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새벽 16
열어놓은 창으로 불어드는 바람이 상쾌하다.
운전석에 편하게 기대어 앉은 하진은 시동을 걸고 AM을 켠다.
하진은 출근 길엔 항상 AM에서 흐르는 시사 경제 관련 뉴스를 듣곤한다.
주가 폭락에 관한 보도가 끝나고 아나운서가 저명인사와의 전화 연결 방송을 할 때쯤 하진은 백미러를 흘낏 본다.
멀리서 서현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서현의 첫출근부터 함께 카풀을 했지만 서현은 매번 늦어 하진을 집 앞에서 기다리게 하곤 했다.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늦잠을 잤다는 둥 열쇠를 어디 둔지 몰라서 한참 찾았다는 둥
변명하곤 해서 이제는 차라리 공용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곤 하는 것이다.
백미러에 조그맣게 비치던 서현이 점점 다가온다.
이상하게 걸음이 절뚝 거린다.
또 넘어진 모양이군.
하진은 피식 웃으며 라디오를 끄고 경쾌한 재즈 음악을 튼다.
서현과 함께 출근 하면서부터 하진은 뉴스를 듣지 않는다.
딸깍.
- 우이잉, 언니, 저 오늘 또 넘어졌어요.
서현이 울상을 지으며 보조석 문을 열고 들어온다.
봄향기처럼 상큼한 아기분 내음이 차 안에 가득해진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서현만의 향기다.
- 조심해서 걷지. 안 뛰어와도 된다고 했잖아. 시간은 넉넉하니까.
- 웬걸요. 안 뛰어도 넘어져요. 구두 굽 높은 것도 아닌데.
- 오늘은 안 다쳤어?
- 무릎 조금 까졌어요. 하도 넘어져서 이제 넘어질 때 요령도 생겨요.
서현이 무릎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베실 웃는다.
빨간 딱지가 앉은 서현의 무릎 한 쪽에 또다른 상처가 생겼다.
- 오늘은 좀 양호하네.
하진은 보조석 앞에 달린 서랍을 열어 약과 밴드를 꺼낸다.
서현과 함께 출근하면서 준비하게 된 필수품이다.
다시 집으로 가서 약과 밴드를 찾아오기엔 귀찮으니까.
- 쿠쿳, 고마워요, 하진 언니.
서현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약과 밴드를 받는다.
하진은 핸들을 돌리며 차를 출발시킨다.
- 그 약이랑 밴드 다 쓸 때까지만 넘어져라.
- 히힛.
서현은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 뒤 가방을 뒤적여 스타킹을 꺼낸다.
자주 넘어지는 지라 스타킹은 늘 출근길 하진의 차 안에서 신는다.
- 저도 언니처럼 바지 입고 다니고 싶은데 하도 넘어져서 옷 버릴까봐 못 입겠어요.
나같은 애도 없을 거야.
치마 입고 싶어서가 아니라 넘어져서 할 수 없이 입는 거라니.
조심성 없이 스타킹을 끌어올리며 서현이 조잘거린다.
- 치마 잘 어울려.
하진은 빈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니 진심이라는 것을 서현은 안다.
서현은 생긋 웃는다.
- 참, 언니 덕분에 저 요즘 회사에서 칭찬 받아요.
제가 제일 먼저 출근하잖아요.
언니가 빨리 출발하니까 저보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없는 거 있죠.
일찍 출근하니까 할 일 없어서
대충 정리 하고 음악 틀어놓고 창문 열어놓고
일하고 있으면 우리 신참 대견하다고 칭찬해줘요.
군기 든 신참이라고 놀리는데 사실 언니 아니었으면 겨우겨우 지각 면했을 걸요?
- 난 서현이 덕분에 요즘 느슨해졌다는 말 듣는데.
- 어, 그럼 저 때문에 괜히..
- 아니, 팀원들이 좋아해. 숨통 트인다고.
상사가 먼저 출근해서 일 하고 있으면 피곤한가보더라고.
- 그래요?
난 언니 덕분에 칭찬 받아서 좋고 언닌 저 덕분에 팀원들한테 호평 받아서 좋네요?
서현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차가 속력을 내자 창으로 바람이 거칠게 불어들어온다.
이쯤 되면 하진은 창문을 닫지만 서현이 창에 매달려 바깥 풍경을 보는지라 그냥 둔다.
- 머리는 내밀지 마.
- 야호! 오늘 아침도 이렇게 밝았습니다.
바람 기분 좋고 햇살 반짝이는 봄입니다!
오늘의 출근길 풍경을 보도해드리겠습니다.
네네, 태평상회 오늘은 웬일로 아직도 문을 열지 않았군요.
배불뚝이 주인 아저씨, 드디어 상호명에 맞게 태평하게 살 생각일까요?
와후, 새로 생긴 저 빌딩 1층에 무슨 가게가 생길까 했더니 피자집이로군요.
언니, 개점했을 때 가면 상품 주겠죠?
서현이 휙 고개를 돌려 하진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묻는다.
하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서현은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옷에서 봄향기가 물씬 느껴집니다.
분홍색, 연두색, 흰 색, 간편한 옷차림에 걸음도 경쾌하군요.
방황하는 청춘의 무리가 보이는군요.
이 좋은 날에 저 친구들 학교에 갈까요, 안 갈까요?
안 간다에 한 표 던집니다.
가로수는 오늘따라 더욱 싱그럽군요.
저 보도블럭을 혼자 기어가는 개미는 어제 저녁 연인과 이별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드리면서
이상 내 멋대로 방송 한서현 이었습니다.
그렇다.
하진은 아침마다 듣곤하던 AM 뉴스 대신 서현의 일일 뉴스를 듣는 것이다.
바람에 흩날린 서현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진다.
하진의 짧은 머리도 우습게 헝클어진다.
하진은 백미러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웃는다.
하진이 왜 웃는지 알지 못하면서 서현도 명랑하게 웃는다.
- 네 다음은 명곡 감상의 시간입니다.
오늘은 특히나 서현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서현은 아주 기분이 좋을 때면 명곡이랍시고 노래를 부르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흐르는 재즈 음악에 맞춰 서현이 멋대로 즉흥 작사를 해서 노래를 한다.
- 소풍가기 좋은 날.
노란 하늘엔 초록 구름. 나는 짝짝이 양말을 신었지.
파랑하양 스트라이프 무릎까지 올라와. 야호 신나네.
빨강노랑 동그라미들 종아리에서 춤추네. 야호 신난다.
짝짝이 양말을 신고 하얀 도시락 가방을 매고 소풍을 가자.
하얀 도시락 속엔 꼬마 샌드위치들. 랄랄랄라.
소풍가기 좋은 날.
분홍 바다에 투명 돛단배. 나는 짝짝이 양말을 신고 소풍을 간다네.
나이에 맞지 않은 어린모습.
이 아이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에 잠긴 채 운전에 열중하던 하진이 핸들을 급히 돌린다.
끼이이이이익-
대로변 한 쪽에 차가 급정거 한다.
차 한 대가 하진의 차 앞으로 급하게 새치기 한 것이다.
뒤에서 오던 차가 있었더라면 추돌사고가 날 뻔 했다.
하진은 미간을 잠시 좁힌 채 한숨을 한 번 내뱉고 다시 차를 출발시킨다.
- 에, 언니는 욕도 안 하네?
- 욕은 뭐하러 해.
- 저런 사람은 혼을 내줘야 한다구요.
하진은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운전을 한다.
신호에 걸려 하진의 차는 새치기한 차 옆에 선다.
- 저럴 걸 뭐하러 새치기 했담.
서현이 중얼거리더니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새치기 차의 운전사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 뭐.
뺀질거리는 젊은 남자가 툭 말을 내뱉는다.
- 야, 이 존만한 새끼야. 골로 가고 싶지 않으면 운전 제대로 해!
- 야, 뭐야?
신호가 바뀐다.
- 언니, 달려! 밟아요!
하진은 크게 웃으며 차를 출발 시킨다.
서현이 차창을 모두 닫는다.
뒤에서 남자가 울그락불그락 뭐라고 소리치면서 추격한다.
베테랑 운전사 유하진, 유유히 새치기 차를 따돌린다.
- 야호!
아아, 이들의 출근길은 결코 무난하지 않다.
*
-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하진의 밝은 목소리에 팀원들이 웃는다.
- 팀장님, 요즘 좋은 일 있어요? 얼굴도 무척 밝아지시고..
- 그렇게 보여요?
하진이 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 봄이라서 그런가. 여유 있어 보이고 좋아보이세요.
유팀장님 요즘 연애하는 거 아니에요?
- 연애는 무슨. 오는 길에 우울한 뉴스까지 들었는데.
- 무슨 뉴스요?
- 보도블럭을 홀로 기어가는 개미가 어제 저녁 실연했다고 그러던데요?
- 네에?
팀원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늘 진지하던 사람이 던지는 농담이 신선한 탓이다.
- 노란 하늘에 초록 구름, 분홍 바다에 투명 돛단배.
짝짝이 양말 신고 샌드위치 들고 소풍가기 좋은 날이라던데
소풍은 주말로 미루시고, 오늘은 열심히 일합시다.
주변 공기가 싸아하다.
모두 '그건 오버예요, 팀장님' 표정으로 하진을 바라보고 있다.
- 흠,흠.
하진은 무슨 일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펜을 손에 쥐고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린다.
솔직히 말해 무안하다.
- 쿡!
누군가의 소리 죽인 웃음이 터진다.
- 정상욱씨 기획안 작성 다 됐어요?
- 아, 네. 여기.
웃을까 말까 고민하는 듯 야릇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하진에게 걸어온다.
- 팀장님 조금 전에 하신 말씀..
서류철을 휙 넘기는 하진에게 남자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하진은 뭐죠? 하는 건조한 표정을 담아 남자를 올려다본다.
남자가 얼른 서류로 눈길을 돌린다.
- 지난번 회의 결과를 종합해서 이번 기획은..
하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남자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한 장씩 넘긴다.
다시는 헛소리 하지 않겠다 다짐하면서.
그들의 새벽 17
여유로운 퇴근시간.
빈 머그컵을 씻어들고 책상으로 촐랑촐랑 걸어간 서현은
머그컵의 뚜껑을 덮다가 책상 위에 올려진 은색 지구본 퍼즐을 바라본다.
동료들이 한 번씩 퍼즐을 맞춰보겠다며 들고 가서는
결국 완성을 못해오면 서현이 나머지 조각들을 맞추곤 해서
이젠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척척 맞추게 되었다.
한 사람씩 사무실을 나서며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한다.
서현은 퇴근하는 이들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집게 손가락으로 지구본을 빙글 돌리고는 가방을 든다.
사무실을 나온 서현은 엇박으로 폴짝폴짝 뛰다가
멀리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발견하고 우다다다 달린다.
- 잠깐만 같이 타고!
엘리베이터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한 남자가 서현을 바라보며 웃는다.
명문 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처음부터 대리로 입사한 허영민.
젊은 나이에 곧이어 있을 과장 진급 1순위로 손꼽히는 사람.
여사원들의 가쉽에 한두번씩은 꼭 등장하는 사람.
- 어, 허대리님 엘리베이터 안 탔어요? 정원초과였나요?
- 아니오. 서현씨 올 때까지 기다렸지요.
- 어? 왜요?
- 그렇게 달리니까 넘어지지요. 오늘도 넘어진 모양입니다?
영민은 대답 대신 허리를 살짝 굽혀 서현의 무릎을 보며 말한다.
- 에...?
서현은 오른쪽 다리를 뒤로 숨기고 왼쪽 다리에 무릎을 슬슬 문지른다.
- 하여간 애같다니까.
- 못미더워하시는 거군요? 그래도 일은 잘 하잖아요.
- 그래서 더 신통방통이군요.
영민이 즐겁게 대꾸한다.
서현도 히죽 웃는다.
- 서현씨, 퇴근하고 약속 있으신지요?
- 네.
- 있어요? 보통 바로 집에 가시는 것 같던데?
- 약속 있어요. 그저께 첫월급 받았잖아요. 오늘은 신나게 쏘는 날.
서현이 자랑스러운 듯 턱을 치켜들며 입술을 쫑긋거린다.
영민도 웃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 오늘 서현씨랑 단 둘이 식사나 할까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군요.
- 단 둘이 식사?
- 아.. 서현씨가 일처리 잘 해줘서 제가 한결 부담이 덜었습니다.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다는 뜻에서 겸사겸사.
- 앞으로도 잘 해달라는 뜻에서 뇌물이군요?
- 하하. 그렇죠. 상사의 뇌물 받을 용의 있어요? 내일은 시간 어때요?
- 에이. 제가 해야 할 일 하는 것 뿐인데요, 뭘.
뇌물 없이 앞으로도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서현이 밝게 웃으며 말하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서현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긴다.
영민은 그 자리에 서있는다.
- 대리님, 안 타세요?
- 아, 저는 아직 정리할 게 남았어요.
- 제가 아는 언니 별명이 '워커홀릭 유'래요. 소개시켜 드리고 싶네요.
후훗. 그럼 내일 뵈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홀로 남겨진 영민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는다.
- 데이트 신청 보기 좋게 퇴짜 맞았군.
*
빌딩 앞에서 시간을 확인한 서현은
횡단보도 앞에서 구두굽으로 바닥을 따닥따닥 친다.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을 때마다 들리는 구두 굽의 또각또각 소리가 재미있다.
멀리 하진의 회사가 보인다.
어제 늦게 선주가 전화를 해와서는 다짜고짜
- 한서현, 너 한 턱 내는 날 언제야? 기다리다 목 빠진다.
설마 그새 짤린 건 아니겠지?
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오늘로 날을 잡은 터였다.
출근은 하진과 함께하지만 퇴근은 각자 따로하기 때문에
오후에 하진을 볼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선주와 함께 만나기로 해서
하진의 회사로 걸어가는 길이다.
하진의 회사에 도착할 무렵 맞은 편에서 오던 차가 깜박이를 켜며 스르륵 멈춘다.
빵빵-
- 아가씨, 어디까지 가요?
클락션이 울리고 보조석 창으로 선주가 머리를 쓱 내밀면서 웃는다.
선주의 긴머리가 봄바람에 찰랑이며 흔들린다.
- 와아, 선주 언니. 오랜만이죠? 머리 푸니까 여자 같다.
- 여자한테 여자 같다가 뭐냐. 빨리 타.
- 넵
서현이 뒷좌석에 올라탄다.
- 하진 언니 오늘은 잘 하면 세 번 만나겠네요.
운전대를 잡은 하진이 백미러로 서현을 보며 웃는다.
- 세 번?
선주가 뒤로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 저희 새벽에도 가끔 만나거든요.
- 만나서 뭐하는데?
- 그건 이웃사촌들만의 권한이라구요.
선주언니 옆집으로 이사오면 알려드릴게요.
- 어우, 치사하다.
- 언니 만큼 치사할까.
- 내가 뭐.
- 혼자 사탕 먹었잖아요.
- 아하하, 너 그때 무지 먹고 싶었구나?
- 어디갈까? 저기 신호 바뀌기 전에 결정해.
하진의 말에 선주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뒤로 고개를 돌린다.
- 서현아, 너 뭐 먹고 싶냐?
- 하진 언니가 그때 랍스터 먹자고 했잖아요.
- 하하. 농담이지.
하진이 이마를 문지르며 웃는다.
서현은 하진이 웃을 때가 좋다.
멋적게 웃으며 약간 얼굴을 찌푸릴 때.
- 너 특별한 날 가는 데 있어? 축하할 일 있을 때 먼저 생각나는 곳.
그런 데 없나? 난 있는데.
- 있어요.
- 어디?
- 그냥, 집 옥상에서 라면 끓여 먹어요. 휴대용 버너 들고 나가서.
서현은 어깨를 으쓱 하며 웃는다.
- 오.. 그거 좋은데?
야야야, 하진아 우리 서현이네 옥상에서 라면 끓여먹자.
엠티 기분 날 거 같은데?
- 그럴까?
- 에이.. 그래도 오늘은 제가 쏘는 날이잖아요.
다음에 와서 드세요. 오늘은 근사한 식당에서 밥 먹구요.
- 아, 라면 먹고 싶다.
- 그거 괜찮네.
밥 먹고 난 운전 안 해도 되니까 간단하게 우리 집에서 한 잔 해도 되고.
- 그래도..
선주와 하진의 말에 서현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 걱정 마. 돈 팍팍 쓰게 해줄테니까. 내가 황실 라면을 끓여주마.
술안주도 만들어야 되니까 우리 일단 장보러 가자. 이히~
- 김선주, 신났네. 너 내일 일 없지?
- 물론이지.
- 그럴 줄 알았다. 우린 내일 출근해야 돼. 적당히 생각해두라고.
- 어우. 샐러리맨들 속에서 고독하구나. 너희 하루 째.
- 우리가 너냐.
선주와 하진의 대화를 들으면서 서현은 키득거리며 웃는다.
두 사람이 티격대는 걸 보고 있으면 즐겁다.
서현은 앞좌석 사이의 공간에 얼굴을 내밀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다.
- 뭐하냐, 한서현.
- 좋아서요.
- 뭐가 좋아?
- 언니들 좋아서 보는 거예요. 히힛.
- 엇흠~ 거북하다. 얼굴 치워.
- 쳇. 선주 언니는 안 좋아요. 하진 언니만 좋아요.
- 니가 애냐. 유치하다 한서현.
- 선주야, 그러는 너는 애냐.
- 와하하하. 하진 언니 1등!
왁자지껄 여자 셋.
셋이 모여 요리를 한다는데.
접시가 깨질지는 두고보아야 할 듯 하다.
그들의 새벽 18
서현의 양 옆으로 키 큰 두 여자가 무거운 봉투를 들고 걷는다.
- 언니 안 무거워요? 제가 들게요.
서현이 하진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 으응. 안 무거워.
- 난 무거워.
선주가 허리를 굽혀 서현의 어깨에 턱을 받치며 말한다.
- 언니가 술 그만큼 사자고 했으니까 언니가 들어야 돼요.
- 너 한 잔도 마시지 마.
선주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휙 허리를 편다.
하진은 피식 웃는다.
- 안녕하세요.
서현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에게 경쾌하게 인사를 한다.
주인집 아주머니다.
- 으잉, 학상.
- 저 이제 학생 아니에요. 취직했어요.
서현이 밝게 웃으며 말한다.
- 으잉.. 그려? 취직했구먼. 어쩐지 요새는 낮에 보기 힘들더라고.
- 네, 지난 달 전기세랑 수도세 낼 때 뵙고 못 뵈었죠?
아저씨는 좀 괜찮으세요?
- 어유. 말도 마. 전에 허리 다친 데 또 다쳐서 병원에 있잖어.
지금 병원 가는 길이여.
- 아.. 그랬구나. 얼마나 다치셨길..
- 근디 학상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여?
- 아, 네.
- 이 총각들이랑?
- 네?
- 아유, 내가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처녀가 바깥 남자들 집에 데리고 드나드는 거 안 좋아.
나야 우리 학상 착실한 거 아니까 상관 없지만서도 그래도 눈이 있잖어.
총각들도 명심허고 앞으로는 자제해줬으면 좋겄네.
다 내 딸 같어서 허는 말이여.
- 아주머니. 제가 남자로 보이세요?
선주가 쓰윽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 으잉? 여자여?
- 아주머니.
제 이 윤기나는 긴 머리를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선주가 머리카락을 들어 장난스럽게 흔들어보이며 짐짓 언성을 높인다.
하진은 푸후 웃어버리고 만다.
- 그 머시냐.. 로크..로크 같구만.
- 로크요?
- 왜 그거 있잖어. 우리 아들래미가 좋아하는데.
머리가 치렁치렁하게 길어가지고 아이고 지저분해서 내가참.
우리 아들래미도 그거 할거라고 이발도 안 하고,
으이구 내가 그놈 잘 때 싹뚝 잘라버릴라다가 말았어야.
머리만 길러가지고 소리 지르는 거 머가 좋다고. 흐잉.
- 아아. 롹커요?
- 그르지그르지. 로크.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 아주머니. 그런데 저는요.
- 명심하겠습니다.
선주의 말을 가로막으며 하진이 고개를 꾸벅 숙인다.
- 이 총각은 목소리가 야들야들허니 곱구먼. 그려그려.
잘들 놀다 가. 학상 일찍일찍 다니고. 알제잉?
- 네.
주인집 아주머니가 바쁜 걸음으로 걸어간다.
- 아니, 내가 어딜 봐서!
- 김선주씨 담배 좀 작작펴. 그러니 목소리까지 그 모양이지.
- 내 목소리는 원래 타고 난 거야.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
이참에 로크나 해볼까. 나를 로크 킴이라 불러다오.
선주가 낄낄거리며 말한다.
- 이상하네. 난 언니들 언니로 보이는데. 아줌마도 참..
언니들이 키가 커서 그런가봐요.
서현이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웃는다.
- 괜찮아. 종종 듣는 말이라 상관 없어.
- 흥, 한서현. 이사해라. 기분 나빠졌다.
- 가자.
하진이 봉투를 쥐지 않은 손으로 서현의 어깨를 잡고 성큼성큼 걷는다.
서현은 팔을 들어올려 브이를 그리며 흔든다.
앞장 선 서현의 의기양양한 웃음소리.
- 아니, 저것들이. 야, 로크 킴이랑 같이 가.
선주도 냉큼 따라가 서현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두 사람의 체온이 따듯하게 서현의 뒷목을 감싼다.
서현도 양 팔을 벌려 두 사람의 허리를 잡는다.
골목길엔 기분 좋은 봄바람이 가득하다.
*
- 이야, 좋네.
선주가 옥상 난간에 서서 휘휘 둘러보며 말한다.
한쪽 앞엔 골목을 사이에 두고 원룸이 있어서 별로 볼 것이 없지만
반대편엔 시야가 탁 트여서 동네가 잘 보인다.
- 저 원룸만 없으면 더 볼만하겠다.
- 그럼 저 하진 언니 못 만났을 걸요?
서현이 집에서 이것저것 챙겨 나오며 웃는다.
- 아, 그렇게 되나?
- 그럼요.
사실 원룸 공사 할 때 좀 속상했는데 지금은 무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좋은 이웃사촌도 얻고.
서현이 하진을 바라보며 웃고는
작은 돗자리 두개를 휙휙 펼쳐 옥상 위에 깐다.
- 이 돗자리 헌혈하면 주는 거예요.
- 너 체중 미달일 거 같은데?
-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헌혈하고 받아서 가져다 줬어요.
- 누가?
- 의자가 하나 밖에 없어서 식탁에서 못 먹을 거 같아요.
우리 돗자리에서 먹어요.
서현은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이다가 다른 말을 한다.
- 설마 저 돌무더기가 식탁이냐?
- 얼마나 운치있는데요. 선주 언니, 시비 좀 걸지 말아요.
- 넌 말대답 좀 하지 마.
- 선주씨, 황실 라면 준비하시지.
난간에 기대어 둘을 바라보던 하진이 재킷을 벗으며 말한다.
- 오우케이.
선주가 도마에서 온갖 야채와 버섯과 치즈를 다듬고 라면을 끓일 동안
편하게 옷을 갈아 입은 서현은 작은 라디오를 콘센트에 꼽고
최대한 밖으로 끌어와 음악을 틀고 집 문을 활짝 열어둔다.
여유로운 저녁.
부드러운 바람이 하늘하늘 불어오고
멀리 보이는 산등선 위로 저녁 노을이 따듯하게 번진다.
잔잔하게 흐르는 Gontiti의 음악.
코펠에서 끓는 라면 냄새.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웃으며 달려가는 소리.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는 하진과
돗자리를 차지하고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선주와
벽돌 식탁 앞 의자에 앉아 이야.. 맛있는 냄새 라고 중얼거리는 서현.
세 여자의 여유로운 저녁은 천천히 흘러간다.
그들의 새벽 19
탁탁탁탁.
도마 위에서 들리는 정겨운 칼질 소리.
하진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선주는 두번째 요리를 시작한다.
옷을 갈아 입고 세수를 하고 나온 하진은
맥주 컵과 포크와 접시를 꺼내고 식탁 위에 올려진 책들을 치운다.
- 너 밥 먹으면서 책 보지 말라고 했지.
힐끔 뒤를 돌아본 선주가 말한다.
- 오랫동안 버릇이 돼서.
-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밥상머리에서 책을 봐요.
- 후훗.
- 웃는 거 보니까 인정한단 말이지? 그나저나 서현이 요녀석은 어디 갔어?
- 옛써!
하진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화분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서현이 쪼르르 달려간다.
- 쫄병아, 내가 조수노릇까지 해야겠냐, 이 나이에?
- 뭐 할까요?
- 양배추 씻어서 먹기 좋게 찢고 꼬마 토마토도 씻고, 오렌지도 좀 까고.
과일도 좀 깎고. 알아서 좀 해봐라. 쫌.
- 언닌 뭐할 건데요?
- 김.선.주.특.제.닭.가.슴.살.구.이.꼬.지.
- 으음.. 이름 너무 길다. 근데 언니 요리 학원 다녔어요?
- 흣. 요리하는 거 취미야. 술안주 열심히 만들다보니 실력이 늘었지.
그 중에서도 닭가슴살 꼬지는 예술이야 예술.
독특한 비법으로 만인의 인정을 받은 노벨상감이지.
- 노벨상에 요리상은 없을 건데요?
- 말꼬리 잡지 말랬지.
- 가슴을 특히나 좋아하는 김선주가
실연의 아픔을 닭가슴살 꼬지를 만들면서 달래느라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비화 추가.
식탁 앞에 앉아 오렌지 껍질을 까던 하진이 덧붙인다.
- 으하하하하.
선주는 허리를 젖히며 크게 웃는다.
서현도 쿠쿡거리며 웃는다.
- 야, 그래도 그땐 나 무지 처절했었다고.
- 그래, 덕분에 술안주로
닭가슴살 꼬지만 수도 없이 먹었던 나도 처절했었다고.
- 실연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도 능력이지.
- 그런가? 그럼 난 능력이 형편 없는 모양이군.
Orange가 아니라 All N.G 네.
하진이 껍질을 깐 오렌지를 쪼개어 접시 위에 올리며 중얼거린다.
- 아하하하, All N.G 인생? 그거 좋네.
시끄러. 서현아 하진 언니 한 대 패고 와라.
- 제가 왜요?
- 넌 내 쫄병이고, 쫄병은 상명하달에 절대 복종해야 되며
하등의 이유는 묻지 않아야 한단다.
- 언닌 너무 유치해요.
- 동의.
하진의 대답.
- 너 계속 그럼 특제요리 못 먹게 한다.
- 게다가 치사하구요.
- 동의.
다시 하진의 대답.
- 아, 이거 서러워서 나도 이웃사촌 하나 만들던지 해야지 원.
툴툴거리며 당근과 양파를 자르는 선주.
키득거리며 샐러드를 만드는 서현.
싱긋웃으며 접시에 과일 안주를 보기 좋게 담는 하진.
세 여자 사이로 따듯한 공기가 흐른다.
*
- 애인 데리고 놀이터 놀러오라니까, 왜 안 와?
취기가 올라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선주가 서현에게 묻는다.
- 그야 애인이 없으니까요.
- 음. 너 연애 해본 적은 있어?
- 당연하죠.
- 구르는 재주 있네. 연애 경험 몇 번?
- 한 번...
- 사랑했어?
- 네. 많이요.
서현이 맥주잔을 두 손으로 쥐고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 아, 민감한 질문인가? 쏘리쏘리. 건배나 한 번 할까?
선주가 잔을 들며 말하자 하진이 말없이 잔을 든다.
서현도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를 한다.
챙.
경쾌하게 잔 부딪는 소리가 울린다.
하진이 원샷을 하자 선주가 하진의 잔에 맥주를 따른다.
- 얘기하고 싶어요.
둘을 바라보고 있던 서현이 조용히 말한다.
선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런데, 언니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어요.
- 뭘?
- 그게..
서현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연다.
- 그 사람이 여자예요.
- 프헉.
선주가 맥주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해댄다.
- 그러실 줄 알았어요. 얘기 안 할래요.
- 아하하하. 아니, 계속 얘기해. 환영하고 있는 중이야.
서현은 하진을 한 번 쳐다본다.
하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은옥이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어요.
열 여덟살 때 저희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불이 났었거든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은옥이가 정말 큰 힘이 되어줬어요.
늘 그림자처럼 제 곁에 있어줬어요. 무슨 일이건 함께 했죠.
은옥이 집에서 살게 됐어요.
가장 친한 친구였고 자매같아서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은옥이 부모님도 너무 잘 해주셨고.
두고두고 못 갚을 정도로 친자식처럼 대해주셨어요.
같은 대학에 합격해서 무척 기뻤어요.
하지만 그때 저는 사는 게 참 힘들었어요.
늘 신나게 웃고 다녔지만 그리고 은옥이와 함께여서 정말 즐거웠지만
사실 많이 힘들었어요.
공부도 해야 했고, 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연애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방학 땐 과외도 하고 서빙도 하고 닥치는대로 일을 했었어요.
은옥이 부모님이 너무 잘 해주셨지만 그래도 계속 신세를 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아주 작은 곳이라도 방을 얻어서 독립하려구요.
은옥이도 그런 저때문에 늘 일을 했었어요. 제 고집을 아니까요.
은옥인 같은 곳에서 일하면 저대신 힘든 일을 다 도맡아서 했었어요.
그러다가 은옥이가 저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고백하진 않았지만 우연히 은옥이의 일기를 읽었거든요.
하지만 모른 척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니까. 난 사는 것도 힘들었으니까.
그 때부터 은옥이의 친절이 불편해졌어요.
은옥이가 다정하게 굴면 화를 내기도 하고 혼자 먼저 학교에 가버리고.
그래도 은옥인 변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은옥이네 집을 나왔고 혼자 살게 된 거예요.
반지하였는데 여름 장마철엔 곰팡이가 무섭게 생기던 그런 집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은옥이가 저에게 고백을 했어요.
담담하게 얘기를 하던 서현이 엷게 웃으며 하진을 바라본다.
- 언니, 담배 있어요?
- 담배 펴?
선주가 턱을 괴고 서현을 바라보고 있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 은옥이가 담배를 폈었거든요. 그 애 생각이 나면 가끔 펴요. 그 애 냄새가 나서.
하진은 말없이 일어나 담배와 라이터를 가져다준다.
서현은 담배를 꺼내물고 불을 붙인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천천히 내쉰다.
- 담배는 한숨 쉴 때 참 좋아요. 연기랑 같이 내뱉으면 한숨 쉬는 거 안 들키잖아요.
- 빙고.
하진이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 그래요. 은옥이가 고백을 했던 날 말이에요.
손에 쥔 담배 끝을 내려다보는 서현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린다.
==============================================================================================
오랜만이죠. ^^
지난 번에 18편까지 날아가버려서- 당분간 경쾌해도 좋을까 생각한다고 했더니
너무 가벼웠던 모양이에요. 휘릭~ 날아가버렸어요;; - 복구 될 때까지 기다리려다가 그냥 제가 올려요.
(필라인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
원래가 장면 중심의 글이었던 지라 매일 한 편씩은 써서 호흡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이제 혼자 가졌던 그 부담을 덜 수 있을 것 같네요. 히히
지난번 18편에 글 남겨주셨던 어부님께 19편을 드리고 싶네요.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서 그들의 새벽을 읽을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셨죠.
제가 자신만만하게 네, 물론이죠. 라고 답했는데 글이 사라져버렸네요.
읽어주신 분들 고마워요.
그들의 새벽 20
은옥이 서현에게 고백했던 날.
가을의 끝자락이었고 겨울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10월의 끝무렵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난히 뜨거웠다, 여름처럼.
수업과 일을 같이 해야했던 서현은 늘 잠이 부족해 어지러웠었다.
서현은 이상 기온처럼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에 현기증이 이는 것을 꾹 참으며 걷고 있었다.
스웨터만 입었는데도 땀이 난다.
- 서현아!
은옥의 목소리다.
서현은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은옥이 나무에 기대어 서서 차가운 생수통을 흔들며 웃는다.
- 서현이 너 요즘 너무 일찍 학교 오는 거 아냐?
같이 밥 먹으려고 너희 집 가보면 맨날 잠겨 있더라.
오늘 수업도 한 시부터 있으면서. 학교에 와서 뭐했어?
- 도서관에서 공부했어.
서현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은옥도 서현의 걸음에 맞춰 옆에서 나란히 걷는다.
-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서운하다 야. 같이 공부하면 좋잖아.
서현은 답하지 않는다.
- 너 점심도 안 먹었지? 지금 한 시간 비지?
나도 점심 안 먹었는데 같이 밥 먹자. 김밥 사왔어. 너랑 같이 먹으려고.
- 밥 먹었어. 빈 강의실에서 잘 거야. 졸려.
- 어어.. 먹었어? 그래, 그럼 난 네 옆에서 책 좀 보면 되겠네. 같이 가자. 나도 배 안 고파.
은옥이 서현의 손을 잡는다.
차가운 생수통을 쥐고 있던 은옥의 손이 시원하다.
- 덥잖아. 손에 땀 났어.
서현은 슬그머니 손을 빼내며 말한다.
은옥은 다시 서현의 손을 잡는다.
- 야,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손 좀 잡아보자. 내 손 시원하지?
서현은 갑자기 울고 싶어진다.
은옥의 손을 휙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은옥도 빠른 걸음으로 서현의 뒤를 쫓는다.
- 한서현, 너 요즘 왜 그래? 그 날이냐?
한 달에 일주일 정도는 참아줄 수 있지만 이건 너무 길어. 왜 이렇게 신경질이야?
은옥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 너야 말로 왜 그러는데?
서현이 휙 돌아서서 은옥을 바라보며 말한다.
서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 내가 뭘..
- 넌 자존심도 없니? 싫다잖아.
너랑 같이 공부하는 것도 싫고, 밥 먹는 것도 싫고, 손 잡는 것도 싫다잖아.
- 야야, 우리 사이에 자존심은 무슨. 웃긴다, 야.
- 우리 사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 그야... 둘도 없는 친구 사이지.
- 이젠 아니야.
- 푸하하, 한서현 여름 간 지가 언젠데 이제서야 더위 먹었냐?
하여간 먹는 건 엄청 밝혀요.
서현이 다시 휙 돌아서서 걷는다.
은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 서현아 왜 그래?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어?
몇 달 동안 나 피해다니는 이유가 뭐야? 얘기 좀 해봐.
은옥은 건물로 들어가버리는 서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입술을 잘근 씹고는 숨차게 달려가니 서현이 막 한 강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은옥은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걸어간다.
강의실로 들어서자 창가쪽 책상 제일 앞자리에 엎드려 있는 서현이 보인다.
은옥은 강의실 앞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서현을 마주 바라본다.
- 서현아, 미안한데, 일어나봐.
서현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 하... 우리가 왜 이렇게 됐냐. 우리 제일 친한 친군데.
왜 이렇게 됐지? 응, 서현아?
은옥의 힘 없는 목소리가 빈 강의실에 한숨처럼 깔린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빈 강의실의 서늘한 공기에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은옥이 벽에 기대어 앉아 무릎을 그러모으고 머리를 숙이고 있다.
- 은옥아, 미안해. 네 말대로 나 더위 먹었나봐.
더우니까 괜히 너한테 신경질 내고..
- 더위 대신 김밥 먹자.
아무리 날씨가 이래도 곧있음 겨울인데 촌스럽게 더위나 먹고.
너 사실 밥 안 먹었지? 먹는 거 좋아하는 니가 밥 안 먹으니까 그런 거야.
나도 사실은 배 무지 고파.
은옥은 고개를 숙인 채로
가방에서 김밥이 담긴 일회용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낸다.
- 은옥아, 우리 친구 맞지?
서현의 말에 은옥의 손이 멈춘다.
- 하핫.. 당연히 친구지. 그럼 뭐냐. 애인이냐?
은옥이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말한다.
- 그래. 밥 먹자. 강의실 시원하니까 기분 좋다.
밥 먹고 너 우리 과 수업 들을래? 요즘 내가 너무 바쁜척 했어.
오랜만에 같이 수업 듣자. 우리 1학년 땐 같이 듣는 교양 수업 많아서 좋았는데, 그치.
맨날 낙서하면서 얘기하고. 고등학교 때 버릇 못 버려서 말야.
은옥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휙 든다.
- 싫어.
- 헤헷, 싫음 말구. 하긴 다른 과 전공 수업 재미 없지.
- 친구 하기 싫어. 나 너랑 친구하기 싫어.
- 야아, 은옥아, 너 삐졌어? 미안미안.
니가 친구 안 해주면 나 왕따야. 하하.. 기분 풀어라, 응?
- 서현아. 너.. 알지? 아는 거지? 내 마음 아는.. 거지?
- 무..무슨?
- 알잖아. 내가 너 친구 이상으로 생각..
- 말하지 마.
서현의 낮은 목소리가 은옥의 말을 막는다.
은옥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서현은 은옥의 움직임을 따라 얼굴을 든다.
서현의 눈이 말하고 있다.
말하지 마. 은옥아 제발 말하지 마.
은옥은 서현의 눈을 외면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햇살에 반짝이는 창밖 풍경이 서러울 정도로 밝다.
- 나. 너. 사랑해.
정적이 감돈다.
- 한서현. 나 너 사랑한다고.
은옥이 서현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이번엔 서현이 은옥을 외면한다.
- 고등학교 때부터 쭉 그랬어.
넌 내가 친구였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어.
너랑 같이 있으면 늘 심장이 덜컹거렸어.
손 잡는 것도 떨렸어.
네가 아프면 내가 더 아팠어.
네가 슬프면 내가 더 슬펐어.
네가 행복하면 내가 더 행복했어.
네가 즐거워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었어.
네가 나를 보면서 웃으면 나는..
- 그래서?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 나.. 너한테 다른 의미의 좋은 사람이 될 순 없는 걸까?
- 너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 건지나 알아..? 너야 말로 더위 먹은 거 아냐?
- 널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 나 지금 아주 말짱해. 말짱한 정신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
아주아주 멀쩡하게 사랑하니까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어.
- 앞으로 우리 만나지 말자.
서현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한다.
- 서현아.
은옥이 다급하게 서현의 팔을 잡는다.
- 이거 놔. 너까지 나한테 이러지 마. 너 아니라도 나 충분히 힘들어.
- 서현아, 미안해. 욕심 부려서 미안해. 못 들은 걸로 해줘.
한 번도 말 못한 게 억울해서 그랬나봐. 내가 잘못했어.
그냥 예전처럼만, 그 만큼만.
- 넌 정상이 아니야.
-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왜 정상이 아니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어째서 잘못된 거지?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 마음을 그런 식으로 매도할 권리는 없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게 미친 거야.
- 더러워.
- 더...러워?
서현의 팔을 잡은 은옥의 손에 힘이 풀린다.
은옥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 그래. 난 널 친구로 생각하고 모든 걸 다 보여줬어.
그런데 넌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게 배신감 느껴져.
왜, 다시 말해줘? 더러워. 됐어?
은옥의 손이 미끄러지듯 서현의 팔을 놓는다.
흐려진 은옥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결국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소리내어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무는 은옥의 얼굴이 붉어진다.
- 하루에도 몇 번씩 너랑 키스하는 상상을 했어.
잠든 너를 바라보면서 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성훈 선배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도, 나도 이런 내가 싫어.
그래.. 나 미친 건지도 모르겠어.
그래.. 난 더러운 인간인지도 모르겠어.
울음을 삼키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은옥의 목소리.
-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집어삼키듯이 말을 내뱉는 은옥의
신발 위로 눈물이 투두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울고 있는 은옥을 버려두고
서현은 매몰차게 돌아서서 강의실을 나간다.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복도를 천천히 걷는다.
한 발 두 발 계단을 정확하게 밟는다.
코너를 돈다.
털썩.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은 서현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은옥아.
나 이제 어떡하지?
우리 이제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