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 : 29-30
천국은 어떤 자의 소유일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쫓는 자의 것이리라. 그런 삶의 대표적인 본보기로는 바울과 성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꼽을 수 있겠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간다. 하지만 남는 것은 무엇이랴. 실제 삶에 있어서는 타종교인이나 일반인 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다. 아니 더 못한 경우도 많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그런 삶은 어렵고 힘이 들어 중도에 지치고 만다. 그리하여 이제는 신앙이 있는 듯 없는 듯 형식만 남은 삶이 되어 버렸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어찌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이처럼 힘이 든다는 말인가.
신앙 연륜이 쌓이고 진리의 말씀을 웬만큼 깨달은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내적 평화가 없이 늘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은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머리 속에서는 항시 주님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고 계명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간절함 또한 가득하지만 외부로 나타나는 선한 삶은 별로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우울이 자리하여 있다. 작은 쇼우윈도우 속에 갇힌 마네킹과 같이 언제부터인가 자유를 잃어버렸다.
이러한 상태를 남에게 알려 해결책을 같이 찾고 싶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진정으로 마음을 열만한 상대를 만나기 힘들거니와 찾는다고 할지라도 덮어놓고 가르치려 들거나 아니면 시험에 들었다며 기도해주겠다는 것이 고작이다. 또 그 동안의 경험상 남의 조언이라는 것이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그 원리 자체는 옳은 것일지라도 실제 자신에게 적용시키려 할 때 쓸모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예를 들어 기도하면 된다든지 말씀을 꼭 붙들라든지 악을 버리면 된다는 것 등이 그러하다. 누가 그것을 몰라서 이리 하고 있을까.
진리의 말씀을 모를 때는 열심이라도 있었건만 말씀을 배우고 점차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지금에는 도리어 열심은 사라지고 교만만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그대로 인생이 끝나지나 않을까 조바심까지 난다. 사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나아가 이를 영적 침체기에 당하는 시험이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그것은 누구든지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필수 과정의 일이기도 하다.
진리를 알지 못할 때는 선을 행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고 또 악을 버리지 못하는데서 오는 죄의식도 없어서 그에 따른 시험과 영적 고통도 없다. 하지만 그럴 경우 중생도 없다. 왜냐하면 중생의 실제적 능력은 일반적으로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악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하나씩 싸워 이김에 따라 영혼이 악을 멀리하고 선을 지향할 수 있는 그 의지의 자발성을 키우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을 조금씩 배우면서 진리가 안에 들어오면 그로 인해 악과 선이 갈라지고 충돌하며 여기서 죄의식이 발동하고 그것이 깊어지면 강박관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죄의식은 양심이 건전하게 작용하는 것이기에 신앙에 절대 필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쌓여 강박관념을 형성하면 오히려 영혼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한다. 이는 죄의식과 강박관념이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한 몸을 이루는 듯 보이기에 구별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 결과 죄에 대한 강한 의식은 오랜 기간 그 죄를 끊치 못함으로 인해 어느 새 영혼을 해하는 강박관념으로까지 발전하여 우리가 지고자 하는 십자가의 무게를 더욱 가중시키고 만다.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주요 원인 하나를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표준을 우리가 너무 외골수적인 형태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주님과 이웃 사랑의 경건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욕망과 기쁨은 모두 버린 채 전 생애를 오직 주님을 위한 고난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러하다. 이런 생각들이 지배적인 원리로 작용하며 우리의 신앙 풍토를 형성하는 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은 시종일관 어렵고 힘든 고통의 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위 본문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 : 29-30 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신앙 생활에서 실제로 체험되는 느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 우리 마음에 담아두기 어려운 말씀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동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몸부림을 쳐보았으나 그때마다 극복하기 어려운 좌절감만을 맛보고 돌아선 기억들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십자가를 질 능력은 없으면서 그것을 지고자 하는 욕망만 부풀어오르면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는 더욱 커 보이고 허리는 휘게 된다. 세상 누가 있어 그 길을 정말 어렵고 힘든 고난의 길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도 어렵고 힘든 저 고난의 길이야말로 진정 주님을 잘 섬기기 원하는 우리로서는 갈 수밖에 없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외줄기 길이 아니던가!!
이런 생각에 마음이 지배당하면 신앙 생활은 결코 즐거워질 수 없고 급기야 주님을 부담스러워 하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이른 바 우리에게 주체못할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생각이 은연중 마음에 불평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모범은 당연히 고난에 찬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어쩌면 체념으로 굳어져버린 이와 같은 생각들로 인해 우리의 삶은 각 사람의 표정에서도 잘 나타나듯 너무나 어둡고 칙칙하기만 하여 도무지 밝은 빛이라곤 없다. 과연 거룩하고 경건한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괴롭고 힘든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이어야 할까?
우리가 겪는 이러한 오류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천국을 잘못이해한 데 기인한다. 한 마디로 진리의 말씀을 잘못 깨달아 교리가 바르게 정립되지 못하였기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진리의 말씀에서 얻는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인도하고 계명을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하는데 만일 그 교리가 바르고 구체적으로 정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삶을 개혁할 아무런 능력을 낼 수 없어 신앙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다 확실한 빛을 볼 때 의심이 가셔져 그가 생각한 것을 실제 행위로 옮기기 때문이다.
신앙은 본래 자신의 이성이 합리적으로 정립한 진리의 말씀을 기초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물론 인간의 이성은 빛을 받는 그릇에 불과하기에 그 이성의 힘만으로 진리를 소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마음이 먼저 신성의 조요를 받아야 비로소 그의 이성도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듯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진리를 찾아 검색하고 분별하여 그의 이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한 후에야 그의 마음에는 견고한 사상이 형성되어 믿음으로 발전하고 이어 그에 따른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알고 난지 한참이 지난 시점에서도 도무지 신앙에 힘이 없어 괴롭기만 한 것에 대하여 나름대로 많은 생각들을 품을 수 있겠으나 '모두들 선을 행하기에 이제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는 이 한 가지를 나는 강조하고 싶다.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싶은 생각이 간절하겠지만 이것이 신앙의 염려를 불러일으켜 조급함을 낳기에까지 이르게 되면 마음은 사뭇 이에 부대껴 일찌감치 지쳐버린다.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주님은 분명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멍에는 신음을 발할 정도로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메고 가야만 한다고 여기니 얼마나 괴로우랴!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세상 종말이 당장에 찾아올 듯이 느껴진다.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세상과 관련된 모든 것은 일체 끊고 오로지 영적인 것만을 추구해야만 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성인들의 삶을 보아도 자신과 세상 기쁨에 관한 것은 주님을 위하여 모두 단절하고 청빈을 아내 삼고 고통을 벗삼아 애틋이 주님만 사모하며 걸어가야 할 인생살이가 아니던가. 또 복음 찬송 가사를 보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너무도 황송히 여긴 베드로는 그 십자가를 제대로 지지 못하고 거꾸로 지고 갔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 주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의 정서들인데 과연 주님이 우리에게 지기를 원하신 십자가가 그렇게 힘에 겨운 것이던가?
비록 주님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리시려는 궁극적인 것은 세상적 관심사가 아닌 영혼 구원을 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돌이켜 오직 주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주님의 가르침에 합당하다. 하지만 여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시각이 전적으로 자신의 자아애와 세간애를 몰살시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있다.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의 마음 저 밑바닥에는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과 자기 소유 전체를 버리고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신앙이 너무도 크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삶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지고한 신앙같이 느껴지기에 가능하다면 한 번쯤은 자신도 그들처럼 살아보기를 원하는 소망을 품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앙의 목표가 높은 반면 그것을 이룰 능력이 나오지 않아 참으로 안타깝다.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지금 당장 실현 가능성이 없는 열망을 강하게 품는 것은 때로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한 욕심으로까지 발전하여 신앙을 급조하려는 유혹에 빠지게도 한다. 인간이 어떤 일을 수행하는데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그것을 하고자 하는 바램 때문이다. 이 바램이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 사로잡힐 때 비록 선한 빛이 그 속에 부분적으로 함유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은 욕심으로 변하고 만다. 이러한 욕심이 신앙에 작용하면 인간의 마음은 역시 신앙적 분위기로 충분히 뜨거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욕심으로 보기보다는 믿음의 충만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사실 자아를 사랑하는 것이나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전혀 나쁘지 않다. 선다싱도 말하기를 사람에게 욕구가 있는 것은 그 욕구를 지으신 주님이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길 또한 어딘 가에 마련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욕구는 채우라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버리는 것이 창조주의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 역시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삶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주님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영혼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듯 흘러나와 우리의 겉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주게될 것이다. 그러면 설령 삶의 주변에 크나큰 어둠이 덮일지라도 우리는 크게 동요치 않으리라. 물론 순간적으로 믿음을 잃어버린 채 허둥댈 수는 있으나 우리의 심령은 금새 밝고 환한 웃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 많은 유혹과 시련 가운데 놓여 사는 우리에게 이루어주고자 하신 밝고 강인한 하나님 나라이건만 정작 우리는 밤낮 실패하고 뒤로 물러서기를 잘하며 죄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묵직한 탄식 소리와 슬픈 기색을 띤 채 침상에 뿌려지는 눈물 자국 등 얼마나 어둡고 무겁고 힘없으며 비참할 정도로까지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을 더욱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모습인양 착각하고 사는가!
오늘날 주님의 가르침은 이처럼 가장 기초가 되는 진리에서조차 크게 변색되어 버렸다. 하나님 나라는 참된 삶의 능력은 없이 입술로만 드려지는 빈 껍데기의 지식적 고백 속에나 임하고 있는데도 우리 영혼은 전혀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영혼의 병이 얼마나 깊으면 어두운 분위기의 신앙 생활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강한 힘으로 자신의 모든 어둠과 싸우며 이를 극복하려 들기보다는 연약함을 빌미로 죄인에게 거저 주어지는 그런 주님의 싸구려 은혜나 더 사모하고, 영혼의 내적 기쁨과 평화보다는 고난과 눈물의 신앙에 더 익숙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이며 수동적인 생각에 젖어 있는 것이 주님 앞에 언제나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며 교만을 버린 자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표본인 양 주님의 가르침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그 근본적인 구조상 자아를 위한 것이 아니면 그 어떠한 일도 하지를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 물질적인 몸을 입었기에 물질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아와 물질을 떠나서는 존속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기에 주님께서도 이 세상 모든 사물을 사람의 행복을 위해 지어주신 것이다. 하지만 여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우선으로 하는가 라는 순서상의 차이에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자리하는 사랑의 올바른 질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이 가장 주도적인 힘을 지닌 상태에서 그 아래 세간적 사랑과 자아의 사랑이 종속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속한 이 세 가지 사랑 중 지고한 사랑이 다른 두 사랑을 통제하는 경우에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해 세 사랑이 질서를 잡게 되어 그에게서는 선이 나타나게 되지만 이 순서가 뒤바뀔 때는 자아의 사랑과 세간적 사랑에 눈이 멀게 되어 거꾸로 악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과 이웃을 제일로 하는 순서를 깨지만 않는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를 위한 삶을 즐길 수 있고 또 세상적 부를 취할 수도 있다. 실제로 천국에는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다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비록 이 세상에서 자아를 위한 모든 욕망을 끊고 물질적으로 비천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저 세상에서 천국이 주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천국은 영적 세계이고 이 세상은 물질적 세계이기에 이 세상에서 물질적 비참이 저곳에서 영적 보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천국은 이 세상 삶의 연속이기에 이 세상에서 영적인 평화와 기쁨 없이 어둡고 괴로운 인생을 산 자가 그 보상으로 밝고 빛나는 천국을 소유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곡해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천국에 있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겪은 괴로운 세월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씀도 이를 물질적 개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등지고 홀로 외딴 수도원 같은 곳에서 독야청청 하려는 것은 신앙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더욱 탐욕만을 기르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사람의 마음이 오직 신을 위하여 보존되어야 이 세상에서나 다음 세상에서 평강을 맛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이 지으신 사람의 마음에 여러 가지 욕구가 있다는 것은 신이 그 충족을 어딘 가에 마련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과목이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은 그것을 따먹을 대상에게 즐거움을 주려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인간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기쁨을 맛보는 것 자체는 전혀 나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언제나 도를 지나치는 것이 화를 불러오게 된다.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으나 물에 잠기면 죽는 것 같이 세상 즐거움이 분명 삶에 필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에 빠지면 영혼이 멸망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같이 고난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기쁨과 행복이 없는 신앙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거기서 탈출하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고난이 아주 고상한 것으로 인식되어 자꾸 그것을 사랑하게된 까닭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쁨과 행복을 증오하는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온 것이다. 단지 하나님은 그가 감당할 역량을 감안하여 그에게 닥친 고난의 크기와 완급을 제어해주실 뿐이며 한편으로 그 고난을 발판으로 영혼의 정화를 위한 선하신 역사만을 행하실 뿐이다.
이렇게 고난은 그 본질에 있어서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본래 선하신 주님은 그 어떠한 이유로든 인간에게 해와 고통을 직접적으로 가하시는 일을 전연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행여 악을 사랑하는 자를 고치기 위한 주님의 어쩔 수 없는 방편, 그 마음 아픈 허용이라는 차원으로 고난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그러한 섭리로 인해 우리가 고난 그 자체를 사랑하도록 이끌림 받는다면 이는 주님의 의중을 잘못 헤아린 것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기쁨과 행복 가운데 신앙 생활 영위하기를 원하신다. 어찌 인생이 고통받는 것을 선하신 하나님이 원하실 수 있으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신자로서는 당연한 삶일 것이다. 하지만 고난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고통과 괴로움을 뜻하지는 않는 것은 겉으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는 평강의 물줄기가 흐르는 것을 영혼이 감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울은 고후 4:16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에 담긴 고난을 바라보는 자세가 어떠한가에 따라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어두울 수도 또는 밝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십자가를 질 때의 고난과 자기 부인 등이 때로는 육체적 어려움과 물질적 가난, 또 욕망의 포기로 나타날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외적 현상이 반드시 주님을 쫓는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 고난의 가치는 마음에 일어나는 선악간 시험의 때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주님의 순종심을 배워 전력을 다해 악과 싸우는데 있다. 고통을 통하여 신앙의 자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일지라도 이는 어느 한 측면에 불과하고 선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풍성한 은혜를 베푸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이키도록 섭리하시는 것이 더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열심히 좇는 길이라는 것은 생명을 아끼지 않는 순교, 가진 것 하나 없는 빈궁, 욕망이란 욕망은 모두 제거하려는 금욕 등에 마음의 비중이 두어지기에 기쁨과 행복한 신앙 생활보다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되는 신앙 생활이 더 거룩하고, 더 경건한 삶으로 오해되고 있다. 진리가 평범한 것에 있듯이 천국 또한 일상 생활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누리는 기쁨과 행복 속에 내재하는 것이건만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기쁨과 행복을 떠나 특별한 고난과 고통의 삶 속에서나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고전 4:11 하나님 나라는 이 구절에서처럼 바울이 당한 것과 같은 형태의 수고와 고통의 삶 속에만 있고 이 세상을 기쁨과 행복한 삶으로 사는 것 속에는 없는 줄로 오해하지 말자.
진실을 말하건대 주님을 따르는 신앙 생활은 우리가 알고있듯 그렇게 어둡고 칙칙한 것이 아니라 본래 매우 즐겁고 기쁜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일 역시 사실은 힘겹고 지겨운 일이 아니라 마음 상쾌하고 후련한 일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지키도록 명하심 속에는 우리가 그 말씀을 준행할 때 당연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뜻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 우리가 천국의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저 세계에서 누리기에 앞서 이 세상에서는 그런 정도의 수고와 고통쯤이야 넉넉히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도 주님의 참 의중은 아니다.
천국의 기쁨은 우리가 장차 들어가게 될 저 세상에서나 맛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부터 맛보고 누려야 한다. 이 세상 안에서도 마음 안에 천국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거기 언제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이는 아직 마음에 천국이 임하지 못한 까닭이요 우리 영혼의 성품이 아직 천국의 기쁨과 행복에 길들여지지 못한 까닭임을 알아야 한다. 이웃을 사랑함에서 오는 기쁨이 하늘의 참된 기쁨임에도 그것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기쁨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 저 너머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에도 익숙해질 줄 알아야 한다.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놀랍고 신비한 기쁨과 평안이 마음 깊은 곳을 흐른다면 세상 무엇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으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고통과 두려움 안에 가두며 억압할 수 있으랴!! 한번 맛들이면 세상 것 다 팔아 그것을 취할 만치 애지중지하게 마련인 그 기쁨과 평안인데 어찌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그것을 누릴 기대감으로 살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신비하고도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감춰져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이 우리에게 어렵고 힘든 느낌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 이제는 새로운 믿음의 눈으로 그 계명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직은 우리 영혼이 천국의 사랑에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거기 따르는 여러 희생과 수고가 고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지만 머지 않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오히려 기쁨으로 느껴지는 영혼의 크나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리라!!
사실 너무도 오랜 시간 겨울은 우리 마음에 드리워져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 겨울의 위세에 눌려 폐칩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던 우리였다. 그 결과 우리는 그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겨울이 다 지나간 후 어느 날 문득 화창한 봄날이 찾아올 것에 대한 소망도 또 그 봄을 몰고 오실 주님에 대한 믿음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너무 긴 시간을 겨울의 차가운 빛 안에 갇혀 있었던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이란 온통 고통과 고난뿐이라는 지겹고 무서운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좋지 못한 기억들을 접을 때가 왔다. 바야흐로 영혼에 드리워진 어둠이 가시고 환한 빛 아래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할 때가 온 것이다. 고난 앞에서 고통과 괴로움만을 기억하던 시기는 지나간 한때로 족하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은 밝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는 결코 어둠이 없으시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더 이상 한숨과 탄식 속에 신앙 생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이심을 깨닫고 이전의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루빨리 떨구어버려야 한다.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신 거룩한 땅! 그곳에 들어가도록 요단강을 가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때가 마침내 이르렀다는 이 가슴 설레는 기쁨의 소식을 우리 마음 구석구석에까지 알려야 한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저 이방인들에게만 이 복음을 전하려 들지 말고 먼저 주님을 안다고 여기는 내 마음 속 그 어둡고 그늘진 곳에부터 전해야 한다.
자기 내면에 빛을 받지 못해 어두워진 마음, 그 구석진 모퉁이에까지 복음의 빛을 밝혀 그곳을 일깨워보자! 그리하여 그 몸서리쳐지는 광야 생활을 드디어 접고 천국의 경계 안으로 한 발 들여 놓아보자! 그동안 광야 생활 중 겪었던 모든 두려움과 불안, 좌절과 낙심과 침체는 얼마나 심했던가! 천국의 사랑에 길들여지지 못한 자신의 이기적 마음이 불러들인 이 모든 어두운 과거를 이제 후련히 떨칠 때가 바야흐로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심으로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줄곧 성경에 펼쳐지던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라! 주께서 어찌 우리가 겪는 이 짙은 어둠을 흩어버리지 못하시랴! 구원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준비할 뿐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자!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내자! 문둥병자가 낫고 중풍병자가 나을 그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주여! 나의 병을 고쳐주소서! 믿음에 찬 고백을 드릴 준비를 하자!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이 어둠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지금 주님께서 산 넘고 강 건너 오고 계심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 열리기를 기도해야 하리라.
지금까지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시는 주님을 힘듦과 수고와 고통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실상 주님의 그 계명 뒤편에는 화창한 봄날의 아름답고 따스하며 가슴 후련한 기쁨과 평안이 숨겨져 있다. 믿음의 눈으로 이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는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거기 혹 맞이하게 되는 고난을 더 이상 고통으로 여기지 않도록 놀라운 기쁨과 평안을 부어주실 것이다.
이렇게 영혼이 점차 천국적인 것들에 길들여질수록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예전의 어두웠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밝고 활기찬 느낌들 속에 진행될 것이다. 그러한 천국의 기쁨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그런 기쁨을 맛보는 자가 천국에서도 그런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 세상에서 슬프고 괴로운 삶을 산 자가 그 대가로 저 세상의 기쁨과 평안을 얻으려는 생각은 주님의 가르침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비록 완전치는 못하지만 한 웅큼 정도의 천국적인 기쁨과 평안일지라도 그것을 이 세상에서 맛보는 자는 여러 날의 고통과 수고를 넉넉히 마음에 두지 않을 평안 속에 살리라!
그러므로 힘을 내고 용기를 내자! 두려워 말자! 언제까지 광야 생활 그 어둠 속을 방황하고 다닐 것인가!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밝고 강하며 즐겁고 힘차게 신앙 생활을 하자! 크게 한번 웃어볼 날이 멀지 않았다. 진정한 웃음을 웃어볼 날은 기어코 오고 말리라! 주님이 주시는 영혼의 그 상쾌함이여! 그 개운함이여!
이제 바야흐로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에 의해 요르단 강을 건널 때가 되었다. 설령 변방(가장자리)일지라도 천국이 눈앞에 있다. 지금까지 잠자던 여호수아가 우리 마음 속에 살아날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온 백성을 이끌어 그 거룩한 땅에 들어가도록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내 종 모세가 죽었다. 그러니 너는 이제 이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떠나 이 요르단 강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거라. 너희 발바닥이 닿기만 하면 어디든지 그 곳을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 이 광야에서 시작하여 레바논을 거쳐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고 거기에서 헷족의 땅을 거쳐 해지는 쪽 대해에 이르기까지 너희의 영토가 될 것이다. 네 평생에 아무도 네 앞길을 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네 곁을 떠나지 않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내가 이 백성의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을 차지하여 이 백성에게 나누어 줄 사람은 바로 너다!!!
항상 이렇게 긴글로 표현할수 있는 그 능력과 사랑에 탄복합니다 제 경험에 의해서 만든 말인데요, 냇가에 돌들이 장마를 만나서 굴르면서 동글동글 해지듯이, 쌀 바가지에 쌀들이 보여서 서로 부댓기면서 쌀이 씻어지듯이 삶의 고난을 통하여 영혼이 목욕함으로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이치
라 여겨집니다. 이미 님의 영혼안에서 여호수아가 깨어 나셨군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지난날 저도 어리석음으로 무지 고생을 했어요 참으로 무지가 낳은 오류로 인해 영육간으로 손해를 많이 보았지요 그러나 결코 손해가 아닌것이 그럼으로 해서 가장 빠른 직통길을 알게 되었죠
결국에는 십자가아래 자신을 내려놓고 행함으로서는 도저히 갈수 없는것, 말씀안에서 자신이 죽어지고 곧 비어지고 포기함으로 따라 가는것이 주님의 멍에를 지는 길임을 알게 된 거죠, 그야말로 쉽고 가벼운짐... 다른말로 오직 성령의 법으로 가는길!!!, "주님이 주시는 영혼의 그 상쾌함이여! 그 개운함이여!" 아멘!!
천국은 이 세상 삶의 연속이기에 이 세상에서 영적인 평화와 기쁨 없이 어둡고 괴로운 인생을 산 자가 그 보상으로 밝고 빛나는 천국을 소유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곡해한 것이다. 아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저 이방인들에게만 이 복음을 전하려 들지 말고 먼저 주님을 안다고 여기는 내 마음 속 그 어둡고 그늘진 곳에부터 전해야 한다. 탁월합니다....주님! 주님을 따르는 신앙 생활은 우리가 알고있듯 그렇게 어둡고 칙칙한 것이 아니라 본래 매우 즐겁고 기쁜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일 역시 사실은 힘겹고 지겨운 일이 아니라 마음 상쾌하고 후련한 일이다. 옳습니다.!!주님의 달콤한 사랑느낍니다...
첫댓글 아멘~~
우리의 고민과 고통에 대하여 주님에게 가지는 불평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명해주신것 같습니다. 아멘!!
A men
항상 이렇게 긴글로 표현할수 있는 그 능력과 사랑에 탄복합니다 제 경험에 의해서 만든 말인데요, 냇가에 돌들이 장마를 만나서 굴르면서 동글동글 해지듯이, 쌀 바가지에 쌀들이 보여서 서로 부댓기면서 쌀이 씻어지듯이 삶의 고난을 통하여 영혼이 목욕함으로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이치
라 여겨집니다. 이미 님의 영혼안에서 여호수아가 깨어 나셨군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지난날 저도 어리석음으로 무지 고생을 했어요 참으로 무지가 낳은 오류로 인해 영육간으로 손해를 많이 보았지요 그러나 결코 손해가 아닌것이 그럼으로 해서 가장 빠른 직통길을 알게 되었죠
결국에는 십자가아래 자신을 내려놓고 행함으로서는 도저히 갈수 없는것, 말씀안에서 자신이 죽어지고 곧 비어지고 포기함으로 따라 가는것이 주님의 멍에를 지는 길임을 알게 된 거죠, 그야말로 쉽고 가벼운짐... 다른말로 오직 성령의 법으로 가는길!!!, "주님이 주시는 영혼의 그 상쾌함이여! 그 개운함이여!" 아멘!!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그 믿음 신앙 잘지켜 천국백성 되시길.........
천국은 이 세상 삶의 연속이기에 이 세상에서 영적인 평화와 기쁨 없이 어둡고 괴로운 인생을 산 자가 그 보상으로 밝고 빛나는 천국을 소유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곡해한 것이다. 아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저 이방인들에게만 이 복음을 전하려 들지 말고 먼저 주님을 안다고 여기는 내 마음 속 그 어둡고 그늘진 곳에부터 전해야 한다. 탁월합니다....주님! 주님을 따르는 신앙 생활은 우리가 알고있듯 그렇게 어둡고 칙칙한 것이 아니라 본래 매우 즐겁고 기쁜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일 역시 사실은 힘겹고 지겨운 일이 아니라 마음 상쾌하고 후련한 일이다. 옳습니다.!!주님의 달콤한 사랑느낍니다...
아멘~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