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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처능白谷處能(1617~1680) 속성은 전全, 자는 신수愼守, 대각등계는 존호尊號. 12세에 의현義賢 스님을 따라 출가하였다. 17~18세경에 당대의 문장가인 신익성申翊聖}을 찾아가 유가 경전을 비롯하여 제자백가서를 배우고 20대 초반에 벽암 각성碧巖覺性을 스승으로 모셨다. 남한산성 승병대장인 남한승통南漢僧統을 역임하였다.
대각등계집 제2권(大覺登階集 卷之二) / 문文 / 불교의 폐지에 대해 간언을 하며 올린 상소문
신臣은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공자가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함께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게 되고, 함께 말할 수 없는 사람인데 함께 말하면 말을 잃어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치에 들어맞게 말을 할 때는 무성의하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요임금은 윤수尹壽88)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순임금은 무성務成89)을 방문하였습니다. 요임금ㆍ순임금은 위대한 성인의 자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모두 매우 고귀한 지위에 있었으니, 깊은 시골에 사는 사람을 취할 필요도 없으며 나무꾼(蒭蕘90) )의 말도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윤수ㆍ무성을 말함)에게 은근한 정성을 나타낸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을 쓰면 반드시 현인을 만나고 간언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반드시 추로鄒魯(공자와 맹자)91)의 말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니仲尼(공자)가 노담老聃(노자)에게 배웠습니다.92) 사람도 반드시 요순시대의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백西伯(주나라 문왕)은 여망呂望93)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역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그 지역 사람들의 말을 폐기하면 말을 잃게 되는 것이요, 시대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그 시대 사람들을 버리면 사람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분명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세상이 태평하면 은자들도 세상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에서 사호四皓94)를 존경하였습니다. 풍속이 순박하면 욕심 없는 탈속한 사람들이 간간이 배출됩니다. 그러므로 진晉나라에서는 죽림칠현竹林七賢95)을 높이 받들었습니다. 죽림칠현이 어찌 모두 이윤伊尹ㆍ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부열傅說 같은 재상의 재주가 있었겠습니까?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어찌 모두가 한신韓信ㆍ팽월彭越ㆍ위청衛靑ㆍ곽거병霍去病 같은 장군의 지략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모두를 제후로 봉하여 신하로 충당한 것은, 그들이 인자한 임금이 백성을 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혹은 성군聖君이 정치를 잘 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재주는 반드시 십란十亂(열 명의 어진 신하)96)에 의지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지혜는 역시 삼우三愚97)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엄청나게 큰 종은 한 조각 쇳덩어리로 만들 수 없음과 같습니다. 천 칸 되는 큰 집을 어찌 짧은 시간에 지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성인이시고 신적인 능력이 있으시며 문무를 겸비하신(聖神文武)
大覺登階白谷集
諫廢釋敎䟽
臣聞孔子曰。可與言而不與言。失人。
不可與言而與言。失言。言或可以有中。
聽不可以無誠。故堯咨尹壽。舜訪務
成。彼以至聖之資。咸居極貴之位。則
不必取蓬蒿之人。不必納蒭蕘之言。然
所以勤欵者。盖益我者存焉。何則。取
人則必見賢人。納言則必聞善言。言不
必鄒魯之言。故仲尼學於老聃。人不必
堯舜之人。故西伯師於呂望。是故若以
邦域。爲嫌而廢言。失言。若以時代。爲
訝而棄人。失人。可不察哉。可不明哉。
夫世治則逸人願從。故漢遵四皓。俗醇
則淸軰間出。故晋高七賢。七賢豈皆伊
傅周召之相才乎。四皓寧盡韓彭衛霍
之將略乎。然而咸在提封。得充臣妾者。
或助仁后之隆化。或扶聖君之優治。故
安民之才。必憑十亂。濟世之智。亦待
三愚。其猶洪鍾萬鈞。非片銕所鑄。大
厦千間。豈一世所搆哉。
伏惟聖神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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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 전하(현종)께서는 천명을 받아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왕세자로 있던 시절에는 효성이 대단하여 닭이 울면 문안을 갔으며,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변란(雉劬98) )이 일어날까 조심하였습니다.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니 백성들이 즐거운 얼굴을 하였으며,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고아를 가엾게 여기니 백성들이 목을 내밀면서 은혜를 갈망하였습니다. 2ㆍ3년 동안 교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쳤고, 수천 리 밖에까지 은혜는 백성들에게 더해졌습니다. 삼왕三王(복희ㆍ신농ㆍ황제)도 어질지 않다면 그만이며, 어질기만 하다면 전하께서 바로 삼왕 같은 분입니다. 오제五帝(소호ㆍ전욱ㆍ제곡ㆍ요ㆍ순)도 성인답지 못하면 그만이지만, 성인 같은 행동을 한다면 전하께서 바로 오제 같은 분입니다. 오늘날에 소巢ㆍ허許99)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옛적의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만난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명군과 성왕의 행정은 분명하였으며 정치도 어질었기는 하지만 자신이 직접 만기萬機(왕의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므로 한 가지 실수가 있을까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경』에는 임금을 가르치는 글인 고誥100)가 있으며, 『시경』에는 왕을 훈계하는 시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분이 낮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을 낮추면서 간언을 받아들임은 임금으로서의 인자함이요, 임금의 존엄성을 범하면서 당돌하게 간언을 올림은 신하의 충성심입니다. 그러므로 『서경』 「열명說命」에서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반듯하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임금이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좌전』 (「소공昭公」 20년 8월 기사)에는 “임금이 하는 말이 옳기는 하지만 부당한 점이 있을 때, 신하는 그 부당성에 대해 의견을 올리면서 임금의 옳은 점을 이루어 준다. 임금이 하는 말이 부당하지만 옳은 점이 있을 때 신하는 임금의 옳은 점에 대해 의견을 올리면서 그 부당한 점은 없앤다.”101)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하가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은 매우 미천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상문桑門(승려)이 되어 축교竺敎(불교)를 더럽히는 인간 세상 군더더기 중에 하나이며, 강과 구름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외롭고 바싹 마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의리에 대해서는 평소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득실得失과 치란治亂의 논의에 대해서 어찌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감히 자신을 ‘신臣’이라고 부르는 것도 참으로 분수에 넘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옛날에 (북위北魏 시대의) 법과法果 스님은 안성후安城侯로 임명되었고, 당唐의 불공不空 스님은 숙국공肅國公으로 봉해졌습니다. 모두 신하의 대열에 서서 임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시경』 (「소아」 〈북산北山〉)에서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서 “우리 임금 오시기를 기다린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피차彼此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신人臣이 비록 볼만한 형상이 없더라도
主上殿下。誕膺天命。纉承丕位。儲宮
之日。孝誠趂乎鷄鳴。君臨以來。恐愳
生乎雉劬。輕徭減賦。則蒼生怡顏。恤
寡憐孤。則赤子延頸。二三載之間。化
冾生靈。數千里之外。恩添品
。三王
不仁則已。仁則殿下是也。五帝不聖則
已。聖則殿下是也。豈意今日之巢許復
遇昔時之堯舜乎。雖然自古明君聖王
政非不明也。治非不仁也。而躬臨萬機
慮有一失。故書有訓君之誥。詩存戒王
之篇。是以矜憐鄙陋。枉屈從諫者。君
父之仁也。冒黷尊嚴。唐突進言者。臣
子之忠也。故說命曰。木從繩則正。后
從諫則聖。此君父之所可鑑也。春秋傳
曰。君所謂可而有否焉。臣獻其可。以
去其否。此臣子之所可效也。臣以至微
至賤。猥叨桑門。謬忝竺敎。人世上一
贅物。水雲間隻枯容。其於君臣父子之
義。素昧留心。得失治亂之談。寧能刺
口。而今敢稱臣者。固知濫矣。然昔法
果沙門。拜安城候 [11] 。不空法師。封肅國
公。咸以臣例。紆荷主恩。則詩所謂。莫
非王臣。書所謂。徯我后來者。固無揀擇
於彼此也。然則爲人臣者。雖甚無狀。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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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계책이나마 있으면 임금에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알아보니, 승니僧尼(비구와 비구니) 모두를 사태沙汰(많은 사람을 떨쳐내는 일)시키도록 하여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비구들 역시 없애기로 논의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참으로 우매하여 임금님의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임금께서 생각하시기를 불교가 서방 인도에서 탄생되었지만 중국에 흘러들어 왔으니 지역이 다르다고 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삼대三代(하ㆍ은ㆍ주) 이후에 나왔으니 상고시대의 법이 아니므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인과를 거짓으로 말하고 응보를 기만하여 널리 알리고 윤회로 백성을 그릇된 길로 끌고 간다고 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농사도 짓지 않고 누에도 치지 않고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으면서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함부로 머리를 깎아 항상 법망에 걸리어 헌정 질서를 손상시킨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혹은 불교도라 핑계 대고 구차하게 요역徭役을 회피하며 군대에도 빠진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신은 불교가 탄생하게 된 시종을 먼저 말하고,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목은 뒤에 설명하고자 합니다. 임금님께 하소연하오니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臣이 멀리 이전 역사를 살피고 고찰하니, 『주서이기周書異記』10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부처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 갑인년(B.C. 1027)에 세상에 태어났다. 밤에 오색 기운 빛이 있으며 청홍색이었다. 왕이 태사太史인 소유蘇由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상서로운 징조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서방에 위대한 성인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나라 목왕穆王 53년 임신년(B.C. 949)에 열반에 들었다. 당시 흰 무지개 열한 줄기가 남북을 관통하였다. 목왕이 태사 호다扈多에게 묻기를 ‘무슨 징조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서방의 위대한 성인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였습니다.
“오나라 태재太宰(재상)인 백비白嚭가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은 성자이십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학식이 넓고 기억력이 풍부한 사람이지 성인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성자인가요?’라고 하니, 공자는 조용히 대답하기를 ‘서방에 위대한 성인이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음이 있으며, 교화를 베풀지 않아도, 교화가 저절로 행해집니다.’”103)
또 『장자』 「제물론齊物論」에서 “만년 후에라도 한번 대 성인을 만나서 그 견해를 인정받는다면, 이것은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부처님을 가리키며 한 말입니다.
有愚計。不得不禀於君父也。
謹因朝報。
伏奉聖旨。遂令僧尼。並從沙汰。尼已
還俗。僧亦議廢。臣實闇斷。未窺聖慮
之何謂也。聖慮必以佛氏。生彼西方。
入此華夏。有異邦域而然歟。抑出三代
後。非上古法。有殊峕代而然歟。抑僞
啓因果。謬暢報應。有誣輪廻而然歟。
抑不畊不蠶。遊手遊食。有耗財帛而然
歟。抑妄爲剃落。每罹憲網。有傷政敎
而然歟。抑托號浮啚。苟避徭役。有失
偏伍而然歟。臣請先言佛興之始終。後
陳右列之條目。仰愬宸襟。乞垂睿覽。
臣逖覽前史。詳考歷代。周書曰。佛昭
王二十四年甲寅出世。夜有五色光氣
作靑紅色。王問太史蘇由曰。是何祥也。
對曰。西方有大聖人生也。至穆王五十
三年壬申。佛入寂。時有白虹一十一道
貫通南北。王問太史扈多曰。是何徵也。
對曰。西方有大聖人滅也。又吳太宰
問孔子曰。夫子聖者歟。曰丘愽識强記。
非聖人也。然則孰爲聖者與。夫子動容
而對曰。西方有大聖人。不言而自信。
不化而自行。又藏子曰。萬歲之後。一
遇大聖。知其解者。是朝暯遇之。皆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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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시대에 이르러 사문 실리방室利防104) 등이 서역에서 왔을 때 진시황제는 그들의 기이한 풍속을 미워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갑자기 신장이 나타나서 옥문을 부수고 그들을 구출해 가자, 진시황제는 두려워서 후하게 예물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또 한나라 무제武帝 때 곽거병이 곤야왕昆耶王105)과 금인金人을 잡았는데 금인의 키가 1장丈 남짓이 되었으므로, 한 무제는 대신大神이라 여기고 감천궁甘泉宮에 안치하였습니다. 또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을 서쪽 신두身毒 (인도)에 보내어 불법을 구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한나라 원제元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106)이 인도 고대 언어로 기록된 불경 20여 권을 구해 자신의 저서인 『열선전列仙傳』에 넣었습니다. 한나라 애제哀帝 때에는 경헌景憲이 월지국月支國107) 사신으로 가자 월지국 국왕이 불경을 바쳤습니다. 후한의 명제明帝 때에는 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중랑장中郞將 채음蔡愔 등을 서역에 파견하여 불법을 알아보게 하니, 채음이 인도 승려인 마등摩騰과 법란法蘭 두 분 스님을 모시고 돌아왔습니다.108) 이때부터 불교가 유행되기 시작하여 후한後漢과 위魏나라 연간에 점차 퍼졌고 당송唐宋 시대에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불교에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리기도 하고 집안을 다스리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불교가 흥성한 전말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지역이 달라서109) 불교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성인이신 공자의 수레는 고국 노魯나라에 머물고 진陳나라와 채蔡나라까지는 굴러가지 않았을 것이고, 현자이신 맹자의 언변은 고국 추鄒나라에 있고 제齊나라와 양梁나라까지는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秦나라의 15개 성과 바꾸지도 못하는 가치 없는 조벽趙璧110)과 같고, 수레도 비추지 못하여 위魏나라의 자랑거리가 되지도 못하는 수주隋珠111)와 같습니다.112) 동이東夷에서 태어난 순임금과 서강西羌에서 태어난 우임금을 성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포악한 임금인 걸桀과 주紂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융戎에서 태어난 유여由余(춘추시대 현인)와 만蠻113)에서 태어난 계찰季札(춘추시대 현인)을 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춘추시대의 유명한 도둑인 도척盜跖과 장교莊蹻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므로 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까닭에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구이九夷114)에서 살고 싶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사람은 삼한三韓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였습니다. 수레와 배로 갈 수 있으며, 비와 이슬을 함께 받으며, 이하夷夏(중국과 변경 국가)의 경계가 서로 이어지며, 중국이든 변경 지역이든 어디에서 태어났든지 간에 성인은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송宋의 학자인 유원성劉元城(이름은 安世)은 “공자와 부처의 말씀은 서로 끝과 처음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佛而言也。逮秦始皇時。沙門室利防等
來自西域。帝惡其異俗。以付獄。俄有
神碎獄門而出之。帝懼厚賜遣之。至
漢武帝時。霍去病獲昆耶王及金人率
長丈餘。帝以爲大神。安于甘泉宮。又
遣愽望候 [12] 張騫。西徃身毒。獲浮屠法。
元帝時。光錄大夫
向。得梵本經二十
餘卷。編入仙傳。哀帝時。景憲奉使月
支國。其王投獻浮屠經。明帝時。感夢
遣中郞將蔡愔等。西訪其道。獲迎摩騰
法蘭二僧而還。自是敎法流行。漸於
漢曺魏之間。盛於李唐趙宋之際。聖主
賢臣。莫不憑賴。或治其國。或齊其家。
此其佛興始終之大略也。
殿下若曰。有
異邦域而廢之。則孔聖之轍。止於魯而
不必環於陳蔡。孟賢之舌。藏於鄒而不
必棹於齊梁。其猶趙壁。不得連城於秦
價。隋珠不能照乘於魏誇。豈以舜生於
東夷。禹出於西羌。爲不聖。而聖中國
之桀紂乎。豈以由余生於戎。季札出
於蠻。爲不賢。而賢中國之跖蹻乎。是
以魯叟。欲居九夷。華人願生三韓。况
舟車所通。雨露所同。夷夏之境相接。
內外之聖不殊。故劉元城曰。孔子佛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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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金의 학자인 이병산李屛山은 “세 분의 성인115) 모두 주周나라 때에 났다. 마치 해ㆍ달ㆍ별이 부상扶桑(동쪽 해 뜨는 곳) 위에 모여 있고, 강수江水ㆍ하수河水ㆍ회수淮水ㆍ한수漢水가 바닥없는 깊은 대해(尾閭)에 모여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본다면 『중용』에서 “도는 함께 운행해도 서로 거스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주역周易』 「계사繫辭」 하에서는 “길은 달라도 귀일점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다르지 않음은 화살에 화살촉이 걸려 있는 것과 같으며(하나로 일치한다는 말), 도가 다르지 않음은 부절符節을 합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역이 다르기는 하지만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불교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그렇지만 문자로 기록된 서적을 사용하면 그만이지 새끼를 꼬아서 만든 상고시대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편안히 집에서 살면 그만이지 반드시 위태로운 나무 둥지에서 살면서까지 거처를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겨울 음식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봄부터 미리 곡식을 먹는 것과 같고, 밤잠이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낮부터 마루에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은殷나라의 현인인 기자箕子ㆍ비간比干ㆍ미자微子 세 사람이 은나라가 멸망할 즈음에 나왔다고 해서 불충不忠이라 하고, 상고시대의 포악한 무리인 구려九黎를 충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제자인 십철十哲116)이 주나라 말기에 태어났다고 해서 본받을 수가 없다면 상고시대의 포악한 사흉四凶을 본받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상고시대의 황제인 포희庖羲(복희)가 팔괘八卦를 그리자 『주역』의 도가 문왕文王에 의해 발현되었으며, 하나라 우임금이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뜻을 서술하자 낙서洛書가 기자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하물며 하늘과 땅이 제 위치에 있고, 해와 달이 세상을 비춤은 고금의 이치가 같습니다. 이전 시대나 이후 시대의 규범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시대의 조맹趙孟은 “한번은 그때이고, 한번은 이때이다. 어찌 영원한 것이 있는가?”(『좌전』 「소공」 원년)라고 하였습니다. 모자牟子117)는 “저 때도 한때, 이때도 한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순임금ㆍ우임금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반드시 “부처와 우리들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할 것이고, 탕임금ㆍ무왕이 다시 세상에 나오더라도 반드시 “부처에 대해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후생가외後生可畏(후배들이 두렵다.)”라고 하였으며, 『춘추좌씨전』(「소공」 원년)에서는 “시원여이視遠如邇(먼 시대에 있는 것을 보기를 가까운 시대에 있는 듯이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시대는 다르나 일은 동일하며, 시대는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불교의 윤회설이 백성을 속이므로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나라 천자의 옥소玉簫는 도승道僧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言。相爲終始。李屏山曰。三聖人者。同
出於周。如日月星辰之合於扶桑之上。
江河淮漢之匯於尾閭之涯。迹此觀之。
中庸所謂道并行而不相悖。繫辭所謂
殊途而同歸者。可謂聖之不殊。若柱箭
鋒。道之不異。如合符節。此不可以有
異邦域而廢者一也。
殿下若曰。有殊時
代而廢之。則書契之籍。不必代結繩之
政。屋宇之安。不必易居巢之危。其猶
冬食不宜春畊之粒。夜眠不合晝坐之
堂。豈以三仁。出於殷滅。爲不忠。而忠
上古之九黎乎。豈以十哲。生於周衰。
爲不法。而法上古之四凶乎。是以庖犧
晝卦。易道顯乎文王。夏后叙疇。洛書
成乎箕子。况乾坤所位。日月所臨。古
今之致同焉。前後之䂓一也。故趙孟曰
一彼一此。何常之有。牟子曰。彼一時
也。此一時也。迹此觀之。如使舜禹復
生。必曰佛氏。吾無間然矣。湯武復出。
必曰佛氏。吾何言哉。然則魯論所謂後
生可畏。左史所謂視遠如邇者。可謂時
異而事同。代殊而理一。此不可以有殊
時代而廢者二也。
殿下若曰。有誣輪回
而廢之。則唐天子之玉簫。不必假道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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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 도독都督의 금반지는 이웃 노파가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118) 윤회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는 노을이 강에 잠기는데 내일 다시 해가 뜨지 않고, 시든 꽃이 언덕에 떨어지는데 내년에 다시 꽃이 피지 않는다고 생각함과 같습니다. 당나라 학자 배휴裵休가 진晉의 허현도許玄度119)가 다시 태어난 몸임을 믿지 않고, 대청 위에 걸려 있는 활이 뱀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나라 위고韋皐120)가 제갈량諸葛亮이 다시 태어난 몸임을 믿지 않고, 길거리의 돌을 호랑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진종眞宗이 미소를 지은 것121)은 천존天尊이 탄생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송宋 인종仁宗122)이 울음을 그친 것은 위대한 신선이 세상에 내려왔음을 증명합니다. 더구나 죽음과 삶은 연계되어 있고, 화와 복은 인간이 불러들이는 것이고, 장수와 요절은 천생적으로 정해진 것이며, 상서로움과 재앙의 징조는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漢의) 가의賈誼는 「복조부鵩鳥賦」에서 “천변만화千變萬化는 끝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수隋의 이사겸李士謙은 “등애登艾는 소, 서백徐伯은 물고기, 군자는 고라니, 소인은 원숭이가 된다.”123)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예기』 「월령月令」에서 “쥐가 변하여 메추라기가 된다.”라고 하였으며,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은 다르지만 이치는 하나요, 말은 다르지만 뜻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윤회설이 백성을 속인다고 하여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재물을 소모한다고 여기어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순임금은 역산歷山에서 쟁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면 그만이지 남면南面(임금은 남쪽을 바라봄)하여 임금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은나라 재상인 이윤伊尹도 신야莘野에서 낫을 휘두르고 농사를 지으면 그만이지 북면北面(신하는 북쪽을 바라봄)하여 신하가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노나라 음식이 기杞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는 적합하지 않고, 월나라의 구운 고기는 진秦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적합하지 않음과 같습니다. 공자가 노련한 농부보다 농사일을 못한다124)고 하여 천하의 사리에 달통하지 못했다고 여기며, 농사일을 물어본 번수樊須를 천하의 사리에 통달했다고 하겠습니까? 맹자가 사람들에게 봉양을 받는다고 해서 검소하지 않다고 여기며, 짚신을 직접 삼는 허행許行125)을 검소하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도심지에 나와 사는 사람들은 구태여 모두가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며, 안방 깊숙이 사는 여인들도 반드시 길쌈을 하여 옷을 직접 지어 몸을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물며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과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덕을 근본으로 삼고 재물을 지엽적인 것으로 삼습니다.
而傳。晋都督之金環。不必因隣媼而得。
其猶落暉沉江。應無來日之再繼。殘花
墜岸。必無明春之重敷。豈以裴休是
許玄度之奮身。爲不信。而信堂上之弓
蛇乎。豈以韋臯是諸葛亮之前魂。爲
不眞。而眞路中之石虎乎。是以眞宗開
咲。悟斯天尊之降誕。仁宗止啼。驗是
大仙之下生。况死生所系。禍福所召。
壽夭之分㝎矣。休咎之徵昭焉。故賈誼
曰。千變万化。未始有極。李士謙曰。鄧
艾爲牛。徐伯爲魚。君子爲鵠。小人爲
猿。迹此觀之。禮記所謂鼠化爲鴽。莊
書所謂鯤變爲鵬者。可謂事殊而致一。
言異而意同。此不可以有誣輪回而廢
者三也。
殿下若曰。有耗財帛而廢之。
則舜虞操耒於歷山。而不必南面爲君。
伊尹揮鏺於莘野。而不必北面爲臣。其
猶魯食不適杞夫之肥。越灸不合秦人
之嗜。豈以孔丘不如老農。爲不達。而
達問稼之樊須乎。豈以孟軻養於野人
爲不儉。而儉捆屨之許行乎。是以出遊
闤闠者。不必皆耘耔而餬口。深居閨室
者。不必皆績紡而遮身。况經世之君。
治國之主。以德爲本。以財爲末。故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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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나라의 소공召公은 (『서경』 「여오旅獒」에서) “보물로 삼는 것은 오직 어진 사람이니, 가까이 있는 사람이 편안하다.”라고 하였으며, (춘추시대 진晉의) 호언狐偃은 (『대학』에서) “보배로 삼을 것은 별로 없고,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냄을 보배로 삼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대학』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재물이 있다”, 『서경』 「무성武城」에서 “천하에 크게 곡식을 푼다.”라고 한 것은, 즉 토지가 있으면 재물이 모여 소모됨을 걱정하지 않고 재물을 뿌리면 백성이 모이니 쌓아 두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물을 소모한다고 하여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국가 정책과 교육을 손상시킨다고 여기어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위에서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요임금은 단주丹舟라는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고, 아래에서 간언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순임금은 고수瞽瞍라는 못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취가 나는 풀이 향기 좋은 난초에 섞여 있고, 원앙새가 봉황새를 어지럽힘과 같습니다. 하나라 예羿와 착浞이 불충不忠하여 죽일 수는 있지만 신하가 되는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계신癸辛126)이 불분명하여 추방시킬 수는 있지만 임금 모시는 의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중이 조정의 법을 어기면 경黥(묵형. 얼굴에 죄수라는 표시의 먹물을 들임)을 해도 좋으며 죽여도 좋습니다. 비구니가 세상에 정한 법을 범했으면 의형劓刑(코를 베는 형벌)을 해도 좋고 죽여도 좋습니다. 어찌 부처를 탓하고 미워하며 불교 전체를 폐지할 수 있습니까? 단지 타고난 성품이 선으로 옮겨 가지 못한 것이지, 불교의 가르침이 악으로 물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은 “남의 선행은 내가 본받아 실천하고, 남의 악행은 내가 고친다.”127)라고 하였습니다. 당나라의 이사정李師政은 “유생儒生들이 죄가 있어도 공자의 잘못과는 관계가 없으며 승려가 잘못을 저질러도 어찌 이것이 석가세존의 허물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주역』 (「해괘解卦」)에서 이른바 “과오를 용서하고 죄를 용서한다.”라고 한 것과 『서경』 「다방多方」에서 “덕행을 한 사람을 분명히 밝히고 벌을 줌을 신중히 한다.”라고 한 것 등은, 사람 중에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법은 폐지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 정책과 교육을 손상시킨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혹시 승려가 군대 조직에서 빠진다고 해서 불교를 폐지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도성에 산다고 거짓으로 속이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가구는 얼마나 많으며, 지방의 호족에게 거짓으로 몸을 의탁하여
公曰。所寶惟賢。則邇人安。孤偃曰。無
以爲寶。仁親以爲寶。迹此觀之。經傳
所謂。有土。此有財。武成所謂。大賚于四
海者。可謂土有則財聚。不憂耗也。財散
則民聚。不願畜也。此不可以有耗財帛
而廢者四也。
殿下若曰。有傷政敎而廢
之。則上非不敎而堯有丹朱之子。下非
不諫而舜有瞽瞍之父。其猶薰蕕雜乎
蘭芷之叢。鸂鶒亂乎鳳凰之群。豈以羿
浞之不忠爲可誅。而塞其爲臣之路乎。
豈以癸辛之不明爲可放。而絕其戴君
之義乎。是以僧干朝憲。則黥之可也。
殺之亦可也。尼犯俗刑。則劓之可也
誅之亦可也。寧咎釋而惡之。并與佛而
廢哉。但以性品。或不遷於善。非是敎
法。能使染於惡。故子產曰。人之所善。
吾則行之。人之所惡。吾則改之。李師
政曰。靑衿有罪。非關尼父之失。皂服
爲非。豈是釋尊之咎。迹此觀之。大易
所謂。赦過宥罪。多方所謂。明德愼罰者。
可謂人雖可罰者有矣。法不可廢者明
焉。此不可以有傷政敎而廢者五也。
殿
下若曰。有失偏伍而廢之。則矯托於
輦轂之下。而戶不出稅者。幾多。詐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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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壯丁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불교는 세력이 점차 약해져 가지만 승려들의 역할은 매우 많아 호적에 편입된 가구와 동일하고 일반 백성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양서兩西(황해도ㆍ평안도)에는 군적軍籍에 등록된 승려가 많으며, 삼남三南(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에는 관의 요구에 부응하는 승려가 많습니다. 중국에 종이를 공물로 보내는 것도 모두 승려들에 의해 나왔으며, 상급 관청에 잡다한 물건을 바치는 것도 모두 승려들이 준비한 것입니다. 그 이외 잡역이 수백 가지이고, 독촉하고 요구함이 수만 가지입니다. 관아 문에서 나오자마자 관아의 명령이 계속 이어집니다. 바빠서 날짜를 어기면 간혹 감옥에 잡혀가기도 하고, 순식간에 닥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 매질도 당합니다. 각 도의 외곽에 있는 보루堡壘와 남한산성 등에서 보초를 서기 위해서 천 리 길에서 양식을 지고 와 해마다 성곽을 지킵니다. 몸은 파수 보는 사람과 같고 행적은 전쟁 나간 군인과 같습니다. 감색 머리칼과 파란 눈동자는 바람에 머리 빗질을 하고 비로 목욕을 하였으며, 하얀 버선과 하얀 누더기 옷은 진흙을 뒤집어쓰고 먼지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놀랄 만한 급한 상황이 생기면 벌떼처럼 개미처럼 모여들며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번개처럼 우레처럼 달려 나갑니다. 십만 명으로 대부대를 만들고, 오십 명으로 소부대를 만듭니다. 활과 화살을 좌로 당기고 우로 뽑습니다. 크고 긴 창으로 전방 부대는 돌진하고, 후방 부대는 최후까지 남아서 방어를 합니다. 칼을 쓸 때는 진晉나라ㆍ초나라의 강함을 다투고 진을 칠 때는 진秦나라ㆍ월나라의 병법을 익힙니다. 이런 사실을 추적해서 본다면 『시경』 「당풍唐風」 (〈보우鴇羽〉)에서 “나라의 일을 하느라 힘을 다 쏟는다.”라고 한 것과 『시경』 「소아」 (〈하초불황何草不黃〉)에서 “아침저녁으로 겨를이 없다.”라고 한 것 등은, 은혜를 저버린 자는 적고 정의로운 일을 한 사람은 많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군대 조직에서 빠지기는 하였지만 불교를 폐지할 수 없는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이상이 위에서 열거한 조목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신의 지혜는 하찮고 정성도 부족하여 이상의 여섯 조목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하는 데 해로움만 있고 보탬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전대前代에 불법을 숭상한 임금과 불법을 보호한 신하들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을 들어 말한다면 불법을 숭상한 임금은 천 명 만 명 이상이 되지만 간략히 몇 명의 임금을 열거하겠습니다.
예악을 천하에 널리 밝힌 이로는 어느 누가 후한後漢 명제明帝만 하겠습니까? 유학과 문인 학자를 크게 일으킨 이로는 어느 누가 후한 효장제孝章帝만 하겠습니까?
於蕃鎭之間。而名不添丁者。何限。而
佛道陵遅。僧役浩穰。有同編戶。無異
齊民。兩西則占軍籍者多。三南則應官
徵者衆。紙楮之貢獻中國者。皆出於緇
衣。雜物之進納上司者。盡偹於白足。其
餘百役。督索万般。衙門纔退。官令繼
至。忙迫失期。則或遭囚繫。創卒罔措。
則或被鞭1)朴 [11] 。至於諸道郊。壘南漢山
城。千里褁粮。每歲守堞。身同戍客。迹
等征夫。紺髮靑眸。櫛風沐雨。素襪白
衲。蒙泥染塵。粵有警急。則蜂屯蟻聚。
爰臨戰伐。則電掣雷犇。千百爲群。什
伍作隊。桃弧棘矢。左挽右抽。大戟長
鈹。前驅後殿。鋒爭晋楚之强。陣習羸
越之法。迹此觀之。國風所謂。王事靡監。
小雅所謂。朝夕不暇者。可謂孤恩者寡
矣。仗義者多焉。此不可以有失偏伍而
廢者六也。
此其右列條目之大槩也。臣
智不衛蔡。誠非橫草。莫是此六之外
別有所害。無補於治平而然歟。臣誠言
前代崇奉之君護持之臣而質之。以君
言之。則崇奉之君。不趐千萬。而略擧數
主焉。修明禮樂。孰如漢明帝乎。隆興
「朴」通「扑」{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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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를 겸비한 이로는 어느 누가 양梁나라 무제武帝만 하겠습니까? 천하를 통일한 이로는 어느 누가 수나라 고조만 하겠습니까? 국가의 문물제도를 통일되게 정비한 이로는 어느 누가 당나라 태종만 하겠습니까?
후한의 명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학문이 뛰어났고 위엄도 대단하였으며 공손함과 검소함을 겸비하였습니다. 사치와 화려함이 없고 국가를 다스리는 경략에 뛰어났으며 유학자를 높이 받들고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여 나라의 정치가 밝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길에서는 노인에게 인사를 하였으며 경전을 들고 뜻을 물어보았습니다. 학식 있는 학자와 문장가들이 많았음은 『시경』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128)처럼 성대하였습니다. 하ㆍ은ㆍ주 삼대 이래로 성대한 학풍이 이처럼 위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제는 석가모니의 불상을 현절릉顯節陵과 청량대淸凉臺에 모시도록 하였으며, 당대의 문장가인 반고班固와 부의傅毅는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후한의 가장 뛰어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종리의鍾離意129)가, 특히 명제의 성격이 “편협하고 자질구레하다.”130)라고 그의 전기에다 기록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역사적 평가라고 하겠습니까?
후한의 장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유순하고 선량한 사람을 선발해서 등용하여 충간忠諫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정치 체제를 분명히 밝히어 엄한 형벌을 없애고 문장을 좋아하여 유가儒家의 고전을 숭상하였습니다. 이때에는 신작神雀과 신봉神鳳이 왔으며 백조白鳥(학)와 백록白鹿이 나타나는 상서로운 조짐이 있었습니다. 서주 자사徐州刺史 왕경王景131)이 〈부처를 찬송하는 글(金人頌)〉을 올리고 선제先帝(명제)가 부처를 섬긴 공로를 찬미하였는데 『한서漢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관들이 참언讒言으로 태자를 폐위시켰으며 해로운 정치를 했다고 썼으니 어찌 진실한 논의라 하겠습니까?
양나라 무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진실로 문무를 겸비하여 유업儒業을 널리 알렸습니다. 예술성과 재주가 많아 무기를 거두어 모았으며(전쟁을 끝냈다는 의미) 덕을 베풀고 인정仁政을 실천하여 은택이 먼 지방까지 두루 퍼졌습니다. 이때에 궁궐에는 오색구름과 여섯 마리 용이 궁궐 기둥을 지켰으며 궁궐 정원에는 삼족오三足烏132)와 공작 두 마리가 계단을 지나갔습니다. 인류의 문화가 시작된 이래로 영험하고 신기한 감응이 이처럼 기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재계齋戒하였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사관 위징魏徵이
儒雅。孰如孝章帝乎。文武兼偹。孰如
梁武帝乎。混同四海。孰如隋高祖乎。
混一車書。孰如唐太宗乎。漢明之治世
也。有文雅威重。而恭儉兼焉。無奢靡
淫麗。而經略能焉。有崇儒尙德。而政
治明焉。于斯時也。臨壅拜老。执經問
義。其宿儒文士之濟濟。猶周南獜趾之
洋洋。三代以來。儒風之盛。未有若是
之偉。而詔以釋迦寶像。安顯節陵及淸
凉臺。班固傅毅。頌其勳德。於漢爲最。
而惟鍾離意。特以帝性褊詧。書爲實錄。
豈良史哉。章帝之治世也。選用柔良。
而開忠諫之路。明愼政躰。而除嚴刻之
刑。雅好文章。而崇儒術之典。于斯時
也。有神雀神鳳之來儀。現白鳥白鹿之
瑞祥。徐州刺史王景。上金人頌。美先
帝致佛之功。載于漢書。而惟史氏。特
以譛廢太子書。爲害政。豈篤論哉。梁
武之治世也。允文允武。而闡揚儒業。
多藝多才。而載戢干戈。施德施仁。而
澤周遐裔。于斯時也。殿有五色雲。六隻
龍而守柱。庭有三足烏二孔雀而歷階。
書契以來。靈異之應。未有若是之奇。
而日夕齋戒。到老不倦。史官魏徵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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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라 무제는 하늘이 내려 준 인물이며 삼생三生을 알고 있으니 천하의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 문장가인 한유韓愈가 “꿀을 찾았으나 오지 않아 아사餓死하였다.”라고 썼으니 어찌 정직한 기록이라고 하겠습니까?
수나라 고조가 세상을 다스릴 때는 모든 지역을 통치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열었습니다. 주나라 이후로 내려오는 육관六官133) 제도를 폐지하고 예악을 처음으로 두었으며, 한나라의 삼성三省(중서성ㆍ상서성ㆍ문하성)에 의거하여 법도를 준수하였습니다. 이때에는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인 구문龜文이 나타났고, 물에서는 오색 기운이 떠올랐으며, 땅에서는 맛있는 물인 예천醴泉이 솟았고, 산山은 만년 세를 누리라.”134)라고 외쳤습니다. 위진魏晉 이후로 국토를 개척한 공로는 이만큼 광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주岐州 등 30개 지역에서 절과 탑을 세웠습니다. 『석실론石室論』135)에서 “수나라 문제文帝는 황통皇統을 계승하여 자신의 세대에서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참으로 한 시대의 영명한 군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唐의) 두목杜牧이 “지위와 명호名號를 훔쳐 제대로 수명을 누리지 못하였다.”라고 썼으니 어찌 사람을 훈계하는 좋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나라 태종이 세상을 다스릴 때는 반란을 평정하고 쇠약해진 세상 풍속을 혁신하였습니다. 메뚜기를 깡그리 잡아 농사의 재앙을 구제하였으며 군사적인 무력을 떨쳐 먼 지역의 강한 오랑캐를 복종시켰습니다. 이때에는 신령한 다섯 짐승(기린ㆍ거북ㆍ용ㆍ봉황ㆍ백호)과 일각一角(기린)이 서로 모여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내었고, 백호白狐(흰 여우)와 주안朱鴈(붉은 기러기)이 나타나 상서로운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양한兩漢 이래로 국가의 업적을 떨친 규모가 이보다 큰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모후母后 목 태후穆太后를 추숭追崇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홍복사弘福寺를 건립하였습니다. 『신당서新唐書』 권2에서 찬미하기를, “성대하다, 태종의 공적이여! 은殷나라의 탕湯임금과 주周나라의 무왕武王과 견줄 만하고, 주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깝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직 송宋나라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修가 “병력을 동원하여 공적을 얻기를 좋아하니 잘못이다.”라고 썼으니 어찌 진실한 말이겠습니까? 이상의 몇 분 임금들은 모두 세상에 드문 군주였습니다.
신하를 말한다면 불법을 보호한 신하는 수천수만 명이 넘습니다마는 간략히 몇 시대의 인물을 거론하겠습니다.
진대晉代에는 치초郗超ㆍ손작孫綽ㆍ허순許詢ㆍ도잠陶潛ㆍ왕도王導ㆍ주개周凱ㆍ유량庾亮ㆍ왕몽王蒙ㆍ왕공王恭ㆍ왕밀王䛑ㆍ곽문郭文ㆍ사상謝尙ㆍ대규戴逵 등이 있었습니다.
양대梁代에는 임방任昉ㆍ하점何點ㆍ하윤何胤ㆍ심약沈約ㆍ유협劉勰ㆍ부흡傅翕ㆍ부왕傅暀ㆍ
梁武固天攸縱道亞生知。可謂天下仁
人。而惟韓愈。特以索蜜不至。書爲餓
死。豈直筆哉。隋祖之治世也。君臨万
國。而運啓嘉號。廢周六官。而剏置禮
樂。依漢三省。而聿遵法度。于斯時也。
天兆龜文。而水潤五色。地開醴泉。而
山呼万年。魏晋以來。開拓之功。未有
若是之廣。而岐州等三十。各建寺塔。
石室論曰。隋文開統。身及太平。固一世
之英主。而惟杜牧。特以偸窃位號。書
爲不終。豈警辭哉。唐宗之治世也。戡
㝎禍亂。而革季俗之衰。掇呑蝗虫。而
救年榖之災。肅振軍旅。而服遠夷之强
于斯時也。五靈一角。雜畓而呈祥。白
狐朱鴈。昭彰而現瑞。兩漢以來。剏業
之䂓。未有若是之宏。而追崇穆太后。
流涕而建寺。唐史賛曰。盛哉。太宗之
烈也。比迹湯武。庶幾成康。而惟歐陽
脩。特以好功勤兵。書爲病疵。豈諒言
哉。是皆稀世之君也。
以臣言之。
護
持之臣。不趐千萬。而略擧數代焉。晋世。
則有郄超孫綽許詢陶潜王導周凱庾亮
王蒙王恭王䛑郭文謝尙戴逵之徒。梁
世則有任昉何點何胤沈約劉勰傅翕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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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종蕭宗ㆍ이식李寔ㆍ이윤지李胤之ㆍ완효서阮孝緖 등이 있었습니다.
당대唐代에는 유선柳宣ㆍ송경宋景ㆍ장열張說ㆍ왕유王維ㆍ왕진王縉ㆍ양숙梁肅ㆍ이선李詵ㆍ유가劉軻ㆍ육우陸羽ㆍ이고李翺ㆍ최암崔黯ㆍ위주韋宙ㆍ두홍점杜鴻漸ㆍ백거이白居易 등이 있었습니다.
송대宋代에는 전숙錢俶ㆍ왕단王旦ㆍ양걸楊傑ㆍ양억楊億ㆍ위기魏杞ㆍ이구李覯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ㆍ이병李邴ㆍ증개曾開ㆍ이준훈李遵勛ㆍ장덕원張德遠 등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정의 계획을 돕고 국가 계획에 협동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산천(煙霞)에 몸을 맡기거나 자연에 은둔하고 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문장 공부를 원대하게 해서 글재주를 마음껏 펼쳤습니다. 모두가 죽기를 작정하고서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였으며 자신의 육체를 잊고서 불법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모두가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뛰어난 신하들입니다.
이상의 여러 임금과 신하들은 부처를 더욱 힘써 모셨다고 할 수 있지 치국평천하함에 해를 끼쳤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또 전 시대에 불교를 배척한 임금과 불교를 비방한 신하들에 대해서 질문을 올리고자 합니다.
임금으로 말하자면 불교를 배척한 임금은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북위北魏의 무제武帝는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하여 도가道家의 태평천군太平天君을 모시는 정륜천궁靜輪天宮을 세우면서 인력과 재물을 낭비하다가 마침내는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스님들을 함부로 죽이고 자신은 황의黃衣를 입었는데 진양晉陽에서 열이 올라 말소리도 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당나라 무종武宗은 사찰과 불상을 없애고 신선이 된다는 금단약金丹藥을 먹었습니다. 회창會昌(무종의 연호) 연간에는 사찰의 방이 2백 칸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은 불상을 훼손하고 해마다 스님들의 인적 사항이 기재된 승장僧帳을 만들었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정벌하러 갔다가 악성 종기가 터져 죽었습니다. 이상의 임금들은 모두 쇠퇴한 시대의 임금들입니다.
신하로 말하자면 불교를 배척한 신하는 몇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나라의 부혁傅奕이 장도원張道源의 도움에 힘입어 당 태종太宗에게 불교를 혁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재상 소우蕭禹는 그가 불교를 비방한다는 죄과를 물어 물리쳤으며, 태종은 부혁의 말이 도리어 어긋난다고 미워하여 종신토록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북위北魏 재상 최호崔浩가 구겸지寇謙之의 술책을 믿고서 북위 무제에게 승려를 죽여야 한다고 건의를 하였습니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그들의 술수를 택한 무지함을 비방하였으며,
蕭宗李寔李胤之阮孝緖之軰。唐世
[13] 有柳宣宋景張說王維王縉梁肅李詵
劉軻陸羽李翶崔黯韋宙杜鴻漸白居易
之儔。宋世則有錢俶王旦楊傑楊億魏
杞李覯蘇軾蘇轍李邴曾開李遵勗張德
遠之類。或翊亮朝猷。資諧庙筭。或杭
迹烟霞。棲身林壑。或磅磚文章。馳騁
詞句。咸誓死而耽玄。並忘形而禀敎。
是皆空匹之臣也。此數君諸公。可謂奉
佛尤勤。而未聞有害於治平者也。
臣又
言前代廢斥之君排毁之臣而質之。以
君言之。則廢斥之君。不過數三。而惟
魏武帝。詆排釋敎。建靜輪天宮。費竭
人財。而終感
疾。周武帝。殱戮沙門。
身服黃衣。熱發晋陽。而失音抵死。唐
武宗。罷除寺像。餌金丹藥。會昌不滿。
而早致崩亡。周世宗。毁仆鑄像。歲造
僧帳。擧兵北伐。而疽遺殂落。是皆衰
世之君也。以臣言之。則排毁之臣。不
過數三。而惟傅奕附張道源之助。奏
䟽於唐祖。請罷釋敎。宰相蕭禹。斥其
謗佛之罪科。而太宗惡奕言悖。終身不
齒。又崔浩信冦謙之之術。建白於魏武
誅滅沙門。司馬溫公。譏其擇術之不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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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 길 가던 사람들은 최호의 악행을 원망하였으며 최호의 얼굴에 오줌을 뿌렸습니다. 또 북주北周 시대에 도사 장빈張賓이 위효관韋孝寬의 일당과 결탁하여 북주의 무제에게 불교를 헐뜯는 말을 하고 불상을 허물어야 한다고 하자 대부大夫 견란甄鸞이 불법의 정직함을 논변하였고, 후대에 당나라 상서尙書 당림唐臨은 배척을 근거로 해서 (불교설화집인) 『명보기冥報記』를 지었습니다. 또 당나라 도사 조귀진趙歸眞136)이 유현정劉玄靜의 아첨에 따라 당 무종에게 은근히 참소하여 절을 불 지르고 없앴습니다. 그리고 당시 습유拾遺 왕철王哲도 무종에게 불교를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간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사관史官도 불교 혁파를 거론하였음은 호오好惡가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신하들은 모두 혼란한 시대의 신하들이었습니다.
이상의 여러 임금과 여러 신하들은 불교 배척에 매우 철저하였다고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치국평천하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전 시대 군주들의 행위는 자신의 손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시호市虎137)가 전하는 말이요, 베틀에 앉아 있던 증자의 어머니가 베틀 북을 던지게 된 것138)에 연유하는 것입니다.139)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는 송대宋代의 학자인 정자程子140)와 주자朱子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명도程明道는 불상을 배척하지 않았고, 주회암朱晦菴(주자의 호가 회암)은 불서佛書를 즐겨 보았습니다. 장난을 칠 때에 단지 문자로 배척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고원한 듯하지만 내용이 없고, 이치에 가까운 듯하면서 진실을 어지럽힌다.”라고 하였지 불교를 폐지해야 한다는 글은 보지 못했습니다.
당나라의 학자 한퇴지韓退之(한유)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불교를 배척하자 서촉西蜀 용 선생龍先生141)이 한유의 말이 불교의 교리에 거슬린다고 원통히 여겨 「비한非韓」을 지어 한유를 공격하였습니다. 나중에 한유가 태전太顚 스님과 교유를 하자 상서尙書 맹간孟簡(한유의 제자)이 한유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망迷妄을 고친 점을 좋게 평가하였습니다. 송宋나라의 문장가인 황노직黃魯直(황산곡)은 “한유가 태전 스님을 만난 이후로 불교를 배척하는 주장이 조금 줄었다.”라고 평가를 하였습니다. 구양수는 한유의 인간됨을 사모하였고 그가 불교를 배척함을 좋아하였습니다. 구양수가 언젠가 숭산崇山에 유람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고 하니, 사희심謝希深 (송의 문장가)이 글을 지어 그 사건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송나라의 학자인 사마광司馬光은 순자荀子와 맹자孟子의 뜻을 계승하여 불교를 없애려고 하였으나 원통 선사圓通禪師142)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갑자기 숙세의 원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예기銳氣를 잊고 공공연히 “불법의 정미함이 우리 유가서儒家書에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송나라의 장상영張尙英은 공자의 도를 숭상하여
而路人忿浩元惡。行溺其面。又張賓搆
韋孝寛之黨。譎譛於周武。猜毁浮啚。
大夫甄鸞。辨其佛法之正直。而尙書唐
臨。因其抵排。述㝠報記。又趙歸眞。從
劉玄靜之侫。暗訴于唐武。焚廢淨坊。
拾遺王哲。諫其信謟之太過。而史氏論
其革罷。好惡不同。是皆季習之臣也。
此數君諸公。可謂斥佛尤篤。而未聞有
補於治平者也。大抵前代君主之所爲
不出於自用。皆因市虎之傳言。致有機
母之投抒也。
業儒之士。莫賢乎程朱。
而程明道。不背塑像。朱晦菴。喜看佛
書。爭戱之間。只以文字斥之不過。曰
似高而無實。近理而亂眞。廢佛之論。
未之見焉。韓退之上表排佛。西蜀龍先
生。憤其言忤。著書攻之。愈後與太顚
交遊。尙書孟簡寄書。嘉其改迷。故黃
魯直謂。韓愈見太顚之後。排佛之論少
沮云。歐陽脩。慕韓愈爲人。喜排釋氏。
甞遊崈山。遇僧談話。不覺膝之自屈。
故謝希深。作文記其事云。司馬光繼荀
孟之志。方營汰去。因謁圓通。忽悟宿
願。遂忘意之自銳故。公之言曰。其精
微不出吾書云。張尙英尊孔氏之道。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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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불론無佛論을 지으려다가 임제종의 고승인 도솔 종열兜率從悅 스님을 찾아가 마음이 확 트이어 「호법론護法論」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우의정으로 벼슬이 올랐는데,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으므로 송나라의 문장가인 당자서唐子西(唐庚)가 시를 지어 그의 미덕을 칭송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걸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문자로써 불교를 멀리하였을 뿐이지 불교를 폐지하자는 논의는 또 보지 못했습니다. 즉 불법의 이치를 깊이 음미하는 동안에 마음으로 합치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논한다면 불교를 숭상하고 모신 임금과 신하는 수천수만 이상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시 불교를 믿은 임금과 신하는 모두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를 배척한 임금과 신하는 두세 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불교가 유해하다고 해서 당시의 임금의 신하는 모두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불교를 받들고 믿음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후한의 명제 같은 임금이 북위 무제보다 못하며, 송경이 장빈 같은 무리보다 뒤떨어질 것입니다. 과연 불교를 폐지하고 배척함이 옳다고 한다면 북주의 무제 같은 임금이 당의 태종보다 뛰어나며, 최호가 부의 같은 인물보다 현명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태평한 시대를 따진다면 반드시 한漢ㆍ당唐을 말하고, 부의ㆍ송경이 사특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혼란한 시대를 말한다면 반드시 북위ㆍ북주를 말하고, 최호ㆍ장빈이 나라를 경륜할 만한 솜씨가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여러 역사를 종합하여 (부처가 없다는) 무불설無佛說에 관하여 단정을 내리십시오. 신 역시 여러 역사를 열거하여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옛적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사양師襄에게 거문고를 배웠고, 장홍萇弘에게 음악을 물었고, 담자郯子에게 고대 관직 체제에 대해 배운 것은, 이들 모두에게 취할 만한 점이 있고 『춘추春秋』를 저술하고자 위함이었습니다. 그런즉 담자는 경전에 적히었으며143) 해석하는 이가 관직 명칭의 학설로 기록하였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이 경전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은 편찬하는 이가 이들의 학술이 기예지술技藝之術이라고 여겨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양ㆍ장홍 등이 어찌 담자보다 현명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대개 관직 명칭은 세상 교화와 관계가 있고 기예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구양수와 송기宋祁가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할 때에 구양수는 혜정惠淨의 행적을 삭제하고 오직 일행一行144)이 만든 대연력大衍曆을 남겨 두었습니다.
作無佛論。尋叅從悅。豁省心地。乃著
護法論。後登右揆。久旱而雨故。唐子
西賦詩。頌其美云。此皆豪傑之士。而
只以文字斥之。廢佛之論。又未之見焉。
則翫味之間。默契者存焉。
由是論之。
崇奉君臣。不趐千萬。而佛若無補。則當
時君臣。盡皆非乎。廢斥君臣。不過數
三。而佛若有害。則當時君臣。盡皆是乎。
果以崇奉爲非。則漢明諸君。劣乎魏武。
而宋景短於張賔之儔也。果以廢斥爲
是。則周武諸君。拔乎唐宗。而崔浩賢
於傅毅之徒也。雖然論治日。則必曰漢
唐。而未聞傅宋有邪僻之心也。語亂世
則必稱魏周。而未聞崔張有經綸之手
也。殿下必謂綜核諸史。斷無佛說。臣
亦擧數史而質之。昔孔子問禮於老子。
學琴於師襄。問樂於萇弘。學官於郯子。
皆有所取。而其修春秋也。則郯子得書
乎經。而釋之者錄其官名之說。三子不
書乎經。而編之者黜其方技之術。襄弘
諸子。豈不若郯子賢哉。盖官名所以關
於世敎者也。方技所以脫於國經者也。
是故歐陽脩宋祈修唐史也。則歐公偏
削惠淨等迹。而唯存一行大衍之作。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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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는 현장玄奘 등의 전기는 모두 삭제하고 오직 도홍道弘이 남긴 지리설地理說을 드러냈습니다. 혜정ㆍ현장 등이 어찌 일행ㆍ도홍 등보다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그렇겠습니까? 대개 대연력은 사계절을 통괄하는 것이요, 지리설은 인간의 일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니, 사관들의 기록을 취함이 합당합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 즉 「태종기太宗紀」에 실린 부혁傅奕이 주술력을 시험한 등의 종류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기술하고, 현완玄琬145)이 도를 논한 것은 억제하고 싣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주술력을 시험한 것은 뛰어나고 도를 논한 것은 하열하다고 하겠습니까?
대개 주술력을 시험한 것은 호사자好事者들이 근거도 없이 제시하였으므로 인용하여 불교의 공허한 점(虛)을 폄하한 것입니다. 도리를 논한 것은 이치를 탐구하는 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당당하게 수집하였으므로 물리치고 불교의 참된 점(實)을 숨기고 물리친 것입니다. 그리고 구양수ㆍ송기ㆍ사마광이 지은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저 『춘추』를 본받아서 저술되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저 『춘추』는 사사로이 편을 드는 것이 없는데, 이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한쪽으로 치우쳐 미워함이 있습니다. 불교의 참된 점은 물리치고 숨기며, 공허한 점은 인용하여 폄하합니다. 어찌 춘추시대의 정직한 역사가인 동호董狐의 붓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불교와 관련된 학설이 역사서에 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불교가 없던 예전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편안하였는데 불교가 있은 후에는 나라의 존속 기간도 짧고 운수도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신 역시 전대의 혼란한 시대를 열거하여 묻도록 하겠습니다.
혼란하여 멸망한 세상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몇 시대만 대략 열거하겠습니다. 사람을 해치고 많이 죽이기로는 어느 누가 하나라 걸왕桀王만 하겠습니까? 의로운 사람을 해치고 선한 사람을 손상시키기로는 어느 누가 은나라 주왕紂王만 하겠습니까? 권력을 탐내고 공적을 좋아하기로는 어느 누가 진시황제만 하겠습니까?
하나라 걸왕이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탐욕스럽고 포학하였으며 힘은 쇠를 구부릴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화려한 궁궐과 누대를 지어 총애하는 말희妺喜를 기쁘게 하였으며 산더미 같은 고기와 포를 만들어 백성의 재산을 고갈시켰습니다. 술로 못을 만드니 천 명이 마셨으며, 술지게미로 둑을 쌓으니 십 리 길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은덕을 베풀지 않고 포악한 짓을 하니 백성들은 그 괴로움을 참지 못하였으며, 음탕하고 방종한 짓을 하여 백성들을 모두 고생길로 빠뜨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이 하나라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내렸으며,
公並删玄裝等傳。而獨著道弘地理之
說。淨裝諸師。豈不及行弘軰哉。盖大
衍所以統天時者也。地理所以係人事
者也。見取於史筆宜矣。司馬光修通鑑
也。則太宗紀所載。與傅奕試呪之類。
揚而迺書。與玄琬談道之比。抑而不載。
豈試呪爲優而談道爲劣哉。盖試呪好
事者。孟浪所提故。引之而貶訕佛氏之
虗也。談道探理者。瞋堂所輯故。黜之
而諱却佛氏之實也。然則抑此三史。法
彼春秋而作也。雖然彼春秋。則必無私
挾。而此三史。則互有偏疾。其於釋氏。
宲者黜而諱之。虗者引而貶之。豈皆
董狐之筆哉。此所以佛說之不載於史
氏者也。
殿下必謂無佛之前。國治邦寧
有僧之後。年夭運促。臣亦擧前代亂亡
之世而質之。亂亡之世。不可勝記。略
擧數代焉。賊人多殺。孰如夏桀乎。殘義
損善。孰如殷紂乎。貪權好功。孰如秦
皇乎。夏桀之爲君也。貪固肆虐。力能
伸鉤。悅婦寵於瓊宮瑤臺。彈民財於肉
山脯林。酒爲池則千人俯飮。糟築堤則
十里延望。滅德作威。不忍其茶毒。耽
婬縱暴。盡墜其塗炭。是以天降夏氏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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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 태양은 언제 없어지려나.”146)라고 하는 원망을 품었습니다. 그러자 은나라의 탕왕은 백성들에게 걸을 정벌하겠다는 맹세를 하면서 정벌 길에 나섰고, 중훼仲虺는 탕왕에게 훈계하는 「중훼지고仲虺之誥」라는 글을 지었습니다. 마침내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견고한 좌측의 하수河水와 제수濟水를 상실하였고, 반석처럼 견고한 우측의 태산과 화산華山이 무너졌으며, 남쪽의 험준한 지역인 이궐伊闕을 빼앗겼으며, 북쪽을 완전히 방비하는 양장산羊腸山이 붕괴되었습니다. 탕임금은 남소南巢147)로 걸을 추방하였습니다. 명조鳴條로 달아난 걸이 죽자 하나라도 역시 곧이어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탕서湯誓」에서 “천명으로 걸을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은나라의 주紂임금이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 거짓을 잘 꾸몄으며 지혜도 넉넉해 간언을 막았습니다. 옥 술잔과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여 사치가 극에 달하였으며 시뻘건 구리 기둥 위로 사람을 걷게 하는 잔혹한 형벌을 행하였습니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 녹대鹿臺(주임금의 보물 창고)에 보물이 가득 찼으며, 잔악한 짓을 행하여 곡식이 거교鉅橋(주임금의 곡식 창고)에 가득하였습니다. 충성스런 어진 신하들에게는 포락지형炮烙之刑148)을 내렸으며, 추운 겨울 아침 강물을 건너오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보고는 정강이가 추위를 견디는지 알아본다고 두 정강이를 베었습니다. 간언을 하여 보필하는 신하들의 살을 가르고 어진 신하 비간比干의 일곱 구멍을 쪼갰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은 은나라에 가득 퍼진 포학한 죄에 분노하였으며, 백성은 대대로 원수로 지내는 원통함을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周나라 무왕은 용감한 병사를 격려하였으며 태공太公 여상呂尙은 직간直諫을 하는 강직한 지사들을 도왔습니다. 마침내 상교商郊(은나라ㆍ주나라가 전투를 벌인 곳)는 화살이 날아가는 전쟁터가 되었고, 목야牧野(은나라와 주나라의 최후 격전지)는 은나라의 군대가 창을 거꾸로 들고 도리어 자신의 군대(은나라)를 공격하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맹문산孟門山(은나라 좌측의 요지)에는 태항산太行山(은나라 우측의 요지)의 먼지가 휘날리고, 북쪽의 항산恒山에는 황하의 물결이 쳤습니다. 군사들이 회동하니 숲처럼 가득하였으며, 죽은 병사들의 피는 방패를 흘려보낼 정도로 치열하였습니다. 은나라의 보물은 모두 불에 탔으며 자신과 국가가 한꺼번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태서泰誓」에서 “천명이 은나라의 주임금을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진나라의 진시황제가 임금 노릇을 할 때입니다. 그는 천성이 모질어 사납고 평소 마음은 탐욕스럽고 잔인하였습니다. 유학자를 구덩이에 파묻어서 어질고 정의로운 사람을 죽였으며 책도 불태웠습니다. 자신의 공적을 칭송하는 사업149)을 크게 일으켰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도 거행하였습니다. 북쪽 오랑캐가 우환거리가 되자 장군 몽염蒙恬이 북쪽에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신선이 되고자 하여 서불徐市로 하여금 동쪽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에 보내어 불로초를 가져오도록 시켰습니다. 백성의 재산을 긁어모으고 부자들은 수도인 함양咸陽으로 이주시켰으며, 백성들의 노동력을 짜내어 위수渭水 남쪽에 아방궁阿房宮을 지었습니다. 2세世 호해胡亥(진시황제 둘째 아들)150)에 이르러서는 권력이 약해져 간사한 자들이 드러낸 야욕이 널리 퍼졌으며, 3세世 자영子嬰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구슬이 호지滈池의 임금에게 되돌아가고, 건어물은 진시황제의 시체를 실은 온량거轀輬車151)에 잠기었습니다.
유방劉邦은 패서沛西 지방에서 용처럼 웅크리고 있었으며, 항우項羽는 산동山東 지역에서 호랑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罪之罰。人懷時日曷喪之怨。於是成湯
行誓衆之征。仲虺作諭王之誥。遂使河
濟失湯池之固。泰華摧盤石之堅。伊闕
割南阻之險。羊膓崩北備之完。放之南
巢。走於鳴條。身終遷死。國亦隨亡。故
湯誓曰。天命殛之。殷紂之爲君也。言
能飾非。智足拒諫。窮奢侈於玉盃象著 [14] 。
重刑辟於炭火銅柱。厚賦稅則財寶鹿
臺。行殘害則粟盈鉅橋。炮烙忠良。斮
朝涉之兩脛。刳剔諫輔。剖比干之七竅。
是以天怒1)啇 [12] 罪貫盈之虐。民抱乃汝世
讎之寃。於是武王勗如熊之夫。太公扶
叩馬之士。遂使*啇郊爲鳴鏑之場。牧
野作倒戈之地。孟門騰太行之塵。恒山
沸大河之浪。師會若林。血流標杵。寶
玉俱焚。身國並滅。故泰誓曰。天命誅之。
秦皇之爲君也。天性剛戾。素心貪殘。
剗仁義於坑儒焚書。崇事業於頌功封
祀。患胡虜則蒙恬北築萬里。慕神仙則
徐市東入三山。畜聚人民。徙豪富於咸
陽。焦勞心力。作宮庭於渭南。陵夷至
於胡亥。姦回逞志。蔓衍及於子嬰。宗
祀不血。是以壁返滈池之君。鮑濽轀輬
之魄。於是劉邦虬據乎沛西。項籍虓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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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관중關中 지방에서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유방이 패상覇上에 당도하니, 그 지역의 제후들은 양羊을 보내어 항복하였습니다.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농隴과 촉蜀에서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습니다. 망이궁望夷宮에서 호해는 조고趙高에게 살해당했으며, 자영은 지도軹道152)에서 목에 밧줄을 걸고 항복하였으니, 만년을 위한 계책은 2세世를 지나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의賈誼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인의仁義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여러 임금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불교가 없었는데도 패망하였으며, 나라의 운수 역시 단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승려가 있지 않은데도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오호! 기이합니다.
우리나라의 전대 기록을 조사하니 양梁나라에서 신라에 부처님의 사리를 보내자 모든 관리들이 나가 영접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사찰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불상도 찬란히 빛이 났으며 신승神僧도 간간히 배출되었고 기이한 스님도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불법을 구하러 서역으로 갈 때는 너른 바다에 배를 띄웠으며, 불법을 구해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고구려에 머물기도 하고 백제에 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삼국의 왕과 신하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부처를 모셨으며 매우 즐겁게 부처를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손가락과 온몸을 소신공양燒身供養하면서 국가의 운명이 오래되고 집안이 잘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992년, 고구려는 705년, 백제는 618년의 왕조를 누렸습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유해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고려의 왕씨王氏가 삼한을 통일을 하게 되자 불법이 널리 퍼지고 신도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재상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 모두가 마음을 기울여 불교에 귀의하고 불법이 널리 퍼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혹은 왕족으로 비구니와 스님이 된 사람도 간혹 있었으니 불법이 악을 막고 선을 널리 퍼뜨리는 근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려 왕씨가 나라를 475년 동안 통치하였습니다. 고려 왕조 기간 동안에도 불교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유해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대왕 전하께서는 천명에 응하여 국운國運을 열었으며 흉악한 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위대한 명성은 임금이 된다는 예언이 있었으며 성인의 덕이 있어 구오지위九五之位(제왕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경건하고 지혜롭고 도덕심과 재주는 모든 왕의 으뜸이며, 심오한 지혜와 온화하고 공손함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포용하였습니다.
乎山東。遂使關中迎爭鹿之戰。覇上送
納羊之降。殽涵轟伐戮之聲。隴蜀漲腥
膻之氣。弑身望夷。繫頸軹道。萬歲之
計。二世而亡。故賈誼曰。仁義不施。此
數君之世。可謂无佛而敗亡相尋。年祚
亦促。此非有僧而致然者朙矣。
嗚呼异
哉。若稽我東之前籙。則梁送佛舍利于
新羅。百官郊迎。自爾梵宇崎嶇。尊容
燦爛。神僧間生。異釋繼出。訪道西遊。
則或舫渤桴溟。得法東還。則或居麗止
濟。三國王臣。莫不駿奔而遵。雀躍而
奉。至於剪鬚落髮。灼指燃身。期爲壽
國祐家之助。而新羅歷年九百九十二
年。高麗歷秊七百五年。百濟歷秊六百
一十八年。此時未聞佛之有害於治道
也。逮夫王氏之統合也。玄綱振紐。道
樹增芽。宰輔之冠冕。人倫之羽儀。靡
不倒心而歸投。翹首而佇仰。或至於王
族之爲尼爲僧者。間常有之。冀爲遏惡
弘善之本。而王氏曆秊四百七十五年。
此峕亦未聞佛之有害於治道也。
恭惟
我太祖大王殿下。應天啓運。刜惡除兇。
當鴻號四七之符。禦龍飛九五之位。欽
明文思。邁絶百王。濬哲溫恭。牢籠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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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세운 초창기와 국가의 기틀을 잡은 후에는 취령鷲嶺에 정신을 두고153) 계원鷄園에 마음을 두고서154) 무학 대사無學大師를 방문하여 한양을 수도로 결정하였습니다.
태종 대왕께서는 진실로 중용中庸의 도를 잡고서 선왕의 덕을 계승하였습니다. 동정서원東征西怨155)의 경사慶事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인을 돕고 유약자를 이끌어 주는 인자함을 쌓았습니다. 남을 해치는 잔악한 자를 제거하고 없애면서도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며(湯網156) ), 형벌을 관대히 하고 죄 있는 사람을 사면하고 길을 가다가 죄수를 만나면 수레를 멈추고 죄의 경위를 물어 보았습니다(禹車157)). 문안을 드리는 여가와 정무를 보고 난 한가한 때는 각원覺苑(사찰)을 찾아다니면서 공空의 종지宗旨를 연구하였습니다.
세종世宗ㆍ문종文宗 대에 이르러서는 이제 막 개국한 나라의 초장기에 대단히 신중하게 처신하면서도 공로를 많이 드러내었습니다.
세조世祖 대왕께서는 학문을 진작하는 계획(文謨)을 대대적으로 밝히고 군사적인 공적(武烈)을 널리 드러내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을 받들고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는 전통을 이어받고, 도리를 논의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위엄을 세웠습니다. 신성하고 총명한 자질로 아름다운 공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엄숙하고도 공손하며 경건하고 조심하여 참으로 영웅의 자질에 딱 들어맞았으며 은혜를 가득 내리는 태양을 돌리고 진실한 교풍敎風을 고무시켜 일으켰습니다.
성종成宗ㆍ중종中宗 대에 이르러서는 역대 왕들의 아름다운 명령을 이어 갔으며 그러한 규범을 후대에 전하였으니, 특별히 승과僧科를 설치하여 나라의 과거 시험과 동급으로 하였습니다.
명종明宗ㆍ선종宣宗 대에 이르러서는 역대 왕들이 남긴 교훈을 실천하느라 부지런히 노력하였으며 그들이 남긴 계획을 경건히 실천하였습니다.
지혜로우신 인조 대왕仁祖大王 전하께서는 역대 왕들의 큰 업적을 모으고 하늘이 내린 천명을 잘 알았습니다. 반란을 제압하고 포악한 사람을 죽이는 도리를 실천하였습니다. 위험한 상황 앞에서는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는 권도權道를 생각하였습니다. 나라의 재앙이 될 만한 싹이 트면 반드시 자르고 사죄四罪158)에게 벌을 내리고 백성의 농사에 반드시 관심을 가져 육책六責159)으로 스스로를 지켜 나갔으니, 참으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짝을 찾기 힘든 참된 군주이며, 현재를 뛰어넘어 영원히 적수가 없을 정도인 성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연꽃 속에 간직되어 있는 진리와 깨달음의 도를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으며 북돋아 주고 베지를 않았습니다. 훌륭한 왕의 자손들이 대대로 계승하여 내려와 그 자신 한 몸은 경사를 누리며 영원토록 끝이 없는 국가 사업을 후대에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불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해로움이 있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시경』 「주송周頌」 (〈민여소자閔予小子〉)에서 “위대한 조상들을 생각한다.”라고 하였으며, 『시경』 「노송魯頌」 (〈반수泮水〉)에서 “자신의 마음을 밝혀 나라를 세운 공로가 많은 조상에게 다가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역대 빛나는 조상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항상 생각함이 조상의 공로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聖。草昧之初。權輿之後。栖神鷲嶺。致
情鷄園。訪得無學。㝎都漢陽。太宗大
王。允執厥中。克肖其德。蘊東征西怨
之慶。貯扶老携幼之仁。去殺勝殘。輒
解湯網。寛刑赦罪。爰停禹車。問安之
暇。垂拱之餘。鉤深覺苑。索隱空宗。至
于世宗文宗。克愼厥緖。篤叙乃功。世
祖大王。丕顯文謨。維揚武烈。承崇德
尙賢之統。立論道經邦之威。聖神聰明。
用勱嘉績。嚴恭寅畏。允恊英姿。輪昇
惠日。皷振眞風。迄于成宗中宗。嗣厥
休命。傳此風䂓。特設僧科。例同國試
及乎明宗宣宗。敢勤厥訓。祗服斯猷
睿聖仁祖大王殿下。集厥大勳。顧諟明
命。行救亂誅暴之道。詧臨危制變之權。
孽薅必鋤。四罪能施。稼穡必念。六責
自全。實曠古難雙之眞主也。亦超今永
隻之聖君也。然而蓮藏之詮。菩提之道。
存而不革。培而不剪。文子文孫。乃繼
乃承。享一人有慶之禎。垂萬歲無疆之
業。此時亦未聞佛之有害於治道也。周
頌曰。念玆皇祖。魯頌曰。昭假烈祖。伏
願殿下。念玆烈祖。禹謨曰。念玆在玆。
「啇」通用「商」{編}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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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군아君牙」에서 “조상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와 같은 조상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천하에는 불교가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이빨에 옻칠을 하는 나라, 짐승처럼 마시고 상투를 치는 풍속이 있는 지역, 풀옷을 입고 털을 먹는 지역,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를 늘어뜨리는 지역, 구이팔만九夷八蠻의 바깥 지역, 오융육적五戎六狄의 사이에도 모두 다 승려가 있습니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이나 사대부가 백성을 교화함은 승려들 덕분이고, 승려들에 의해 자신들의 절개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전하의 아름다운 덕행은 금수를 포용하고 지극한 사랑은 초목에까지 두루 미칩니다. 어찌 소를 양으로 바꾸어 살린 것에 구애받겠습니까?160) 어찌 나무와 기러기의 능력이 다르다고 해서 죽음에 대해 치우친 생각을 하십니까?161)
삼가 역대 고승들의 족보를 보면 국사國師 도선道詵(827∼898)은 우리 동방의 성승聖僧입니다.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에게 불법을 전수받았습니다. 당나라의 도사道士인 윤음尹愔은 “일행 화상은 참으로 성인이다.”162)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천문가인) 낙하굉洛下閎이 설명한 6백 년 예언설을 받아들여 『주역』의 대연수大衍數163)를 추측해서 점성가들의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도선 대사는 일행 스님의 오묘한 학설을 모두 이어받고 동쪽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천지의 이치를 연구하고 음양의 조화를 관통하였습니다. 높고 낮은 산을 올라가 두루 조사해서 사찰을 건립하여 천오백여 개의 비보裨補(도와서 이익이 되게 함)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비보란 국가를 도와서 이익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지세地勢가 가장 신령하면 반드시 예언하기를, “이 절이 흥하면 이 나라가 흥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선 대사의 말이 거짓이고 현실적인 근거가 없다면 그만이지만 그의 학술이 기이하고 징험이 있으면, 즉 사찰을 건립함이 국가에 도움이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손해됨이 없음이 또한 분명합니다.
근래 어지러워진 세상에 이름난 거대한 사찰은 불에 타 없어지고, 또 권세가들에 의해서 절을 많이 빼앗겼습니다. 나라의 큰 기운이 무너지고 산맥의 기운이 쇠약해졌습니다. 불교가 망하겠습니까? 나라가 흥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도선 대사의 예언으로 본다면 사찰이 있고 없음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계가 있습니다. 신은 항상 국가를 위해서 애통하게 여기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서도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또 승려들의 역사를 조사해 보니 제왕이 흥성할 때는 반드시 명망이 있는 고승을 방문하였으며 국사國師라는 호칭을 세웠습니다. 국사란 나라의 임금을 돕는 스승이라는 의미입니다. 고승의 도덕심과 명망은 가장 높아
君陳 [15] 曰。無忝祖考。伏願殿下。念玆祖
考。
凡天下未有無佛之國。雖彫題漆齒
之邦。嘼飮魋結之俗。卉服毛茹之疆。
文身被髮之域。九夷八蠻之外。五戎六
狄之間。咸皆有僧。蒙其君長之化。全
其操守之節。况殿下之懿德涵於禽獸
至仁浹於草管。豈隘牛羊互易之生哉。
豈偏木鴈異喜之殺哉。謹案釋譜。國師
道詵。我東之聖僧也。入唐受法於一行。
一行者。尹愔所謂聖人者也。膺洛下閎
六百年之讖。推大衍數。紏其數家之繆。
詵盡傳其妙。秘而東歸。縕天地。貫幽冥。
陟巘登巒。歷銓建寺。爲一千五百裨補
之所。裨補者。裨補國家之謂也。其地
勢㝡靈。則必讖云。此寺興則此國興。
其言恐訹狂妄則已。其術神異徵驗。則
寺宇之剏。有益於國家。無損於治道者
亦明矣。近世澆灕。名籃巨刹。鞠爲火
熸。又爲勢奪。元氣剝喪。山脉凋零。佛
將亡耶。國將興耶。雖然以讖觀之。寺
宇之成毁有。則國家之興亡繫焉。臣常
爲國痛之。爲國危之。又勘僧史。帝王
之興也。必訪尊宿。立國師之號。國師
者。師補國君之謂也。其道望㝡高。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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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흥하려면 신승神僧이 출현한다.”라고 반드시 기록하였습니다.
중국을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마등摩騰,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의 보지寶志(418∼514), 수나라의 지의智顗(538∼597), 당나라 태종 때의 현장玄奘(600∼664), 송나라 태조 때의 마의麻衣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해동海東을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신라 시대의 묵호자墨胡子, 고려 시대의 순도順道, 백제 시대의 난타難陁, 송악의 도선道詵, 한양漢陽의 무학 대사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상의 여러 승려들이 교활하고 남을 속였다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불도는 넓고도 멀리 퍼졌습니다. 즉 신승이 출현함은 국가에 이익을 주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도 손해가 없음은 또한 분명합니다.
요즈음 세상은 황당하여 큰 덕을 가진 스님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불법이 높은 고승들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또 갑자기 단절되었습니다. 불법이 내려오는 계통은 막혔으며, 사찰은 황폐해졌습니다. 불교가 장래에 쇠퇴하겠습니까? 아니면 국가가 미래에 흥성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비기秘記를 근거로 해서 본다면 신승의 출현 유무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신은 항상 국가를 위해 안타까이 여기고 나라를 위해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아! 전체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찰이 있으면 이익이 있고, 승단이 없으면 손해가 있습니다. 치도治道의 손익은 역시 사찰의 유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승단을 없애고 절을 허문 연후에 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십니까? 신은 거짓으로 전하를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역사서를 섭렵하시어 고금의 일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사찰을 없애고 흥한 임금이 몇 분이 됩니까? 승단을 존속시키고서 갑자기 망한 임금이 몇 분이 됩니까?
또 비구니가 있음은 한대漢代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왕의 후궁인 첩여婕妤164)와 궁녀 등 230여 명은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불교로 귀의하였습니다. 여혜경呂惠卿165) 등은 도사 628명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승복을 입었습니다. 현종顯宗은 열 군데에 절을 세웠습니다. 성안에 있는 세 곳의 절에는 비구니와 첩여 등을 편안히 거주하도록 하였고, 성 밖의 일곱 개 절은 스님을 안주시키면서 여혜경 등을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성 안팎으로 구분 지은 것은 남녀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必記云。國之將興。神僧出。以中國言
之。漢明之於摩騰。梁武之於寶誌。隋
祖之於智顗。唐宗之於玄奘。宋祖之於
麻衣是也。以我東言之。新羅之於墨胡。
高麗之於順道。百濟之於難陁。松嶽之
於道詵。漢陽之於無學是也。其人黠頑 [16]
欺謎則已。其道恢弘廣達。則神僧之出
有益於國家。無損於治道者亦明矣。近
世荒唐。碩德煙消。開士漚滅。又爲斗
絕。道統陻塞。禪林蕪穢。佛將衰耶。國。
將盛耶。雖然以記觀之。神僧之出沒有
則國家之盛衰係焉。臣常爲國慨然。爲
國愀然。
噫。合而觀之。有寺則在所益
矣。無僧則在所損矣。治道之益損。亦
預乎其間。而何必曰除僧毁寺。然後爲
治平者哉。臣非架空而誣罔於殿下也。
殿下涉獵圖史。曉達古今。廢寺而勃興
者。有幾君乎。存僧而忽亡者。有幾主
乎。且僧有尼衆。始於漢世。當時王婕
妤等。與宮媛二百三十餘人。厭俗歸眞
呂惠卿等。與道士六百二十八人。投簮
被衲。顯宗建寺十所。城內三寺安尼
婕妤等住之。城外七寺安僧。惠卿等住
之。所以限內外者。男女有別故也。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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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에서도 그 법도가 역시 실천되었습니다. 자수원慈壽院166)ㆍ인수원仁壽院167) 두 원院은 궁궐 바깥에 있으니 즉 선대 왕후王后의 내원당內願堂168)입니다. 봉은사奉恩寺(서울 강남구 삼성동)와 봉선사奉先寺(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두 사찰은 능침陵寢 안에 있으니, 즉 선왕先王의 외원당外願堂입니다. 내외內外를 구분 지은 것은 역시 남녀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로 선왕先王ㆍ선후先后의 제도입니다. 사찰은 국가와 더불어 흥하였고 국가와 함께 망하였습니다. 사찰이 있으면 국가의 경사요, 사찰을 훼손하면 국가의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에서 “사람들이 망한다고 하니, 마음의 근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수원ㆍ인수원을 철폐하면 전하의 근심이 됩니다. 『시경』 「소아」 〈육아蓼莪〉에서 “병이 비어 있음은, 술잔의 수치이다.”라고 하였으니, 봉은사ㆍ봉선사가 쇠망하면, 즉 전하의 수치일 것입니다. 지금 자수원ㆍ인수원 모두를 철폐해서 비구니를 내쫓아 보내었으며, 봉은사ㆍ봉선사를 모두 폐기해서 노비들을 몰수하였습니다. 우뚝 솟은 사원들이 고대 은나라의 황폐한 도읍지처럼 처참한 모습을 띄고 있으며, 청정한 스님과 비구니들은 모두 곤궁에 처한 사람들의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상조용繪像雕容(불상)은 마을 아낙네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방포원정方袍圓頂169)은 마을 어린이들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전하의 관대한 마음은 충분한데 무엇을 꺼리어 선후가 남긴 내원당의 비구니들을 내쫓으십니까? 전하의 부富 정도면 충분한데 무엇이 부족하기에 선왕이 남긴 외원당의 노비들을 빼앗으십니까?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5년에) 목자穆子가 “옛날의 좋은 것을 버리면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는 사원을 폐기한 것이 가장 큽니다. 우자鄅子가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소공」 18년)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돌아갈 곳이 없기로는 비구니들을 쫓아낸 것이 가장 큽니다.
천리天理로 말을 하자면 선왕ㆍ선후의 법도를 따름이 이치에 순응함입니다. 인사人事로 말을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논의를 따름은 이치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서경』 「태갑太甲」 상에서 “너의 조상들의 행실을 따른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낙고洛誥」에서는 “전대 사람이 이룬 업적을 더욱더 굳건히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다면 천리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춘주좌씨전』 「성공成公」 9년에서 “선군先君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예기』 「교특생郊特生」에서 “조상의 명을 받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於我東。其揆亦行。夫慈壽仁壽兩院
在宮掖之外。即先后之內願堂也。奉恩
奉先兩寺。在陵寢之內。即先王之外願
堂也。所以限內外者。亦男女有別故也。
此非一朝一夕之剏。實是先王先后之
制也。與國同興。與國同亡。有成則國
之慶也。有毁則國之殃也。故大雅曰。
人之云亡。心之憂矣。兩院廢則殿下之
憂也。小雅曰。瓶之罄矣。惟罍之恥。兩
寺衰則殿下之恥也。今兩院盡廢。放黜
尼衆。兩寺盡棄。削沒奴婢岧嶢寺院。
帶殷墟之慘。淸淨僧尼。含楚囚之悲
繪像雕容。傷心於巷婦。方袍圓頂。拭
淚於閭兒。殿下之寛。有何所忌。而黜
先后內願堂之尼衆乎。殿下之富。有何
所乏。而削先王外願堂之奴婢乎。穆子
曰。棄舊不祥。今日之不祥。孰若寺院
之廢棄哉。鄅子曰。余无歸矣。今日之
無歸。孰若尼衆之放逐哉。
以天理言之。
循先王先后之法則順也。以人事言之。
從一朝一夕之議則背也。故太甲曰。率
乃祖攸行。洛誥曰。篤前人成烈。苟如
是則順天理者也。左傳曰。不忘先君
禮記曰。受命于祖。不如是則背人事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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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임금과 백성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詩』에서 “나만 홀로 백성이 아니랴?”170)라고 하였고,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은 임금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비구니들이 어찌 전하의 백성이 아니며, 그리고 전하는 비구니들의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은 임금을 받들어 모시며 임금은 백성을 부립니다. 그러므로 백성의 입장에서는 의리상 당연히 정성스럽고 공경해야 합니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백성을 사랑하고 관대하고 어질게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비尊卑의 명분이고 상하 간에 편안히 사는 길입니다. 만약 비구니를 추방시킴이 과연 옳다면 선대 왕들의 영령이 전하에게 부끄러움을 가지게 될 것이요, 사원을 철폐함이 과연 잘못되었다면, 즉 전하께서는 선대 왕들의 영령에 부담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아! 이상의 일로써 추론해 본다면 사원이 있으면 순리에 따르는 것이요, 비구니를 추방함은 순리에 위배됩니다. 정치가 순리적으로 되어 나갈 것인가 혹은 잘못되어 나갈 것인가의 여부도 역시 사원의 존폐와 비구니의 추방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사원을 혁파하고 비구니를 추방시킨 연후에 인정仁政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
신은 근거도 없이 전하를 현혹시킴이 아닙니다. 전하의 효도는 천심天心을 감동시키고 지혜는 인도人道에 달통하였습니다. 선대 왕후께서 남긴 법도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비구니를 추방시킬 수가 있습니까? 선왕의 옛 법도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노비들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또 절에는 역대 제왕들의 위패를 모셨는데 당대唐代에 시작되었습니다. 개원開元(713∼741) 연간에 활동한 도의 선사道義禪師가 금각사金閣寺를 세웠습니다. 대종代宗이 두 종류의 세금으로 도움을 주니 고조ㆍ태종 이하 일곱 분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각각 황제의 칭호를 그 위패에 표시하였습니다. 광순문光順門에 모든 관리를 세우고 사찰 안으로 맞이하여 차례로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해마다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당시 태묘太廟와 동쪽과 서쪽의 두 궁궐에 영지靈芝가 자라니 황제가 시를 지어 찬미하였습니다.171)
우리 조선에서도 대개 당의 제도를 본받아 내외 원당願堂에 왕의 위패를 모신 지가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요 참으로 공경하고 존중해야 할 의식입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흙더미 속에 위패를 묻어 버렸으며 제단도 붕괴되었고 제사도 끊어졌습니다. 전하께서는 그 지역이 아닌 곳(즉 사찰이라는 의미)에 위치하여 위패를 설치하기가 합당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시대가 많이 지나가서 오랜 세월이 흘러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也。姑以君民語之。有君則必有民。故
詩云。我獨非民。書云。可愛非君。尼衆
豈非殿下之民。而殿下豈非尼衆之君
哉。民以君戴。君以民使。故在民義當
慤謹。在君愛宜寛仁。此尊卑之名分。
上下之安寧也。若放尼果是。則先靈有
愧於殿下矣。若廢院果非。則殿下有負
於先靈矣。噫。推而觀之。存院則在所
順矣。放尼則在所背矣。政軆之順背。
亦與乎其間。而何必曰。罷院黜尼。然後
爲仁政者哉。臣非鑿虗。而眩亂於殿下
也。殿下孝感天心。明通人道。思先后
之遺範。則忍黜其尼衆乎。念先王之舊
模。則忍削其奴婢乎。
且寺設聖位。始
於唐世。禪師道義。建金閣寺。代宗助
以二稅。設高祖太宗已下七聖位。各以
帝號標其上。立百僚於光順門。迎入寺
內。以次致祀。自是歲爲常准。于時太
廟二宮。生靈芝帝。賦詩美之。至於我
東。盖取諸此。夫聖位之設於內外願堂
者。數百秊矣。此非曰可曰否之端。實
是乃敬乃重之儀也。今一朝瘞於沙土
之中。壇墠旣崩。禘祫斯絶。聖慮必謂
處非其地。不宜設而然歟。抑世數久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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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그 지역이 아닌 곳에 위치했다고 한다면, 즉 당시 사람들의 식견이 높지 못함이요,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만약 시대가 많이 지나가서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즉 전대의 경전에 근거가 있고 흙더미에 묻힐 것이 아닙니다. 은대殷代에는 삼종三宗172)이 있고 주대周代에는 칠묘七廟173)가 있는데, 이것을 종묘라고 합니다. 종묘의 법은 고대에는 조주祧主174)는 태조묘의 동서쪽 협실에 모셨으며, 흙더미 속에 묻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소昭175)의 자리에 있는 신주를 옮길 때에는 문왕文王의 사당으로 옮기고, 목穆의 자리에 있는 신주를 옮길 때에는 무왕武王의 사당으로 옮기는데, 역시 흙더미에 묻는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시조는 백대가 지나더라도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치가 없습니다.
사원은 본래 불우佛宇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그 자리가 아니기는 하지만 이미 제왕의 위패를 모셨다면 참으로 종묘와 같습니다. 옛적 춘추시대에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향교鄕校를 허물지 않자 공자는 그가 어질다고 여겼고, 이영李榮이 사당의 신주를 헐어야 한다고 논의하자 한유韓愈는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 태조 이하 역대 왕들께서는 어떠한 존귀한 신령이기에 어찌 차마 왕의 호칭이 새겨져 있는 신주를 진흙 속에 묻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시대의 채묵蔡墨이 “옛 유적을 허물지 않는다.”(「소공」 32년)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옛 유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장소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춘추시대의 자어子魚가 “옛날의 제도를 따른다.”(「정공」 4년)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옛날 제도로 체협지사褅祫之祀176)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리를 기준으로 말을 한다면 공경할 만한 귀중한 유적을 지켜 나가면 이득이요, 인사를 기준으로 말을 한다면 왈가왈부하는 논쟁을 일으킨다면 손실입니다.
그러므로 『서경』 「상서商書」 〈열명說命〉 하에서 “선왕들이 완성한 법도를 거울로 삼는다.”라고 하였으며, 『서경』 「주서周書」 〈필명畢命〉에서 “선왕들이 완성한 공적을 공경하며 따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천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주역』 「수괘需卦」 구삼九三에서 “공경하고 신중하면 패배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곤괘困卦」 구오九五에서 “제사를 지냄이 이롭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즉 인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신이 날짜를 계산해 보니 가뭄과 기근은 신주를 묻은 해에 시작되었으며 지금 4년째로 접어듭니다. 벼를 심지도 못하고 곡식 수확도 못하였으며, 멀건 죽도 솥에는 없습니다. 남아를 데리고 가서 (종으로 만들어) 곡식과 바꾸니 부부가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며,
不應存而然歟。若曰處非其地。則當時
之識見未高。非殿下之失也。若曰世數
久遠。則前代之經典有據。非沙土之瘞
也。殷有三宗。周有七廟。是謂宗廟。宗
廟之法。古者祧主。藏於太祖廟之東西
夾室。未聞瘞於沙土之中也。至周則昭
之遷主。藏於文王之廟也。穆之遷主。
藏於武王之廟也。亦未聞瘞於沙土中
也。况始祖百世。無遆遷之義。今寺院
本稱佛宇。則雖非其地。旣設聖位。則
實同宗廟。昔子產不毁鄕校。孔子仁
之。李榮議毁廟主。韓愈非之。况我太
祖已下列聖。是何等尊靈。而忍以泥塵
瘞其標號之主哉。蔡墨曰。不廢舊績。
國之舊績。曷若壇墠之位乎。子魚曰。
以率舊職。國之舊職。曷若禘祫之祀乎。
以天理言之。遵迺敬迺重之蹟則得也。
以人事言之。起曰可曰否之諍則失也。
故1)啇書曰。監于先王成憲。周書曰。欽
若先王成烈。苟如是則得天理者也。需
之九三曰。敬愼不敗。困之九五曰。利
用祭祀。不如是則失人事者也。
臣以年
月考之。旱饉始於瘞主之歲。于今四載。
秧糓退鎌。饘酏辭鼐。持男易粟。則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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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팔아 살아 나갈 계책을 세우니 부모자식 간에 서로 이별하고, 유리걸식하면서 돌아다니는 자들은 길을 덮고, 굶어 죽는 사람은 거리를 메웠습니다.
춘추시대의 유하劉夏가 “신이 노하면 그 제사를 받지 않는다.”(『춘추좌씨전』 「소공」 원년)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선대왕들의 영혼이 노하여 제사를 받지 않아서 나라가 이러한 상황을 불러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춘추시대의 안자晏子가 “신이 노하면 그 나라를 바라보지 않는다.”177)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선대왕들의 영혼이 노하여 우리나라를 향하지 않아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현재 대단히 덕이 많은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렇게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몇 년이나 계속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여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근거로 과거를 본다면 더욱더 잘못됨이 있습니다.
용俑178)을 만든 것이 비록 미미하지만 위대한 성인인 공자는 용을 만든 사람이 후손이 없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돌을 땅속에 묻음이 비록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신령한 부처는 석씨石氏179)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역대 왕의 위패는 목자木子180)입니다. 웅덩이를 파서 묻는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조손祖孫 관계로 말해 보겠습니다. 조상이 있으면 반드시 후손이 있습니다. 『서경』 (「태갑太甲」) 중에서 “너의 빛나는 조상을 본받으라.”라고 하였으며, 『시경』 (「상송商頌」 〈나那〉)에서 “오 빛나는 탕의 후손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역대 왕들이 어찌 전하의 조상이 아니겠으며, 그리고 전하는 어찌 역대 왕의 후손이 아니겠습니까? 후손은 조상을 계승하고 조상은 후손들에 의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후손들의 효도는 당연히 조상들을 추모하고, 조상들의 영혼은 은밀하게 후손들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저승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이치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해야 하는 본래의 모습입니다.
신주를 묻음이 과연 옳다면, 즉 선왕들의 영혼은 전하에게 노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사를 폐지함이 정말로 잘못이라면, 즉 전하는 선왕들의 영혼에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 거꾸로 살펴본다면 위패를 설치함이 즉 이득이 있고, 제사를 중단하면 즉 손실이 있습니다. 교화의 득실은 역시 그 사이에서 나옵니다. 하필이면 위패를 훼손시키고 제사를 폐지한 연후에 덕교德敎를 실행하려 하십니까?
신은 유언비어에 따라 전하에게 참람되게 말씀드림이 아닙니다. 전하의 도덕심은 천인天人을 관통하고 학문은 심오한 경지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제터가 무너짐을 안타까이 여기신다면 어찌 차마 선왕들의 신주를 묻을 수 있겠습니까? 체협褅祫이 끊어짐을 슬퍼한다면, 즉 어찌 차마 그 올리는 제사를 없애려고 하십니까?
妻對泣。鬻子謀生。則父母相離。流亡
者蔽路。餓莩者塡衢。劉夏曰。神怒不
歆其祀。或者先靈怒。不歆祀而致此耶。
晏子曰。神怒不嚮其國。或者先靈怒。不
嚮國而至是耶。不然。豈今至德之治世。
有此不雨之連年哉。此必然而無疑者
也。將今視古尤有甚忒。作俑雖微。大
聖知俑人之無後。埋石雖小。神釋諭石
氏之致亡。矧今聖位。乃木子也。其於
穿坎而故坑之。爲何如哉。
姑以祖孫語
之。有祖則必有孫。故書云。視乃烈祖。
詩云。於赫湯孫。聖位豈非殿下之祖。而
殿下豈非聖位之孫乎。孫以祖承。祖以
孫永。故在孫孝。當追思。在祖靈。合陰隲。
此幽明之常理。死生之本然也。若瘞主
果是。則先靈無怒於殿下矣。若廢祀果
非。則殿下無報於先靈矣。噫。逆而觀
之。設位則在所得也。停祀則在所失也。
敎化之得失。亦出乎其間。而何必曰。毁
位廢祀。然後爲德敎者哉。臣非踵訛
而僣議於殿下也。殿下道貫天人。學臻
深奧。憮壇墠頹崩。則忍瘞其標主乎。
愴禘祫之停絕。則忍廢其享祀乎。
詳而
「啇」通用「商」{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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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하게 논의한다면 봉은사ㆍ봉선사 두 절은 쇠망시켜서는 안 되며, 자수원ㆍ인수원 두 원도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두 가지 일을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봉은사ㆍ봉선사 두 절을 망하게 하십시오.
비구니는 추방시켜서는 안 되며, 역대 왕들의 위패도 땅에 묻어서는 안 됩니다. 두 가지 일을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비구니를 추방시키십시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부득이해서 하는 설명입니다. 진실에 근거해서 말을 한다면 모두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역대 왕의 신주를 묻은 옛적부터 비구니를 추방한 금년에 이르기까지 비가 제 때에 내렸습니까? 날씨가 조화를 이루었습니까? 오곡이 익었습니까? 백성들이 즐거워하였습니까? 작년의 가뭄은 왕년보다 심하고 금년의 가뭄은 또 작년보다 심합니다. 내년의 가뭄이 금년보다 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역대 왕들이 순리에 따라 업적을 이룬 뜻을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어리석은 신이 감히 간언하는 정성을 살피십시오. 지난 세대에 일어난 일을 깊이 연구하여 미래에 벌어질 일을 막지 마십시오. 그러면 선왕의 영혼들이 아낌없이 돌보고 도움을 줄 것이요, 전하께서는 사찰을 폐지하고 혁파하는 허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고 귀신도 모두 즐거워합니다. 오전五典181)이 순조롭게 실행되며 모든 관리들의 일이 제때에 시행됩니다. 계절에 따라 칠정七政182)을 고르게 하며,183) 백성들은 친족들과 화목하게 살도록 하니, 곳곳에서 배를 두드리는 노랫소리(鼓腹之歌)가 들리고 사람들은 콧날을 찡그리는 탄식이 없으니 태평한 세상을 이룰 수 있고 융성한 국가의 복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신은 선조先朝(효종)에게 외람되이 지우知遇를 입었으므로 감히 오늘에 목숨을 돌보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길이 없으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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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새긴 사람들(刻字秩)
무주茂朱의 인명印明, 금구金溝의 성정省淨, 무주의 신청信淸, 태인泰仁의 종원宗元, 임실任實의 원익元益, 금구의 각심覺心ㆍ경한敬閑.강희康熙 22년 계해년(1683, 숙종 9) 3월 모일에 마치다.
論之。兩寺不可衰也。兩院不可廢也。
二事不兼。則寧衰兩寺也。尼衆不可黜
也。聖位不可瘞也。二事不兼。則寧黜
尼衆也。雖然此不得已之說也。據實而
言之。皆不可也。何者。自瘞主之徃年。
至放尼之今年。則風雨時乎。陰陽調乎。
五糓熟乎。百姓樂乎。前年之旱。甚於
徃年。而今年又甚於去年。則又安知明
年之不甚於今年哉。伏願殿下。上軆祖
宗奬順之意。下察臣愚敢諫之誠。深追
旣徃。不塞將來。則先靈有眷顧之佑。
殿下無廢革之
。人靈咸悅。神鬼盡歡。
五典克從。百揆時叙。齊七政於天時。
睦九族於民類。處處有鼓腹之歌。人人
無蹙額之歎。太平可致矣。洪祚可延矣。
臣於先朝。猥蒙知名故。敢於今日。不
避隕命焉。不勝屏營惴慓之至。謹昧死
以聞。
登階集終。
刻字秩。茂朱印明。金溝省淨。茂朱信淸。
泰仁宗元。任實元益。金溝覺心。敬閑。
康熈二十二年。癸亥。三月。日 訖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