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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활(李宜活,1573~1627)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설천(雪川). 配 밀양박씨 박성(朴惺)[生]의 딸
■가계
시조 이세정(李世貞) 고려향공진사(鄕貢進士) ▶경주파(여강이씨)
>8세 이숭례(李崇禮) 포항 여일 입향
>9세 이수회(李壽會) 참군
>10세 이번(李蕃) 생원 配경주손씨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
>11세 ①이언적(李彦迪,1491~1553)[생1513][문1514]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시호는 문원(文元).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12세 ①이응인(李應仁) 配인동장씨 장응기(張應機)의딸
>13세 ①이의윤(李宜潤,1564~1597) 자는 수연(晬然), 호는 무첨당(無忝堂) 정구의 문인
>13세 ②이의징(李宜澄)
>13세 ③이의활(李宜活,1573~1627) [생1612][문1618] 1614.10.~ 1616.6 개령현감
>13세 ④이의잠(李宜潛)[진]
>13세 ⑤이의택(李宜澤)
>12세 ②이전인(李全仁)
고조(高祖) 훈련원참군 증이조판서(訓鍊院參軍 贈吏曹判書) 이수회(李壽會)
증조(曾祖) 성균생원 증좌찬성(成均生員 贈左贊成) 이번(李蕃)
조부(祖父) 좌찬성 여성군 증영의정(左贊成 驪城君 贈領議政) 이언적(李彦迪)
선고(先考) 사옹원판관(司饔院判官) 이통(李應仁)
서숙(庶叔) 증예빈시정(贈禮賓寺正) 이전인(李全仁)
서종형제(庶從兄弟) 청도군수(淸道郡守) 이준(李浚)
유학(幼學) 이순(李淳)
형제(兄弟) 유학(幼學) 이의윤(李宜潤)
유학(幼學) 이의징(李宜澄)
하양현감(河陽縣監) 이의잠(李宜潛)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 이의온(李宜溫)
■이력
선조 6년(1573년)에 경주 안강 양좌동에서 출생하였다. 광해군 2년(1620년)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2년 뒤에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급제 후 호조좌랑을 거쳐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고령현감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지내고 함경도 도사로 나갔다. 이후 간신 이이첨 등이 전횡을 일삼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경주로 낙향하였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인조 원년(1623년)에 흥해군수로 중용되었다. 인조 5년(1627년) 병으로 관청에서 죽었다. 유저로 설천문집(雪川文集)이 있다.
■기록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6년 갑인 > 9월 14일 > 최종정보
이의활(李宜活)을 개령 현감(開寧縣監)으로, 윤지복(尹之復)을 영산 현감(靈山縣監)으로, 김상용(金尙容)을 지중추부사로〉 삼았다.
고전번역서 > 갈암집 > 갈암집 제23권 > 묘표 > 최종정보
興海郡守李公墓表
公諱宜活。字浩然。其先驪州人。上祖諱世貞。爲高麗鄕貢進士。其後率相繼有聞人。曾祖諱蕃。成均生員。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祖諱彥迪。官至左贊成。諡文元公。世所謂晦齋先生也。無子。以從父弟經歷諱通之子爲後。卽公之先考也。諱應仁。以蔭仕至通判。妣玉山張氏。贈兵曹判書封延福君諱末孫之玄孫。洗馬諱應機之女。公以萬曆庚戌。入太學補上舍生。以薦拜陵署郞。俄陞司憲府監察。出爲高靈縣監。後又任開寧,龍潭兩邑事。戊午。登文科。由成均典籍。拜咸鏡道都事。旣謝恩。歷辭卿宰。至一權貴家。閽者不卽通刺。公怒命徒從捽打之。遂不見其主而歸。聞者以爲難。公當光海時。雖歷仕中外。常處卑官薄祿。不求通顯。嘗築室於良佐洞居第之西。扁曰雪川精舍。因以自號。及癸亥反正。公始乞外。出知興海郡事。以通判公墓寄在郡境故。所至爲政。公廉嚴恕。吏畏而民懷。以天啓丁卯。疾卒于郡廨。十月二十日也。春秋五十五。以是年某月某日。反葬于慶州府北神光縣磨造里巳向之原。公之配曰凝川朴氏。大庵先生諱惺之女。有丈夫子二人女子子二人。男長曰皖。獻陵參奉。以孝友稱於鄕里。次曰馦早夭。女長適縣監郭衛國。次適檢閱鄭杺。參奉無子。以從兄子垷後。童蒙敎官。敎官有三男四女。男長德純。次德新。季德均。未娶而夭。女適士人孫得貞,李廈相,琴鳳操,進士郭廷賓。德純有五男。長曰敏中。次曰義中早夭。次曰徽中。次曰敬中。季曰徵中。德新無子。以徽中爲後。公早承家庭詩禮之訓。旣又受室于朴氏之門。有觀感薰陶之益。大庵公深器重之。大庵公無嗣續之托。公亟請立其族子爲後。人皆義公之爲。夫人朴氏幼有至性。又常不離典訓之內。年纔八歲。遭王母夫人之喪。哭泣哀毀如成人。及笄歸于公。事舅通判公。肅恭誠至。終始不懈。通判公每稱其能盡婦道。及卒。夫人執喪盡禮。及丁大庵公憂。持喪節度。皆從儀法。其見公。必具衰絰。俯伏不起。及朞服闋。公欲挈歸。夫人泫然曰。女子於親喪。旣練而歸。禮則然矣。顧念先人無血屬奉奠者。若几筵未撤而歸。情所不忍。願夫子卜小室。代執巾櫛。以待我三年喪畢也。公感其言。畜媵侍。權攝家事。及夫人歸。待之甚厚。常假與顏色。無纖毫嫌介意。及公沒。夫人血泣終三年。凡遇忌祭若時節祭享。雖年考旣高。必躬親蠲潔以莅之。至婢僕之賤。亦令齊宿以將事。子孫或有過失。嚴加警責。不少假借。諸孫男女雖在髫齡。不令坐同席而食共卓。閨門之內。截然有法度。聞寒岡,旅軒兩先生之沒。輒涕泣行素曰。是先人道義之交。吾雖婦人。安得恬然不變常度乎。嘗作書遺其子陵署公。蓋奉先以誠及毋忘外家祀享之意也。以歲辛丑二月七日。考終于內寢。享年九十四。以某月某日。從葬公宅兆之前。嗚呼。公旣克紹文元遺緖。傳德襲訓。不墜其家聲。夫人固先受敎於賢父。及其來嬪大家。益自祇飭。禮容肅穆。治家嚴正。壺彝閨範。無讓於古之淑哲。此皆可書而傳也。公之捐館。今七十有餘年。一日公之玄孫敏中以其家傳行實記一通來。請余表其墓。玄逸旣世通家。有義不得辭者。輒敢論次其世德家範事終始如右。使之伐石以表于墓道焉。
上之二十九年昭陽協洽二月戊申。載寧李玄逸述。
흥해 군수(興海郡守) 이공(李公) 묘표
공은 휘가 의활(宜活)이고 자는 호연(浩然)이며, 그 선조는 여주인(驪州人)이다. 상조(上祖) 휘 세정(世貞)은 고려 때에 향공(鄕貢) 진사(進士)였고, 그 뒤로 이름난 사람이 이어져 내려왔다. 증조 휘 번(蕃)은 성균관 생원이었는데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언적(彦迪)은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고 시호가 문원공(文元公)이며 세상에서 이른 바 회재(晦齋) 선생이라고 부르는 분이다.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인 경력(經歷) 휘 통(通)의 아들로 후사를 삼았으니, 이분이 곧 공의 선고(先考)인데, 휘는 응인(應仁)이고 음사(蔭仕)로 통판(通判)에 이르렀다. 비(妣)는 옥산 장씨(玉山張氏)인데, 병조 판서에 추증되고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진 휘 말손(末孫)의 현손인 세마(洗馬) 휘 응기(應機)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에 태학(太學)에 들어가 상사생(上舍生)이 되었다. 천거로 능서랑(陵署郞)에 제수되었고 곧 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며 이어 고령 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뒤에 또 개령 현감(開寧縣監),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역임하였다. 무오년(161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거쳐 함경도 도사에 제수되었다. 사은숙배한 뒤에 공경 재신들에게 두루 인사를 다닐 때에, 한 권세 있는 집에 이르러 문지기가 즉시 통자(通刺)를 하지 아니하자 노하여 하인을 시켜 그를 잡아 패게 하고, 결국 그 주인을 만나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은, 남들이 쉬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하였다.
공은 광해군 시대를 만나 비록 두루 중외의 벼슬을 하였으나 항상 봉록이 적은 낮은 관직에 있었고 좋은 벼슬을 원하지 않았다. 일찍이 양좌동(良佐洞) 집의 서쪽에 작은 서재를 하나 지어 설천정사(雪川精舍)라 편액을 걸고 그것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계해년(1623, 광해군15)에 반정(反正)이 일어난 뒤 공은 비로소 외직을 청하여 흥해 군수로 나갔으니, 통판공(通判公)의 묘소가 흥해군 경내에 있기 때문이었다. 가는 곳마다 정사를 보기를 공정하고 청렴하며 엄격하면서도 관대하게 하여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흠모하였다.
천계 정묘년(1627, 인조5) 10월 20일에 흥해군 관아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55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경주부(慶州府) 북쪽 신광현(神光縣) 마조리(磨造里) 사향(巳向)의 언덕으로 모셔 와 장사 지냈다.
공의 배(配)는 응천 박씨(凝川朴氏)인데 대암(大庵) 선생 휘 성(惺)의 따님이다.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 환(皖)은 헌릉 참봉(獻陵參奉)인데 효성과 우애로 향리에서 이름이 났다. 차남 혐(馦)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현감 곽위국(郭衛國)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검열 정심(鄭杺)에게 시집갔다. 참봉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종형의 아들 현(垷)으로 후사를 삼았는데 동몽교관(童蒙敎官)이다. 교관은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덕순(德純)이고 차남은 덕신(德新)이다. 막내는 덕균(德均)인데 혼인하기 전에 죽었다. 딸들은 사인(士人) 손득정(孫得貞), 이하상(李厦相), 금봉조(琴鳳操), 진사 곽정빈(郭廷賓)에게 시집갔다. 덕순은 5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민중(敏中)이고, 다음은 의중(義中)인데 일찍 죽었고, 다음은 징중(徵中)이고, 다음은 경중(敬中)이고, 막내는 휘중(徽中)이다. 덕신은 아들이 없어 휘중으로 후사를 삼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한 박씨의 문중에 장가들어 더욱 보고 배운 바가 많았으므로 대암공(大庵公)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대암공이 뒷일을 맡길 후사가 없자 공이 누차 청하여 그 족자(族子)를 세워 후사를 삼으니, 사람들이 다들 공이 한 일을 의로운 일이라고들 하였다.
부인 박씨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매우 아름다웠고 항상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나이 겨우 8세에 조모상을 당하였는데 곡읍(哭泣)과 애훼(哀毁)를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계례(笄禮)를 한 뒤 공에게 시집와서 시아버지 통판공(通判公)을 섬김에 정숙하고 공손하며 지성스러워 시종 해이해지지 않았으므로 통판공이 매양 그 부도(婦道)의 극진함을 칭찬하였다. 통판공이 졸하자 부인은 초상을 치르는 일에 예를 극진히 하였다. 대암공의 초상을 당하여서는 초상의 절도(節度)를 모두 의법(儀法)을 따랐으며, 공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최질(衰絰)을 갖추고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았다. 기복(朞服)을 마친 뒤 공이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려 하자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여자는 친상(親喪)에 연제(練祭)를 마치면 돌아가는 것은 예법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선친은 전(奠)을 받들 후손이 없으니 궤연(几筵)을 철거하기도 전에 돌아가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컨대 부자(夫子)께서는 소실(小室)을 들여 대신 시중을 들게 하고, 제가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공이 그 말에 감동하여 잉첩(媵妾)을 들여 집안일을 대신 섭행하게 하였다. 부인이 돌아오자 매우 후하게 대우하고 항상 기쁜 안색을 하였으며 늦게 돌아온 것에 대해 털끝만큼도 불평스런 마음이 없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니 부인은 곡읍을 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모든 기제(忌祭)와 시절(時節) 제향(祭享) 때에는 나이가 매우 많았는데도 반드시 깨끗한 음식을 장만하여 몸소 제사에 참여했고, 천한 비복(婢僕)들에게도 재숙(齋宿)하고 제사의 일을 돕도록 하였다. 자손들 가운데 혹 과실이 있으면 엄하게 경책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여러 손자와 손녀들에 대해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거나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게 하지 않으니, 집안에 분명하게 법도가 있었다.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두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번 눈물을 흘리며 소식(素食)의 예를 행하고 말하기를, “이분들은 선인께서 도의(道義)로 사귀던 분들이다. 내가 비록 부인이지만 어찌 태연히 평소대로 생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글을 지어 그 아들 능서공(陵署公)에게 주었는데, 선조를 정성껏 받들라는 것과 외가(外家)의 제사를 잊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신축년(1661, 현종2) 2월 7일 내침(內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94세였다. 모월 모일에 공의 묘소 앞쪽에 장사 지냈다.
아, 공은 문원공(文元公)의 유업(遺業)을 잘 이어 덕업과 교훈을 전승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았고, 부인은 참으로 먼저 어진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은 데다 대가(大家)에 시집와서 더욱 자신을 신칙하여 예모를 엄숙히 하고 집안을 엄정하게 다스려 부인으로서의 의절과 규문의 법도가 옛 현부인들에게 손색이 없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기록하여 전할 만한 것이다.
공이 세상을 떠나신 지가 이제 70여 년이 되었다. 하루는 공의 현손 민중(敏中)이 그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행실기(行實記)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표(墓表)를 청하였다. 현일은, 대대로 통가(通家)의 교분이 있었으므로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 없기에, 감히 그 세덕(世德)과 가범(家範)을 위와 같이 엮고, 돌을 떠다가 묘표를 세우게 하는 바이다.
금상 29년 계미(1703, 숙종29) 2월 무신일에 재령 이현일은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