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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문화-피터 존스, 레이 윤겐 비판
“이 책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고 우리가 잠시 경험하고 있는 ‘이방 풍습들’을 현재 전 지구적 문명에 대한 전체주의적 주장으로 만들고 있는 광범위하고 심도 있고 불길한 세력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 . . 한때 기독교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세속적 인본주의 운동을 이제는 종교적 이교사상이 대체하고 있다. . . .
그러나 이 시대의 종교 또한 세속적 인본주의 못지 않게 성경적 기독교를 대적하면서 성경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고대적이고 광범위한 이 운동은 세속적 인본주의가 성취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깊이 우리의 문화적 의식에 뿌리 박고 있다. . . .
이 운동의 상당 부분은 현대의 많은 학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조차 인정하고 있는 고대의 영지주의로 환원하는 운동이다. 이 이교주의는 오늘날 전형적인 서구인의 삶에 연루되어 있다.”[i]
이 글은 개혁주의 신학자인 존 프레임John Frame이 피터 존스Peter Jones가 지은 On Global Wizardry(『세계적 마법 현상』) 의 서문에서 한 말이다. 필자가 다른 면에서는 존경하는 존 프레임은 ‘명상훈련’을 ‘이방 풍습들’로 간주한다.
프레임의 ‘논리적 비약’이 문제다. 프레임은 외양이 비슷하면 내용도 같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이런 잘못된 비판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모르몬교는 예배할 때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전을 강해하고 헌금하며 구제와 전도도 한다.
- A 교회도 그렇게 한다.
- 그러므로 A 교회는 모르몬교다?
한국을 위시하여 전 세계의 교회 모든 교회가 A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모르몬교인가? 불신자는 모르몬교나 개신교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비슷한 '외양'만 보고 핵심적 '알맹이'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방종교와 분명히 구분된다. ‘외양’은 비슷하지만 알맹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인 피터 존스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영적 체험이 대유행이다. 현대 복음운동에 가담해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오직 성경으로’라는 개혁주의 원칙이 폐지되고 있다. . . . . .진리는 경험되는 것이지 사고思考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유의하라.”
진리는 사고 작용에 의해서만 정립되는가? 아니다. 진리는 사고와 경험에 의해 정립된다. 진리는 사고에 의해서만 정립된다는 일부 개혁주의자들도 오류가 있고 경험의 의해서만 정립된다는 일부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에게도 오류가 있다.
그러나 초자연적 현상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방언, 신유, 축사, 예언은 사도시대에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칼뱅이나 유명한 기적중지론적 칼뱅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본인의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세계적인 석학이라도 방언이나 초자연적 황홀체험에 대해 문외한이거나 비판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은사주의자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들이 ‘무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논리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안다’know는 단어는 이성적, 경험적, 관계적 지식을 말한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성경 진리를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안다.
그리고 ‘참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요한복음 17:3)이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지식은 물론 관계적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안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이성적 지식에 대해서만 말하고 경험적이고 관계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사고체계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논리로 <신비주의와 손 잡은 기독교>에서 레이 윤겐Ray Yungen은 오늘날의 관상(명상)기도를 비판한다.
예를 들어보자. A집사가 똑똑한 불신자 B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다.
그랬더니 B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독교에 관한 책을 좀 보았더니 기독교는 유대교-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온 한 분파더라.
구원은 기독교는 물론 모든 종교에 있고, 심지어는 '선행만 해도 구원 받는다'(포괄주의) 더라.
성경 예언 성취는 나중에 추가한 것이고, 기적은 전설과 심리학적 차원에서 기록한 것이더라.
기독교는 불교, 천주교 다음으로 종교 선호도가 꼴찌더라.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종교를 믿어야 하나?”
이런 의문에 대해 A집사는 뭐라고 답변(변증)할 것인가? 요즈음 기독교의 관상기도, 호흡기도, 기독교 신비에 대해 비판하는 자들은 B와 같은 자들이다.
자기들이 체험이 없기 때문에 x과 된장의 겉모습이 유사하다고 본질이나 핵심도 동일하다고 착각하는 자들이다.
국내에서는 정태홍 목사가 레이 윤겐을 자주 인용하면서 관상기도를 비판하고 있다. B가 기독교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수준이다. 자기들의 직접 체험이 없기에 외면적 유사성만 보고 x과 된장이 같은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 문화란 게 따로 있는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예수를 믿는 신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명령이자 규범(規範. Norm)-신자 모두가 순종해야 할 것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이지만 신자가 신비체험을 하는 것은 성경의 명령이나 규범이 아니라 서술이나 본보기-‘이렇게 했다’, ‘저런 사람이었다’-로 기록했다.
성경은 신비체험을 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있고 교회사를 통해서도제7장-28과에서 예시한 것처럼 신비체험을 하면서 하나님의 큰 일을 한 사람들이 많고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비공식 집계지만 한국 교인 중 방언을 하는 사람이 80퍼센트에 이르고 골통인 예장 OO교단의 목회자나 성도들 중에서도 3분지 2 정도가 방언이나 초자연적 체험을 인정하는 기적계속론자라고 한다.
이런 경우, 신자는 신비체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이 주제는 책 한 권을 써야할 정도로 까다롭다.[ii] 신비체험을 한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하지 못한 사람들은 희한한 신학과 이유를 대면서 신비체험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특히 공부 많이 하고 신학 책 많이 본 기적중지론적 칼뱅주의 신학자들, 목회자들 및 성도들이 제일 극렬하게 반대한다.
성경에서 신비체험이나 기적행하는 은사는 명령이나 규범이 아니라 서술이나 본보기로 기록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의 규범은 아니지만 신자들에게 유익하니까 그렇게 한 것 아닌가? 신비체험 하지 못해도 신앙생활 잘 하고 천국 간 사람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에게 신비체험이 유익하고 좋으니까 허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는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못 가진 자는 비판하거나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신비체험도 기적행하는 은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직접 주시기도 하고,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기도 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편 107:9).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기적행하는 은사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학문의 발달은 패러다임의 충돌에 의한 것
과학 사학자이자 과학 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지며 이 변화를 '과학혁명'이라고 불렀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과학조차 기존의 지식 위에 새로운 자식이 쌓이면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정-반-합이라는 충돌과 통합의 과정을 통해 발달해 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즉 세상의 과학은 끊임 없는 이종교배를 통해 부족한 것은 보충하고 좋은 것은 강화하여 발전해왔다는 말이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신학에는 전통적 칼뱅주의, 웨슬리안주의(감리교),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신학 등이 있다. 그런데 전통적 칼뱅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라는 오만한 자세로 ‘자신들만이 옳고 다른 신학은 틀렸다’ 는 잘못된 가정 하에 순혈주의를 고집하면서 모든 다른 정통신학을 비판하다가 정작 자신들은 몰락했다.
400년 전에 미국 기독교계를 선점한 칼뱅주의 후예들의 성적표는 어떠한가? 북미주-미국과 캐나다- 개신교인 1억 명 중에 52만 명 정도로 겨우 0.5 퍼센트에 불과하다.[iii] 그러나 이들이 비판하는 오순절운동과 은사운동은 겨우 100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35~50퍼센트에 육박하며 계속 성장일로에 있다. 그런데도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자들[iv]은 자신들의 치명적 약점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아직도 비판만 해대고 있다.
사탄이 문화를 지배-크리스천은 빼앗긴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누가복음 16:8).
이 구절을 확대해석하면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반적 지혜에서는 신자들 보다 앞선다는 말이다.
문화나 문명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다. 문화나 문명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인 가인의 후손들이 먼저 발전시켰다(창세기 5장 참조).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창조한 문화와 문명-말, 음악, 성 쌓기, 목축, 철 기구 등-의 바탕 위에 하나님의 신앙을 지켰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 .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8, 10).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을 세상이나 영적으로 좋은 것들을 마귀가 선점하여 오남용하는 사실을 모르고 기독교가 마치 마귀의 창조물(?)을 차용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악기는 세상적 술집에서 사용한다’고 해서 거룩한 교회에서 악기 사용하는 자체를 금지했다.
칼뱅은 찬양할 때 '시편[psalms]을 부르라'고 했고, 지금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그대로 남아있다(21장5절). 그런데 한글로 번역하면서 ‘시편’이 거북스러웠는지 “시[詩]를 부르는 것”은 그래도 원어를 살리는 번역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찬양하는 것”으로 번역하여 원문을 오역하고 있다.
미국에 온 청교도는 신앙고백의 가르침에 따라 멜로디 있는 노래는 '천주교의 찌꺼기'라면서 단조롭게 창(唱 chanting)만 했다. 천주교 것을 무조건 반대한 칼뱅주의자들은 천주교에서 선교를 강조한다고 해서 오래 동안 선교도 금지했다. 요즈음엔 천주교에서 영성훈련을 강조한다고 해서 영성훈련을 천주교적이라고 비판하는 자들도 있다.
교회에서는 한때 오르간이 마귀 소리를 낸다고 해서 사용을 금지했다.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의 찬양은 당시 술집에서 부르는 대중가요에 가사만 바꾼 것인데 한국의 찬송가 책에 그의 노래가 상당히 많이 실려 있다. 결국,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요즈음 모든 교회가 이단이다.
크리스마스도 원래는 이방의 태양신 숭배일이었지만 로마가 기독교화 된 후,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탄생일로 제정했다. 날짜는 지키면서 ‘알맹이’는 바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크리스마스 지키지 않는 신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
한국 교회의 약방감초격인 ‘새벽기도’는 원래 도교 출신인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목사가 도교 수행 대신 기도로 바꾸어 시행한 것이었다. 장로교에서 보편적인 ‘대심방’은 20세기초 미국 선교사들이 무당들이 하는 대심방을 본 따서 한 것이다. 이런 자들이 자기들에게 생소하다 해서 명상훈련을 비판할 자격이 있나?
무엇이 문제인가? ‘형식’, ‘도구’, ‘수단’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혜의 산물인데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이런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점쟁이나 무당은 북치고 춤추고 광란한다.
-A 교회도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짓은 ‘무당굿’이자 ‘광란’이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 치고 기타 치는 찬양과 경배에 대해서 교계가 이런 식으로 비판했다. 당시에 나름대로 예배학을 전공했다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형태의 찬양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일부 지역 교회협의회에서는 신문에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무당굿하지 않는 교회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하지 않은 교회가 오히려 이상한 교회가 되어버렸다.
신학적으로 정리되어서 받아들였는가? 아닐 것이다. 장자 교단인 예장 OO 증경 총회장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즈음 청년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다.”
비난 여론이 다소 수그러들었을 때 보수 교단의 어떤 목사가 말했다.
“교인들이 그런 찬양을 좋아하더라.”
무당굿이라고 비판하더니 교인들이 좋아한다고 교회에서 무당굿을 받아들이는가?
그런데 받아들였다. 왜? 해 봤더니 무당 굿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무당굿이기는커녕 좋기만 하더라.” 경험적인 앎이 중요하다.
“아, 외양은 무당굿과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른 거구나.”
알고 익숙해 지면 오해가 풀린다. 오해가 풀릴 뿐 아니라 너무 좋아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혹시나 명상훈련 반대하고 비판하는 자들에게도 이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교인들이 명상훈련(마음훈련)을 좋아하더라.”
이런 날이 이제 곧 올 것이다. 마음훈련을 하고 나니 신앙생활이 이렇게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다고 간증하는 신자들이 여기저기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문화관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기독교와 문화가 관계 맺는 5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문화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와 동일시 되는 그리스도, 문화 위의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 관계의 그리스도, 문화 변혁자 그리스도이다.
근본주의자는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2:15).
문화주의자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아무런 충돌 없이 조화시킨다. 이들은 근본주의자의 문화 경시의 오류를 잡아주는 역할은 했지만 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의 구분조차 애매하게 만들어 버렸다.
종합주의자는 하나님과 인간 문화의 구분을 명확히 하면서도 문화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다. 문화는 곧 인간의 삶이자 신자나 불신자에게 골고루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반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 스마트폰 및 악기 등은 중립적인 과학의 산물이므로 이들을 적극 활용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도 유사종교와 동일하게 기도, 경전 읽기, 헌금(보시), 전도, 봉사, 구제 등을 한다.
그러나 기독교 가치관에 위배되는 문화-제사, 동성애와 동성결혼 허용 등-는 변혁해 나가는 자세를 취한다. 명상훈련도 마찬가지다. 문화 변혁의 차원에서 이를 수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성경과 문화
성경조차 당시의 언어나 문화를 바탕으로 기록한 책이다.
언어.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성경 기록 전에 이미 존재하던 언어들이다. 자연히 성경에는 세속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들어보자.
-엘로힘(히브리어). 영어 성경에서 하나님(God)은 단수 대문자로, 다른 ‘신들’(gods) 즉 귀신들은 복수 소문자로 번역한다.
-데오스(헬라어). 문맥에 따라 하나님(God) 또는 신들(gods)로 번역한다.
-로고스(헬라어). 원래 스토아 철학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이성적 원리란 의미로 사용했는데, 신약에서 말씀(로고스)이나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씀’(요 1:1)으로 사용했다.
-프뉴마(영, spirit), 쉬케(영혼, soul). 성경 기록 훨씬 이전부터 헬라 철학에서 사용하던 단어들이다.
이처럼 성경은, 반대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이나 사교적 단어’로 도배가 된 책이다. 그렇다고 성경이 잘못되었는가?
또한 개혁신학 서적-특히 조직신학 책-을 보면 성경에 없는 ‘전문용어’로 도배되어 있다. 성경의 정경성, 무오성, 완전성, 영감성, 계시종료론, 삼위일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아담의 죄가 전가되는 방식에 따라 대표론과 실재론, 조직신학의 분류인 계시론, 신론, 인죄론, 기독론, 교회론, 구원론, 말세론, 성경에도 없는 칼뱅주의, 개혁주의, 개혁신학, 개혁교회,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란 단어들~
적어도 신학 전공자라면 이러 단어를 사용해야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은사사역자들이 비판자들이 보기에 ‘생소한 단어’ 몇 가지를 사용하면 비성경적이라면서 호들갑을 떤다.
또한, 성경에 있는 말(단어)-기름부음 사역, 임파테이션 등(로마서 1:11; 사도행전 8:17; 19:6 등)을 사용해도 ‘그것은 사도들이나 하는 것이지 오늘날 신자는 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비판한다.
한글도 비신자인 세종대왕이 창제한 글이다. 초기에는 용비어천가 같은 임금 숭배 용도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제 그 한글로 성경도 번역하고 기독교 책도 쓰고 논문도 쓴다. 그런데 문선명이나 이단들도 한글을 사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인가?
습관, 형식, 문화
-할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기 전에 이미 이교나 이방인들이 할례를 했다.
-인신 제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교 행위인 인신제물-이삭-을 바치게 하셨다. 미수로 끝났지만 아브라함을 실제로 죽이려고 칼까지 들었다.
-언약의 형식.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 형식은 당시 강대국인 히타이트(헷 족속)가 약소국과 맺은 국제조약 형식을 차용했다. 양국의 조약에는 서문, 본문, 결론이 있고 이후 서판 두 개에 기록하여 각자의 신전에 보관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서판은 두 개 만들었지만 이스라엘이 둘 다 법궤에 보관했다.
이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성경 본문을 보다 잘 해석하기 위해 고대 근동지방의 언어, 역사, 문화, 역사를 연구한다. 성경 언어와 역사 연구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Grammatical-Historical Interpretation은 개신교 성경해석학의 기본이다.
-쓰러지고, 웃고, 뛰는 행위, 방언 등. 사이비 종교, 쿤달리니 요가, 심리 현상, 마귀의 현상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도 일어난다. 초자연적 힘, 심리현상 또는 성령의 능력이 사람에게 일어났을 때 동일하거나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내용'이나 '열매'로 분별해야지 '현상' 자체로 분별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는 사람 보고 ‘김정은 위원장님 생각하면서 우는 사람과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고 정죄하는 것과 같다.
요즈음 ‘영성’, ‘중보’라는 단어를 성역화하거나 신격화하여 이런 단어를 사용하면 마치 천지개벽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님의 구약의 경륜을 신약으로 바꾸신 ‘개혁’이란 단어는 왜 입에 달고 사는가?(히브리서 9:10). 예수님의 ‘개혁’과 루터나 칼뱅의 ‘개혁’이 동급인가?
이처럼 성경도 이미 존재하던 세상이나 이교도의 언어, 습관, 형식을 사용하여 기록된 책이고 성경 해석을 위해서도 관련 언어, 문화, 역사를 연구한다. 이런 연구를 통해 성경 본문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자기들이 잘 모르는 생소한 단어나 현상에 접하면 그 모든 것을 마귀적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다. *
[i] Peter Jones, On Global Wizardry, Main Entry Editions, 2012, Kindle ebook.
[ii]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저 『기적의 은사를 구하라』, 한아북스, 2015를 참조하기 바란다.
[iii] North America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NAPARC. 북미주 장로교회 및 개혁교회 연합회) 교세 자료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North_American_Presbyterian_and_Reformed_Council
NAPARC은 ‘북미주 보수장로교회 및 개혁교회 연합회’인데 회원 총수는 52만 명 수준이다. 한국의 보수 장로교회는 합동, 백석대신, 고신, 합신을 합하여 425만 명이 되는 것에 비하면 미국의 보수 장로교는 몰락 수준이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의 보수 장로교 신학자들은 ‘우리가 제일 잘났다’면서 은사운동이나 영성운동을 비판하고 있다. 자기들이 비판하는 바로 그 은사사역이나 영성사역을 자기들이 수용해야 몰락해가는 교세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iv] 방언, 신유, 축사, 예언 등 기적행하는 은사는 사도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다는 주장을 기적중지론(cessationism)이라 한다. 그 반대는 기적계속론 (continuationis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