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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데바림 / 말씀들 | 신 1:1-3:22 | 사 1:1-27 | 막 14:1-16 |
신명기의 히브리어는 ‘데바림 (말씀들)’입니다. 신명기의 핵심은 하나님과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2세들이 새 언약을 체결하는데 있습니다. 참고로 언약의 특징은 영원하며, 불변하며, 발전되며, 확장되며, 계승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슈아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 토라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 5:14-20). 즉, 새 언약이란? 옛 언약의 토대 위에 세워져서 옛 언약을 새롭고 구체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키며, 그것을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업 (히 : 나흘라)의 뜻은 ‘흘러가다’입니다.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넘어가는 재산의 전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순종함으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하여, 영원토록 이 땅을 통치하는 왕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세대와 또 다음세대가 에덴동산의 기업을 이어 받아, 온 땅을 에덴동산과 같이 하나님 말씀으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기업 (히 : 나흘라 : 흘러가다)이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 에덴동산을 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데바림)에 헌신해야 합니다.
<단락 1> 1. 신 1:1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은 38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고도 토라에 대한 불순종과 약속의 땅 거부 사건으로 인해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방향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혼란과 무질서가 따르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최강의 군사력을 갖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약속의 땅을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구원이 시작된 우리 또한 요단강 건너편에 서 있는 것과 같으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재헌신 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8절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중시하며, 그 안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1) 신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히 : 라브 라켐)
호렙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결혼 서약서를 받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 장소를 모세는 시내산이라고 말하지 않고, 호렙산이라고 표현했을까요? 호렙 (히 : 헤레브)의 뜻은 검입니다. 이는 토라에 순종하면 검을 통하여 생명을 얻지만, 불순종하게 되면 검을 통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렙산에 거주한 지 오래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긍정적인 표현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산에 머무른 날이 너무 길었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과거의 영적 체험만을 붙들고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위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곳에 머물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변화되어지는 것, 새로운 것 (도전)을 싫어하며, 안정되고, 안주하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삶의 방향을 돌려 말씀으로 돌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예슈아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을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고 말합니다 (마 9:5). 그러나 예슈아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찾으며,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극복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영적인 돌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 (히 : 레아브다)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키게 하시고 (히 : 레샤므라)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에덴동산을 지키도록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았으며, 에덴동산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하고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또한 천년 왕국 시대에 왕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 (토라와 산상수훈)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천년 왕국 시대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데 많은 방해물들을 예슈아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던 이들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만 왕과 제사장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왕과 제사장의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의 문제). 실제로 살기 원한다면, 왕과 제사장 훈련을 철저하게 받아야 합니다.
(2) 신 1:7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차지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그 땅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땅의 이름은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던 인류를 예슈아의 이름을 통하여 다시 에덴동산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홍해 체험, 시내산 체험, 성막 체험, 미디안 전쟁에서 승리는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돕기 위한 준비와 훈련 과정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할지라도, 얼마나 많은 은사를 받았더라도, 얼마나 많은 기적을 경험하여도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까지 영적인 여정과 성장을 멈추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예슈아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마 7:21),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이기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신의 생각과 싸워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주십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모든 자는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참고로 예슈아도 사단의 유혹을 3번 물리칠 때 모두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 했습니다 (신 6:13, 신 6:16, 신 8:3).
<단락 2> 2. 신 1: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인의 죄를 보지 않고, 하나님 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미워하십니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을 왜곡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의 시작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의심의 옷, 수치의 옷, 남을 평가하는 옷, 죄책감의 옷, 분노의 옷 등을 벗어버린 후 하나님의 형상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만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1) 욥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입술로 죄를 짖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삶에 사단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명의 정탐꾼이 말한 드바림 (하나님의 말씀)과 10명의 정탐꾼이 말한 드바림 (사람의 말)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합니까? 사람의 말을 선택하여서 사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사람의 말은 우리를 속이며, 생명과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보다 높아진 이론 (철학, 인본주의 가치관, 잘못된 신학의 해석, 교단의 교리)과 모든 생각을 사로잡지 않으면 그것이 견고한 진이 될 것을 경고합니다 (고후 10:4-5).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집니다 (롬 8:7).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것을 따라가는 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영이며, 좌우에 날선 어떠한 예리한 검보다 예리하고 모든 악한 것을 잘라낼 수 있습니다.
2) 신 2:24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
히브리어 ‘헤스본’은 견고한 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히브리어 ‘아모리’는 말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히브리어 ‘시혼’은 전사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리 왕은 강력한 견고한 진에서 살고 있으며,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아진 자신의 말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강력한 힘을 소유한 전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아무런 전쟁을 치루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었지만, 동시에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1) 신 3:18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전신 갑주)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 (선두주자의 삶) 이 되어 건너가되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기 위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군대는 전신 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 시대 패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유는 사단과 육신의 생각과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승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왜 그 승리를 취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약 2:17). 성경은 믿음을 설명할 때, 신뢰와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은 믿음의 문제를 자신의 신념 또는 확신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귀신들도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인 것을 믿고 있습니다 (약 2:19).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인 동의로만 여겨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사사기 3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 ’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영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 (영적 무지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 뒤에 공격하는 사단이 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의 특징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기 위한 둘째는 선봉 (선두주자의 삶)에 서야 합니다. 선두주자의 대표적인 사람은 노아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3:1-2)’를 선포하며,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와 예슈아의 초림을 준비한 자입니다. 이처럼 예슈아의 재림에 대한 목마르고 갈급한 사람들은 예슈아를 향한 믿음들이 점점 자라나게 됩니다 (고후 11:2). 그러나 예슈아의 재림에 대해서 회의적이거나, 목마름이 없는 사람들은 믿음의 뿌리가 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를 보게 되면, 종말 (마지막 때)에 관련된 말씀이 선포되지 않을 때 그 세대는 힘을 잃어갔습니다. 이처럼 예슈아의 초림을 선포한 선두주자가 있었다면, 마지막 때 선두주자들은 예슈아의 재림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두주자로 서기 위해서는 3가지를 훈련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누구인가 (정체성 훈련)입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우리에 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에 대해 이해할 때, 우리의 정체성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벧후 1:4).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둘째, 마지막 때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 62:10-11).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에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이끌고 가시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해석할 수 있는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두주자는 대 환란의 시기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예행 연습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우리의 영적인 삶과 이 땅에서의 모든 삶들을 지켜줄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왔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고 통치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때에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좌절하지 않고 다음 세대들에게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설명하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갈 자로 세웠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땅에 완성되어질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의 때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세대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갈 자로 세워질 수 있도록 다음 세대를 여호와의 군대로 세워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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