫, 歐陽澈等, 以中國之人, 尙蒙聖明之褒嘉, 而穆以我東之人, 獨不得與耶? 歐陽澈等, 以異代之士, 尙被朝家之崇奬, 而穆以本朝之士, 獨不得與耶? 伏願殿下, 幸無以人微而小其言, 特命儀曹, 俾以李穆, 合享於歐陽澈等祠, 以副肅考下詢之遺旨, 以示聖明奬節之盛意, 以作興太學士氣, 以激勵末路人心, 則其於風敎之方, 豈曰小補之哉? 答曰, 省疏具悉。李穆事, 曾見海東野史, 欽仰聖祖培養章甫之盛德, 深歎士林激切之氣象矣。故於日昨筵中, 因館儒之疏下敎者也。今觀爾等之疏, 若見其氣像, 不覺興嗟, 而先朝已有特詢可以合享者, 而伊時儒臣所達, 亦爲此, 則其無更議之端, 其令該曹, 一體合享, 而此外可以合享者, 亦令禮官, 遵先朝成命, 京外大臣及知禮儒臣處, 更爲問議焉。
승정원일기 > 영조 1년 을사(1725) 9월 11일(을사) 맑음
01-09-11[23] 평사(評事) 이목(李穆)의 사적을 진달하고 구양철(歐陽澈) 등의 사당에 합향(合享)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송현징(宋鉉徵) 등의 상소
경기, 충청 두 도의 유생과 송현징(宋鉉徵)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구양철(歐陽澈), 진동(陳東) 등 네 사람은 모두 중국의 태학(太學) 유생으로 바름을 굳게 잡고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화를 당했으나 후회하지 않았으며, 세운 뜻과 절개가 우뚝하였으며, 명예와 절개가 늠름하고 당당하였으니, 남긴 풍도를 아득히 생각해 보면 아직도 생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숙고(肅考)께서는 다른 시대에 감흥을 일으켜서 죽은 이를 장려하는 데 진념하여 지난 계해년(1683, 숙종9)에 특별히 윤음을 내려 사우를 세우는 일을 의논하게 하시면서 반드시 태학의 곁에 세우라고 한 것은 대개 네 사람의 명성과 절개가 후세의 태학생이 본받을 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흉년을 만나 공역을 일으킬 겨를이 없어 성명을 도로 거두어들이시어 성상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강개하여 의리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애석해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선조의 유지를 깊이 추모하시며 속히 성대한 은전을 거행하시어 사우를 이미 건립하였고 제사를 행하려고 하시면서 또 명하여 고 진사 윤지술(尹志述)을 배향하게 하셨으니 매우 아름답고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태학의 장보(章甫)로부터 팔도의 유생이라 이름 하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누군들 감탄하고 칭송하며 격발되고 흥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이 삼가 억울하고 원통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백 년 동안 사기(士氣)를 배양해 왔으니 태학에서 절개를 드러낸 이가 어찌 윤지술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다만 조정의 신하들이 들추어내어 건의하지 않아서 아직 미처 듣지 못했거나 모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계해년에 사우를 세우는 것을 논의할 때 우리 숙고께서 일찍이 유신(儒臣)들에게 하교하시어 국조 이래 태학생 중에 절행이 있어 합향(合享)할 만한 자에 대해 특별히 물으시니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등이 아뢰기를 ‘고 평사(評事) 이목(李穆)은 덕망과 풍도와 절개가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으니 오직 이 사람이 합향할 만합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그때 사우가 완성되었다면 아랫사람들이 다시 청하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이목이 합향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릇 전하께서 절개를 포장하려는 조치는 숙고의 유지를 따르는 것인데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이 아직 이목에 대해 아뢰지 못했으니, 신들이 이목의 사적을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이목은 어려서부터 선정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식견이 고매하고 의리가 투철하며 정직한 말과 강개한 절개는 이미 동문들의 추중을 받았습니다. 약관에 진사에 입격하고 태학에 유학하였는데, 정당한 것을 보호하고 사악한 것을 억누르며 탁류를 제치고 청류를 드높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풍채와 논의가 일세(一世)를 용동시켜서 노사(老師)와 숙유(宿儒)라도 옷깃을 여미면서 중임을 맡기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마침 성묘(成廟) 시대에 편치 못한 일이 있어서 정희 대비(貞熹大妃)가 무녀(巫女)에게 비밀리에 명하여 야제(野祭)를 배설하고 명륜당(明倫堂) 뒤 벽송정(碧松亭) 위에서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유생들은 감히 시비를 논하지 못하였으나 이목은 홀로 정의를 부르짖으며 막대기로 매질하여 무녀를 쫓아내고 잡악(雜樂)을 부수었습니다. 정희 대비가 대로하여 죄를 다스리려고 하니 성묘께서 성균관에 명하여 유생의 성명을 다 기록하여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유생들이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이목은 앞장서서 스스로 담당하니 성묘께서 가상하게 여기고 대사성을 불러 칭찬하기를 ‘그대가 유생들을 잘 지도하여 선비들의 습속이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였다.’라고 하시며 술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당시에 윤필상(尹弼商)이 재상이 되어 권세를 좌지우지하였는데 마침 큰 가뭄이 들자 이목이 상소하기를 ‘윤필상을 팽형(烹刑)에 처하여야 하늘이 비를 내려 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윤필상이 또 임금에게 부처를 숭봉하도록 권하자 이목이 상소하여 윤필상을 간귀(奸鬼)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상이 노하여 불러들여 친히 묻기를 ‘그대는 어찌 나의 정승을 간귀라고 배척하는가?’라고 하니, 이목이 대답하기를 ‘그의 행동이 저와 같은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라고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공주(公州)로 귀양 갔습니다만 이목은 더욱 스스로 분려(奮勵)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목이 태학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고 상신 김육(金堉)이 지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설림(說林)》,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표(墓表)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경기 유생 심상희(沈尙熙) 등이 병술년(1706, 숙종32)에 상소하고, 고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무술년(1718)에 아뢰면서 갖추어서 기록하였습니다.
아, 이목은 하찮은 일개 서생으로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화복을 따지지 않았으며 무녀를 내쫓아서 성묘께서 더욱 중히 여기셨고 권귀(權貴)를 지척하여 이단이 행해지지 않게 했으며, 죽음 앞에서도 도를 보위하는 정성은 더욱 독실했으며, 천둥과 우레가 진동하여도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으며, 굳센 절개와 곧은 기상으로 무너져 가는 풍속을 격려하고 준엄한 절개와 높은 풍도로 후대 사람들을 용동시켰습니다.
신들은 삼가 비록 구양철이 강개하고 진동이 정직하다 하나 이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구양철, 진동과 더불어 향사할 만한 절행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목을 버려두고 누가 있겠습니까. 어떤 이는 구양철 등은 태학생으로서 죽었고 이목은 평사로서 죽었는데 지금 태학생을 위해서 사당을 건립하는데 평사를 배향한다면 불가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신들의 생각에 이것은 아주 그렇지 않습니다. 구양철 등은 태학생으로서 준엄한 말과 곧은 논의를 하다가 불행히도 죽게 되었으며, 이목은 태학생으로서 준엄한 말과 곧은 논의를 하였으나 다행히도 죽음에 이르지는 않은 것이니, 죽었는가 죽지 않았는가는 시대가 행이냐 불행이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어찌 죽은 자에게만 유독 기개와 절조가 있다고 칭하고, 죽지 않은 자는 기개와 절조가 있다고 이름 할 수 없겠습니까. 오늘날 구양철 등을 위해 사당을 건립하는 것은 태학에서의 절개를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신들이 이목을 배향하기를 청하는 것도 태학에서의 절개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다 같은 태학생이고 다 같이 기개를 떨친 일이니 죽었느냐 죽지 않았느냐는 본디 논할 것이 못 됩니다. 더구나 이목은 공주에 귀양을 갔다가 다음 해 석방되어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평사에 이르렀는데 무오년(1498, 연산군4)의 사화를 맞아 마침내 극형을 당하였고 갑자년(1504)의 사화 때에는 지하에 묻힌 시신에도 모욕이 가해졌습니다. 조정에 벼슬한 지는 3년이 되지 않았고 나이는 겨우 28세였으나 그 시초에 억눌러서 물러나게 한 것은 권귀가 한 일이고 종내 얽어서 해를 끼친 것도 권귀가 한 일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을 따져 보면 실은 태학에 있을 때 두 번 올린 상소가 빌미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목이 죽은 것은 비록 벼슬이 평사에 이른 뒤의 일이지만 그가 죽은 까닭은 조짐이 태학 때에 있었던 것이니 구양철 등과 비교해 보면 단지 늦게 죽고 일찍 죽고의 차이만 있지 태학에서 절개가 드러난 것은 어찌 피차에 조금이라도 다르겠습니까.
아, 이목이 기개와 절조로 온 나라에 이름을 남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조정에서 이미 증직을 하고 사시(賜諡)하였으며 사림(士林)에서 또한 제사를 지내면서 공경히 받들고 있으니 어찌 다만 무오년에 화를 당한 것 때문에 그러겠습니까. 대개 이목의 기개와 절조는 이미 태학생일 때 드러났으므로 심상희가 상소하고 민진후가 아뢸 때도 반드시 태학 때의 일로 아뢰었으니, 이목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여기에서 더욱더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며, 조지겸 등이 진달한 것은 온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들 또한 유자의 무리로서 이목의 풍도를 듣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목의 절개를 상상하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항상 태학생으로 하여금 이목의 사적을 다 알게 해서 이목을 본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들으니 구양철 등의 사우가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 합향하는 전례는 이목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니 신들은 삼가 개연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척독(尺牘)을 갖추어 서로 이끌고 궐문에 나아가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살펴 주소서.
아, 구양철 등은 중국 사람으로서 오히려 밝으신 성상께서 포상하고 가상히 여겨 주시는데 이목은 우리나라 사람인데 유독 참여할 수 없단 말입니까. 구양철 등은 다른 시대 선비로서 오히려 조정에서 높이고 장려하는데 이목은 본조의 선비로서 유독 참여할 수 없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행여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그 말까지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특별히 의조(儀曹 예조(禮曹))에 명하여 이목을 구양철 등의 사당에 합향하게 하여 숙고께서 하문하신 유지에 부응하시고, 밝으신 성상께서 절개를 장려하는 성대한 뜻을 보이시어 태학생의 사기를 일으키시고 말로(末路)의 인심을 격려해 주신다면 풍속을 교화하는 방법에 어찌 도움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목의 일은 이미 《해동야사(海東野史)》에서 보고 성조(聖祖)께서 선비를 배양하신 성대한 덕을 흠앙하며 사림의 격절한 기상에 깊이 감탄하였다. 그래서 일전의 경연 중에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하교한 것이다. 지금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그 기상을 보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선조(先朝)에서 이미 합향할 만한지 특별히 물으신 일이 있고 그때의 유신들이 아뢴 것이 또 이렇다면 다시 의논할 까닭이 없다. 해당 조로 하여금 일체 합향하게 하되 이 밖에 합향할 만한 자에 대해서도 예관으로 하여금 선조(先朝)께서 내리신 명에 따라 경외의 대신 및 예를 아는 유신에게 다시 물어 의논하게 하겠다.”
하였다.
[주-D001] 구양철(歐陽澈) …… 사람 : 네 사람은 구양철, 진동, 동양(董養), 하번(何蕃)을 말한다. 구양철과 진동은 송 흠종(宋欽宗)에게 상소하여 변방에 문제를 일으키고 국세를 위태롭게 한 채경(蔡京)ㆍ양사성(梁師成)ㆍ이언(李彦)ㆍ주면(朱勔)ㆍ왕보(王黼)ㆍ동관(童貫)등 육적(六賊)을 죽여야 한다고 제청하는 한편, 태학생들을 인솔하고 복합(伏閤), 상소하여 금(金)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한 주전론자(主戰論者)인 이강(李綱)을 등용하게 하였으며, 고종(高宗) 때에 황잠선(黃潛善)ㆍ왕백언(汪佰彦)ㆍ장준(張浚) 등 화친론자에게 이강이 밀려나자 이들을 배격하고 이강을 옹호하다가 연좌되어 참형을 당했다. 몇 년 뒤에 고종이 무고하게 죽인 것을 후회하여 벼슬을 추증함으로써 민심을 무마하였다. 《宋史 卷455 忠義列傳10 陳東, 歐陽澈》 동양은 진(晉)나라 태시(泰始) 초에 양후(楊后)가 폐위(廢位)되자 태학(太學)에서 노닐다가 그 마루에 올라가 탄식을 하고는 ‘무화론(無化論)’을 지어 이를 비난하였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董養》 하번은 당나라 태학생(太學生)으로 주자(朱泚)의 난을 당하자 의연히 당(唐)나라 때 국자감(國子監) 안에 설치한 여섯 학관(學館)인 국자학관(國子學館), 태학관(太學館), 사문학관(四門學館), 율관(律館), 서관(書館), 산관(算館)의 생도들을 준엄하게 질책하여 반역자를 따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오명(汚名)을 면하게 되었다 한다. 《新唐書 卷194 卓行列傳 何蕃》[주-D002] 계해년에 …… 하시면서 : 1683년(숙종9) 1월 18일에 임금이 전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유(韓愈)의 글 가운데 〈불골표(佛骨表)〉를 읽기 좋아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하번(何蕃)의 전기(傳記)를 보았다. 또 송(宋)나라의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澈)의 사적(事蹟)을 보았는데, 이들은 천년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부지불각 중에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국가에서 사자(士子)들에게 녹(祿)을 주어 기르는 것이 어찌 한갓 그들로 하여금 글이나 지어서 녹을 구하게 함이겠는가. 내가 이 세 사람을 위해 작은 사당(祠堂)을 성균관(成均館)의 곁에 따로 세워서 오늘날의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것이 있게 하려 한다. 그리고 무릇 고금(古今)에 봉사(奉祀)할 만한 자는 같이 봉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라고 하였다. 《肅宗實錄 9年 1月 18日》[주-D003] 전하께서 …… 하셨으니 : 1725년(영조1) 11월 28일에, 반촌(泮村)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진(晉)나라 태학생 동양(董養), 당(唐)나라 태학생 하번(何蕃), 송(宋)나라 태학생 진동(陳東)ㆍ구양철(欧陽澈)과 본조(本朝)의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을 제향(祭享)하였다. 처음에 숙종(肅宗)이 하번 등을 제사 지내 주라고 명하였고, 윤지술은 성균관의 장의(掌議)로서 그 일을 주관하였으나, 일이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에 숙종이 승하(昇遐)하였다. 이때에 와서 성균관 유생이 상소하여 선조(先朝)의 하교(下敎)에 따라 사당을 세우고 아울러 윤지술을 배식(配食)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英祖實錄 1年 11月 28日》 영조가 어필로 ‘유방아동(流芳我東)’ 네 글자를 써서 걸었으며, 1760년에는 어필로 ‘사현사(四賢祠)’ 세 글자를 써서 내려 현판을 걸도록 명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 京都》[주-D004]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설림(說林) : 《오산설림(五山說林)》을 말한다. 차천로(1556~ 1615)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문명을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특히 한시에 뛰어나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저서에 《오산집(五山集)》, 《오산설림》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가 수록되어 있다.[주-D005] 경기 …… 상소하고 : 통진(通津)의 유학(幼學) 심상희(沈尙熙) 등이 상소하여 고(故) 평사(評事) 이목(李穆)을 포증(褒贈)할 것을 청하였다. 《肅宗實錄 32年 3月 15日》[주-D006] 고 판서 …… 아뢰면서 : 민진후(閔鎭厚)가 이목에 대해 아뢴 것은 정유년(1717, 숙종43)의 일인데, 착오가 있는 듯하다. 《肅宗實錄 43年 8月 28日》[주-D007] 시초에 …… 일입니다 : 이목은 무오사옥(戊午史獄)이 일어나자 윤필상(尹弼商)의 무함을 받고서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참혹한 화를 당했는데, 윤필상은 유감이 그래도 풀리지 않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 이르러 다시 지하에 묻힌 이목의 시신에 모욕을 가했다. 중종 때 복관되었다. 《李評事集附錄 贈嘉善大夫……李公墓表陰記, 韓國文集叢刊 18輯》
ⓒ 한국고전번역원 | 김은정 (역)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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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588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 3월 6일 갑진 32/33 기사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尹志述을 伸寃시켜 주고 四賢의 祠宇에 配食하게 해 줄 것 등을 청하는 姜柱宇 등의 상소
○ 成均館進士姜柱宇等疏曰, 伏以皇天不弔, 我邦家五年之內, 荐降大割, 伏惟我殿下純孝至愛, 重罹險釁, 舊哀新慟, 何以自抑? 臣等有一片苦心, 抑而不發, 已有年矣。今逢盛會, 旣晦之義理乍明, 將喪之斯文復興, 今而不言, 是終無可言之日矣。嗚呼, 世之無士久矣, 非無士也, 士不得爲士也。夫士者, 四民之一, 而能首於三, 不農而食其粟, 不工而用其器, 不賈而資其財, 若是者, 豈無所事而然哉? 幼而講君臣父子之義, 修齊治平之道, 壯而欲行之也。是以, 不處于畎畝市肆之間, 而必處于學校, 學校者, 士之所藏而已, 近乎朝廷矣, 惟其如是也, 故朝廷有大事, 爲士者, 輒相率而陳章, 爲士者, 不以出位爲嫌, 在上者, 亦不以出位而言斥之, 自古然矣。一自太學生尹志述之死也, 凡以士爲名者, 莫不奔走號泣, 至欲毁冠裂裳, 入山而姑死, 自是厥後, 士不得爲士, 願爲農工商而不得矣。其他冠儒冠衣儒衣, 招朋挈類, 冒據於學校者, 皆不識君臣父子之義者也。若是者, 雖自謂曰, 吾士乎吾士乎, 人孰士之乎? 然則雖謂之世無士, 可也。目今聖人作, 而萬物覩, 群陰消而衆陽長, 向之不識君臣父子之義者, 自然縮退, 欲毁冠裂裳, 入山而枯死者, 庶幾復得而爲士矣。然臣等若以士自居, 入處學校, 則其色赧赧然有愧矣。若一向深藏, 不復一言, 則是自外於新化, 而今世永永無士矣。於是相與謀曰, 與其泯默而自外也, 無寧一言而決其去就, 遂于于然入來, 瀝盡苦心於尺寸之紙, 其情亦慼矣, 惟聖明, 垂察焉。嗚呼, 志述之死, 果何罪也? 蓋論諱親之義之不可用於紀述聖考盛德之文字而已, 非故暴揚辛巳事, 以傷我大行大王之心者也。夫聖考平生盛德, 不可勝述, 而惟辛巳處分, 十分正大, 可以俟百世不惑, 則爲聖考之誌, 而糢糊此事, 使聖考大處分, 無以垂示於後世可乎? 志述本意, 只欲不落莫於此而已。其言雖或過激, 其心則可質天地耳, 此胡大罪也, 而彼群凶, 本以名義之罪人, 凡於扶植名義之人, 視若私讎, 不殺不快, 於是最壽·眞儉, 首進凶言, 行進潝繼之, 末乃有逆鏡爲淊天之禍, 而志述, 遂不免焉。嗚呼, 衆口鑠金, 三言成虎, 安得不有十二月十二日之事乎? 夫以太學生論國家大事, 而以言獲罪, 至於正刑者, 三百年以來有之否乎? 又況不問本情, 不待結案者, 非關一人事而已, 其於祖宗朝典章何哉? 人固有一死, 彼志述, 固已含笑就刑矣, 獨可悲者, 自是厥後義理晦塞, 彝倫斁滅, 而人不得爲人矣。凡爲我聖母臣子者, 願隨志述之後, 而不可得焉, 嗚呼, 寧不悲哉, 寧不悲哉? 蓋志述者, 爲聖考爲聖母殺身不悔者也。構殺志述者, 貳於聖母, 而得罪於聖考者也。殿下若念及于此, 則志述, 寧至今有冤而莫之伸耶? 臣等伏聞殿下, 於向日爲宗社死者, 蓋已知其忠而伸其冤矣, 獨於志述無聞焉, 抑獨何哉? 彼志述, 捐七尺不些之軀, 命樹千古不泯之倫常 今日之伸與不伸, 何與於渠哉? 然而在朝家培養士氣之道, 宜不可使此人, 長爲抱冤之鬼也。且不伸志述, 則太學遂無士矣, 此關係豈小也哉? 伏乞聖明, 取覽當時所懷文字, 悉燭志述本來義理, 特示哀矜之意, 亟行伸暴之典, 仍命誅戮前後構陷志述者, 以正其欺蔽聖聰斁滅彝倫之罪, 以謝志述焉。臣等重入賢關, 顧曕左右, 其傍蓋有一區新祠焉, 問諸泮中, 父老咸曰, 此尹掌議所辦四賢祠也。臣等於是, 相顧飮泣, 益愧今日之士之不能若是也。昔我聖考, 知士論之爲國家元氣, 凡於章甫之疏, 其言善則嘉奬之如不勝, 言或不中, 未嘗以嚴辭摧折之, 只令退而讀書, 其所以作興多士者若是, 而猶恐其不能振, 乃命建陳東等祠於太學之傍, 其事雖未遑成就, 其意則已足以新一代之耳目矣。若志述者, 蓋亦因是而興起者也。自在弱冠, 已能率多士陳大疏, 蒙聖考之採納, 及夫庚子大喪之後, 又論服制事, 又論陳東等建祠事, 以成就聖考之成命, 若志述者, 可謂不負聖考矣。今其祠宇纔創, 而志述, 以身殉義, 以繼四賢之躅, 無乃上天故生志述, 以五其四者者乎? 志述死時, 其年二十六矣。以一箇眇然書生, 能辦有萬死無一生之言, 以明亙天地通古今之義, 其所樹立, 視古之四賢者, 豈遽下一級哉? 是以, 多士之瞻望四賢祠者, 莫不曰是志述, 自作其祠, 嗚呼, 其亦盛矣哉。臣等以是謀諸中外多士, 將以志述配食于四賢祠, 此豈私於志述哉? 蓋將明聖考培養士氣之盛意, 贊殿下明義理之新化也。伏乞聖明, 亟下明旨, 令有司得以從事焉。特賜一祭, 以慰九地之冤魂, 以樹四方之風聲然後, 旣晦之義理, 因是而可明, 將喪之斯文, 因是而可興, 而臣等始可以爲士矣。惟聖明, 留意焉。臣等無任悲憤慷慨激䀚祈懇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樹節表忠, 自古美事, 而尙靳一兪者, 意亦在焉故也。疏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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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년 을사(1725) 3월 6일(갑진) 맑음
01-03-06[32]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을 신원해 주고 사현(四賢)을 향사(享祀)하는 사당에 배식(配食)하도록 해 주기를 청하는 성균관 진사 강주우(姜柱宇) 등의 상소
성균관 진사 강주우(姜柱宇)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 5년 사이에 큰 재앙을 거듭 내렸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성이 돈독하고 우애가 지극하셨던 우리 전하께서 불행한 일을 거듭 겪으셨으니 묵은 슬픔과 새로운 애통함을 어떻게 스스로 억제하시겠습니까. 신들이 마음에 조금 괴로운 일이 있었지만 억눌러 드러내지 않은 지 여러 해인데 지금 성세(盛世)를 만나 어두워진 의리가 금방 밝아졌으며 잃어버린 사도(斯道)가 장차 다시 흥기할 것이니, 지금 말하지 않으면 말할 수 있을 때가 끝내 없을 것입니다.
아, 세상에 선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비라고 해서 모두 진정한 선비는 아닙니다. 선비는 사민(四民) 중 하나이지만 세 가지보다 위에 있으며 농사짓지 않고도 곡식을 먹고 공업(工業)을 하지 않고도 기물을 쓸 수 있으며 장사를 하지 않고도 재물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는 것이 어찌 하는 일이 없어서 그렇겠습니까. 어려서는 군신과 부자 사이의 의리와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도리를 배워서 익히며 장성해서는 그것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농토나 시장 사이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학교에 머무는데, 학교는 선비가 학업에 힘쓰는 곳일 뿐으로 조정 가까이에 있습니다.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조정에서 큰일이 있으면 선비가 곧바로 서로 이끌고 상소를 올리는데 선비는 본분을 벗어나서 말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윗사람 또한 본분을 벗어났다 해서 그 말을 배척하지 않았으니, 예부터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이 죽은 뒤부터는 선비로 이름하는 자로 달려가서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심지어 관(冠)을 부수고 옷을 찢고 산에 들어가 말라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일 이후로는 선비가 선비답지 못하게 되었지만, 농부나 공인이나 상인이 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타 유관(儒冠)을 쓰고 유생의 옷을 입고서 무리를 불러 모아서 학교를 무단으로 차지한 자들은 모두 군신과 부자의 의리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 ‘우리 선비여, 우리 선비여.’라고 말하더라도 사람들 중에 누가 그를 선비로 여기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 선비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성인(聖人)이 일어나 만물이 우러러보고 소인들이 사라지자 군자의 세력이 커져서 옛날 군신 간의 의리를 모르던 자들이 자연히 위축되어 물러갔으니, 관을 부수고 옷을 찢고 산에 들어가 말라 죽으려 했던 사람들이 아마 다시 선비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선비로 자처하고 학교에 들어가 머문다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질 것이며 계속 깊이 들어앉아서 다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성상의 새로운 정사에서 절로 외면당해서 이번 세상에 영영 선비 노릇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서로 모의하여 말하기를, ‘침묵을 지키다가 절로 외면당하느니 차라리 한마디 말이라도 하여 거취를 결정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줄줄이 들어와서 조그마한 종이에다 괴로운 심정을 모두 피력하였는데 그 정상(情狀)이 또한 딱하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살펴 주소서.
아, 윤지술이 죽게 된 것은 과연 무슨 죄였습니까.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로 논한다면 성고(聖考 숙종)의 융숭한 덕을 기술하는 글에 그 사실을 써서는 안 되니, 일부러 신사년(1701, 숙종27)의 일을 드러내서 우리 대행 대왕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성고께서 평생에 이루신 성대한 덕은 이루 다 쓸 수 없지만 신사년의 처분이 가장 공명정대하므로 먼 훗날에도 의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성고를 위한 지문(誌文)이 될 것인데, 이 사실을 모호하게 하여 성고의 대처분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윤지술의 본의는 다만 여기에서 실망스럽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므로 그의 말이 과격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천지신명에 맹세할 수 있으니, 이것이 어찌 큰 죄이겠습니까. 저 흉적들은 본래 명의(名義)의 죄인으로서, 명의를 수립한 사람들을 사사로운 원수처럼 여겨서 죽이지 않고서는 시원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최수(趙最壽)와 이진검(李眞儉)이 가장 먼저 흉악한 말을 올렸고 김행진(金行進)과 홍흡(洪潝)이 뒤를 잇고 마지막에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하늘에 닿는 큰 화를 만드니, 윤지술이 결국 죽음을 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이고 세 사람이 말하면 호랑이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어찌 신축년(1721, 경종1) 12월 12일의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태학생으로서 국가의 대사를 논하다가 말 때문에 죄를 얻어서 사형에 이른 사람이 국조(國朝) 300년 이래 있었습니까? 더구나 본의를 묻지 않고 결안(結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처형한 것은 한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일이 아니니, 조종조의 법에 비추어 어떠하겠습니까. 사람은 본래 한 번 죽는 법이고 저 윤지술은 진실로 웃음을 머금고 형장에 나아갔습니다. 다만 슬픈 것은 그 후에 의리가 막히고 윤리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모(聖母 인현왕후)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윤지술의 뒤를 따르기를 원하였지만 행하지 못했으니 아,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윤지술은 성고와 성모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서도 후회하지 않은 사람이니, 윤지술의 죄를 날조해서 죽인 자는 성모를 배반하고 성고에게 죄를 얻은 자입니다. 전하께서 이것을 생각하셨다면 윤지술이 어찌 지금까지 원통함이 있으면서도 신원되지 않은 일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는 지난날에 종사를 위해서 죽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충심을 아시고서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다고 하는데, 유독 윤지술에 대해서만은 그런 말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왜 그렇습니까? 저 윤지술은 7척의 작지 않은 몸을 버려서 천고에 없어지지 않을 윤리를 수립했으니 오늘날에 신원을 해 주든 해 주지 않든 그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조정에서 선비의 기상을 배양하는 도리로 볼 때에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길이 원한을 품은 귀신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윤지술을 신원해 주지 않으면 태학에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니, 이에 관계된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당시에 소회(所懷)를 말한 글을 가져다 보시고서 윤지술의 본의를 잘 헤아리시어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시고 속히 신원의 은전을 행해 주소서. 이어서 전후에 윤지술을 무함한 자들을 죽이도록 명하여 그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윤리를 무너뜨린 죄를 다스려 윤지술에게 답하소서.
신들이 성균관에 다시 들어와 주변을 돌아보니 그 옆에 하나의 새로운 사당이 있어서 반촌(泮村) 사람에게 물으니 부로(父老)들이 답하기를, ‘이것이 윤 장의(尹掌議)가 일으킨 사현(四賢)을 모시는 사당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이에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삼키면서 오늘날의 선비가 이처럼 하지 못하는 것을 더욱 부끄러워했습니다. 옛날에 우리 성고께서는 선비들의 논의가 국가의 원기(元氣)임을 아시고서 유생의 상소에 대해서는 그 말이 좋으면 칭찬하면서 마치 감당하지 못할 듯이 장려하였고, 말이 혹시 사리에 맞지 않더라도 준엄한 말로 꺾은 적이 없고 단지 물러가서 독서하도록 하였습니다. 선비들을 흥기시키기를 이처럼 하고서도 오히려 기상을 떨치지 못할까 두려워서 이내 태학 곁에 진동(陳東) 등의 사우를 세우도록 명하였으니, 그 일을 미처 성사시키지는 못했더라도 그 뜻은 한 시대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윤지술 같은 사람은 또한 이 일로 인하여 흥기한 사람이니, 약관(弱冠) 시절부터 능히 선비들을 거느리고 대규모 상소를 아뢰어 성고의 수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자년(1720, 숙종46)에 국상(國喪)이 있은 후에 또다시 복제(服制)에 관한 일을 논하고 또 진동 등을 향사하는 사우를 세우는 일을 논하여 성고께서 명하신 일을 성취했으니, 윤지술 같은 사람은 성고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사우가 막 창건되었는데 윤지술은 의리를 위해 몸 바쳐 죽어서 사현(四賢)의 발자취를 이었으니 하늘이 일부러 윤지술을 태어나게 해서 네 명의 현인을 다섯 명으로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윤지술은 죽을 당시에 나이가 26살이었습니다. 일개 미약한 서생(書生)으로서 ‘의리를 위해 만 번 죽어도 구차하게 한 번 살지는 않겠다’는 말을 능히 실천하여 천지고금에 두루 통하는 의리를 밝혔으니 그가 수립한 것이 옛날의 사현에 비하여 어찌 갑자기 한 단계 내려가겠습니까. 이러므로 사현의 사당을 바라보는 선비들은 ‘이는 윤지술이 자신의 사우를 스스로 만들었다.’라고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아, 그 또한 성대합니다. 신들이 이 때문에 중외의 선비들과 도모하여 윤지술을 사현의 사당에 배식(配食)하려 하는데, 이 어찌 윤지술에게 사심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성고께서 선비들의 기상을 배양하시던 훌륭한 뜻을 밝히고 전하께서 의리를 밝히는 새로운 정사를 도우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밝은 유지(諭旨)를 내려 유사로 하여금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시고, 특별히 제사를 내려서 구천의 원혼을 위로하시고 세상의 기풍을 세우소서. 그런 연후에야 이미 어두워진 의리가 이를 계기로 밝아질 수 있고 사라지려고 하는 사도(斯道)가 이를 계기로 흥기될 수 있어 신들이 비로소 선비 노릇을 할 수 있으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여 주소서. 신들은 비분강개하고 매우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절의(節義)를 세우고 충성을 드러내는 것은 예부터 아름다운 일인데도 아직 표창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생각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상소에 연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
[주-D001] 그 사실 : 1701년(숙종27) 10월에,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게 하였다는 혐의로 희빈 장씨가 사사된 일을 말한다.[주-D002] 신축년 …… 일 : 1721년(경종1) 12월 12일에 윤지술(尹志述)에게 정형(正刑)을 행하라는 전교를 내린 것을 말한다. 윤지술은 같은 달 17일에 처형되었다.[주-D003] 사현(四賢)을 모시는 사당 : 사현은 진(晉)의 태학생 동양(董養), 당(唐)의 태학생 하번(何蕃), 송의 태학생 진동(陳東)ㆍ구양철(歐陽澈)을 말한다. 1725년(영조1) 문묘(文廟)의 동쪽에 사현을 제향하는 숭절사(崇節祠)를 세우고, 같은 해 11월 윤지술을 배향하도록 하였다. 숭절사는 1764년에 사현사(四賢祠)로 이름이 바뀌어 사액되었다. 《국역 영조실록 1년 3월 3일》[주-D004] 진동(陳東) 등의 사우 : 진동은 송(宋)의 태학생(太學生)으로, 북송(北宋) 흠종(欽宗) 때 금(金)나라가 침략하여 척화론의 중심인물인 이강(李綱)이 파직당하자 유생 수만 명을 이끌고 상서(上書)하여 복직하게 하였으며,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에는 이강이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자 또 글을 올려 유임을 청하였다가 사형당하였다. 《宋史 卷455 忠義列傳 陳東》 1683년(숙종9)에 진(晉)의 태학생 동양(董養), 당(唐)의 태학생 하번(何蕃), 송의 태학생 진동ㆍ구양철(歐陽澈)을 향사하는 사우(祠宇)를 세울 것을 논의하여 1725년(영조1)에 서울 문묘(文廟)의 동쪽에 숭절사(崇節祠)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年 3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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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2년 무술(1778) 2월 2일(계사)
02-02-02[06] 사학 유생(四學儒生) 김덕행(金德行) 등이 상소하여 증(贈) 지평(持平)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에 다시 배향할 것을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기강을 바로잡고 인륜을 세우는 것은 신하의 대절(大節)이고, 의(義)를 장려하고 충(忠)을 기리는 것은 국가의 급선무입니다. 고 증 지평 신 윤지술은 일개 미천한 선비로서 영원히 바뀌지 않는 의론을 잡아 충정을 진술하고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인륜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게 되었고 사기(士氣)가 이로 말미암아 꺾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수립한 것이 저와 같이 뛰어나기 때문에 선대왕께서 즉위하신 원년에 특별히 선비들의 청을 윤허하시어 먼저 그를 신원(伸冤)하시고 또 사현사에 배향하셨는데, 불행히도 정미년(1727, 영조3)에 출향(黜享)한 일이 간흉(奸凶)이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고 해칠 때에 있었으니, 아, 소인이 정론(正論)을 원수로 여긴 것이 심합니다. 앞에 이미 무함한데다 뒤에 다시 시기하고 배척하니, 불행한 때를 당한 충신 열사(忠臣烈士)들 중에 어찌 윤지술의 경우와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윤지술이 한번 출향되어 회복되지 못한 지가 지금 5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충(精忠)과 의절(毅節)이 일월과 나란히 광채를 다툴 만하니, 출향되거나 복향(復享)되거나 간에 진실로 그에게는 이로울 것도 해로울 것도 없겠지만, 조정의 칭찬하고 장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사현사는 바로 윤지술이 마련한 것입니다. 당시의 충절은 진실로 함께 올라서 같이 제향을 받을 수 있으니, 지금 신들의 복향하자는 이 청은 또한 늦었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사현사에 다시 배향하자는 청을 따라 주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주-D001] 윤지술은 …… 여겼으니 : 경종 즉위년에 성균관의 장의(掌議)로 있던 윤지술이, 당시 숙종의 지문(誌文) 중에 숙종이 신사년에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사사(賜死)한 내용과, 병신년에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의 선정(先正) 호칭을 금한 내용 등이 누락되는 등, 편파적으로 기록되었다고 소회를 올린 일로 인하여 사론이 격발되어 경종 5년에 죽게 된 일을 가리킨다. 《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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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제76권 / 순조조 1 / 2년(임술, 1802)
○ 9월. 고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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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순조 5년 을축(1805) 10월 28일(정미)
05-10-28[06] 원릉(元陵)에 행행할 때 거둔 상언(上言) 11도(度)를 이조에 판하하였다.
○ 이조가 아뢰기를,
“동부(東部)의 유학(幼學) 이덕수(李德秀) 등의 상언에 ‘증(贈) 훈련원 정(訓鍊院正) 정득열(鄭得說)은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재주와 용맹을 갖춘 사람으로 선발되어 사천 현감(泗川縣監)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진주성(晉州城) 동쪽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증 지평 정택뢰(鄭澤雷)는 광해군(光海君)이 서궁(西宮)의 변고를 일으켰을 때 항장(抗章)을 올려 대비(大妃)를 폐위해서는 안 되고 이이첨(李爾瞻), 정조(鄭造), 윤인(尹訒)은 참형(斬刑)에 처해야 한다고 극언하였다가 남해(南海)에 찬배(竄配)되어 죽었습니다. 정택뢰의 처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3년간 토실(土室)에서 지내고서 결국 남편을 따라 죽자 그의 아들 정천세(鄭千世)도 날마다 목 놓아 울다 10일도 못 되어 과연 요절하였습니다. 삼대에 걸쳐 충효를 하고 모두 몸 바쳐 죽었으니 특별히 판하하여, 정득열은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하사하며 진주(晉州)의 단향(壇享)하는 반열에 올리라고 명하고 정택뢰도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하사하며 태학(太學)의 사현사(四賢祠)에 배식(配食)하라고 명하며 정씨 모자는 특별히 정려(旌閭)하는 은전을 시행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정득열이 온 힘을 다해 싸우다 순국한 것은 참으로 여러 선비가 말한 것과 같은데 죽음을 애도하며 추증한 관직이 낮습니다. 그의 아들 정택뢰가 올린 윤리를 부지하는 상소 한 통은 진소양(陳少陽)에게 부끄럽지 않은데 성대하게 포장(褒獎)하지 않아 공의(公議)가 오랫동안 펼쳐지지 못하였습니다. 정씨 모자의 굳은 절개와 지극한 행실도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니 추증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상께서 재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호를 하사하는 문제는 대신과 논의하여 처리하고, 단향하고 사향(祠享)하고 정려하는 문제는 해당 조로 하여금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