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상상 속의 화산은 이십 사수 매화 검법이 화려하게 뿌려지는 무림의 천국이었다. 중학교 학창 시절, 무협지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책을 빌려볼 정도로 넉넉하지 않아 친구가 빌린 책을 반납 하루 전에 읽고 되돌려주는 방법으로 무협에 대한 허기를 채웠다. 전권 스물네 권의 무협지를 밤새워 읽고도 시간이 모자라 수업 시간에 책 뒤에 숨겨 읽다가 무지하게 혼난 적이 있다. 체벌보다는 책을 압수당해 책값을 변상하는 일이 더 무서웠다. 빌고 빌어 책을 돌려받은 다음에는 사회 선생님의 팬이 되었다.
무협지를 좋아하던 친구와는 지금도 무림 같은 현실을 논하며 부부 모임을 하고 있다.
시안 여행 나흘째, 화산 가는 날이다. 중국의 오악 중 서악으로 불리는 화산은 시안 동쪽으로 120km 떨어진 웨이난시에 있다. 하늘 아래 가장 가파른 산으로 불리며 조양봉(동봉 2,090m), 연화봉(서봉 2,086.6m), 낙안봉(남봉 2,154.9m), 운대봉(북봉 1,614.9m), 옥녀봉(중봉 2,037m)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연꽃처럼 생겼다고 한다.
화산은 중화민족 문화발상지 중 하나이며 거대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교 성지로 스무 개가 넘는 도관이 있다.
트레킹 하기에 좋은 날씨다. 원래는 케이블카를 타고 북봉에 올라 화산을 체험하고 케이블카로 내려올 계획이었다. 여행 온 김에 화산 트레킹을 원하는 친구들의 의견을 모아 케이블카를 타고 서봉에 올라 중봉을 거쳐 북봉까지 간 다음 케이블카로 내려오는 코스로 변경했다. 가이드 비용을 포함해 인당 육십 달러가 추가되고 두 시간이 더 걸리는 코스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홉 시에 호텔을 출발했다. 차창 밖의 풍경을 찍으려 스마트폰을 찾았으나 없었다. 화산의 멋진 풍경을 많이 찍으려는 욕심에 들떠 충전시켜 놓고 가져오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사진은 물론 쇼핑도 할 수 없다. “그래, 오래간만에 스마트폰 없이 자연을 느껴 보자.”라고 자조하고 있을 때 여분의 스마트폰을 가져온 후배가 한 대를 빌려주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나 보다.
버스로 두 시간 남짓 달려 서봉 매표소에 도착했다. 성수기인 만큼 입장료 160위안, 셔틀버스 40위안, 케이블카 140위안이며 자국의 노인과 학생은 할인된다고 했다. 가이드에게 매표를 맡기고 휴식을 취하며 짐을 점검했다. 사십 분 정도 셔틀버스를 타고 서봉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화산풍경구 태화승경문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이십 분 정도 계단을 올라 케이블카 탑승장에 갔다. 생각보다는 많이 기다리지 않고 탑승할 수 있었다. 4km가 넘는 거리를 이십여 분 만에 암벽 터널을 지나 종점에 도착했다. 압도적인 높이의 바위산, 실낱같은 잔도와 점을 찍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사물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케이블카 종점에 있는 도관 마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도관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큰 묶음의 향을 들고 소원을 빌고 있었다. 딸이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소식을 듣고도 할머니 상에 참석할 수 없었던 딸은 친구와 함께 화산의 도관에서 향을 피우며 할머니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서봉으로 출발했다. 정상 부근에는 선녀같이 옷을 입은 아리따운 처녀가 매화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화산파의 매화가 생각났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인파를 헤치고 서봉에 올랐다. 첩첩이 보이는 봉우리들은 한 덩어리의 화강암에 조각된 신들의 작품 같다. 남쪽은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과 사마의가 패권을 놓고 싸우던 진령산맥에 속해 있고 북으로는 위하 평원과 황하를 굽어보며 서북은 중원을 출입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북봉으로 가는 길은 고도 차이가 400m 이상 나기 때문에 내려가는 계단이 가파르다. 트레킹이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걸으며 풍광을 즐기려 해도 계단이 많아 무릎이 아프고 엄지발가락에 통증이 온다. 그래도 어찌하리, 우리가 선택한 길인걸.
두 시간을 넘게 걸어 북봉에 도착했다. 북봉은 삼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산세가 험하다. 위로는 구름이 덮고 아래로는 지맥을 통과해 솟은 운대(雲臺)와 비슷하다고 해서 운대봉이라 한다. 구름 위에 펼쳐진 궁궐과 같다. 운대봉에는 무림 고수들이 마지막 혈투를 벌였다는 “화산논검(華山惀劍)”이란 표지석이 있다. 화산은 사람이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의 악산이기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날아다니는 무협 소설의 중심이 된 것 같다. 중학교 때 상상한 무림의 중심지에 현실의 내가 서 있다.
북봉의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는 잔도에는 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등산객들이 개미처럼 줄을 잇고 있다.
어릴 적 상상력을 되짚어 준 화산은 꾸밈없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라고 한다. 대자연 앞에 티끌만도 못한 존재인 인간이 굳이 고민하고 고통받고 미워하며 살아야 할까?
내일은 낙양이다. “낙양성 십리허에”라고 흥얼거리며 잠을 청한다.
2025.4.10.(56)
첫댓글 어릴때의 상상 속 장소에서 환희심과 행복감이 함께한 멋진 여행이었네요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또한 삶의 에너지를 주기도 합니다.
무협지에 많이 등장하던 곳을 여기에서 다시한번 보내요. 저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실지 현장에 있는 느낌
받았습니다 좋은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