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 인연
나의 시절인연
신근식
“어릴 때 죽음의 위기가 있었다.”고 할머니가 말해주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슬아슬한 위기를 여러 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조상이 돌본 덕분”이라고 하였다. 그 말이 정말 맞을지도 모른다. 아들 위해 기도하고 아들이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또 수많은 인연의 힘이 올바른 삶의 길로 가도록 이끌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곧 내 인생이다. 친구, 동료, 지인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나고, 산에서 만나고, 각종 모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수많은 인연들이 모두 나의 올바른 삶의 길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저 친구에게 한번 코가 꿰이면 평생 꿰인다.”고 말한다. 반은 험담이고, 칭찬이다. 지속하여 오래 관계를 맺는다는 뜻인데 내게 다가온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끈질긴 면도 없지 않다.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인생이 즐겁다. 그 사람이 그렇게 흔쾌히 응하면 인연은 계속된다. 일상의 촘촘한 나의 인연 그물망은 그렇게 엮이어져 왔다.
최근 가수 안성훈의 ‘시절인연’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게 되면서 ‘시절인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절인연은 ‘모든 사물의 현상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것을 일컫는 불교 용어이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 사람과의 만남도, 일과의 만남도, 소유물과의 만남도, 깨달음과의 만남도, 유형무형의 모든 만남은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각자의 시절이 무르익을 때 연이 닿는다면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나의 시절인연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본다. 가장 가까이는 부모와 자식, 형제 등 혈연으로 맺어진 인연들이 먼저일 것이다. 다음은 어릴 때부터 학교 다니면서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이다. 그리고 내 청춘을 고스란이 다 바친 직장생활 36년 동안 만났던 직장 동료와 선배들이 있다. 퇴직 후 각종모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아내가 부업으로 식당을 경영하면서 알게 된 손님들도 빼 놀 수 없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과 함께 인과관계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살아오는 동안 학교, 직장, 사회에서 늘 경쟁의식 속에 고통과 시련의 시간도, 즐거웠던 시간도 있었다. 혹은 상처 입고 때로는 본질을 잊은 채 헤맨 때도 있었다. 세상살이가 더하기․빼기처럼 정답이 딱 떨어지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도 살다 보면 진실한 마음이 통하고, 꿈 나누고 이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든든한 인연으로 만나기도 하였다.
시절인연이 한때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삶의 방향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관계가 되는 일이 있다.. 같은 반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 보던 절친인 경우도 있다. 크게 무언가가 서운했던 것도, 싸운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정말 살다 보니 삶의 궤적과 각자가 그리는 인생관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레 멀어지는 인연이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관계에 대해서는 ‘시절인연이 다 했구나.’ 하면서 시절인연 하나를 떠나보낸다.
가진 것이 있으면 내어놓는 것이 매번 손해 보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타고난 본성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많이 하는 넓은 오지랖 때문에 실속 없이 살다 보니 항상 몸이 고단했다.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쳐서 때로는 외로웠다. 그러나 어찌 고단함만 있겠는가? 모두가 소중하고 감사하지만, 인생에 가장 큰 의미로 내게 다가왔던 아내를 생각했다.
부모와 자식은 피로 맺어진 천륜이다. 이보다 더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내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서로 낯선 환경과 가치관으로 살다가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되었다. 책임의 무게를 지고 살아오는 동안 서로 버팀목으로 받쳐줄 때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원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장이라도 끝장낼 것 같이 미워하기도 했다. 가장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날을 함께 했다. 자식 낳고, 열심히 가족 위해 힘을 썼다.
살갑지 않았지만 늘 부지런하고, 지혜롭고 언제나 밝은 미소를 가진 속정 깊은 사람이다. 끊임없이 일 벌리고, 불같은 성질과 열정에 조바심치는 나의 행동을 옆에서 봐주느라 얼마나 마음졸이며 힘들어했을까. 강산이 네 번 정도 바뀌는 세월을 함께하였다. 이제 사소한 것으로 다투거나 얼굴 붉힐 필요한 일이 없다. 서로 ‘같음’은 나누며 즐기고, ‘다름’은 인정하며 존중하고 상대가 좋아하는 일 해주면 그만일 것이다.
부부는 과연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일까? 우리도 시절인연처럼 아무리 결혼하고 싶어 해도 하지 못하였다. 그때 두 번의 인연으로 운명처럼 나타나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부모는 내가 성장하면서 당신 곁을 떠나갔다. 자식도 장성하면 언젠가 내 곁을 떠나간다. 왔다가 가는 수많은 인연도 자기 시간에 쫓기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리되기도 한다. 아무리 뒤돌아보고 생각해도 그럴 때 늘 곁에서 함께 지켜준 소중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람과 일,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 어쩌면 지금 이순간에도 과거의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때일지도 모른다. 지금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귀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다가오길 기다리는 성숙한 시절인연을 맞이하는 최선의 길이라 믿는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다른 사람 통해 나를 알고, 또 다른 세상을 알아간다. 다양한 사람 만나 인연 쌓으며, 남은 삶을 조금씩 완성해 가는 것이 최선이다.
(20240511)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
♥사람 사는 데 종교를 떠나 일상의 일에서는 인연이 많다.
그러나 문학 하는 사람에게는 문학 속에서 처럼 작가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 만들어야 스토리가 전개 된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우연"은 차라리 만들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그런 인연을 만드는 게 작가이다.
청림숲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