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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도답사도보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로드
유럽대륙을 거쳐서 리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스페인을 다녀본 사람은 다들 그곳을 가리켜 '인류 문명의 모자이크 국가'라고 말한다.
이는 오랜세월 동안에 그곳을 거쳐간 로마와 게르만(서고트족)과 기독교 문명의 터전 위에 이슬람이라는 또 하나의 위대한 유산이 머물면서 시간이라는 역사 위에 수많은 사연을 아로새겨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스페인 만의 독특한 문화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스페인만의 독특한 문화)를 아쉽게도 우리는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뿐만아니라 바르셀로나에서도 스페인만의 독특한 역사적 문화를 접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명의 모자이크)라 불리는 '스페인만의 매우 독특한 문화'는 대부분 남서부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도 가장 스페인다운 도시를 찾으라면 나는 한치도 머뭇거림없이 단번에 '그곳은 세비야'라고 대답하겠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매우 독특한 모자이크 문명'의 근원지를 꼽으라면, 나는........1) 세비야 2) 그라나다 3) 코르도바 4) 론다 였노라고 대답하겠다.
이는 또한 내가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감명을 받았던 좋아하는 도시의 순서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 안내서들은 세비야를 이렇게 표현한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정서는 작열하는 태양과도 같은 뜨거운 정열인데,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이자 최대 도시인 세비야에 가면 이 모든것을 마을껏 즐길 수 있다. 사랑의 화신이 등장하는 오페라 <카르멘>과 <돈 후안>의 무대이기도 하며, 바로 정열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플라멩코의 본고장이 바로 세비야이기 때문이다.'
이 매혹적인 도시 '세비야(세빌리아)'를 역사의 전면에 대대적으로 부각시킨 인물은 아무래도 '콜럼버스'가 아닐까 싶다.
세비야는 고대 이곳을 정복한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처음 도시로 건설되기 시작하였지만, 서고트족(게르만)이 지배하는 동안에는 톨레도에 밀렸고, 무어인(이슬람)이 지배하는 약 700년 이상의 시간 동안에는 코르도바에 밀려서 정치와 권력의 핵심에서는 늘 조금씩 밀려나 있었다.
이사벨 여왕에 의해서 거세게 추진되었던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의 결과로 스페인이 코르도바를 되찾게되자, 이슬람 세력은 여래개의 소국으로 분열되면서 남쪽으로 쫓겨가기 시작했다. 분열된 이슬람은 곧이어 세비아 마저 스페인에게 점령당하게 되고, 마지막 거점을 그라나다로 옮기게 되었으나 그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슬람이 완전히 리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면서부터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가운데 자리한 세비야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갔다.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동안 이사벨 여왕과 남편 페르디난도 왕은 상당 기간을 그라나다에 체류하였고, 종국엔 그라나다에 묻혔지만, 그들의 대부분의 통일 이후 통치기간동안 스페인 제국의 중심은 바로 이곳 세비야 였다.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완전한 스페인의 통일을 달성하던 그 해, 1492년 콜럼버스는 이곳 세비야의 과달카비르 강 하류에 있는 팔로스 항을 떠나 대서양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는 신항로 개척의 꿈을 싣고 출항했다. 2개월의 항해 끝에 그는 마침내 인도(?)에 도착했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산살바도르에 도착하여 신대륙을 발견하는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쾌거였다.
이 사건 하나로 이탈리아 도시공화국들이 주도하던 세계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게되는 대 변혁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지중해를 벗어 난 유럽은 비로소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그 핵심에 스페인이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스페인은 남미의 브라질을 제외한 중북부 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건설하면서, 식민지를 통해 들여오는 막대한 부를 통해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위대한 제국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세비야로 몰려 들었다.
세비야는 그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수많은 자원과 문화와 재화들이 세비야로 몰려들었다. 대서양을 통한 모든 교역의 종착지가 바로 세비야 였다.
팔로스 항구는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였고, 과달키비르 강은 대서양을 오가는 대형 범선들로 언제나 가득찼다.
팔로스 항의 상징과도 같은 '황금의 탑'이 과달키비르 강가에 버젓이 남아서 옛 영광과 당시의 위용을 그대로 과시하고 있다.
대항해 시대에 등대 역활을 하던 거대한 탑의 지붕을 황금으로 씌워 그렇게 되었다는 설과, 신대륙에서 가져온 황금을 보관하던 보물창고였다는 설이 존재한다. 암튼 그 두가지 가설 모두 과거의 눈부신 번영을 구가하던 세비야와 스페인을 잘 나타내 주고 있지 싶다.
바야흐로 세비야를 중심으로 스페인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세비야에서의 첫 아침을 맞는다.
어제 코르도바에서 난리도 아닌 난리(?)를 격었고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간에 겨우 숙소에 늦은 체크인을 하였던 터라 적지 않게 이 아침을 걱정하면서 맞지않을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어렵게 구했던 게스트하우스는 4층 건물에 4층 구석의 방이었고, 주방은 1층 출입구 옆에 붙어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솔직히 좀 암담한 심정이었으나........ 밤새 기적처럼 챠밍여사의 컨디션이 말짱하게 원상태로 회복되었고, 오르내려 본 결과로 좀 협소하기는 하지만 나름 유익한 여행의 경험이 될것이라며 흔쾌히 긍정적으로 부닥친 현실을 받아들여 주어서 크게 한시름을 놓았다.
모두가 코르도바 적십자 병원의 의사선생님 덕분이다.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분이시여. 땡큐입니다. 댕큐.'
이른 아침시간을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챠밍여사가 툭 한마디 던진다.
'뭐하고 있어? 세비야는 스페인 아니야? 스페인 사람들은 바르에서 진한 에스페레소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며? 세비야에는 바르가 없어? 일단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던지 에스페레소는 아니더라도 아메리카노나 라떼를 파는 바르를 찾아서 우리도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해야 할꺼 아니야? 싫어?"
헐!
이 사람 어제 코르도바에서 죽을지 살지 병원 응급실을 찾아가서 누웠던 사람 맞나?
스페인 환타(?)가 도대체 무슨 매직을 부렸기에 하룻밤새 이렇게 쌩쌩해 졌나???????
원기 회복을 감사해야 하나? 아니면 벌써부터 또다시 머슴노릇 쌩고생이 시작되는걸까?
헐!
아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만났다.
연극 무대에서가 아니라 세비야의 새벽산책길에서 진짜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만났다.
'올라.'
내가 아침 인사를 건네자 이발사는 면도를 위하여 비누거품을 칠하던 것을 멈추고 살며시 손을 흔들어 인사에 답해준다.
우리나라의 <춘향가>를 연상시키는 로맨틱 코메디라 할 수 있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피에르 보마르세'가 쓴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보마르세가 만든 연극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초연은 물론 서너차례 초기 공연에서 흥행에 참패를 격게된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보마르세는 실패때마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 연극을 관찰하고 연구해서 계속적으로 개작을 시도했다.
이 같은 실패가 거듭되자 나름 연극계에서는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지극히 불행한 연극으로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회자되는 기현상을 낳았다.
개작을 거듭하였음에도 모조리 흥행에 실패한 보마르세는 끝까지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대한 애정을 굽히지 않았다.
연이은 흥행의 참패를 거듭한 보마르세는 이를 벗어날 타개책으로 세빌리아 이발사의 속편격인 (피가로의 결혼)을 써서 무대에 올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의 속편격인 (피가로의 결혼)이 무대에 올려지자마자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보마르세는 그간의 모든 실패를 단 한번에 모두 극복하게되었다.
모짜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어서 먼저 무대에 올렸다. 그 또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오래오래 함께 살았습니다' 라고 해피앤딩을 노래한다면, 피가로의 결혼은 '사랑이 물흐르듯이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로맨틱 코메디의 속편격인 (피가로의 결혼)이 먼저 무대에 올려졌고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이 무대에 올려진지 30년이 지나서, 이탈리아의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이 사랑이야기의 전반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 그는 오랜세월동안 실패 내지 참패의 대명사로 남았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곡을 붙여 오페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전편과 후편이 바뀐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세빌리아의 이발사)라는 제목에 서린 저주때문이었을까? 오페라 공연은 거듭해서 참패를 격었다.
로마에서 역시 공연에 참패하고 무대를 떠나는 로시니에게 초면인 한 선배 음악가가 위로의 인사를 건네주었다.
'당신이 <세비야의 이발사>의 작곡가군요. 로시니씨 축하합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존재하는 한 이 작품은 끊이지않고 영원히 공연될 거요. 앞으로도 포기하지 말고 희가극만 쓰도록 해요. 다른 스타일은 당신 성격에 맞지 않을 테니.'
노 선배의 충고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얼마 지나지않아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다시 새롭게 부각되었고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실패를 거듭한 로시니에게 위로를 건네준 선배 음악가는 바로 노년의 (베토벤) 이었다.
이런 인연때문이었을까?
베토벤은 '세비야 교도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곡을 하기도 하였으니, 베토벤 생전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 이다.
그런가 하면 세비야나 그라나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등 스페인의 도시 곳곳을 다니다보면 사방에서 '돈 후안'을 만나게 된다. '몰리에르'의 사회적 풍자소설 (돈 후안)에 등장하는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또한 유럽 역사에서 카사노바에 비견되는 희대의 바람둥이 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사회복지사업에 지대하게 공헌한 사회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는 '모짜르트'에 의해서 (돈 조반니)로 환생되어 무대에 등장한다.
이 처럼 이 모든 희극과 오페라의 배경이되는 무대가 바로 여기 '세비야(세빌리아)'인 것이다.
대항해 시대를 통해 맞게된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이처럼 유럽전체의 문화와 예술과 경제와 종교의 중심지로 우뚝 솟아 올랐던 것이다. 유럽의 모든 지식인과 문학가와 소설과와 미술가와 음악가들이 모두 스페인으로........ 이곳 세비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고, 한 순간도 끊김없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음악이 울려 퍼지는 대표적 오페라가 바로 '죠르쥬 비제'가 작곡한 (카르멘)이고 역시 이곳 세비야가 배경 무대이다.
젊고 잘 생기고 미래가 촉망되는 군인 '돈 호세'가 이곳 세비야에서 팜므파탈의 원조처럼 받들어지는 매혹적인 집시여인 '카르멘'을 만나서 인생을 망치게 되고, 끝내는 카르멘을 죽이고 스스로 자신도 파멸의 길로 몰아넣게되는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오페라가 바로 (카르멘)이다.
돈 호세가 정열적인 여인 카르멘을 만나게 되는 곳이 바로 '왕립 담배공장(현 세비야 단과대학)'으로 세비야를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으례히 한번씩은 다녀가는 명소이다.
세비야의 새벽 공기는 아주 상쾌했다.
거기에다 스페인의 쾌청한 파란 하늘은 항상 우리를 감동 시켰다.
애국가에도 나오는 '가을하늘 공활한데......'라는 대목의 파란 가을하늘을 대한민국에서는 일년 중 며칠 쯤 볼 수 있을까?
어릴때는 그나마 가을에는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가을하늘을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공활하기까지 한 파란 하늘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제는 하늘을 떠올리는 자체만으로도 '미세먼지 노이로제'에 걸릴판이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속인가?
스페인의 하늘은 당장 비가 내리는 하늘이 아니면 항상 공활하다. 새파랗다 못해 짙은 코발트 빛으로 눈동자가 짖무를 정도로 맑고 파랗다. 한국의 공활한 가을하늘은 스페인 하늘색에는 명홤도 못내밀것 같다. 하늘 자체만으로도 그림이 되고 배경이되고 예술이 된다.
참 부럽다.
부러운 것이 참으로 많은 스페인이다.
과달키비르 강변길을 산책한다.
멀리 아침 미명의 그림자 너머로 '황금의 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일대가 대항해 시대를 주름잡던 '팔로스 항구지역' 이다. 하지만 이제는 옛 영화를 짐작해 보는것 조차도 쉽지 않을만큼 참 많이 변했다.
흡사 우리나라 나주시의 영산포를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영산포 하면 이제는 나주시 변두리의 개천 뚝방길 정도로 연상되지만, 옛날에는 수많은 고깃배와 소금배와 조세미를 싣고 한양으로 향하는 배들로 가득했던 아주 커다란 항구이자 포구였다. 지금은 내륙의 하천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바닷물이 들어오고 파도가 몰아치던 엄연한 항구였다. 바다에 직면해 설치된 항구는 거센 파도와 해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배들의 입항과 출항과 물건의 선적과 하역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보니 바다로 향하는 강의 하구중에서 해수면이 넒고 수심이 깊은곳을 찾아서 바다를 막 벗어나 강의 내륙으로 접어드는 지점에 포구를 설치하고 장사를 하고 교역을 하였던 것이다. 그게 영산포였고, 세비야의 팔로스 항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하류로 조금만 나아가면 곧 과달키비르 강이 끝나고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대서양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새벽 산책이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올레' 하고 아침인사를 나눈다.
강변 산책길을 벗어나 세비야 외곽 지역의 골목길을 순례하던 중 (Las Piletas)라는 레스토랑 겸 타파스 매장을 만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마치미내 바르를 찾아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는 말이다. 이 바르를 택한것도 특별한 이유는 없이 연실 현지인들이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는 따라 들어간것 뿐이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이미 안쪽에도 제법 많은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의가 에스페레소에 빵이나 케잌 한조각씩을 먹고 있있다.
그렇게 무심코 남들을 따라 들어간 바르였는데....... 이곳이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유명한 타파스 점으로, 현재까지도 세비야는 물론이고 여러곳에서 유명한 투우사들이 찾아와 애용하는 역사적으로도 아주 유명한 장소라는 것을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아주 아주 인상 깊었던 장소에서 우리도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해서 먹었다.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또 하나........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황당한 경우를 경험하게 된것은........
우리가 체류한 약 30분 정도의 시간에...... 적어도 열 서너번 정도의 정전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소리치는 사람도 없고........ 직원들도 그려러니 순서를 바꿔가면서 차단기를 오갔다. 다들 으례히 이곳에서는 그려러니 하는 분위기였다. 연속적이거나 지속적으로 정전이 된다는 것은 어딘가가 누전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자칫 화재로 번질수도 있으니 서둘러 점검 내지는 수리에 돌입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하도 답답해서 어째 그러느냐고 물어 봤다.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어딘가 누전으로 인한 잦은 정전이란다. 또 대부분은 쉽게 상황이 변하거나 아무탈이 없기도 한데 오늘따라 유독 심하다는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왜 안고치냐고 물어봤다. 이 가계가 역사적으로 아주 유서깊은 오래된 건물인데 대부분의 전기 시설이 나무 인테리어 안쪽의 벽속으로 설치가 되었단다. 그래서 전기를 손보고자 하면 거의 이 가계를 홀랑 뜯어버리고 다시 지어야만 한단다. 그래서 차마 홀라당 뜯어버리지 못하고 불편하지만 그러려니하고 손님이나 종업원이나 주인이나 대충 그렇게 지내고 있단다.
헐!!!!
이건 하나도 안부러웠다.
향이 유독 진하고 그윽한 세비야의 모닝 커피를 마치고 우리는 아침을 시작하는 현지인들을 만나러 다시 아침 산책길로 나섰다.
어디를 가나 현지인들의 아침 풍경은 모두가 비슷비슷하다.
'올라.'
하루 장사를 위해 생선가계를 열던 젊은이가 나에게 아침인사를 건네온다.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이요? 오! 한국 잘알지요. 반갑습니다. 이곳 시장 가계들은 주로 저녁시간에 활성화 된답니다. 아직 닫혀있는 가계들도 그때는 모두 문을 열고요, 맛있는 음식들이 아주아주 많이 나와요. 꼭 저녁 시간에 한번 오세요.'
시장을 지나 골목을 돌다보니 아르다운 아줄레주(타일 미술)가 건물 벽면에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잠시 멈춰서서 바라보다가 느끼는 바가 있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뿔싸.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주변 풍경들이 고스란히 그 아줄레주 벽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것이 아닌가? 주변의 실제 모습이 아름다울까? 아니면 벽면에 붙어있는 타일 그림(아줄레주) 속의 풍경이 더 아름다울까?
세상에나........
' ....... 이 건축공사가 모두 마무리되고나면, 이 대성당을 보게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자리에 모인 우리들을 모두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구상에 다시는 없을 위대한 건축물로 지어야만 한다.'
1401년 세비야의 성당 참사위원회는 이 겉은 결정을 선포했다.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크고 거대한 성당을 짓기로한 공사가 첫삽을 뜨게되었다. 100년을 훌쩍 뛰어넘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성당(두오모)을 짓기 위하여 '대성당 건축 추진위원회(두오모 오페라)'가 설립된지 약 104년이 지나서 스페인의 세비야에서도 같은 이유로 '세비야 대성당 건축 참사 위원회'가 발족한 것이다.
세비야 대성당은 너비 116m에 길이 76m의 거대한 건축물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후로 생겨난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서 현재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규모를 뽐내고 있다.
웅장함이 중압감처럼 느껴지는 외관뿐만이 아니라, 뾰족한 탑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 솟아나있는 대성당의 풍경은 당시 이 건축에 참여하고 관여한 사람들의 간절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슬람 양식의 모스크를 허물고 새롭게 교회 건축물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대성당의 곳곳에는 뿌리채 뽑아내듯 다 지워내지 못한 이슬람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세비야 대성당의 정문격인 서쪽 중앙의 '승천의 문'을 매일아침 일찍 찾아가면 대성당 안으로 무료로 들어갈 수가 있다. 대성당이 현재에도 세비야 사람들의 신앙적 장소로 이용되고 있기에 매일아침 기도시간을 전후해서 누구에게나 개방되고, 그 기도시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개관을 하게된다. 다만, 예배를 위한 임시개관이기에 출입구와 기도처를 비롯한 지극히 일부만을 정해서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들이민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풍당당한 대성당의 위용을 실감할 수가 있다.
우리는 아침 산책길에 대성당의 안쪽을 일부지만 구경할 수가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세비야 대성당을 찾아갔다. 대성당의 일부를 들여다 보기는 했지만, '콜럼버스이 묘'를 보지 못했고 아직 '히랄다 탑'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여행자를 위해 열려진 '산 크리스토발의 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간다.
매표소에서 표를 산 뒤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오렌지 정원이 멋들어지게 펼쳐진다. 싱그러움과 이슬람의 향기가 가득 풍겨나오는듯 하다.
싱싱한 오렌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너머로 우뚝솟아있는 히랄다 탑이 한껏 자신만의 독특한 위용을 맘껏 뽐내고 서있다.
그리고 대성당으로 막 들어서려는 앞에 한 손에는 방패, 다른 한 손에는 종려나무 잎을 든 여인의 조각상이 발걸음을 가로막은듯이 서 있다. 우아한 자태가 몯보인다. 어디선가 본듯한 낮익은 이 조각상의 이름은 '엘 히랄디요'로서 '신앙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상이다. 한손에 들고 서 있는 방패는 방패라기 보다는 얼핏 아주 커다란 둥근 방패연을 연상시킨다. 어째서 느닷없이 등장한 이 조각상이 낮이 익을까를 생각해 보니........ 히랄다 탑의 꼭때기에 설치된 조각상과 한치의 틀림도 없는 쌍둥이 조각상이다.
어쩐지.........
히랄다는 '바람개비'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커다란 방패에 와닿는 바람에 의해서 이 조각상이 빙글빙글 돌게 만들어졌기에 아랍어 기원에서 '히랄다(풍향을 가리키는 닭)'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세비야 대성당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15세기 고딕성당의 진수를 고스란히 보여주고있는 대성당은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와 갖가지 벽화들로 가득차서 웬만한 미술관을 방불케한다. 그 화려함과 장엄함은 굳이 카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넋을 놓고 한참동안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대성당의 중앙에 바로 (콜럼버스의 묘)가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대성당 내부를 모두 둘러보고 내부 통로를 통해 찾아가게 되는 '히랄다 탑' 또한 대성당의 일부인 것이다.
*** ' 나 이대로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어.' 어느새 챠밍여사의 눈시울이 촉촉히 젖어가고 있었다.
이번 여행중에 챠밍여사가 벅찬 감동으로 할 말을 모두 잊고 눈물을 글썽인적이 세번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 가족 성당)'을 처음 마주대하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아주 한참동안을 말이다.
몬세라토 수도원에서 트래킹 도중에 산골짜기 벼랑 위에 십자가에 서서 계곡 저만치 수도원을 건너다보면서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감동에 벅차 '주저 앉아 마냥 펑펑 울고 싶다'고 하소연 한 곳이 바로 세비야 대성당의 '콜럼버스의 묘'를 바라보면서였다.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는 스페인에 황금시대를 안겨준 위대한 항해자이자 탐험가이며 개척자 이다.
그런가 하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전무후무한 침략자이자 약탈자이며 극한의 살인광이 되기도 한다.
그가 위대한 승리자가 될것인지, 탐욕으로 가득찬 미치광이가 될것인지는 다분히 우리 각자의 시선과 판단에 따라 달라지게 평가될 것이다.
과연 후대의 이런 상반되는 평가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 나는 직접 찾아가 꼭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이 행한 일들에 어떤 평가를 내리고 계십니까?"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 사람들은 콜럼버스를 이탈리아를 빛낸 위대한 탐험가라고 생각하지도 자랑하지도 않는다. 전혀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승리한 스페인이 제노바를 식민지배하던 시기에 그곳으로 가 정착한 스페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속지주의냐 속인주의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아무튼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모두 인연을 둔 것은 사실이다.
군인을 동경하기도 했고 상인이 되기를 부모가 바라기도 했지만, 끝내 콜럼버스는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를 택했다. 하지만 당시의 이탈리아는 선박제조나 항해술에 있어서 낙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해양 선진국이었던 스페인으로 떠났다. 스페인에서 선원으로 일하던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포루투갈에 항해왕자 엔리케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새로운 범선을 제조하고 새로운 항해술을 개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문물을 접하려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엔리케 왕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남쪽 항로를 개척해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콜럼버스는 서둘러 포루투갈 리스본으로 떠났다. 새로운 선박제조 기술과 항해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에게는 대서양을 건너 서쪽으로 나아가려는 야망이 가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대서양을 건너 인도에 닿겠다는 열망이 그를 부단하게 채찍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바로 자신을 가르치고 이끌어주던 선장의 딸이었다. 오래지 않아 콜럼버스는 신문물을 모두 섭렵한 뛰어난 선장이자 항해사가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콜럼버스는 장인을 통해 여러 후원자들과 종국엔 엔리케 왕자에게까지 자신의 야망인 '서쪽 항로 개척'에 뜻을 피력했다.
하지만 이미 남쪽 항로에서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둔 포루투갈의 모든 후원자들은 콜럼버스의 서쪽 항로 개척엔 아무도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았다.
포루투갈에서 희망을 잃은 콜럼버스는 포루투갈을 떠났다. 멀고 먼 영국에서도 냉대했다.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에서는 명함조차도 내밀지 못하게 했다.
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스페인 뿐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의 정점에서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 침공이 한창인때였다. 타이밍이 전혀 맞지를 않았다. 국가의 모든 관심과 역량이 그라나다 전쟁터에 쏠려있는 마당에....... 뜬금없이 서쪽 바다로 배를 띄워야 한다니........
스페인의 어느 누구도 그의 주장에 귀를 귀울여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판에 딱 한사람........... 이사벨 여왕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여왕의 남편인 페르난도 왕까지 나서서 '콜럼버스의 미친 헛소리'라고 힐난하는 마당에 여왕은 따로 콜럼버스의 알현을 허락했다.
콜럼버스는 매우 지능이 뛰어나고 달변가이면서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여왕이 주된 관심사를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여왕 앞에서 수많은 학자와 신하들을 상대로 콜럼버스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놓고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여야만 했다.
이미 서너걸음 앞선 포루투갈의 남쪽 항로 개척과 불확실 투성이인 콜럼버스만의 서쪽 항로에 대한 확률재고, 천문학적인 투자 비용 등등에 대하여 뜨거운 논쟁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콜럼버스에겐 여왕을 향해 쓸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여왕페하께서는 지금까지 레콩키스타(카톨릭에 의한 스페인 국토 회복운동)를 성공적으로 이끄셔서 이제 이교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날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과연 누구를 위한 운동입니까? 여왕페하의 공적을 남기기 위함입니까? 스페인만을 위함입니까? 감히 저는 그 어느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를 땅끝까지 몰아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에 가득하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받치고, 주님께서 기쁘시게 받아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스페인은 통일될것이고 이교도는 물러갈 것입니다. 이곳에서 쫒겨난 이교도들이 또다시 어디에 거점을 차지하고 준동하게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저 서쪽 바다건너 어디엔가 미지의 땅이 있고, 그 땅에 어떤 부족이나 나라이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이 있다면.......... 제가 그들을 찾아가 하나님을 알리고 믿게끔 하고 싶습니다. 쫒겨간 이교도들이 그곳을 찾아내기 전에 말입니다. 미지의 땅에 살고있는 야만인들을 하나님 앞에 이끌어 나와서 기독교인을 만드는것 또한 주님게서 크게 기뻐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 먼훗날 찾아가 보니........ 그들이 이제까지 만행을 부렸던 이 안달루시아처럼 이교도들의 천국을 만들어 놓았다면 어찌 주님께서 크게 슬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왕페하. 인도 항로만을 개척하고자 함이 결코 아닙니다. 그 여정중에 미개한 이민족이나 이교도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들을 키독교인으로 개종시켜 이끌어 주고자 하는 지극히 존엄한 가르침 때문이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십시요.'
'선교 목적' '복음 전파.
요대목이 그냥 이사벨 여왕의 가슴속을 깊디 깊게 사정없이 마구마구 파고 들었다.
여왕은 콜럼버스에 대한 대대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결정했다. 남편과 모든 신하의 절대 반대 속에서 '정히 그렇다면 스페인의 국고를 쓰지 않겠소. 내 개인 사비에서 그 모든것을 충당할 것이요'라고 했지만, 전제왕정 시대에 나라것하고 왕 개인것하고 구분이 어디있어. 다 그게 그거지.......
1492년 8월 3일. 마침내 콜럼버스는 세비야의 팔로스 항을 떠나 대서양을 힘차게 출발했다.
'여왕 페하.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여 반듯이 지구의 오른쪽 오리엔탈 지역 인도에 닿도록 하겠습니다. 인도 항로를 개척함과 동시에 몽골의 칸과 교역 협정을 체결하고 반듯이 그곳에 카톨릭을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동방의 카톨릭과 서방의 카톨릭이 힘을 합쳐서 이교도 집단인 이슬람을 격파하고, 마지막엔 성지인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위대한 여정의 초석을 놓고 돌아오겠습니다.'
콜럼버스는 팔로스 항을 떠난지 두달만인 10월 12일에 카리브 해의 산살바도르에 도착한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이곳을 인도(India)라고 믿었다. 그래서 종국엔 이곳을 '서쪽에 있는 인도'라는 의미의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혹 콜럼버스가 생각보다는 좀 멍청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에서, 그리고 포루투갈에서 바다로 나가 항해를 하고자 하는 목적은 오로지 '인도로 향하는 항로'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냐면 당시엔 (황금 1KG = 향신료 1KG)으로 가치가 형성되고 거래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향신료와 황금이 1:1 로 거래되던 시기였다. 그런 이유로 육로든 해로든 어떻게든 너도나도 인도에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항구에서나 스페인 항구에서나 포루투갈 항구에서 인도에 관한 정보나 향신료에 대해서 어느정도 풍부한 지식을 갖추었어야만 했다.
터번을 쓰고 흰 수염에다 피부는 유난히 까맣고...... 향신료 종류와 인도인들의 풍습과 식생활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코브라 놀이와 커리 음식은 알았어야만 했다.
콜럼버스는 정작 인도가 아닌 카리브 해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만 되어도 중남미 원시인과 인도인은 확실하게 구분한다. 전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선각자이자 탐험가인 콜럼버스는 죽는 날까지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
터번 쓴 사람도 없고, 코브라 쇼도 없고, 매운 커리도 없고............ 같이 간 일행중에도 인도의 실체에 대해서 알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에베레스트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면서 등반을 떠났다면........ 인근의 한참 낮은 산에 올라가 '세상 최고봉을 정복했다'고 외쳐도 되는건가?
어떻게 인도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 인도를 찾아 바다로 나섰단 말인가?
귀환한 콜럼버스의 배엔 향신료는 전혀 실려있지 않았다.
대신 금덩어리와 은덩어리가 실려 있었다.
이듬해 바로셀로나 '왕의 계단'에서 성대한 환영잔치가 벌어졌다.
바야흐로 '스페인의 황금시대'가 그 서막을 올린 것이다.
두 차례의 원정을 통해 콜럼버스는 중남미(서인도 제도)에서 황금 120톤과 은 8.000톤을 스페인으로 가지고 왔다.
하루 아침에 스페인은 돈이 넘쳐나는 유럽 최고의 부자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돈이 넘쳐나다 보면 항상.........
인플레이션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인류 역사의 정설이다.
인플레이션이 생기면....... 극과 극의 상황이 발생한다. 극한의 부를 축적하는 자와 극한으로 내몰려 부를 착취당하는 자들로 나뉘게 된다.
이는 다시 대립과 마찰로 이어지고....... 끝내는 공멸한다.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온 엄청난 부는 스페인을 황금시대로 만들었지만, 넘쳐나는 부는 오래지 않아 스페인을 '영원한 유럽의 2류 국가'로 전락 시키고 만다. 중세 시대 이후로 유럽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3강 구도 속에 유지되어 왔다. 황금시대를 지나면서 스페인은 쓰러진다. 유럽은 이제 (영국. 프랑스. 독일)이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되는 새로운 시대적 국면을 맞게되는 것이다.
그럼 이 역사의 풍운아 콜럼버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애초 이사벨 여왕의 절대적 지원을 약속받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서약이 있었다.
첫째, 그가 발견하는 신대륙에서 얻게되는 모든 재원은 스페인에 귀속되지만 그 중 10%만은 콜럼버스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가 개인 소유하도록 허락한다.
둘째, 그가 발견하는 영토는 스페인의 영토로 귀속되지만 콜럼버스가 그곳에 상주하며 다스리도록(총독) 허락한다. 불하받은 재산과 통치권은 그의 혈육에게 세습되도록 허락한다.
셋째. 그가 발견하는 영토에는 그의 공적을 담아 콜럼버스의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넷째. 평민의 신분이었던 콜럼버스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이같은 약속이 담긴 서류에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는 사인을 했다.
엄청난 황금과 은이 신대륙으로 부터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부유해진 상인들은 부패한 귀족들을 부추겼고, 탐욕에 눈이 먼 귀족과 왕족들은 애초의 약속을 무시했고 콜럼버스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이미 신대륙은 발견 되었고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오는 마당에 10%라는 실로 어마어마한 부가 콜럼버스 개인에게 고스란히 할당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의 이사벨 여왕의 심정과 태도는 분명하게 전하여 지지 않는다.
콜럼버스에게 식민지를 다스리는 총독의 직함은 주어졌지만, 스페인에 갖다바친 재화의 10%가 자신에게 되돌아 오지 않았고, 기대했던만큼의 작위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 부와 지위가 세습되기를 바랬던 그의 염원도 스페인의 궁전에서 벌어지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지켜질리가 만무했다.
실제 만년의 콜럼버스는 신대륙에서 자신이 가진(여왕이 서면으로 약속한) 배당금 10%를 포함한 재산과 통치권과 세습권을 가지고 망명을 생각했다. 그가 만약 분명한 서면을 통해 이탈리아나 프랑스나 포르투갈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망명했다면....... 이는 실로 엄청난 파급을 낳았을 것이다. 교황이 중재에 나서도 어쩌지 못하는 국가간에, 아니면 이해관계에 따른 국제적 대 혼란의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당시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첫항해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귀국길에 풍랑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여 세비야의 팔로스 항이 아닌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구에 피난하게 된다. 이곳에서 콜럼버스는 제르니모스 수도원에서 포르투갈 왕을 만나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신대륙 발견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포르투갈 왕은 배를 수리해 주고 식량을 주어서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협조했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두번째 항해 이후에 엄청난 재화가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후회가 막심한 포르투갈 왕은 뒤늦게 마음을 바꾸어 먹고 세상을 향해 '신대륙은 처음부터 포르투갈의 영토다'라고 선언한다.
1차 원정에서 조난 당하여 제발로 포르투갈 영토로 콜럼버스가 스스로 떠내려 왔으며, 그때 이미 자신에게 신대륙에 대한 모든것을 양도하기로 약속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스페인은 즉각 포루투갈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제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포르투갈을 혹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바야흐로 지중해 제해권에서 벗어나자 마자 대서양과 신대륙을 놓고 또 한판의 세계대전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결국 다급한 상황에서 교황청이 나섰다.
이미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나가는 인도항로를 확보한 포르투갈은 이번 대서양 항로마저 차지하게 된다면 지구 전체를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급격하게 부상하여 인류 역사상 최강을 무적함대를 지니게 된 이참에 포르투갈 영토는 물론 그들이 이미 차지한 인도항로마저 빼앗을 심산이었다. 양측이 모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교황은 중재안을 내놓았다.
지구를 북반부와 남반부로 나누는 자오선을 들이밀고, 인도 항로를 포함하는 남반부는 포르투갈이 해상 지배권을 갖는다. 하여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는 물론 브라질을 포함한 남미의 통치권을 포루투갈이 보장받게 된다.
북반부를 할애받은 스페인은 대서양 항로를 포함해 중남미 지역(카리브 해) 이북의 바다를 지배하도록 한다. 하여 중 북부 아메리카가 스페인의 통치지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 온 황금으로 인플레이션이 터지고,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의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게 몰상당하는 순간까지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재판격인 트라팔카 해전에서 무적함대가 무참하게 깨졌다. 새로운 강대국이 초연하게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스페인의 황금시대가 지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교황이 제시한 자오선을 기준으로 한 바다의 양분 원칙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스페인도 포르투갈도 영국의 안중엔 없었다.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심지어 인도까지 모두 영국의 손아귀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실제 교훈이 있었음에......... 만약 콜럼버스가 이미 그때에 자신의 지위와 지분을 가지고(여왕의 서약서) 영국에 혹은 프랑스에 의탁하기라도 했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
이런 상황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중에....... 콜럼버스에게 죽음의 사신이 찾아왔다.
스페인을 믿을 수 없었던, 스페인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했던 콜럼버스는 '나의 시신을 처음 신대륙을 발견했던 장소인 카리브 해의 산살바도르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첨언하기를...... '여하한 경우이던 나의 시신이 스페인 땅에 닿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에 당부를 하였다.
콜럼버스는 죽었다.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신대륙의 총독이 되기는 했으나 애초의 약속대로 세습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콜럼버스의 후손들은 스페인에 의해 약속이 지켜지지는 않고 있지만, 스페인이 역사의 정통성을 내던지지않는 한, 이사벨 여왕이 서명한 약속은 반듯이 실행되어야만 하는 국가(왕정)의 약속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콜럼버스였기에 그 서약서를 이탈리아에 위임한다면........ 당연히 이탈리아 국가 차원에서 10%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설 것이다.
스페인은 깨닭았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의해 생겨났고 스페인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며 죽어서도 스페인의 영역과 관리와 보호속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때부터 국가 차원에서 콜럼버스 우상화 작업이 펼쳐졌다.
작금의 스페인 영토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고 존엄한 분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그 다음은........ 이사벨 여왕이 당연하겠지만....... 아마도 아닌것으로 보여진다. 스페인에서 인간중에 가장 위대하고 높은곳에서 존경과 칭송을 받는 인물은 아마도........ 콜럼버스일 것이다. 그 다음이 아마도 이사벨 여왕으로 보여진다. 콜럼버스가 여왕 앞에 무릎꿇고 알현하는 그림이나 조각상도 많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같은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콜럼버스 동상처럼........ 콜럼버스는 지상에서 100미터 정도되는 높이에 아주 거대하고 웅장하고 품위있게 우뚝 서있고....... 그의 발치 아래, 100미터 쯤 아래 여왕이 왕좌에 앉아있는 동상도 무척이나 많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위대한 군주인 이사벨 여왕의 옆에 나란히 서있는 남편 페르난도 왕은 있지만........ 이사벨 여왕의 윗쪽에 놓여질 수 있는 사람은 콜럼버스가 유일하다.
이는 마치 스페인 사람들에겐......... 이사벨 여왕은 인간으로서 가장 높고 지극하신 존재이고, 콜럼버스는 거의 신에 가까운 지극히 높은 곳에 오르신 영웅이 아니었을까?
스페인은 당연히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영토안에서 잠들어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유언대로 그의 후손들은 산살바도르에 유해를 묻고 지켜왔다. 유해 송환 노력은 세기를 넘어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유언을 앞세워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스페인의 후대 왕이 묘수를 찾아냈다.
콜럼버스의 유언을 받드는 조건으로 유해의 송환을 새롭게 요청했다. 그러자 산살바도르도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했다.
스페인 영토에는 뭍히지 않겠다는 유언을 받들겠다고 했으니....... 아마도 스페인으로 유해를 가져다가 국가차원에서 성대하게 장례절차라도 진행한 후에, 다시 산살바도르로 되돌아 오든가, 아니면 고향 이탈리아 제노바쯤에 뭍히겠지 하는 생각들이 대부분이었다.
산살바도르에서 스습된 유해는 화장되었다. 화장된 콜럼버스의 유분은 미국을 거쳐서 마침내 스페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왕의 약속대로 콜럼버스이 유분은 단 한순간도 땅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극진한 예로 최선을 다해 그의 유언을 실행에 옮겼다.
성대한 의식속에 세비야에서 마침내 스페인으로 돌아온 콜럼버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콜럼버스의 유분은 한동안 베일에 싸인 채 철저하게 비빌에 붙여졌던 세비야 대성당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 이미 마련해 놓은 무덤에 안치되었다.
왕은 콜럼버스의 유언을 모두 지켰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땅이 아니라 허공에 떠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무덤에 잠든 것이다.
이사벨 여왕이 다스리던 스페인은 네개의 소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네개 왕국의 당시 재배를 하던 실제 왕들의 거인 조각상이 콜럼버스의 관을 어깨에 메고 서 있다. 감동이 밀려오고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장관이다.
카스티야와 레온, 그리고 아라곤과 나바라의 왕들이 영원히 콜럼버스의 관을 들고 서 있는 형편이 된 것이다. 앞의 두 왕은 콜럼버스를 지지해준 왕들이라 고개를 번듯하게 들고 밝은 표정이다. 뒤쪽의 두 왕은 콜럼버스를 질시하던 왕들인지라 창피하고 비통한 표정들이다.
아무리 귀족 신분으로 격상되었다곤 치더라도........ 스페인을 다스리던 네 명의 왕이 영원히 관을 어깨에 메고 서 있어야 할 판이 되었다면....... 콜럼버스의 위상은 어디쯤으로 보아야만 할까?
세비야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히랄다 탑(La Giralda)'은 분명 세비야 대성당의 부속 건물이다.
이슬람 점령 시기에 모로코에서 건너 온 알모하드 왕조에 의해 건설된 모스크의 '미나렛 (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국토회복운동 이후 16세기에 들어서 이슬람 사원을 철페하고 교회를 새롭게 건축하면서 미나렛 역시 기독교식 종탑으로 바꾼 것이다.
스페인의 카톨릭은 이 자리에 있던 거대한 이슬람 사원을 철저하게 제거했다.
하지만 이곳 미나렛만은 모스크의 첨탑이기 이전에 놀라운 건축술과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차마 철거하지 못하고 보완 증축하여 교회의 종탑으로 변형시키기로 결정하고 만다. 종교적 이념이나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위대한 건축물로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현재 여행자가 올라갈 수 있는 33층이라 표시된 약 70미터의 전망대까지는 옛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이슬람식 모스크의 미나렛이다. 이슬람은 이 전망대 자리에 모스크의 전형이랄 둥근 돔을 설치했었다.
차마 이 아름다운 첨탑을 허물 수 없었던 스페인 카톨릭은 돔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종탑을 세웠다. 흔히 이탈리아 건축에서 말하는 '랜턴'으로 종탑을 세우고, 그 위에 바람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 조각상 '히랄다'를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새로만든 이 종탑의 높이가 약 97.5 미터에 이른다 하니......... 그러고 보니 피렌체의 두오모나 그보다 조금 낮은 조토의 종탑이나....... 기독교의 전망이 빼어난 건축물들은 대부분 95 미터 전후이네. 중세 시대에 95 미터를 들어 올렸다면.......... 헐.
히랄다 탑의 아름다움 보다 건축학적으로 아주 뛰어난 특징중 한 가지는.......... 계단이 없고 위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여타의 건축물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그저 1층 공간이 주는 느낌이나 33층의 공간이 주는 느낌이 별반 다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왕이 말을 타고 올라가기 위해서 계단을 없앴다는 이유 보다는 이슬람 건축술의 매우 뛰어난 공간 활용기술이 대단히 그고 감명 깊게 확인되는 순간이다.
종탑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세비야 시내의 전경과 함께 평지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대성당의 감춰진 머리 부분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뾰죽뾰죽하게 돌출된 고딕식 탑들과 탑들을 연결하고 있는 아치가 훤히 그대로 들여다 보인다. 마치 중세의 건축술이 감추어 두고 싶었던 비밀들을 슬쩍 들여다보고 있는것 같은 착각마저 생겨날 정도이다.
지상에서 올려다 보면 그저 한없이 웅장하고 거대하기만 했던 건물이 살며시 종탑에 올라와서 살펴보자니....... 엄청나게 커다란 돌덩이로 기본 구조의 뼈대를 만들어 놓고나서 그 구조물에 덕지덕지 고딕 양식의 장식을 가미했고, 이들을 또 하나의 거대한 철구조물로 서로 엮어서 무게를 지탱하게 한 고딕식 아치의 실체나 비밀을 슬쩍 염탐하듯이 들여다 보는 기분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져 오기 때문이다.
이 비밀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거치고 나서야....... 성당의 내부를 저토록 화려하고 성스럽게 치장했으리라.
사방으로 뻗어나가 서로를 연결하고 있는 립볼트들이 새삼 그 어떤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로마인들이 찾아낸 바실리카 양식이 떠오르고, 바실리카를 있게한 아아치의 발명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는지가 새삼스레 다시 생각이 난다. 그것들이 있고 나서야 비로서 건물의 하중이 분산되고 넓은 공간이 창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인류는 보다 넓은 공간 창조를 위해서, 그리고 높이에 상관하지 않는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아아치 형태로 지어진 모든 건축물의 한가지 단점은 아아치를 통해서 높은 하중을 분산 시킬 수 있게 되었지만, 외부로 발산되는 분산된 하중을 버텨낼 방도를 찾는 것이었다. 이스탄불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경우에는 이슬람이 점령한 후 외부로 분출되는 높은 하중으로 인하여 성당이 점점 기본 구조를 잃게되자 화강암으로 거대한 부벽을 만들어 여러 방향에서 이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기독교가 지은 건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슬람식 부벽을 추가로 설치해 현재에 이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세비야 대성당의 경우는 지상 외부의 부벽을 설치하지 않고 지붕 위에 립볼트(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여 서로 견고하게 잡아당겨주는 방식)를 설치하여 외부로 뻗어나가려는 하중을 지탱해 주고 있다.
립볼트의 중요성과 그 효용가치 외에도 그 자체에서 어떤 감동적일만큼의 아름다움이 느껴져 온다.
실로 아름답다. 이렇게 보고 있노라니 립볼트라는 것이 어떤 '희생' '헌신'으로 마음속에 다가온다.
히랄다 탑을 찾는 여행자가 너무나 많다.
그저 앞사람의 등짝만 바라보며 완만한 경사를 끊임없이 올라가는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전망대에 오르기는 했는데...... 아뿔싸. 세비야 전경을 내려다 보는것도 수월치가 않다.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치고..........
탑을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인파를 비켜가면서 겨우 창문을 통해 주변 풍광을 구경할 수 밖에........
그래도.........
그래도 히랄다 탑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만큼........
히랄다 탑을 내려오면 유난히 푸른 색상이 빛을 발하는 오렌지 정원이 여행자의 지친 발걸음을 위로해 준다.
이 역시 전형적인 이슬람 모스크의 흔적이다. 중앙에 항시 물이 넘쳐나는 분수를 두고 노랗게 익은 오렌지를 주렁주렁 매단 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냥 아무데고 그늘에 드러누워 달콤한 낮잠에 취해보기엔 딱이지 싶다.
대성당에서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하나다. 바로 '면죄의 문'이다.
대성당을 둘러보면서 심신을 정갈하게 추스른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속세의 모든 죄를 사하여 준다'는 의미로 느껴져서, 이제 세상으로 나서야 하는 발걺음에 한결 어떤 용기가 샘솟는것만 같다.
'그간 모아놓은 돈이 없어서 면죄부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할레루야. 아멘 아멘.'
그렇게도 철저하게 이슬람 모스크의 흔적을 지우고 삭제하고 허물어 트렸음에도........ '면죄의 문'은 여전히 완벽한 이슬람 사원의 성소로 통하는 출입문이었다. 이 아름다움을 차마 어떻게 지워버리고 털어낼 수 있을까보냐.
아름답다.
면죄의 문을 가만히 살펴보자니......... 기독교식 교회 이전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이슬람 사원(모스크)의 모습이 사뭇 궁금해 진다.
아니....... 사무치게 그리워 진다.
이는 종교적 교리나 가치의 문제가 아니다.
'가이샤의 것은 애초부터 가이샤의 것이 되는 것이 옳지않겠는가?'
대성당을 나와 세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산타 쿠르스 거리'가 나온다.
세비야에서도 중세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예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대단히 아름다운 지역이다.
이 지역을 아름답게 만든것은 처음 유대인들이었으며, 명성이 높아지자 세비야의 구족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미로처럼 서로 얽혀있는 사방으로 뻗어나간 골목길 안쪽으로는 고풍스런 아름다운 집들이 빼곡히 처마를 맞대고 늘어서 있다. 새하얀 벽에는 무수히 많은 꽃들이 장식되어 있고, 화사한 타일로 꾸며진 출입문과 다양한 화분으로 장식된 발코니가 이채롭다. 이곳저곳의 좁은 공간에도 녹음 무성한 작은 광장들이 들어서 있고 예쁜 소품이나 도자기류를 파는 앙증맞게 생긴 상점들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좁은 골목 한쪽으로 나앉은 카페나 레스토락의 테이블과 으지들은 마치 곳곳의 광장을 자기집 앞마당으로 여기는 듯 싶다.
길을 찾아 나가기에 제법 어려움을 격을것만 같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며 무슨 걱정인가?
이 느낌과 풍경들이 바로 세비야의 본래 모습인것을........... 길을 잃어 본들 어떠리? 시간이 좀 지체된들 무슨 걱정이겠는가?
이 골목이....... 마주치는 이 사람들이 바로 세비야의 진면목인 것을.......
저기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돈 호세일지도 모르고......... 어느새 딴남자의 팔장을 끼고 가는 카르멘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광장 저쪽 노천 카페에서 아리따운 여인에게 와인을 따르고 있는 저 남자가 어쩌면 돈 후안일지도........
허기를 느껴 우리도 대성당이 건너다 보이는 길가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늘이 드리워진 길 건너편의 카페에 자리를 잡은 것은 대부분 검은 머릿결의 동양인들 모습이다. 서양인들은 대부분 따사로운 햇쌀이 그대로 내려쬐고 있는 양지쪽의 노천 카페에 앉아서들 그대로 눈부신 햇쌀을 즐기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우리도 햇쌀 가득한 양지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코르도바에서 이동해 세비야에 도착하였고, 며칠동안 제대로 먹은것이 없는 챠밍여사였다. 적십자 병원에서 처방받은 링게르 한병과 스페인표 특수 환타가 그동안의 전부였는지라...... 여전히 커디션이 걱정되던 터라 편한 음식으로 선택하라고 양보를 했는데......... 아뿔싸.
커다란 생맥주를 각자 한잔씩 주문한다.
헐.
올리브유가 듬뿍 뿌려진 넘치도록 푸짐한 샐러드에 방금 막 구워낸듯한 빵이 푸짐하게 나온다.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생맥주를 가볍게 시음하고는.......... 이 사람 며칠 아팠던 사람 맞나 몰러? 무지무지 맛있게 잘도 먹는다. 며칠 어찌 참았을꼬?
며칠 절약해 둔 식생활비.......... 실로 걱정이 된다. 앞으로가 심히 걱정이 된다.
또 헐.
대성당이 있는 콘스티투시온 거리를 지나 세비야 현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옛 정취 가득한 올드시티의 한복판이랄 수 있는 엔카르나시온 광장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 길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광장 건너편에 멋쟁이 청년 돈 호세가 경비병으로 근무하면서 담배공장에서 일하던 팜므파탈의 주인공 카르멘을 만난 장소였던 세비야 대학 법학부 건물(옛 왕립 담배공장)이 있다.
어쩌면 첫눈에 홀딱 빠져버린 호세가 바로 이길로 내 옆을 스쳐지나 카르멘을 몰래 뒤좇아갔을수도 있겠다. 이 길가의 어느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데이트를 즐겼고, 골목 안쪽의 어느 유곽에서 남몰래 정염을 불태웠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그 유명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 등장하는, 장엄하고 경괘한 행진곡과도 같은 (서곡)이 들려오는것만 같다.
저절로 발걸음에 흥겨운 리듬이 더해진다.
가끔은 이렇게 반쯤 넋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유유자적 할 수 있는 재미 또한 여행만이 안겨주는 색다른 하나의 묘미라고 할까?
오랜 세월동안 대성당과 히랄다 탑은 세비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던것이 밀레니엄을 지나 21세기가 되면서 세비야에 마침내 새로운 랜드마크가 생겨났다.
스페인만의 독특한 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는 안달루시아 지방, 그 중심에 서서 카톨릭과 이슬람 문화가 혼합된 스페인만의 정취와 특색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세비야의 올드 시티 한복판에 최첨단의 현대적인 건축물이 불쑥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와 전통을 무시 내지는 배반한 매우 불쾌한 건축이다' 라는 혹평이 건설 당시부터 세차게 일어났다. '세비야에는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흉물이다'라는 이유로 건설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여러가지 시련을 격게된다. 공사 기간이 배로 늘어났고, 당연히 공사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착공 7년만인 2011년에 완공된 이 새로운 건물의 등장은 세비야는 물론 세상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만들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세계의 건축가들이 투표로 뽑은 '세계 10대 현대 건축물'의 하나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목조 건축물이기도 하다. 준공 이후에도 세비야 사람들은 이 건축물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채 십여년이 지나지않은 지금, 세비야에는 새로운 랜드마크가 생긴 것이다. 이즘은 세비야 사람들도 이 건축물을 인정하고 아끼게 되었으며 수많은 현지인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내가 사용한 2013~2014년도 개정판 여행 책자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지금 판매되는 개정증보판에는 어떻게 올려져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만큼 세비야 여행을 함에 있어서 이 건축물은 아직도 따끈따끈한 핫플레이스라 할 수 있겠다.
카르멘의 발길을 뒤쫓아 엔카르나시온 광장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저만치에서 매우 강렬하게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아주 멋진 풍광이 모습을 드러낸다.
'엔카르나시온의 라스 세따스(Las Setas de la Encarnación).'
현지인들이 이 건축물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고 할 수 있는 '엔카르나시온의 버섯'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이슬람의 지배시절부터 있었던 전통 재래시장의 자리를 재개발한것 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며, 얼핏보자면 아주 거대한 버섯송이가 꽃피어 있는 형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비야가 이 장소에 빼어난 건축을 하기 위하여 국제 현상 공모를 벌였을 때, 출품된 이 직품의 설계도면엔 분명하게 '메트로폴 파라솔 (Metropol Parasol)'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여 현지인들은 지금도 '엔카르나시온의 버섯'이라 부르지만, 안내 책자와 여행자들에게는 '메트로폴 파라솔'이라는 이름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굳이 한국말로 다시 표현해 보자면 '세비야의 양산'이라고 할까? 스페인에서 파라솔은 어쩌다 오는 비를 막기 위함 보다는 허구헌날 뜨거운 햇쌀을 가리는 용도가 주된 임무일 테니까 말이다.
엔카르나시온 광장은 이슬람에 의해서 세워진 세비야를 삥둘러 싸고있던 성벽 안쪽의 공터로 애초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 있었다. 국토회복 운동 이후에 이곳은 카톨릭 수도원이 들어섰다. 세월이 한참 더 흐르고나서 수도원은 허물어졌고 그대로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다. 그러다 18세기가 지나면서부터 허물어진 성벽과 남아있는 수도원의 담장에 기대어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어 좌판을 벌이다가 자연스럽게 재래 시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광장 일대가 제법 커다란 재래시장으로 발전하기는 했으나 주변의 환경은 버려진 흉물스런 빈민가의 모습이었고 점차 쓰레기장으로 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1948년부터는 도시재개발 사업이 벌어져 주변 환경 정리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업 진척이 미미하여 재래시장으로 사용되던 마지막 노후건물은 1973년에야 최종 철거되었다. 이후 이 일대를 주차장으로 사용하였으나, 이곳 터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민들은 여전히 주위에 몰려들어 재래식 좌판을 벌였다.
결국 90년대 들어서 세비야 당국은 지하에 주차장을 두고, 지상에 현대화된 시장을 형성하는것으로 재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광장 주변의 정화사업에 뛰어들었다. 공사가 착착 진행되던 도중에 그만.......... 지하 주차장 공사를 하던 도중에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됨으로써 공사가 모두 중단되었다. 이미 총공사비의 상당 부분이 투입된 상황이었다. 1.400만 유로가 허공으로 날라가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세비야를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에 흉물스럽게 변한 공사현장을 마냥 방치해 둘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세비야는 장기적인 새로운 재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현대적 시장만을 만들것이 아니라 세비야의 관광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번듯한 건물을 짓기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 엔카르나시온 광장 개발을 위한 국제 현상 공모를 개최하였다. 세계적인 현대 건축가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최종 결과는 '엔카르나시온의 버섯'을 형상화 했다는가로 150m 세로 75m 높이 28m의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을 설계하여 제출한 독일 건축가 율겐 마이어 헤르만(Jürgen Mayer-Hermann)의 설계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 그 외관과 위치, 시공상의 일정 및 비용초과로 수많은 논란이 고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총공사비 5천만 유로로 힘차게 출발할 때 까지는 좋았는데.......... 엔지니어링 부분을 담당했던 아럽(Arup)사가 시행에 앞서 많은 구조적 가설들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존 재료들의 한계를 초과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 구조물이 설계 도면대로 실행되기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시당국에 소견을 통보하였다. 연구 실험에서 실제로 구조물 자체 무게를 지지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으므로 이 구조물을 지탱할 실현가능한 대안들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중단되었던 공사가 접착제를 보강재로 사용한 실현가능한 디자인이 2009년초에 가서야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공사지연과 몇 가지 검증 등을 거치면서 이 구조물의 총공사비는 5천만유로에서 1억유로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메트로폴은 거대한 버섯을 닮은 여섯 개의 파라솔로 되어 있는데, 마치 유기적으로 천을 짜듯이 엮은 물결모양의 유별난 외관 때문에 주변의 전통적인 도시환경과 대비되어 보인다. 아마도 지금처럼 친숙해지기 전까지는 '역사를 배반한 건축물'이라는 푠현이 더 적합했을지도 모를 이 지역에 몇 안되는 현대건축물 중의 하나로서, 점차 역사의 도시 세비야의 새로운 아이콘이자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메트로폴 파라솔은 모두 네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지하층(레벨 0)에는 이 곳에서 발견된 로마와 무어인들의 고대유적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고 길거리에 면해 있는 1층(레벨 1)에는 중앙시장이 있다. 레벨 1의 지붕은 머리 위에 있는 상부의 목재 파라솔 때문에 그늘이 지는 곳으로, 개방된 공공광장으로 이용되며 공공이벤트를 위한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레벨 2와 레벨 3에는 2층의 파노라마 테라스(레스토랑 포함)로 되어 있어서 도심에 대한 최적의 조망을 제공해 준다. 뿐만아니라 옥상에서 도시전경을 볼 수 있는 파노라마 테라스를 비롯하여 고고학박물관과 농부마켓, 들어올려진 광장, 그리고 그 아래와 파라솔 내부에 있는 여러 개의 바와 레스토랑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구조물은 설계 및 건설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로마시대의 고고학적 유물이 있는 장소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 구조물을 어떻게 설치할 것인가의 문제와, 자체하중을 줄이기 위해 목재와 철재를 사용하면서도 스페인 남부지방의 뜨거운 여름온도에 어떻게 견딜 수 있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었다.
핀란드에서 특별히 제작하여 공수해온 핀포레스트 케르토 LVL(laminated veneer lumber, 베니어합판 제재목)은 침엽수합판을 접착재로 붙여 만든 매우 유연한 재료로서, 수십년동안 목재구조물에 성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용적의 안정성과 내기후성(특히 습기) 및 고강도성을 필요로 하는 프로젝트에 이것은 이상적인 재료였다. 약 3,400개의 목재부재들은 독일 뮌헨 근처 아이차흐(Aichach)의 핀포레스트 부재공장(Finnforest’s component factory)에서 가가 원하는 모형대로 제작되었다. 2,500㎥의 케르토 LVL이 세비야까지 육로로 운반되어 이 곳에서 폴리우레탄 코팅이 이루어지고 최종적으로 조립되었다.
거대하게 출렁이는 3층 캐노피는 1.5m×1.5m 크기의 Kerto-Q 베니어합판 제재목을 격자형구조위에 평평하게 배열하여 만든 것으로, 이 패널들은 지붕의 전반적인 구조체계를 형성한다. 아럽사의 엔지니어들은 목재판을 지탱하기 위한 개별크기를 계산하여 목재에 가해지는 응력의 방향이 목재패널의 나뭇결 방향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개별 하중지지부재의 크기는 실제하중에 적합하게 되어 있으며, 따라서 CNC공작로보트(CNC-controlled trimming robot)를 이용하여 밀리미터 단위로 정밀하게 가공하는 동시에 매우 가변적으로 제작되었다. 각 부재들의 길이는 1.5m에서 16.5m 사이, 두께는 68㎜에서 311㎜ 사이이며, 약 3,400개의 목재부재 중에서 가장 큰 부재는 높이 16.5미터, 폭 3.5미터, 두께 140㎜인 기둥이다.
세비야의 새로운 상징이 되고 있는 이 구조물은 세비야의 새로운 만남의 공간, 즉 과거와 현재,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상호교류의 장소이다. 로마시대의 도시계획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격자형구조는 이 곳에서 곡선의 캐노피 형태로 변형되고 대비된다. 더욱이 점과 선, 면 사이, 다시 말해서 나무줄기가 만드는 결절점에서부터 캐노피의 굽이치는 윤곽, 그리고 나무틀 토대가 만드는 가상의 면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는 움직임이 연상된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가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유희인 것이다.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고 사람의 시선을 무한전 잡아당기는 마력을 가진 건물이다.
어떻게 저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골판지로 책상 위에서 작게 만들어 볼 수야 있었겠지만........ 저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세월의 흔적이 전혀 묻어나지 않은 현대건축의 새로운 면목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현대 건축도 충분히 매혹적이고 아름다울수가 있는 것이었다.
(메트로폴 파라솔)
'세비야 사람들은 과거에 몇번이나 세상을 구했기에 차고 넘치는 위대한 유산들 위에 너 까지 얹어서 가졌더란 말이냐!'
충주 탄금대 (*** 기념 공원)에 있는것들 싹 밀어버리고........... (중원경 파라솔) 하나쯤 있었으면.......
부.럽.다.
그 외에도 세비야에는 여행자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이름난 명소들이 즐비하다.
우선은 로마시대부터 이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이나 역대 왕들이 거주하던 알카사르가 있다.
이슬람을 그라나다로 몰아낸 잔혹한 왕 페드로 1세에 의해서 본래 이슬람 궁전이 있던 건물을 카톨릭식으로 개축한 궁전이다. 대항해 시대를 맞아 이슬람을 완전하게 리베리아 반도에서 몰아 낸 이사벨 여왕이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던 공간이기도 하다. 대항해 시대의 콜럼버스나 마젤란을 비롯한 수많은 개척자와 탐험가들이 이곳을 찾아와 여왕을 알현하고 물자와 경비 지원을 요청하던 장소이다.
초기에서부터 리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무슬림들은 흔히 무어족이라 불리는 시리아 계통의 아랍족이었다. 11세기에 들어서 대대적인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이 벌어졌고, 마침내 이슬람 통치의 중심이었던 '코르도바'가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이슬람은 허겁지겁 지중해 건너편인 모로코 지역의 알모라비드 왕조에 도움을 요청하게되었다. 이교도들에 의한 영토 정복을 염려하여 알모라비드 왕이 군대를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왔는데........ 아뿔싸. 이교도와의 전쟁은 외면한 채 급격히 쇠락한 시리아 왕조를 훌러덩 뒤집어 엎어버리고 세비야 이남의 안달루시아를 점령해버리고는 새로운 왕조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서둘러 세비야를 새로운 이슬람식 수도로 건설했다. 이 알카사르가 바로 모로코에서 건너 온 알모라비드 왕조가 세운 첫 수도의 왕궁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 세비야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톨레도 지역인 카스티야&레온 지역에서 불세출의 위대한 이사벨 여왕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모로코의 이슬람 왕조는 세비야를 버리고 그라나다로 쫓겨가게 된다. 거기에서 위대한 알함브라 궁전을 짓고 영화를 누려보려 하였지만........ 이사벨 여왕의 집요한 공세에 멋진 궁전만 지어놓고 지중해 건너 모로코로 쫓겨간다. 이 격변의 시기에 이슬람 왕조는 3개의 닮은골의 위대한 건축물을 남겨놓게 된다. 그라나다 여행기에서 재차 언급을 하게되겠지만....... 세비야의 알카사르를 둘러보노라면 저절로 떠오르는 건축이 있다. 바로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모습이다. 잔혹왕 페드로 1세는 그라나다를 정복한 이사벨 여왕의 이후 즉위한 왕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에 취한 그는 알함브라 궁전의 건설에 참여한 수많은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꿈에도 잊여지지 않는 알함브라 궁전과 같은 아름다운 왕궁을 개축하도록 요구하여 탄생한 건물이 바로 세비야 알카사르이다. 얼핏 색각하자면 알함브라 궁전을 실제로 건축하기에 앞서서 예행연습(습작)으로 지어 본 건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사벨 여왕에게 알함브라 궁전 열쇠를 넘겨주고 지중해를 건너 간 모로코 이슬람 왕조의 보아브빌 왕 역시 꿈에도 잊혀지지 않는 알함브라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해서, 도망쳐 옮겨간 모로코의 페스에 알함브라를 닮은 궁전을 짓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탄생한것이 페스 궁전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진품이다. 세비야 알카사르는 어딘지 모르게 짝퉁 분위기다. 그리고 페스 궁전은 매우 어설퍼 보이는 모사품이다. (그라나다 여행기 알함브라 궁전 편에서 재차 거론하기로 함)
그 외에도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페인 광장'이 세비야에 있다.
스페인의 모든 도시에는 저마다의 특색을 갖춘 '스페인 광장'이 있다. 아마도 옛 스페인 제국의 영화를 기리기 위함이듯 싶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세 군데의 스페인 광장을 꼽는다면........ 첫째. 극장식 반원 형태의 건물에 둘러 쌓여 수많은 분수와 벤치를 모두 형형색색의 타일로 치장한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으로 모든 스페인 광장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아미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나온다. 스페인 각 지역을 나타내는 타일로 장식된 지도와 함께, 58개나 되는 각 도시의 휘장과 또 그 지역을 상징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타일 장식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그 그림이 상징하는 의미를 찾아보거나, 때론 그림을 보는 순간 이미 '아! 여기는 어디로구나'하는 깨달음에서 터져나오는 작은 쾌감도 체험할 수 있다. 정말로 감동적인 색다른 경험을 여행자에게 안겨준다.
둘째, 스페인의 자존심이자 긍지로 추앙받고 있는 (세익스피어와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세르반테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을 꼽을 수 있다. 그곳에 가면 돈키호테와 산초와 로시난테와 조랑말을 만날수 있다.(현재는 공사중으로 관람 불가능)
셋째. 이미 세계적인 호화롭고 멋진 분수 쇼로 찬사를 받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광장'이 있다. 지난 날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페막식에서 황홀하고도 우아하기까지 한 멋진 분수 쑈를 전세계에 맛껏 본내준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뒤에 올 '바르셀로나 편'에서 만나 보기로.......
그런가하면 대성당에는 견줄 수 없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 상을 보관하고 있는 '마카레나 성당'과 스페인에서는 상당히 특이하게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하는 '막달라 마리아 성당'도 이곳 세비야에 있다. 전설과도 같은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 에수 사후에 유일한 여제자였던 막달라 마리아가 유럽으로 건너와 한 왕조의 개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속에 프랑스 남부에서는 곳곳에서 심심치않게 막달라 마리아를 모신 교회들을 만나 볼 수 있지만, 흔히 정통 카톨릭을 자부하는 스페인 땅에서 만나보는 막달라 마리아 교회는 사뭇 이채롭게 느껴진다.
또한 '돈 후안 자선병원'과 '돈 후안 수도원'도 아주 이색적인 느낌으로 낯선 여행자의 발걸음을 잠시 붙잡아 둔다.
희대의 탕아 돈 후안(돈 조반니)이 어느날 커다란 깨달음이 있어서 회개하고 참신한 카톨릭 신자로 전향한 뒤에, 나머지 시간을 모두 사회복지와 자선사업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가 이곳 세비야에 직접 지은 병원과 성당이 바로 이곳이다.
그가 걸었던 참회 한 이후의 새로운 삶의 궤적들은 이곳 세비야 뿐만이 아니라 차후에 찾게되는 그라나다에서도 대단히 인상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참된 행적들은 바르셀로나에서도 또 다시 만나게 된다. 그의 행적 또한 다음 기회에........(지면 관계상 너무 길어진 것 같아)
그렇게 그렇게 3일간의 세비야 여행을 마치게 되면 커다란 아쉬움속에 짐을 챙겨들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서 '프라도 산 세바스티안 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2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알헤시라스 항구'로 가기 위함이다.
이제 잠시 스페인 여행에서 발걸음을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의 모로코로 옮겨보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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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도답사도보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