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오래전 기억의 단편이 가슴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볕이 좋은 날, 옛 연인 지연과 함께 올랐던 지리산 등산길에서의 일이었다. 산 중턱에 접어들었을 때 멀리서 비구름이 몰려오는 형상이 보였다. 지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저기 하늘 색깔 안 보여? 바람도 갑자기 차가워졌어. 이러다 큰비가 오겠어, 산에서 내려가자."
하지만 나는 기상청 예보를 맹신하며 자존심을 세웠다.
"기상 예보에서 오후까지는 맑다고 했어. 조금만 더 가보자, 정상 코앞인데 여기서 포기하면 아쉽잖아. 네가 너무 엄살을 부리는 거야."
"엄살이라니? 내 직감이 이상하다잖아!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고 그렇게 고집을 피워?"
"고집은 누가 부리는데? 기껏 와놓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포기하자고 하는 게 누구야?"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팽팽한 옥신각신 끝에 결국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우리의 고집이 무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은 돌변했고,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비도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며 진흙탕이 된 산길을 허겁지겁 내려오는 동안, 육체적인 고생은 극에 달했다. 춥고 지친 상태에서 쌓였던 피로와 서운함은 결국 폭발했고, 하산 길목에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
"처음부터 따라오질 말았어야지, 왜? 나에게 화야?"
지독하게 날 선 말들이 오간 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등졌다. 젖은 등산복 차림 그대로, 서로 한마디 말도 섞지 않은 채 한참을 떨어져서 따로 하산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냉랭한 공기 속에서 각자의 외로움과 분노만이 진흙탕 길을 적셨다.
터미널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연은 나를 본 체만 체하며 먼저 다른 버스에 올랐고, 나는 그 뒷모습을 잡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혼자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귀갓길은 지옥처럼 길고 쓸쓸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자취방은 젖은 옷에서 풍기는 퀴퀴한 흙냄새와 지독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날의 지독했던 갈등은 결국 이별이라는 아픈 종착지로 우리 관계를 밀어 넣고 말았다.
헤어진 후의 허전함과 밀려드는 자책감은 온몸의 에너지를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해 어떤 날은 악에 받쳐 술에 취해 지내기도 했고, 이별의 상처를 잊어보려 낯선 여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어도 가슴 한구석은 시린 바람이 불어와 구멍 난 듯 뚫려 있었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극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밤마다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방황하기도 하고, 때로는 낯선 도시에 홀로 차를 몰고 떠나기도 했다. 사람과의 인연이란 구름처럼 쉽게 흩어지고, 사소한 바람 한 점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다 결국엔 찢어지고 마는 것일까 하는 깊은 회의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궤적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삶의 무거운 짐과 현실의 무게가 우리를 차가운 바닥으로 끝없이 끌어 내리려 할 때, 우리를 외롭지 않게 지탱해 주는 것은 세상의 거대한 기적이나 요행이 아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리던 어느 날 밤, 고향 친구가 아무런 추궁도 없이 불쑥 찾아와 내 집 문 앞에 캔맥주 두 개를 말없이 내려놓고 어깨를 툭 쳐주던 그 무심한 손길. 직장에서 치여 사직서를 품고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을 때, 동네 붕어빵 아줌마가 "총각, 힘내요"라며 서비스로 쥐여주던 따뜻한 종이봉투의 온기.
힘들 때 곁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연들, 무심한 듯 건네는 사소하지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묵묵히 밀어 올려주는 일상의 소박한 상승기류들이 모여 간신히 우리를 추락으로부터 붙잡아 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마음의 흉터를 안고 살아가던 중, 퇴근길에 무심코 들린 허름한 동네 중고 서점 구석에서 손때 묻은 낡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접어놓은 페이지 틈으로 흘러나온 문장 하나가 내 심장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인간은 영원한 평화를 찾을 수 있는가? 격렬한 폭풍우 속에서도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 그것은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는 저 너머의 지평선에 있다."
마치 과거 지리산의 폭우 속에서 서로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던 내 상처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주는 것만 같았다. 책장을 넘길수록 주인공 콘웨이가 겪는 내적 방황과 세상의 혼란은 고스란히 나의 고통과 겹쳐졌다. 책은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세상의 중력과 상처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마주하라고. 그 책은 차가운 바닥에 처박혀 있던 나를 머리채를 잡듯 번쩍 일으켜 세웠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망이 요동쳤다. 더는 이 방황과 자책 속에 머물 수 없었다. 책 속에서 지친 영혼들이 찾아갔던 그곳, 영원한 청춘과 평화가 깃든 숨겨진 지상낙원 '샹그릴라'. 나 역시 그 책이 이끄는 대로, 상처 입은 내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티베트의 히말라야 자락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향해 오르는 길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해발 4,000m가 넘어가자 희박한 산소 덕분에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리고, 심장은 터질 듯 빠르게 쿵쾅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깊은 곳까지 찬 바람이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주섬주섬 휴대용 휴대용 산소통을 꺼내 입에 물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치 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인공적인 산소가 식도로 스며들었지만,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주진 못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온몸의 에너지가 바닥나는 듯한 지독한 고산증세 속에서 나는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 쥐며 눈부시게 하얀 만년 설산 위로 피어오르는 몽글몽글한 구름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그때였다.
머리가 핑 돌고 시야가 아스라하게 흐려지는 고산증세 속에서, 먼 곳으로부터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흐릿한 신기루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다. 설산의 하얀 안개와 눈 부신 햇살 사이로, 거짓말처럼,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형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속에는 믿기지 않게도, 홀로 이 척박한 땅을 여행 중이던 지연이 서 있었다.
지연 역시 오랜 방황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후, 그녀 역시 나처럼 그날의 상처와 극심한 공백을 견디지 못해 세상의 끝을 헤매고 있었다. 밤마다 지리산의 폭우 속 악몽에 시달리며 자신을 자책했고, 낯선 나라의 도시들을 홀로 전전하며 잃어버린 마음의 지도를 찾아 헤매던 터였다. 서로서로 향해 짊어져 온 세월의 무게와 방황의 고통이 그 순간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서로서로 알아본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고 시간은 그대로 멈춘 듯했다. 과거 지리산의 폭우 속에서 매몰차게 돌아섰던 두 사람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세상과 단절된 고요한 낙원의 자락에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히말라야의 품에서 다시 구름을 올려다보며 우연히 재회한 것이다.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던 눈가에 이내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고여 흘렀다. 고산증세로 차오르던 숨 가쁨인지, 아니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른 그리움인지 모를 감정이 온몸을 적셨다. 세월이 흘러 각자의 지독한 아픔을 겪고 마침내 성숙해진 채 마주한 그 자리에서, 하늘의 구름은 마치 우리의 지난날을 위로하듯 포근하고 거대한 그림자를 우리 위에 드리워 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자, 무거운 삶의 중력과 이별의 아픔을 견뎌낸 두 영혼에 하늘이 내려준 가장 눈부시고 극적인 화해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