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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마당 2015. 7. 16. 18:19
尙州의 書院 名稱 考察
- 現存하는 書院 建物을 中心으로 -
聞慶大學校 招聘敎授 權世煥
目 次
제1장. 書院 ……………………………………………………………………………… 2
1. 書院 본래의 기능 …………………………………………………………………… 2
2. 書院의 교육적 역할 ………………………………………………………………… 2
제2장. 尙州에 現存하는 書院들의 명칭 고찰 ……………………………… 5
1. 道南書院 ……………………………………………………………………………… 5
2. 興巖書院 ……………………………………………………………………………… 7
3. 玉洞書院 ……………………………………………………………………………… 9
4. 玉成書院 ……………………………………………………………………………… 12
5. 孝谷書院 ……………………………………………………………………………… 13
6. 鳳山書院 ……………………………………………………………………………… 14
7. 臨湖書院 ……………………………………………………………………………… 16
8. 涑水書院 ……………………………………………………………………………… 17
9. 淵嶽書院 ……………………………………………………………………………… 18
10. 淸巖書院 ……………………………………………………………………………… 19
11. 洛嵓書院 ……………………………………………………………………………… 21
12. 近嵒書院 ……………………………………………………………………………… 22
13. 西山書院 ……………………………………………………………………………… 23
14. 鳳崗書院 ……………………………………………………………………………… 25
15. 道安書院 ……………………………………………………………………………… 26
제3장. 現存하는 書院들의 役割 ………………………………………………… 27
참고문헌 ………………………………………………………………………………… 30
제1장. 書院
1. 書院 본래의 기능
書院의 주된 기능은 先賢에 대한 祭祀를 모시고 講學을 통해 儒生들을 敎育하는 것이다. 또한 書院은 향촌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향촌자치기구로서의 기능도 하였으며, 지역의 도서관 기능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祭祀와 敎育에 비해 그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서원의 祠廟에는 성리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을 配享하였는데, 초기에는 安珦·崔沖·鄭夢周 등을 모셨다. 이후 사림으로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李滉·曺植·李珥 등을 配享하였다.
書院의 교육은 성리학을 학문적 기초로 삼고 있다. 따라서 書院에서는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여 격조 높은 講義와 자유로운 討論이 이루어졌다.
교육의 목적은 크게 聖賢을 본받아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法聖賢과 능력 있는 관리를 양성하는 養吏의 두 가지였으며 이는 교육내용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즉, 교과목은 기본적으로 사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성리학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과거의 시험과목이었던 史記와 詞章, 製述과 習字 등의 敎育도 함께 실시하였다. 또한 실천적 덕목으로 儒敎儀禮도 익혔다.
2. 書院의 교육적 역할
서원의 교육은 자체적으로 제정한 院規에 따랐는데,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특히 李珥가 선조 15년(1582) 왕명을 받아 저술한 학생수양의 기본서인 「學校模範」서문에“하늘이 만민을 낳으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天賦의 덕을 누구나 고루 받았건만 師道가 廢絶하여 敎化가 밝지 못하므로 인하여, 振起하고 作成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비의 풍습이 경박하여지고, 양심이 마비되어 헛된 공명만 숭상하고 실행을 힘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로는 朝廷에 인재가 부족하여 벼슬자리에 虛點이 많고, 아래로는 풍속이 날로 부패하여 倫紀가 점차 문란하여지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장차 舊習을 일소하고 士風을 크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선비를 선택하고 敎化하는 道를 다하고자 聖賢의 가르침을 본받아 「學校模範」을 만들어,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몸가짐과 일해 나가는 법규를 정하였으니, 모두 16조로 되어 있다. 제자 된 자는 마땅히 遵行할 것이요, 스승된 자도 이것으로써 먼저 자신을 바로잡아 師表의 道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16조의 내용은 立志(학문을 갈고 닦을 뜻을 세우고 목표를 바르게 한다), 檢身(선비로서의 몸가짐과 행위를 점검하고 단속한다), 讀書(글을 읽을 때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한다), 愼言(말버릇을 신중하게 하여 예법에 유익한 말을 가려서 한다), 存心(안으로 마음을 다잡아 외물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한다), 事親(부모를 효심으로 섬긴다), 師事(스승을 도리를 다하여 섬긴다), 擇友(벗을 가려서 사귀고 교우의 예를 다한다), 居家(집안을 윤리에 어긋남이 없이 잘 다스려야 한다), 接人(사람을 대함에 있어 예의를 준수한다), 應科(뜻있는 선비가 몰두할 것은 아니나 과거를 응시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공을 이루어야 하고 시간을 허비하여서는 안 된다), 守義(利와 義를 잘 분별하여 義를 지킨다), 尙忠(충직함과 순후함과 기개와 절조가 하나가 되어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篤敬(공경을 돈독히 하여 그침이 없어야 한다), 居學(학교에서의 생활에서 강령에 어긋남이 없이 근학에 힘쓴다), 讀法(글을 읽는 정해진 방법(혹은 과정)에 따라 공부에 힘쓴다) 등이다. 이 책은 유교정신에 입각한 당시의 교육관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學校模範 제11장의 應擧條에는 應擧란 科擧를 이르며, “科擧의 及第는 비록 뜻있는 선비의 애써서 구할 바는 아니나, 요즈음에는 그것이 벼슬로 나가는 길이 되었으니, 만일 道學에 온 마음을 쏟아서, 나아가고 물러남을 예의로 하는 이는 科擧를 숭상할 까닭이 없지마는 국가의 부름으로 科擧에 응하게 되면 또한 마땅히 성심으로 공을 이룰 것이요, 날짜만 낭비하여서는 안 된다. -중략- 科擧 공부를 소홀히 하여 한 갓 세월만 보내고, 학문과 科擧 공부 중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 매우 경계할 점이다.”(應擧謂科第 雖非志士所汲汲 ∼ 學問科業兩無所成者多矣 最可爲戒)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書院 공부의 주안점은 순수 학문의 궁구에 있으며, 선비로서 科擧 공부 또한 현실적인 문제로서 당시 사림에게 있어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일차적인 공부는 道學이고, 다음으로 科擧에 응시하는데 필요한 詞章學 또한 중요한 것이니, 이 두 가지 공부가 대종을 이루었다.
또한 伊山書院 院規 1장에 “儒生이 독서하는 데는 四書五經을 本原으로 삼고, 小學, 家禮를 門戶로 삼아, 나라의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을 좇고, 聖賢의 친절한 교훈을 잘 지켜 만 가지 착한 것이 본래 내게 갖춘 것임을 알고, 옛 道義가 오늘날에도 실천될 수 있음을 믿는다. 모두 다 힘써 몸으로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며, 體를 밝히고 用을 적합하게 하는 학문을 할 것이며, 諸史子集, 文章, 과거의 업도 또한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옆으로 널리 통하도록 힘쓸 것이나, 마땅히 內外, 本末, 輕重, 緩急의 차례를 알아서 항상 스스로 격려하여 타락하지 않도록 하고, 간사하고 요망하여 음탕한 글을 院內에 들이어 눈에 가까이 하여 道를 어지럽히고 그 뜻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諸生讀書以四書五經爲本原∼近眼以亂道惑志)라고 하여 四書五經이 本原이며, 小學과 家禮를 門戶로 하며, 나라에서 권장하는 科擧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 여러 가지 학문에 대한 섭렵을 하여야 하나, 근본을 잃을까하여 경계하도록 하였다.
교육방법으로는 계절에 따라 교과를 달리하는 특이한 교육방법도 있었다. 봄·겨울에는 四書五經을, 여름·가을에는 史學과 諸子, 詩文集을 독서하도록 하였다. 이는 더운 여름에 經書를 자세히 연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이는 계절과 교과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書院의 입학자격은 시대별·지역별 혹은 書院別로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대체로 입원의 자격은 별로 까다롭지 않았고, 生員·進士를 대상으로 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학생의 정원은 처음에는 별다른 규제가 없었으나, 書院에 따라 별도로 운영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書院 본연의 교육방식은 四書三經과 周易 등을 근간으로 한 사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實踐 德目, 儒敎崇尙 儀禮를 체계적으로 익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鄕村社會라는 무대가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제2장. 尙州에 現存하는 書院들의 名稱 考察
1. 道南書院
상주시 도남동 175번지
❖ 道南書院의 淵源
道南書院은 1605년(선조38) 상주의 사림 宋亮 등 8인이 서원 건립을 추진하여 1606년(선조39)에 書院名을 승인받고 건립하여 國朝五賢인 鄭夢周(圃隱), 金宏弼(寒暄堂), 鄭汝昌(一蠹,) 李彦迪(晦齋), 李滉(退溪)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그 후 盧守愼(穌齋), 柳成龍 (西厓), 鄭經世(愚伏) 선생을 追配하였고, 1871년(고종8)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92년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05년에 전체적인 복원을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도남서원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李埈(蒼石)을 追配하여 九賢이 奉亨되었다.
道南이라는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宋史楊時傳에 顥曰 送之曰 吾道將行於南矣라고 하여 宋의 程顥(程子)가 남쪽으로 가는 楊時를 보내면서 우리의 道가 남쪽에서 성행하리라고 하였다.
道南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뒷날 南宋의 李侗, 朱熹 등의 학자들이 楊時를 程氏正宗으로 받들어 道南이라는 말이 생겼으며, 蒼石 李埈은 贈巡察使 鄭公文에서 吾道南矣喜統緖之有歸顧所係之‧‧‧‧‧라 하여 ‘오도가 남에 있고 도의 통서는 이곳으로 이어지며’라고 하여 道南書院이 조선성리학의 정맥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配享 先賢(9현)
❒ 鄭夢周(圃隱)-1337(충숙왕 복위6)∼1392(공양왕4)
❒ 金宏弼(寒暄堂)-1454(단종2)∼1504(연산군10)
❒ 鄭汝昌(一蠹)-1450(세종32)∼1504(연산군10)
❒ 李彦迪(晦齋)-1491(성종22)∼1553(명종8)
❒ 李滉(退溪)-1501(연산군7)∼1570(선조4)
❒ 盧守愼(穌齋)-1515(중종10)∼1590(선조23)
❒ 柳成龍(西厓)-1542(중종37)∼1607(선조40)
❒ 鄭經世(愚伏)-1563(명종18)∼1633(인조11)
❒ 李埈(蒼石)-1560(명종15)∼1635(인조13)
❖ 建物 名稱
건물의 명칭을 살펴보면 먼저 도를 얻기 위함(入德)에 몸과 마음의 자세를 바르게(靜虛)하여서 오직 전심함으로써(一貫) 비로소 조선유학의 정맥(道正)과 만날 수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 道正祠 : 道也者 不可須臾離也(中庸)
正也者 正中平直(中庸)
剛健中正(易卦辭)
❒ 內三門 : 中門, 東夾門, 西夾門
내삼문은 廟庭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삼간 솟을대문이며, 제향공간의 정문으로 그 안쪽이 성역이 되므로 신과 사람이 만난다는 뜻으로‘내신문(內神門)’이라고도 한다.
❒ 一貫堂 : 하나의 理致로 모든 일을 꿰뚫는다는 뜻이다.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論語 里仁篇)
❒ 靜虛樓 :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없음을 靜虛라고 한다.
❒ 四行堂 : 四計 즉 四敎, 四經, 四端, 四禮, 四勿을 의미한다. 그리고 四行은 孝悌忠信의 4가지 德行을 말하기도 한다.
❒ 遜學齌(東齋/敬齋) :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고 꾸준하게 힘쓴다는 뜻이다.
惟學遜志 務時敏 厥脩 乃來 允懷于玆 道積于厥躬 (商書說命下 4章)
❒ 敏求齋(西齋/義齋) : 힘써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이다.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而求之者也(論語 述而篇)
❒ 典祀廳 : 周代에 春官에 속하여 祭祀를 맡아보던 官廳으로 書院享祀時 祭物을 봉치하여 두는 곳이다.
❒ 外三門(入德門) : 人品과 德性을 닦아 聖人의 경지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君子之道 淡以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中庸)
❒ 藏板閣 : 木板에 글자를 새긴 印刷用 木板을 간직한 곳이다.
❒ 風雩壇 : 낙동강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諷詠을 하는 자리이다. 風雩壇이 1722년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복원하지 못했다.
❒ 詠歸門 : 詩를 읊으며 돌아오는 문이라는 뜻이다.
曾點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論語 先進篇)
❖ 기타
❒ 建院通文
❒ 巡察使鄭公文
❒ 道正祠上樑文
❒ 一貫堂上樑文
❒ 白鹿洞學規(道南書院學規)
❒ 道院古事
❒ 道院約條
2. 興巖書院
상주시 연원동 769번지
❖ 興巖書院의 淵源
1702년 건립되었으며 영남지방 最初의 老論系列書院이며, 숙종의 親筆賜額書院이다. 御筆은 碑閣을 세워 오늘에 보존하고 있다.
1705년(숙종31) 太學에 거동하여 先聖을 배알하고, 문과·무과를 실시해 인재를 뽑고, 下敎하기를 “箕子가 東方에 封해지자 八條의 가르침을 펼쳐 남겨진 교화가 수천 년 이래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일찍이 近侍를 보내 그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였지만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또 承旨를 보내 제사지내게 하고, 별도로 守護를 더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종은 또 손수 華陽·興巖 두 書院의 額號를 써서 걸게 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人主가 賢人을 존경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다면 거의 선비의 趨向을 바로잡고 邪說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 이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하였다.
화양은 곧 송시열을 俎豆하는 곳 이고, 興巖은 곧 宋浚吉을 俎豆하는 곳이다. 서인계의 유림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숙종 후반기에 여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興巖書院은 상주시의 서북편에서 동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淵嶽山의 한줄기가 내려와 시내를 바라보는 형국으로, 風水學上 蜈蚣入地穴이라고 한다.
興巖書院은 同春堂 宋浚吉 선생의 獨書院으로 고종 연간 서원 毁撤令에도 毁撤되지 않고, 전국에 남은 47개 서원중의 하나로, 1985년 10월 15일 지방문화제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이 때 경상도에 남은 書院이 9개로 순흥 소수서원, 현풍 도동서원, 선산 금오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서악서원, 경주 옥산서원, 예안 도산서원, 안동 병산서원, 상주 흥암서원이고, 祠는 4개로 동래 충렬사, 고성 충렬사, 거창 포충사, 진주 창렬사 등이다.
특히 興巖書院은 초기 학교설립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상주고등학교, 남산중학교가 이곳에서 발족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겨갔다.
우리 尙州의 書院 중에는 巖(嵒, 嵓)자를 사용한 書院(興巖書院, 淸巖書院, 洛嵓書院, 近嵒書院)이 많이 있다.
書院의 명칭에 巖字를 사용한 연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詩傳에 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이라고 하였다. 즉, 巖字는 書院에 配享된 선현들을 모든 백성들이 우러러 본다는 뜻에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 配享 先賢
❒ 宋浚吉(同春堂)-1606(선조39)∼1672(현종13)
❖ 建物 名稱
❒ 興巖祠 : 同春堂 宋浚吉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進修堂 : 進修堂의 進은 德으로 나아감을 뜻하고 修는 자신을 수양함을 뜻하는 것으로 興巖書院의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進修堂은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敬齋 : 恭敬한다는 뜻으로 論語 子路篇에 居處恭 執事敬을 뜻하며, 儒生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 義齋 : 正義롭다는 뜻으로 論語 述而篇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이란 뜻과 상통하며,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 御筆閣 : 1716년 숙종이 하사한 御書를 보관하기 위하여 세운 御筆碑閣이다.
❒ 藏板閣 : 도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 기타
❒ 御筆碑陰記
❒ 書院節目
3. 玉洞書院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번지
❖ 玉洞書院의 淵源
1518년(중종13년)에 예조참판과 강원도순찰사를 역임한 黃孟獻과 弘文館修撰인 黃孝獻 형제가 백화산 입구의 수봉리 신덕촌에 방촌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독서하던 黌堂(백화서당)이 玉洞書院의 모태다. 1580년(선조13)에 방촌 선생의 影堂을 건립하고 춘추향사를 봉행하여 오다가 1714(숙종40)년 沙西 全湜 선생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陞院하였으며, 1715년(숙종41)에 신덕리에 있던 방촌 선생의 영당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고 1746년(영조22)에 畜翁 黃孝獻, 槃澗 黃紐 선생을 추배하였다.
玉洞書院의 玉洞은 神仙이 산다는 뜻으로 白居易送仙翁詩에 晴眺五老峰 玉洞多神仙이라 하였듯이 玉洞書院 景觀이 白玉洞 같다는 의미이며, 임금께서 사액을 내릴 때 본 書院의 이름을 白玉洞에 근원을 두고 玉洞이라 명하셨다.
또한 玉洞書院의 堂과 齋, 門樓의 명칭은 立齋 鄭宗魯가 지었으며, 玉洞書院堂齋及水石命名記에서 立齋는 서원과 그 동네는 이미 모든 것이 玉으로 이름을 지었으니 나머지도 이러한 의미를 고려하여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무릇 선생의 덕업과 그 공을 만약 사물에 견주어 본다면 江河山嶽일 뿐이다. 비록 연성의 보배와 조승의 보배를 가지고도 만분의 일도 비유하기가 어려운즉 지금 이 玉으로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리라고 하였다.
❖ 配享 先賢
❒ 黃喜(厖村)-1363(공민왕 12)∼1452(문종 2)
❒ 全湜(沙西)-1563(명종 18)∼1642(인조 20)
❒ 黃孝獻(畜翁)-1491(성종 22)∼1532(중종 27)
❒ 黃紐(槃澗)-1578(선조 11)∼1626(인조 4)
❖ 建物 名稱
❒ 景德祠 : 景德祠는 厖村, 沙西, 畜翁, 槃澗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방촌 선생의 영정 모사본이 함께 모셔져 있는 곳으로, 景은 우러러 봄, 즉 先賢의 德을 仰慕하는 뜻이다. (金史 熙宗紀의 萬世慕仰)
❒ 內三門 : 廟庭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삼간 솟을대문이다.
❒ 蘊輝堂 : 立齋 鄭宗魯의 玉洞書院堂齋及水石命名記에 의하면 옛날 사람들은 모두가 군자의 덕을 가지고 玉에다 비유하고, 道를 칭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였다. 본 書院에 배위된 여러분들이 규장처럼 아름다운 명망이 있으니 그 빛나는 자질과 장쾌한 본성은 참으로 명당에 오르고 청조에 나아간 사람들과 견주어 그 아름다움이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 堂을 蘊輝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立齋 鄭宗魯는 玉洞書院堂齋及水石命名記에서 우리 옥동서원의 선비들이 마땅히 이름을 붙인 것을 보고 그 의미를 생각하여 蘊輝堂에 올라가서는 즉 옛 군자들이 睟面盎背한 것은 仁義禮智가 마음에 근본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斲露齋와 琢章齋에 기거할 때는 致思의 공으로 하여금 궁구하기를 지극히 깊게 하여 반드시 그 이치를 얻어서 마치 萬重의 돌을 깎아서 良玉을 얻는 것과 같게 함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 斲露齋 : 齋의 동쪽은 斲露라고 했는데 이는 돌을 깎아 옥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 琢章齋 : 齋의 서쪽을 琢章이라고 했는데 아로새긴 그 문채 즉 追琢其章의 의미를 취하였다.
❒ 淸越樓 : 樓를 淸越이라 한 것은 옥의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다는 것으로 ‘길러준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淸越은 맑고 깨끗하여 일상의 경지를 뛰어 넘는다는 의미이다.
또 立齋 鄭宗魯의 玉洞書院堂齋及水石命名記에서 스스로 수련하는 노력에 있어서는 맹렬하게 반성하고 통렬하게 다스려서 반드시 그 선을 회복하여 마치 수많은 양의 玉을 갈고 닦아서 좋은 그릇을 이루는 것과 같게 해야 할 뿐이다. 先哲의 빛나는 업적을 우러러 제대로 알고 실천해야한다.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은 진짜로 보배를 품고 있는 사람이 마음속에 쌓이고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은 潤澤이고 縝密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玉에서 따 온 것이다.
❒ 懷寶門 : 懷寶는 藏器以待의 의미를 취했다.
❒ 縝密寮 : 樓의 왼쪽 방으로 玉의 의미를 취했다.
❒ 潤澤寮 : 樓의 오른쪽 방으로 玉의 의미를 취했다.
❒ 典祀廳 : 周代에 春官에 속하여 祭祀를 맡아보던 官廳으로 書院享祀時 祭物을 봉치하여 두는 곳이다.
❒ 白玉亭 : 玉洞書院의 부속 건물로서 山頂形 정자이다. 정자가 위치한 정상은 마치 백옥을 모은 듯 아름답다하여 이름을 白玉亭이라고 지었다.
❖ 기타
❒ 書院 陞院時 通文
❒ 正宗大王賜祭文
❒ 廟宇上樑文
❒ 玉洞書院重修記
4. 玉成書院
상주시 외남면 신상리 129
❖ 玉成書院의 淵源
玉成書院은 靈川子 申潛 목사가 세운 18개소의 서당 가운데 하나인 首陽書堂이 그 모태로 하여 승원하여 書院이 되었다. 1633년 蘭溪 金德培 선생과 靈川子 申潛 선생을 배향하고 院號를 玉成으로 정하였다. 玉成은 유생들이 學文과 德을 갈고 다듬기를 玉을 갈고 다듬듯 하라는 뜻이 있다.
또한 처음 玉成書院이 있던 곳은 西山의 북편인 지금의 외남면 구서리의 玉峰 아래 있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書院의 이름을 玉成이라 한 것은 書院 뒷산의 玉峰에 유래하였다고도 짐작된다.
이 書院은 지역의 현안문제를 협의하는 장소로 가장 많이 이용되었으며, 회합에 의한 결과물인 결정통문이 가장 많이 작성된 書院이기도 하다.
❖ 配享 先賢
❒ 金得培(蘭溪)-1312(충선왕4)∼1362(공민왕11)
❒ 申潛(靈川子)-1491(성종22)∼1554(명종9)
❒ 金範(后溪)-1512(중종7)∼1566(명종21)
❒ 李㙉(月澗)-1558(명종13)∼1648(인조26)
❒ 李埈(蒼石)-1560(명종15)∼1635(인조13)
❖ 建物 名稱
❒ 景賢祠 : 景은 우러러봄이니 先賢의 德을 仰慕하는 뜻이다. (金史 熙宗紀의 萬世慕仰)
❒ 明倫堂 : 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성균관이나 지방의 향교에 부설되어 유학을 강학하던 강당이다. 孟子의 ‘滕文公篇’의하면‘학교를 세워 교육의 행함은 모든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또한 명륜당은 고전정신을 북돋워 새로운 역사 창조의 바탕을 마련한 곳이며, 사회정의를 부식하고 교화하는 근원(首善之地)이 되었다. 따라서 退溪는 學校는 風化之原이요 首善之地라고 하였다. 즉, 학교는 교화의 근원이요 모범을 보이는 곳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書院은 前學後廟의 구조로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다.
❖ 기타
❒ 兩先生祠記
❒ 玉成史蹟後
❒ 慕賢契 序文
5. 孝谷書院
상주시 공성면 용신리(절골) 324-1번지
❖ 孝谷書院의 淵源
愚谷 宋亮 선생을 배향한 世德祠에서 출발하여 서원으로 陞院한 서원이다. 서원을 처음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예전에 오래 되었다. 上洛은 예로부터 문헌이 왕성한 지방으로상주 남쪽에 예전에 孝谷書院이 있었으나 지난 숙종대왕 을축년에 본주의 사람들이 愚谷 宋亮 선생의 사당을 선생이 사시는 곳에 세웠으니, 마을 이름이 孝谷인 것은 선생이 나라가 인정한 효자인 까닭이다.
따라서 서원의 이름을 孝谷書院이라고 한 연유다. 孝谷書院은 옮기기를 세 번이나 하였으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또한 愚谷 선생은 鄕風刷新과 興學育英에 앞장서셨으며, 존현육영의 미덕을 높이려 道南書院을 창설할 때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유교의 이념을 몸소 행한 孝忠의 표본이라고 하겠다.
❖ 配享 先賢
❒ 金沖(西臺)-1513(중종8)∼1572(선조5)
❒ 宋亮(愚谷)-1534(중종20)∼1618(광해군10)
❒ 高仁繼(月峯)-1594(명종19)∼1647(인조25)
❒ 金光斗(一黙齋)-1562(명종17)∼1608(선조41)
❖ 建物 名稱
❒ 崇德祠 : 崇은 높이 떠받든다는 뜻이니 先賢의 덕을 높이 받든다는 뜻이다. 禮記 王制篇에 上賢以崇德이라 하였다.
❒ 廟庭門 : 묘정출입문이다.
❒ 孝谷講堂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기타
❒ 移建上樑文
❒ 孝谷講堂重建記
6. 鳳山書院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584
❖ 鳳山書院의 淵源
鳳山書院은 申潛 목사가 세운 鳳山書堂으로 이곳은 소재 선생이 생전에 지역 유생들을 위하여 강학하던 곳이었다. 1688년(숙종14) 사당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강당을 건립하였으며, 1708년(숙종34)에 穌齋 盧守愼 선생을 主享으로 예조의 승인을 얻어 書堂에서 書院으로 陞院하여 一松 沈喜壽, 板谷 成允諧 두 분을 배향하였으며, 그 후 省克堂 金弘微, 頤齋(梅湖) 曺友仁, 東園 丁好善, 白華齋 黃翼再의 네 분을 추배하였다.
❖ 配享 先賢
❒ 盧守愼(穌齋)-1515(중종10)∼1590(선조23)
❒ 沈喜壽(一松)-1548(명종3)∼1622(광해군14)
❒ 成允諧(板谷)-(선조시대의 사람)
❒ 金弘微(省克堂)-1558(명종13)∼1648(인조26)
❒ 曺友仁(頤齋)-1561(명종16)∼1625(인조3)
❒ 丁好善(東園)-1571(선조4)∼1632(인조10)
❒ 黃翼再(白華齋)-1682(숙종8)∼1747(영조23)
❖ 建物 名稱
❒ 景賢廟 : 景은 우러러봄이니 先賢의 德을 仰慕하는 뜻이다. (金史 熙宗紀의 萬世慕仰)
❒ 廟庭門(三門) : 묘정출입문이다.
❒ 鳳山講堂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기타
❒ 鳳山書院凡例 一冊
❒ 鳳山書院明倫堂重修日記 一冊
❒ 鳳山書院講堂重修日記
❒ 五賢(宋朝) 尊慕稧帖 一冊, 五賢(宋朝) 尊慕詩帖 一冊
7. 臨湖書院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화평) 377
❖ 臨湖書院의 淵源
臨湖書院은 1590년(선조23)에 함창현 나한리 입암산 아래에 강당을 건립하고 院號를 儉巖이라 정하였으나 배향할 선현을 찾지 못하였다가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후 1691년(숙종17)에 공갈못이 바라보이던 城嶽書堂 자리인 공검면 역곡리에 건립하고 院號를 臨湖라 하였으며, 書院으로서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훼철되고 난 후 1989년 함창읍 신흥리 화평마을의 현재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臨湖書院은 원래 삼한시대에 만들어진 광활한 인공호수를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던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이름 그대로 공갈못을 바라보고 있어 臨湖書院이라고 하였다.
❖ 配享 先賢
❒ 表沿末(藍溪)-1431(세종13)∼1498(연산군4)
❒ 洪貴達(虛白亭)-1438(세종20)∼1504(연산군10)
❒ 蔡壽(懶齋)-1449(세종31)∼1515(중종10)
❒ 權達手(桐溪)-1469(예종1)∼1504(연산군10)
❒ 蔡無逸(休巖)-1496(연산군2)∼1556(명종11)
❖ 建物 名稱
❒ 景賢祠 : 景은 우러러봄이니 先賢의 德을 仰慕하는 뜻이다. (金史 熙宗紀의 萬世慕仰)
❒ 臨湖講堂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外三門 : 서원을 출입하는 문으로 평대문이다.(바깥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을 원래 외삼문이라고 한다.)
❖ 기타
❒ 建院事蹟
❒ 臨湖書院 移建記
8. 涑水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주속길 116-6(속암리 78)
❖ 涑水書院의 淵源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목민관인 愚齋 孫仲暾에 대한 선정비와 함께 단밀면민들이 세운 生祠堂이 본 서원의 효시이며, 이 生祠堂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전국에서 처음 세워진 사당으로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었다. 이후 1656년(효종7) 생사당을 복원하면서 사우의 이름을 景賢祠라 하였다. 이후 1703년(숙종29) 서원으로 승원하여 涑水書院이 되었으며, 廟宇는 景賢祠이다.
涑水의 涑은 빨아서 때를 제거한다는 뜻이니 洗滌汚垢라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을 씻는다는 뜻이다.
涑水書院은 봉성서당의 본래 이름인 涑水書堂에서 따 왔다고 한다. 또한 거실마을 뒤 쪽 벌뫼산 끝자락에 중종 때 이조참의를 지낸 성산인 蓮潭 李世仁(1452-1516)이 소요하던 涑水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汜水가 孔子의 고향으로 흐르는 강인 것처럼 涑水는 중국 북송시대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이며, 資治通鑑의 저자인 司馬光의 號이며, 司馬光의 고향의 강 이름이다. 한강 정구가 만년에 살던 곳을 汜水라 한 것처럼 蓮潭도 涑水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닮으려고 정자의 이름을 涑水라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후기 좌의정 유후조의 아들 溪堂 柳疇睦이 涑水亭重建記에서 비슷한 취지로 말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보더라도 원명을 涑水書院이라고 한 것은 이곳에서 공부하는 儒生들이 司馬光처럼 실지의 공부를 하여 愚齋처럼 훌륭한 선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涑水라고 하였다고 본다.
❖ 配享 先賢
❒ 申祐(退齋)-未詳
❒ 孫仲暾(愚齋)-1463(세조9)∼1529(중종14)
❒ 金宇宏(開巖)-1524(중종19)∼1590(선조23)
❒ 趙靖(黔澗)-1555(명종10)∼1636(인조14)
❒ 趙翊(可畦)-1556(명종11)∼1613(광해군5)
❖ 建物 名稱
❒ 景賢祠 : 景은 우러러봄이니 先賢의 德을 仰慕하는 뜻이다.(金史 熙宗紀의 萬世慕仰)
❒ 涑水明倫堂 : 成均館의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內三門 : 내삼문은 廟庭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삼간 솟을대문이며, 제향공간의 정문으로 그 안쪽이 성역이 되므로 신과 사람이 만난다는 뜻으로 內神門이라고도 한다.
❒ 史蹟碑 : 속수서원의 史蹟을 기록한 비석이다.
❒ 外三門(出入門) : 서원을 출입하는 문으로 한간의 사주문으로 되어 있다.
❒ 齋宿所 :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숙소이다.
❖ 기타
❒ 涑水書院事蹟碑文
❒ 孫仲暾 生祠堂 重創 奉安文
❒ 孫仲暾先生善政碑 移建時 爬任錄
9. 淵嶽書院
상주시 지천1길 49 (지천동)
❖ 淵嶽書院의 淵源
明宗때 申潛 목사에 의해 세워진 智川書堂이 서원으로 陞院하여 淵嶽書院이 되었다. 淵嶽書院은 이곳에서 詩會를 한 기록을 정리한 淵嶽文會錄이 보관되어 당시의 활발한 문학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며, 특히 南溪 姜應哲이 명명한 淵嶽九谷이 유명하다.
淵嶽書院은 智川書堂의 자리로서 유림의 藏修之所로서 이 書院은 甲長山 자락과 東에서 西向하여 南川에 잇닿는 길게 뻗은 송림과 甲長山에서 흘러내리는 계류가 바로 서원 앞을 지나며 절경을 만들어, 예로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시문과 창작활동이 왕성하였던 곳이다.
甲長山은 商山 三嶽의 하나로 상주의 案山이다. 이 산은 서쪽에 상산을 앉히고, 그 품이 흡사 큰 연 못을 연상케 하여 淵嶽이라고 널리 알려진 명산이다. 淵嶽書院은 이러한 甲長山의 淵嶽을 書院의 이름으로 가져왔다고 본다.
❖ 配享 先賢
❒ 朴彦誠(樂志亭)-1477(성종8)∼1534(중종29)
❒ 金彦健(芸亭)-1511(중종6)∼1571(선조4)
❒ 康應哲(南溪)-1562(명종17)∼1635(인조13)
❒ 金覺(石川)-1563(중종31)∼1610(광해군2)
❒ 趙光璧(北溪)-1566(명종21)∼1642(인조20)
❒ 康用良(臥雲)-1608(선조41)∼1676(숙종2)
❖ 建物 名稱
❒ 彰德祠 : 彰은 드러냄이니 先賢의 德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詩經에 厥德彰著와 같은 의미를 지녔다.
❒ 三門 : 廟庭으로 출입하는 솟을 대문이다.
❒ 講堂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기타
❒ 淵嶽書院上樑文
❒ 淵嶽九谷記-濯纓潭. 使君臺. 楓岩. 詠歸亭. 東岩. 秋遊岩. 南岩. 鼈岩
❒ 淵嶽文會錄
10. 淸巖書院
상주시 공검면 예주리 산 19-1
❖ 淸巖書院의 淵源
淸巖書院은 경관이 수려한 예주리 야산에 동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書院이 훼철된 후 1991년에 예전의 자리에 현재의 건물을 지어 복원한 書院이다.
淸巖書院은 1752년(영조28)에 陶溪精舍와 雅谷里祠를 합하여 두 곳에 배향되었던 선현을 합사하여 모시고 書院으로 陞院하였다.
配享 先賢은 11현으로 경북 서부지방에서는 배향위차가 제일 많은 書院으로 유명하며, 이곳은 향촌사회 교화와 상주지역의 전통적인 교육방식인 가학의 특색을 잘 간직한 書院이라 하겠다.
❖ 配享 先賢
❒ 柳砲(嘉村)-1375(우왕3)∼1448(세종30)
❒ 柳達尊(臺巖)-1395(태조4)∼1466(세조12)
❒ 朴訥(杏亭)-1448(세종30)∼1528(중종23)
❒ 李謙(醉睡軒)-1452(문종2)∼1507(연산8)
❒ 柳宗仁(翠薇軒)-1516(중종11)∼1545(인종1)
❒ 洪約昌(龜村)-1535(중종30)∼1592(선조25)
❒ 南嶸(孤山)-1548(명종3)∼1616(광해8)
❒ 鄭允諧(鋤歸子)-1564(명종19)∼1618(광해10)
❒ 朴成敏(守黙齋)-1603(선조36)∼1666(현종7)
❒ 李英甲(野翁)-1622(광해14)∼1676(숙종2)
❒ 南近明(峀雲)-1676(숙종2)∼1734(영조10)
❖ 建物 名稱
❒ 景賢祠 : 景은 우러러봄이니 先賢의 德을 仰慕하는 뜻이다.(金史 熙宗紀의 萬世慕仰)
❒ 淸巖講堂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外三門 : 書院을 출입하는 문으로 강당의 좌측에 있으며 솟을 대문으로 시설하였다.
❒ 內三門 : 廟宇에 출입하는 문으로 廟宇의 우측에 시설하였으며, 솟을삼문으로 하였다.
❒ 興學碑 : 서원입구에 세워진 비석으로 현감 남근명의 興學振興碑이다.
❖ 기타
❒ 雅谷里祠奉安文
❒ 陶溪精舍祠宇移建上樑文
❒ 淸巖書院重建記
11. 洛嵓書院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 산 29
❖ 洛嵓書院의 淵源
洛嵓書院은 상산의 동쪽 洛東江 상에 있는 竹岩里에 있다. 竹岩을 대바우라고 하는데 이는 중동리 竹岩에 층대로 된 바위가 있어 대바우라고 했다고 한다. 따라서 서원의 이름을 洛嵓으로 한 것은 그 곳의 지명(洛東江과 竹岩)을 따랐다고 하였다.
洛嵓書院은 1796년(정조20년)에 사림의 중론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西溪 金聃壽 3부자를 배향하였다.담
❖ 配享 先賢
❒ 金聃壽(西溪)-1535(중종30)∼1603(선조36)
❒ 金廷龍(月潭)-1561(명종16)∼1619(광해군11)
❒ 金廷堅(菊園)-1576(선조9)∼1645(인조23)
❖ 建物 名稱
❒ 象德祠 : 象은 法度를 본받는다는 뜻이니 書經 舜典의 象以典刑이란 뜻과 같다.
❒ 昭修門(內三門) : 昭는 밝힘이니 書經에 以昭周公之明德이라 했고, 修는 몸과 마음을 수양함이니 大學에 先修其身을 말한 것이다. 廟宇에 출입하는 문으로 솟을삼문으로 하였다.
❒ 洛嵓講堂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伸止門(外三門) : 伸은 欠身하는 것이니 儀禮에 君子欠伸이란 뜻이요. 止는 容止니 행동거지를 말한 것이니 즉 儀容이다. 君子九思에 容止若思와 같다. 書院의 원생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솟을 대문으로 시설하였다.
❖ 기타
❒ 洛嵓書院上樑門
❒ 洛嵓書院復元記
12. 近嵒書院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근암) 19
❖ 近嵒書院의 淵源
1551년(명종6) 상주목사 영천자 신잠 선생이 세운 18서당의 하나인 영빈서당이 그 모태가 되었다.
처음으로 이 고장 출신인 寓菴 洪彦忠을 모시기 위한 사당을 짓겠다는 논의가 이루어져 活齋 李榘가 癸巳年 4월에 상주목사에게 呈文을 올려 관의 승인을 받아 1665년(현종6)에 寓菴 洪彦忠을 배향하여 鄕賢祠가 되었으며, 1669년(현종 10)에 漢陰 李德馨을 主壁으로 봉안하고 禮曹의 허가를 받아 書院으로 陞院하였다.
❖ 配享 先賢
❒ 洪彦忠(寓菴)-1473(성종4)∼1508(중종3)
❒ 李德馨(漢陰)-1561(명종6)∼1613(광해군5)
❒ 金弘敏(沙潭)-1540(중종35)∼1594(선조27)
❒ 洪汝河(木齋)-1621(광해군3)∼1678(숙종4)
❒ 李榘(活齋)-1613(광해군5)∼1654(효종5)
❒ 李萬敷(息山)-1664(현종5)∼1732(영조8)
❒ 權相一(淸臺)-1679(숙종5)∼1759(영조35)
❖ 建物 名稱
❒ 景賢祠 : 景은 우러러봄이니 先賢의 德을 仰慕하는 뜻이다.(金史 熙宗紀의 萬世慕仰)
❒ 內三門 : 廟宇에 출입하는 문으로 솟을대문으로 하였다.
❒ 講堂(近嵒書院)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기타
❒ 廟宇開基告由祝文
❒ 廟宇上樑文
❒ 院中完議
13. 西山書院
상주시 연원동 산 140-2
❖ 西山書院의 淵源
書院이 처음 세워진 곳은 화동면 판곡리 薇山아래로 경상감사인 홍만조의 도움을 받아 1713년(숙종39)에 건립되었으며, 1797년(정조21)에 상주읍성 밖의 下西門里로 이건하고, 1861년(철종12)에 顯忠의 사액을 받았다. 처음 書院이 세워진 당시의 이름은 義薇書院이었다가 西山書院으로 書院명이 변경되었다.
西山은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 초기의 전설적인 兄弟聖人인 伯夷와 叔齊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치려하자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간하였지만 듣지 않자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연명하다 나중엔 首陽山의 고사리마저 주나라의 것이라 거부하여 결국 굶어죽었다는 고사에 나오는 首陽山을 말한다.
이렇듯 伯夷와 叔齊 형제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목숨을 버린 충절의 대명사다.
義薇의 薇는 採薇로서 고사리를 캔다는 뜻이니 바로 이 고사에서 따왔다고 본다. 伯夷와 叔齊가 首陽山에서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지은 노래이다.
登彼西山兮 採其薇矣 - 저 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캐자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 폭력을 폭력으로 바꾸면서도 그 잘 못을 모르는 구나
神農虞夏 忽然沒兮 - 神農과 虞, 夏의 시대는 가고
我安適歸矣 -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于嗟徂兮 命之衰矣 - 아아! 이제는 죽음뿐이다.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따라서 西山이란 상주의 서쪽에 있는 山이란 듯도 있지만 西山書院은 伯夷와 叔齊가 採薇하며 올랐던 西山의 충절을 의미한다고 본다.
또한 西山은 宋의 眞德秀가 西山精舍를 세우고 강학하던 곳이나, 朱子의 首弟子 蔡元定이 工夫하던 곳과도 의미가 相通한다고 본다.
❖ 配享 先賢
❒ 金尙容(仙源)-1561(명종 16)∼1637(인조 15)
❒ 金尙憲(淸陰)-1570(선조 3)∼1652(효종 3)
❒ 金祖淳(楓阜)-1765(영조 41)∼1831(순조 31)
❖ 建物 名稱
❒ 出入門 : 서원을 출입하는 사주문이다.
❒ 西山講堂(西山齋)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廟庭碑閣 : 西山書院 廟廷碑의 碑閣이다. 서산서원은 서원강당 왼쪽에 廟宇를 신설하지 않고 대신 廟廷碑를 세웠다. 廟廷碑는 서산서원 사적비로서 1857년(철종 8)에 세웠다.
❖ 기타
❒ 西山書院廟庭
14. 鳳崗書院
상주시 신봉동 270
❖ 鳳崗書院의 淵源
1817년(순조17)고려절신 姜淮仲과 갑자사화에 피화된 姜詗을 배향한 景德祠를 창건하였고, 1827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64년 景德祠를 복원 결의하였고, 1975년 옥동서원에서 景德祠를 서원으로 승원 결의하였다.
그 후 1977년 원호를 鳳崗이라 하고 묘호는 景德祠로 승원 고유하였다. 원호를 鳳崗이라한 것은 姜詗의 14세손인 世白이 1817년(순조17) 景德祠를 鳳崗에 세웠다.
❖ 配享 先賢
❒ 姜淮仲(通溪)-1359(공민왕8)∼1421(세종3)
❒ 姜詗(大司諫公)-1450(세종32)∼1504(연산군10)
❖ 建物 名稱
❒ 景德祠 : 景은 우러러봄이니 先賢의 德을 仰慕하는 뜻이다.(金史 熙宗紀의 萬世慕仰)
❒ 內三門 : 묘정으로 출입하는 삼간 솟을대문으로 시설하였다.
❒ 鳳崗講堂(鳳崗書院)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이다.
❒ 外三門(崇德門) : 외삼문의 문호로서 덕을 숭상한다는 의미이며, 삼간솟을대문으로 시설하였다.
❒ 旌閭門 : 甲子士禍에 남편인 姜詗과 사위 許磐과 아들 永叔, 茂叔, 與叔이 동일 피화되었으며 夫人인 善山金氏도 斷食絶命하였다. 中宗反正 후 伸寃되어 부인에게 旌閭가 내려졌다.
❒ 世居碑 : 晉州姜氏의 입향유래를 기록한 비석으로 1992년에 세웠다.
❖ 기타
❒ 景德祠記
❒ 鳳崗書院記
15. 道安書院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 道安書院의 淵源
1783년(정조7)경에 설립되었으며, 원래는 공성면 도곡리에 있던 道安書堂을 공성면 산현리로 이건하고 이를 道安祠로 바꾸었다. 그리고 1783년경에 이건하였다.
그 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0년에 화동면 판곡리 원통산 아래 자리 잡았다.
院號는 道安, 廟號는 尙賢, 講堂은 禮樂이다.
道安이라는 원호는 道安書堂이 道村里에서 安山里로 옮겨 온 것으로 보아 원호를 道安이라고 하였다고 본다. 특히 金宇泰 선생은 號를 짓지 않아 號가 없다가 후일 사람들이 선생이 거쳐하던 곳의 지명을 따서 道村이라고 하였다.
❖ 配享 先賢
❒ 金宇泰(道村)-1647(인조25)∼1708(숙종34)
❒ 金時泰(四勿齋)-1647(인조25)∼1729(영조5)
❖ 建物 名稱
❒ 慕賢祀 : 慕는 思慕하는 뜻이니 先賢의 德을 사모하는 뜻이다.
❒ 廟庭門 : 묘정문은 서원에서 밖으로 나가야 만이 묘정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삼간 솟을대문으로 시설하였다.
❒ 禮樂堂 : 明倫堂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지역 儒生을 위하여 講學을 하던 곳으로 儒生들이 禮와 樂을 배우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 書院重建碑 : 강당의 좌측편에 세워진 와비로 서원을 옮겨 중건하면서 이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비석이다.
❖ 기타
❒ 道安社基址
❒ 道安書堂敦事錄序
제3장. 尙州書院의 役割
書院의 명칭은 唐나라 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의 편수처이던 麗正殿書院·集賢殿書院에서 유래한 것인데, 송나라 때 지방의 私塾에 조정에서 書院이라는 이름을 준 데서 학교의 명칭이 되어 睢陽·石鼓·嶽麓·白鹿洞 등의 4대서원이 생겼으며, 특히 朱子가 강론을 하던 白鹿洞書院이 유명하였다.
이후 書院은 先賢과 鄕賢을 祭享하는 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書齋·書堂·精舍·先賢祠·鄕賢祠 등과 1401년(태종1) 丹城에 문익점을 제사하는 道川書院, 1528년(중종23) 星州에 김굉필을 제사하는 川谷書院, 1534년(중종29) 부안에 金坵를 제사하는 道洞書院이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祠와 齋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은 없었는데, 1542년(중종37) 경상도 豊基郡守 周世鵬이 관내 순흥 白雲洞에 고려 유교의 중흥자 安珦의 舊家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이것이 사와 재를 겸비한 최초의 書院으로 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退溪 李滉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白鹿洞 古事처럼 조정에서 賜額과 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1550년(명종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白雲洞書院에 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額과 서적을 하사하고 學田·奴婢를 給付하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免稅·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書院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公認의 절차인 賜額의 청원에 따라 賜額을 내린 書院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초기의 書院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時政을 비판하는 士林의 公論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血緣·地緣관계나 學閥·師弟·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賜額書院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書院은 양민이 院奴가 되어 軍役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軍丁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守令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書院田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官學인 鄕校를 외면, 書院에 들어가 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그러나 書院은 科擧準備敎育機關으로서 명목만 간신히 지켜왔던 鄕校를 비롯한 官學이 극도로 쇠퇴하게 된 후 당시 교육부재의 풍토위에서 착실한 성장을 하여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敎育 本來의 使命을 홀로 지켰으며, 또한 조선조의 명맥을 그런대로 유지시켜온 선비정신의 배양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書院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고 활용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보다 활발하게 진척되어야 한다.
올 해 尙州에서는 처음으로 玉洞書院이 문화재청이 공모한 ‘2015년 살아 숨 쉬는 서원 활용화 사업’에 선정돼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문화재청이 전국에 있는 書院과 鄕校에 대한 활용화 사업의 일환으로 국비와 시·도비를 지원하고 書院과 鄕校가 자부담으로 운영하게 되는데, 玉洞書院은 상주문화콘텐츠연구소가 주관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방촌 청백리 선비학당에서 소학강좌와 붓글씨를 배운 후 부채 만들어 보기, 선비복장을 갖추고 제향체험하기, 전래놀이로 배우는 전통문화 프로그램으로 방촌선생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북아트와 땅따먹기, 비석치기 등이 있다.
또 '천년옛길 역사 속으로' 프로그램은 대몽항쟁의 역사가 살아 있는 구수천에 조성된 천년옛길을 걸으면서 역사퀴즈를 풀고 상품도 받을 수 있으며, '역사이야기 마당놀이극' 프로그램은 방촌 황희 선생의 일화를 마당놀이극으로 꾸며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으로 구성하여 추진하고 있다.
또한 서원문화컨텐츠 사업을 2008년도부터 추진한 광주의 月峯書院은 근엄하고 딱딱하기만 한 書院이 현대인들의 삶에 지금도 큰 영향을 주는 선현들의 정신이 깃든 곳이지만 찾아가기가 어렵다는 점을 알고 현대인들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하였다.
광주 광산구는 書院을 교육·문화 난장과 서원 탐방 마당으로 변신시켜 활용하기위하여 문화재청이 주관한 2008 지자체 문화재활용 우수 사업에 공모에 참가하여 3천만원의 국비를 확보하여 문화재 생생 프로그램 ‘월봉서원이 살아있다’를 무료 운영하였다.
본 프로그램은 조선 성리학의 거두 고봉 기대승 선생을 배향한 月峯書院이 지닌 학문, 철학, 문화적 의미들을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과 놀이가 가미된 프로그램을 접목시켜 월봉서원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월봉서원이 살아있다’를 마련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어린이 철학 인형극, 동화/설화 이야기 방, 고봉 전설 연극마당, 몸으로 배우는 한자교실, 월봉서원 퍼즐놀이, 달밤에 즐기는 전래놀이, 애일당 선생님의 별 이야기, 주민들과 함께하는 낭독의 즐거움 및 간식 나눔 등의 프로그램이 2시간 반 동안 書院 경내에서 소소한 여유와 즐거움으로 펼쳐 운영하였으나 지금은 운영이 어려운 형편이다.
따라서 書院의 지속적인 활용을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에 의한 다양한 교육 사업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書院 문화 활성화를 위하여서 예산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書院의 본래의 교육적 기능을 찾아보면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講學, 享祀, 敎化가 주테마인 書院에서 자생을 위한 收益事業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書院은 문중 사람들이나 모여 향사제나 지내는 유림공간으로서의 효용성 밖에 없게 된다. 書院이 儒林들의 한낱 박제된 文化遺産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활기찬 跳躍을 할 것인가가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지금 書院이 世界文化遺産에 등제되는 절차를 밝고 있는 시점에서 그에 적합한 書院의 역할과 활성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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