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마리아 - 신 마리아 -주문모 신부를 폐궁에 숨겨 준 왕실 부인-
▲ 신 마리아는 강완숙의 집에서 열리는 미사와 강론에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강 완숙 둥이 자주 폐궁을 찾아와 교리를 가르쳐 주곤 하였다.
송 마리아 : ?~1801, 세례명 마리아, 양제궁에서 사사
신 마리아 : ?^1801, 세례명 마리아, 양제궁에서 사사
송(宋) 마리아는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恩參君) 이인(李福)의 부인이며, 그 며느리 신(申) 마리아는 은언군의 둘째 아들 상계군(常漢君) 이담(李港)의 부인이다. 말하자면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고, 은언군은 사도세자와 영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은언군의 부인 송 마리아는 진천 송씨로, 송낙휴(宋樂休)의 딸이다. 낙휴의 증조부 창(昌)은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나, 할아버지 수량(秀良)은 삭녕 군수, 아버지 의손(宣孫)은 홍산 현감, 낙휴 자신은 겨우 정릉 참봉(精陰參奉)을 지낸 한미한 집안이었다. 은언군이 비록 왕족이기는 하나 권력 밖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한미한 집안과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며느리 신 마리아 역시 한미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는 평산 신씨로, 신업의 딸이다. 업의 아버지 경선(景先)은 재종숙 경악(景槪)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양자로 들어간 집의 증조부 처화(處華)는 평양 서윤을 역임하였으나, 그의 대에 와서는 겨우 큰형이 옥과 현감을 지낸 정도였다.
상계군과 신 마리아의 혼인은 찰방을 지낸 사촌 신개(申借)와 금정 찰방을 지낸 신경운(申景雲)이 주선하였고, 집이 가난하여 신경운이 실질적인 혼주 노릇을 하였다.
폐궁에 비쳐진 한줄기 빛
이와 같이 은언군과 상계군은 비록 왕족이기는 하나 권력 밖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결혼도 한미하고 가난한 양반 집안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당시 정권을 잡고 세도 정치를 펴고 있던 홍국영이 손길을 뻗친 것이다. 홍국영은 세도 정치를 계속하기 위해 그의 누이동생을 정조에게 바쳐 원빈으로 삼게 했다. 그러나 원빈이 1786년 갑자기 병사하자, 세도 정치에 눈이 먼 홍국영은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그의 빈소를 지키게 하고, 상계군을 생질이라 부르며 동궁으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대신들에 의해 역모로 몰려 홍국영은 강릉으로 유배되었고, 상계군은 자살하고 말았다. 그 여파로 은언군도 벼슬에서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이로 인해 은언군이 살던 양제궁(良嫌宮)을 역적이 사는 궁이라 하여 ‘폐궁’ (廢宮)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폐궁에서 유폐된 것처럼 살고 있던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의 가슴속에는 남모르는 한이 맺혀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 , 또 그들의 한 맺힌 가슴속에 한 줄기 빛이 찾아왔으니 바로 천주교였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 하기 수년 전부터 였다. 나인 (內人) 서경의의 외조모인 조씨 노파가 궁에 들어가 전교하였던 것이다. 그 후 1795년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 노파의 소개로 폐궁의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윤유일,지황 . 최인길 등이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나, 몇 년 동안은 만나지 못하였다.
그 후 조씨 노파가 주 신부를 찾아와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진심으로 천주교 를 믿고 성사받기를 원한다고 전하였다. 이 말을 듣고 주문모 신부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간절히 청하므로 폐궁에 가서 성사를 주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들도 강완숙의 집에서 열린 미사와 강론에 두 차례나 참석하였다. 한 번은 나인 강경복을 대동하였고, 또 한 번은 나인서경의를 대동하고 찾아갔었다고 한다. 그러나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자주 강론에 참석할 수 없으므로 강완숙 - 한신애 - 윤점혜가 자주 폐궁을 찾아 교리를 가르쳐 주곤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의 집에 숨어 있던 주문모 신부는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노비 구월의 안내를 받아 폐궁으로 피하였다. 폐궁은 왕실이므로 포졸들이 함부로 들어와 수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신부는 20일 간 폐궁에 숨어 있다가 그곳도 불안하여 아무도 모르게 빠져 나와 여기저기를 헤맨 뒤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황해도까지 갔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당할 것을 생각하여 다시 돌아와 3월 12일 자수하였다.
나홀 뒤 주문모 신부의 신문에서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자 그날로 나인 강경복과 서경의를 국청으로 잡아들여 이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과 주 신부가 폐궁에 20일 간 숨어 있었던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왕족의 부인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취조 기록은 없다.
다만 이들을 모신 나인 강경복과 서경의의 취조 기록에서 이들의 신앙 생활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정치적 음모로 몰린 신앙
먼저 강경복에게 위관이 물었다.
“네가 말하는 소위 신부는 폐궁 안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
“안사랑에 숨어 있었습니다.”
위관이 다시 물었다. “네가 천주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네가 모시는 양반 부인들도 천주교를 믿었다. 천주교를 믿으면서 달리 경영하는 음모가 무엇인지 너는 반드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세하게 낱낱이 아뢰어 라.”
“저희 양반 부인은 당신 스스로 슬픔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이 슬픔을 풀기 위해 천주교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를 믿으면 하늘 나라의 복된 곳에 간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폐궁은 이미 나라에 죄를 범한 역적의 집이므로, 단순히 슬픔을 풀기 위해 천주교를 믿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따로 경영하는 음모가 있을 것이다.
숨기지 말고 다 고하라.”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천주교를 믿게 된 동기는 아들과 남편을 잃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을 때, 이를 잊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추국을 맡은 관리들은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위관이 서경의에게 물었다.
"너는 망명한 사람이 폐궁 안에 숨어 있는 것을 어떻게 하여 알았느냐?"
“제가 하루는 수상한 인적을 보고 물으니, 양반 부인이 소명이 와서 그 방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와 소명은 평소 잘 아는 사이인데 어찌하여 방안에 숨어 있는 것이냐고 한즉, 양반 부인이 천주교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피해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폐궁으로 피해 온 일은 어쩌면 한 집안에 사는 나인에게까지도 숨길 만큼 비밀리에 이루어졌었다. 위관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방은 어느 방이며 네가 본 수상한 일이란 게 무엇이냐?”
“큰방 가까이 있는 거처하지 않는 방입니다. 지난달 20일 이후 양반 부인이 친히 그 방을 봉쇄하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어떤일이 있어 안방 근처 에 가면 양반 부인이 곧 손을 저어 쫓아내었습니다.”
“양반 부인 중 누구누구가 천주교를 믿었느냐?”
“시어머니(송 마리아)는 천주교를 믿었으나 그 시어머니는 믿지 않았으며, 젊은 부인의 시어머니가 젊은 부인(신 마리아)에게 매양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면 젊은 부인은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니 천천히 믿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다 같이 천주교를 믿었으나, 이 진술로 보아 송마리아가 더 적극적이며 열성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슬품과 한 맺힌 삶을 하느님께 의탁해
“천주교를 믿어 무엇에 쓰려는 것이냐?”
“늙은 양반 부인이 저에게 매양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면서 천주교를 믿으면 죽은 뒤 영혼이 하늘 나라 복된 곳으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양반 부인이 천주교를 믿은 것 역시 이를 위해 믿은 것 같습니다.”
“양반이 천주교를 믿으면서 어찌 경영하는 음모가 없단 말이냐?”
“저는 모릅니다.”
"양반 집에 왕래한 천주교인이 누구 누구이냐? 서찰이 오고 간 것도 낱낱이 바르게 아뢰어라.”
“별로 오고 간 사람이 없습니다.
저의 계모와 계모의 어머니,그리고 노비 구월과 강완숙의 집에 사는 과부(윤점혜)가 자주 왕래하였으나, 서찰이 오고 간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 네가 본 것을 낱낱이 바로 아뢰어라.”
“언젠가 양반이 어두운 방안에 한 그림(성화)을 걸어 놓고 경문을 외우며 기도하는 것을 창 밖을 지나가다 보았습니다.”
이로 보아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도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사람의 본분이다. 그러므로 폐궁의 부인들이 천주교를 신앙한것도 당연히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렇게 주문모 신부와 나인 강경복과 서경의의 신문을 통해,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천주교를 믿으며 주 신부를 폐궁에 숨겨 준 사실을 확인한 관리들은 김 대왕대비에게 그들을 사사(賜死)할 것을 상소했다. 이 보고를 받은 대왕대비는 즉시 사사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그 명에 의하여 그 다음날인 3월 17일(양 4월 29일)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약을 받아 먹고 죽었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은 그들의 슬픔과 한 맺힌 삶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조정 관리들은 그들이 서양 종교를 믿은 것은 조정에 대한 원한이 깊기 때문에 어떤 음모를 꾸미기 위한 것이라며 정치적으로 몰고 갔다. 왕족의 부인들이 주문모 신부와 연락을 한 것은 국가의 안전을 해치는 어떤 끔찍한 음모를 꾸미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으며, 은언군 이인이 그 음모의 비밀한 주동자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삼사(三司) 모두가 “역적의 화근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은언군도 사사하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은언군은 실제 천주교를 믿지 않았는데도 그 상소로 인하여 사사되었다.
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순교는 믿음의 씨았이되고』 [신유박해 순교자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