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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번째 수심결(修心訣)
經은 부처님 말씀이고 論은 보살들의 글이며 疏는 큰스님들의 해설서다.
※ 육조단경은 부처님으로 예우를 한 것.
1. 수심결에 대하여
고려(高麗) 21대 희종(熙宗) 때의 목우자 보조(普照) 국사(國師)가 지은 『수심결(修心訣)』을 조선(朝鮮) 시대(時代) 7대 세조(世祖) 때의 중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우리말로 옮긴 책. 10대 연산군(燕山君) 6(1500)년 합천 봉서사(鳳栖寺)에서 간행(刊行).
〈목우자수심결 牧牛子修心訣〉·〈보조국사수심결 普照國師修心訣〉라고도 한다. 40세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며 분량이 많지 않고 문장이 간결·평이하여 참선(參禪)의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지눌은 이 책의 서두에서 〈법화경〉의 '화택비유'(火宅比喩)를 인용하여 삼계(三界)의 뜨거운 고뇌는 마치 불타는 집과 같으니 이처럼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부처를 이루는 일이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곧참 부처이고 자신의 성품이 곧 참다운 법(法)임을 알지 못하여 밖에서만 찾으니,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본론은 마음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론을 9문 9답을 통해 제시했다.
제1 문답에서는 불성(佛性)은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지만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지각하는 것 자체가 곧 불성의 작용임을 설명했다. 제2 문답에서는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돈오(頓悟: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점차로 닦아나감)의 이문(二門)에 있음을 밝혔다. 제3 문답에서는 돈오와 점수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돈오란 자기의 본성이 곧 제불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란 그 깨달음에 의지하여 무시 이래로 훈습(熏習:향기가 옷에 배는 것처럼 業力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된 망념(妄念)을 점차로 걷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제4~6 문답은 돈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깨달음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으며 만약 방법을 써서 깨닫고자 한다면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는 것과 같으니, 눈을 잃지 않았음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영지(靈知:신령스러운 앎)도 이미 자신의 마음이므로 볼 수 없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곧 견성(見性:자신의 불성을 보고 깨달음)이다.
제7~9 문답은 점수의 방법론에 대해 선정(禪定)과 지혜를 균등하게 유지하는 정혜등지(定慧等持)로 설명했다. 정혜(定慧)를 체(體)·용(用)의 관점에서 보면, 정은 곧 자성(自性:자기가 본래 갖춘 성품, 곧 佛性)의 본체이고 혜는 곧 자성의 작용이므로 체·용이 분리될 수 없듯이 정·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점수의 방법론은 정과 혜를 동시에 골고루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정혜쌍수는 수행자의 근기(根機:敎法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로 나뉜다. 자성정혜를 닦는 자는 돈오문에서 '힘씀이 없는 힘씀'(無功之功)으로서 정과 혜를 아울러 부리고 스스로 자성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사람이고, 수상정혜를 닦는 자는 깨닫기 전의 낮은 근기의 공부로서 마음마다 의혹과 번뇌를 끊고 고요함만을 취해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깨달은 관점에서 보면 양자는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비록 돈오 후에 점수라고는 하나, 망념은 본래 공(空)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아도 닦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눌은 이 책에서 자신의 수심관(修心觀)을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체계화했고, 이는 곧 한국불교에서 선수행(禪修行)의 지침이 되었다.→ 목우자수심결 언해
2.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보조국사의 휘는 지눌(知訥)이고,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시호가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황해도 서흥(瑞興) 출생이다.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12)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했다.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 대각(大覺)한 뒤에 수도에 더욱 정진하였다. 1185년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독(閱讀)하고 선 ·교(禪敎)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 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하고 적극적 보살행(菩薩行)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 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의천(義天)이 교로써 선 ·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지눌은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宗風)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고려의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 길상사를 조계산(曹溪山) 수선사라 고쳐 제방(題榜)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자를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국사(國師)에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1. 三界熱惱가 猶如火宅이어늘
其忍淹留하야 甘受長苦아
欲免輪廻인댄 莫若求佛이요
若欲求佛인댄 佛卽是心이니
心何遠覓고 不離身中이로다
色身은 是假라 有生有滅커니와
眞心은 如空하야 不斷不變이니라
故로 云百骸는 潰散하야 歸火歸風호대
一物은 長靈하야 盖天盖地라하니라
*낱자 공부
訣이별할 결, 비결 결, 熱더울 열, 惱뢰괴로워할 뇌, 猶마치 - 같다. 宅집 택,
淹 담글엄, 留머무를 유, 若같을 약, 너 약, 만약 약, 땅이름 야, 覓찾을 멱
潰무너질 궤, 假거짓 가, 遺끼칠 유, 産낳을 산, 壞 무너질 괴, 骸뼈 해,
盖덮을 개 ,
* 단어 공부
·三界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세 가지이다.
욕계는 오관(五官)의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로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 등 5가지가 여기에 속한다.
여기에서는 보시(布施)·지계(持戒) 등을 욕계의 선(禪)이라고 한다. (중생계)
색계는 물질적인 것(色)은 있어도 감관의 욕망을 떠난 청정(淸淨)의 세계이다.
(유여열반)
무색계는 물질적인 것도 없어진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이다.(무여열반)
·輪廻 ~ 윤회란 바퀴처럼 돌고 돈다는 의미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으로 이를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한다.
·佛卽是心 - 부처님이 곧 마음(통칭)이라
일원은 법신불이요, 일원은 본원이요, 성품이다.
眞心(참 마음) 心地(마음 바탕) 心源(마음의 근원) 眞我(참 나)
* 해설
중생들이 있는 곳을 불타고 있는 집이라고 비유를 하였습니다.
대종사님은 파란고해라고 하셨습니다.
눈에는 육안과 심안이 있습니다.
육안은 형상 있는 것을 보고 심안은 형상없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심안으로 보니 번뇌가 불로 보였습니다.
속이 타면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을 끄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 고해에서 벗어 나려면 - 해탈 )
불을 끌 때 소방수가 필요하듯이 해탈하려면 부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럼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요
(부처님은 마음 가운데 있으니 그 부처님을 찾아야)
마음 가운데 계시는 부처님을 발견 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의 몸은 법신, 보신, 화신으로 구분합니다.
색신을 비롯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잠시 있다 떠날거라면 내 것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모두가 생멸을 하는 것입니다.
(직업, 의복, 집, 권력, 금은, 돈 등)
우리의 본래 마음(眞心)은 영원한 것이며 이를 일러 법신이라 합니다.
법신은 크고 작음이 없고 사람에 있어서는 개령,
우주에 있어서는 대령이라고 합니다.
이 법신을 발견 하여야 견성입니다.
法身 – 靈身 - 空身
化身 – 肉身 – 色身
원기 109년 9월 21일
제목 : 고양이가 돼지 목살을 먹는다.
저녁 식사하고 딸이 식사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어둑해지기에 먼저 일어나 산책하러 갔다 왔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서 들어서며 보인 것은, 식탁 위에 고양이가 올라가서 목살구이 남은 것을 먹고 있다. 부엌과 거실을 구별해주는 부엌 슬라이드 문이 열려 있다. 딸은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닫혀있는 샤시문 유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딸에게 알리려고 소리를 쳤다.
못 알아들어서 다시 손으로 유리를 두드렸다. 손이 아프다. 소리쳐서 목이 아프다.
모르는 이를 깨우쳐 움직이게 하려는 마음을 보지 못했다. 주로 현관문으로 통행을 하지만, 샤시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샤시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소리만 들어도 고양이는 식탁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딸이 밥을 먹은 후에 식탁 정리를 하지 않았고 부엌 슬라이드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네가 책임져! 라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고, 네 잘못이야! 라는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잘못이니 네가 처리해! 라는 마음에 따라 화살이 밖으로 향하고 있음을 못 알아차리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하지 않았다.
다음날 고양이는 구토를 하였다. 후추 뿌린 돼지목살 구이는 고양이 건강에도 안 좋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 전달은 해야 할 일이라 판단하여서, 딸에게 마음을 전달하였다. 딸이 내 마음을 받아주어 고마웠다.
잘못된 일이 있을 때 나에게 초점 맞추기를 다시 다짐하는 경계이다.
교무의 의견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셨네요. 운동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산책을 하고 집에 오니 고양이가 식탁에 남아 있던 돼지 목살구이를 먹었네요. 고양이가 소금기 있는 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는 딸이 있었으니 설거지를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안 하려면 덮어 놓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요. 평소에 고양이는 거실에서 놀고 식사는 부엌에서 하니 중간 슬라이스 문을 닫으면 고양이가 식탁에 갈 수가 없지요.
그런데 식탁은 그대로 있고 딸은 자기일만 하고 고양이가 구이를 먹어도 관심이 없고 그랬네요. 그러면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딸이 컸으니 설거지는 해도 되는 것 아냐, 고양이가 구이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모르는가, 슬라이스 문을 닫고 자기 일을 하지, 저런 딸을 믿었다니 그런 후회도 들지요. 일어나는 마음을 다 찾아서 보는 것도 큰 공부입니다. 일어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그 마음을 운전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같은 경계를 당하면 그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잘못된 원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나에게서부터 찾는 게 아니라 밖에서 찾습니다. 오늘도 딸이 안 해서 그랬다는 원인을 여러 개 찾았습니다. 잘못한 딸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딸로서는 고양이가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자기가 하는 일에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엄마로서는 딸이 다 컸으니 그 정도는 했을 것이라 하는 기대가 있지요. 기대는 내 마음이고 딸의 마음은 내 마음과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딸은 이생에 모녀 관계로 만났지만, 영혼을 가진 독립체요 무한대의 힘을 가진 법신불입니다. 확실히 법신불로 안다면 부처님께 부탁하여야 할 일입니다. 부탁했는데도 안 들어주면 어쩔 수 없지요. 나의 기도가 효험이 없는 것이기에 나의 정성을 탓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남이 와서 식사한다면 밥을 다 먹을 대까지 함께 있어 주는 것이 맞고 고양이 관리를 남이 하지 않았다고 탓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남에게도 탓을 안 하는데 소중한 인연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솔성요론에 잘못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를 살피라 하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진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남에게서 찾고 왜 안 하느냐고 탓을 판다면 다음에 똑같은 경계가 올 때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원기 109년 9월 15일
제목 : 남편이 핸드폰을 던진 일
막내가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를 해서 내가 먼저 이제 그만하라고 얘기를 했다. 그래도 게임을 계속하고 있으니 남편이 문구용 칼을 들고 가서 케이블을 끊어버린다며 협박을 하고 핸드폰을 가지고 나와 던져버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요란하다. 나의 마음을 보니 막내가 상처받을까 봐~ 아빠와의 관계가 안 좋아질까 봐~ 그렇게밖에 표현을 못 하는 남편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또 드는 생각이 과거의 학룡이와 은영이 생각이 떠오르며 두 아이에게 했던 말투, 행동들이 상처가 되어 지금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아 막내도 그렇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 나^^그때 참 많이 서운하고 왜 그렇게밖에 말을 못 할까? 좀 더 부드럽게 다정하게 못 하는 남편을 원망하고 소중한 아들이란 생각이 안 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었다. 지금 종훈이에게 하는 걸 보니 소중한 아들이 아니라서가 아니고 원래 남편의 모습이었던 거~ 내가 남편 모습 그대로 못 봐준 거다. 평소에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한 번씩 화를 표출하는 방식이 무식하고 애들에게 상처로 남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남편이 못마땅하다. 그러면서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데~하고 있다.
다음 날 저녁, 남편이 퇴근하고 와서 막내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어젯밤에 했던 행동이 하루종일 걸렸었나보다 생각하며 그래도 다행이네~싶었다. 어제 한 행동이 맘에 걸려있었다는 건 한 번쯤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니~
난 잠자기 전 남편에게 종훈이 방에 가서 무슨 얘기 했어? 화해했어? 하니 주사 꾸욱~했단다. (막내가 어렸을 때 엉덩이와 팔에 주사 맞히는 시늉을 하며 놀았었다) 헐~남편은 이게 화해하는 거구나^^ 종훈이가 뭐래? 아무 말 없었다고 한다. 나는 아직 마음이 안 풀렸나 보네~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다시 종훈 이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는다. 조금 있다 나와서 물어보니 종훈이를 안아줬단다. 반응은? 별 반응 없었다고 하며 나더러 신경 좀 꺼라 한다. 나는 궁금해서 그러지~하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남편도 나름대로 해결해보려 하는구나~ 나와 다르게 해결하는 것뿐인데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자꾸 간섭하게 되네^^
남편은 남편방식이 있는데~자꾸 나처럼 하라고 했네
교무의 의견
아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시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철이 들기 전에는 절제를 잘 못 합니다. 어른들이 안내하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계속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들에게 컴퓨터 그만하라고 하는데 휴대폰을 던졌네요. 남편이 휴대폰 던지는 것을 보고 남편이 잘못한다는 생각이 들으신 것 같습니다. 남편도 마음공부를 하여 폭력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 말고 설득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요. 토란인 아들을 달래는 데도 아이와 소통이 되게 풀어주어야지 미안하다고 말만 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일어나지요.
남편의 마음에는 아내가 잘난 체한다는 생각도 되고 내가 과격하게 하면 자기가 부드럽게 이야기 해주면 될 텐데, 자기 방식대로만 하라고 한다는 생각도 들 것 같습니다. 아들에게 어떻게 사과를 했는지 계속 물으니 못 믿어 그러는 것 같고, 마치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가르치려 든다는 생각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들도 법신불님이고 남편도 법신불님 이십니다. 부처님께는 불공과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아들이 스스로 컴퓨터 사용 시간을 절제하도록 기도를 하시면 어떨까는 하는 생각과 남편 부처님이 아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나와 다르다면 나의 마음을 남편에게 전달하면 어떨까요. 모든 일은 부처님이 감응하셔야 되는 것 같습니다.
원기 109년 9월 25일
제목 : 친구들의 여행 제안
노경만
걱정과 근심은 인간의 삶을 서서히 파괴해서 결국에는 무기력해진다는데 근심 걱정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요? 언제나 좋은 일 기쁜 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라면 종교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사실 저는 살아가면서 큰 경계에 부딪힌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하는데 솔직히 나의 주변을 둘러보면 경계투성이인듯합니다. 그냥 그 깊은 뜻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철없는 아이처럼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즐기며 생각 없이 살았을 때 주변에선 아마도 쑥떡 거리며 험담을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에야 후회되는 것이 아~~그때 시간을 알차게 계획적으로 사용했더라면 하고 싶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더 많이 보고 배웠을 텐데 그랬으면 지금의 내가 좀 달라졌겠지 하는 후회도 많습니다.
요즘처럼 손주들 건사하며 나름 바쁘게 돌고 돌지만 그리고 애써 즐거움을 찾으며 맴을 돌라면서 자기최면을 걸지만 사실 시간과 장소가 안 맞아서 좋아하는 친구와도 멀어지고 많은 부분이 상실되었으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명언을 붙들고 억지로 끼워 맞춰가며 현재의 일들이 중요한 비중으로 따져볼 때 위의 순위에 해당하니까 기왕지사 하는 일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자고 다짐하며 애써 나를 독려합니다. 그런데 선선한 계절 가을이 오니 친한 친구들 철없는 여행 제안에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하고 이래 볼까 저래 볼까 계획해보는 나 자신이 나도 모르게 나타나는 경계인 것을. 주변 지인은 그냥 며칠 좀 갔다 온다고 말해봐라~라며 아주 쉬운 듯 뱉어내는 그 말들이 내 가슴 찌르는 상처가 된다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고 물론 날 위해서 하는 줄 알지만 속으로 욕이 절로 나오고 그냥 아무 말도 안 해줬으면 좋겠다고 내 마음이 말합니다. 이젠 주변 친구들 몇몇들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 걷기도 불편하고 운전도 면허증 반납하고 정규단체 모임에도 마음과는 달리 불참 숫자가 늘어갑니다. 내가 아니면 남편 둘 중 한 명은 거의 건강상 문제가 있는듯하니 다행히도 아직 폴짝거리며 잘 뛰어다니는 나를 여기저기서 많이 필요로 하는데 자유롭지 못한 시간 제약 때문에 주변을 위해 해줄 수 없는 안타까움이 또한 아쉬워서 지금 현재 나의 딜레마인듯합니다.
교무의 의견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글이라기보다는 자기의 공부한 과정을 기재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어미를 경어체로 쓰는 것보다 평어체로 쓰시면 어떨까요.
연세가 드시니 친구들이 할 일도 없고 아프기도 하고 그렇지요.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가고 없으면 허전하지요. 죽기 전에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여행도 했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손주를 돌보아야 하는 일이 주어져 집을 비울 수가 없지요. 여행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과 손주를 돌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손주 때문에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없는데 세정도 모르고 전화를 하며 불러내면 답하기도 그렇고 속상하기도 하지요.
대종사님께서는 공부의 표준으로 극락으로 가는 길과 목적지로 가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극락으로 가는 길은 자성에 합하는 것으로 고도 없고 낙도 없는 한 생각 이전으로 가는 것이지요. 현실에 나타난 모든 것은 영원한 내 것이 아니고 이생에 가지고 노는 소꿉놀이 도구이지요. 그리고 영원한 것은 나의 자성이 진정한 내 것이지요. 내 것도 아닌데 집착할 것이 없지요.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울 일도 없습니다. 또 이생에 못 해보는 것은 내생에 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못한다고 너무 아쉬워할 것도 없습니다.
목적지로 가는 길은 일어난 마음을 찾아서 그 마음을 운전하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보고 운전을 잘하여 목적지에 잘 도착하면 좋지요. 우리의 목적지는 낙원입니다. 일어난 마음이 낙으로 향하도록 운전을 하는 것이 공부인 것 같습니다. 경계 따라 일어나는 마음은 한가지 이기도 하지만 여러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여러 마음을 살펴보고 그 마음을 정리하고 한 마음을 선택하며 낙원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공부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