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인의 염려1. 왜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사라지는가?
<구원의 감격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하여 생각함>
--------------------------------------------------------
하나님께서 내신 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신 그 행위만
<의=거룩>가 됨을 믿습니다.
속죄의 사랑에서 나오는 용서의 능력은 무한함을 믿습니다.
-------------------------------------------------------
선생님께서 고백하시는 신앙을 한번 따라해 봤습니다.^^
사실은 아무리 들어봐도, 아무리 고백해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틈만 나면 내 몸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이렇게도 강하디 강한 자아를 소유하고 있는 내가, 보이지 않는 그 영생이 어떻게 믿어지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주신 자의 소관이지, 결코 받은 자 쪽에서는 잡을 수도 없고 한번 알았다고 해서 ‘나는 이제 많이 아는 자다’라는 차원에서 소유될 수도 없는, 차곡차곡 쌓아놓을 수도 없는 하늘의 비밀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봅니다.
* 그런데 왜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사라지는가? (선생님의 첫 번째 역설적인 물음표-성도들이 그래서는 안되는데... 라는 안타까움으로^^)
선생님의 물음표가 나오는 것마다, 자연스럽게 저 자신에게 답을 써보았습니다---
1. 성도라면 아무리 잘못하고 실수하고, 또는 자신이 무언가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결국 그 마침표는, 모든 것이 다 주님께만 영광 돌리도록 조치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절망하거나 교만한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으로 넘쳐나게 되어 있음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또는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이 터지지 않는다면, 그는 애초에 성령 받은 자가 아니라고 보여진다.
2. 또는 어떤 상대방에 대하여 ‘저 사람에게는 구원의 감격이 없어보인다’고 여기는 내 자신의 시각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이는 사람도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상황이 있을 것인데, 주변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준에 의하여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행위를 보고 정죄한 ‘나’ 자신이 오히려 회개할 일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정 선생님이나 박 선생님이 십자가의 피만 하나님 앞에 ‘의’가 됨>을 믿는 분이기에, 그 분들이 설령 내 자신이 이해가 안되는 어떤 행동을 했다 해도 그를 정죄할 근거를 찾지 못하는데, 똑같이 예수 믿는다는 어떤 교인은, 정 선생님의 행동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자기 일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내세우지?’ 혹은 ‘박 선생님은 예수 믿는다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도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을까?’ 하면서, ‘구원의 감격이 없으니까 저렇지...’ 한다면, 그는 분명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서 형제를 정죄하는 오류에 빠지는 결과가 되는 것이리라(그는 예수님이 피흘려서 구원한 형제으므로).
그러한 생각들의 기준은 연약한 육체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내 생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어떻게 형제의 행위를 보고, ‘구원의 감격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롬 14:4)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성령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맞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의 인간의 본능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감=선악과를 앎=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짐=하나님처럼 자기 의로움 챙기기=육(마귀의 지배)에 속한 자=선악간에 판단하는 자=자기 증거’라는 죄인의 실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조건 죄인(인간의 자기 기준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음을 모르는 자이기에, 즉 ‘죄의 허물로 죽은,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죄관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없기에(아직 성령께서 일러주지 않았기에), 대화의 단절만 남을 뿐이다.
3. 그렇다고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하면서 가만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거짓선지자’가 나오고 ‘사단의 일꾼’이 나오고 ‘꾀는 자’가 경계해야 될 대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과연 그러한지’ 말씀을 상고하라(행17:11)고 했지 않은가. 그러므로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벧전4:10,11) 되는데,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희는 사랑하는 내 아들 말만 들으라”(마17:5,막 1:11)고 했다. 성도라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예수님의 일하심이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났기 때문이다(고전2:2, 1:21). 그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단 한 분의 의로우신 분(히10:7,10)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 잘 믿는다는 어느 특별한 인간을 나타내고자 오신 분이 아니라, 선택한 자에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기 위해 오신 십자가의 영이다(요17:3-5).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고전12:3)하게 되어 있으며 그 분만을 자랑하도록 되어 있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고 해서 모두 성령을 받은 자는 아니다 -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을 받은 자는 자신 안에 들어온 믿음의 출처(엡2:8,9)가 어디인지, 그 하늘의 세계만을 끊임없이 가리키고 그 세계의 가치와 의미만을 증거하지, 그 믿음을 받은 사람(자신 포함)의 행실에 대하여 똑같은 중요성을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롬15:1-3). 왜냐하면 성령을 받기 전에 익히 알았던, 그리고 그렇게 최선의 몸짓으로 이 세상을 살아온 자신의 흔적이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누군가 더욱 강조해주지 않아도 그러한 인간의 덕행, 품성, 자비, 성실... 등등의 행실이라든지, 애씀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얼마나 자신을 세우기에 급급한 품목들이었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롬3:23).
사실은 지금도 똑같이 예전처럼 그렇게(괜찮은 인정을 받으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엡2:3), 다만 지금은, 말씀 앞에 있을 때마다 그것들이 ‘마땅히 부인되어짐을 당하며’ 살게 되었음과 동시에 그 용서의 흔적인 십자가의 피만 더욱 고마움으로 다가옴이, 굳이 변화라면 변화된 삶이다(엡2:4-7).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만 모든 영광이 돌아가야 하므로(갈1:4,5 롬11:36)’ 그 예수님을 증거한 성도의 행위는 마땅히 부인되도록(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수치) 인도됨을 오히려 기뻐하는 무리가 성도임을 알 수 있다. 자기가 계속해서 죄인으로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고마워하며, 계속해서 주님의 속죄의 대상으로 구별되어 용서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죽을 것 같은 상황을 만나도 예수님의 피만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됨(요6:53,54)을 증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며 다가오신 예수님은 분명 선택하신 자녀를 ‘예수 핍박한 죄인’으로 규정하고 들어오신다(행8:1).
“내가 죄인인 너를 부르러 온 것은 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기 위함이다. 내가 너를 평생 잡고 다니며 너의 죄인 됨을 계속 폭로할 것이다. 더욱 깊게, 아리도록 쓴 물이 나도록... 그래야 그 큰 죄악까지도 용서한 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 만천하에 공개되며, 이 피의 능력만을 믿는 영에 속한 자의 구원의 세계와, 이 피를 무시하는 육에 속한 마귀들의 영벌의 세계가 확실하게 구별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십자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만 눈부시다. 그 눈부신 광채를 피뿌림으로 증거해라, 그것으로 감사해라...”
이 세계가 믿음이다. 예수님이 지명하여 끌고 다니는 관계... 죄가 터지며 의가 터지는 세계... 그러므로 예수 믿은 다음에 이제부터는 성도의 행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명백한 언어도단이요, 마귀의 술책이다. 선지자를 통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새언약 시대의 성도를 통해서 계속하여 주어진 증거의 사명은, 독생자의 영광과 그 용서의 충만한 세계뿐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을 보아도 성령받은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는 분명해진다. 수고를 넘치게 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고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내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 광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후 11:23-27). 즉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환란이 따랐다... 그러한 약함과 죽음 가운데 처해지는 사망의 가운데서도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의 고난이 성도에게 넘치게 될 때,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성도의 고생이 아니라)인 십자가의 피만 하나님 앞에 의가 됨을 증거하는 일로 분주해진다. 어떠한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39)는 것을 통보받는 인생!
지나가는 이 세상의 인간들의 사랑으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말라는 통보! 그래서 사망신고 받은 것같고 저주 받은 것같은 상황 속으로 밀어넣으며, 죽음보다 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게 하고, 그것을 전하는 기쁨에 참예되도록 인도받는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위신 챙기느라 고생하는 거짓 영들의 술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된 것으로 오히려 즐거워한다(벧전 4:13).
예수님이 오셔서 “너는 내게 용서받지 않으면 안되는 죄인이다!”라고 가르쳐 주실 때, 성도는 “내가 왜 죄인입니까?”라는 반발로 끊나지 않고, 그 반발까지 완벽하게 죽여주신 상태에서(살 소망이 끊어진 상태), 자신에게 다가와 죄인임을 규정하는 예수님과의 관계 맺어짐 자체가 ‘믿음의 세계’임을 알아차린다(이 상태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십자가의 피의 능력과 효력을 일생토록 계속 적용받음(영원한 속죄)으로 안심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을, 성도의 괜찮아 보이는 행위와 동일하게(1%라도 중요하게-그러면 순 참기름이 아니라 한다) 취급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생활의 역사도 동시에 중요한 가치로 전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런 자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란 자기 행함의 열매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반성과 질책과 자기개선, 성화로 이어지는 자기 열매와 자기 영광을 위한 몸부림... 왜? 인간의 행위의 역사는 끊임없는 소유와 전진과 발전을 바탕으로 깔기 때문이다.
현재 받은 사랑으로만은 만족이 안 되기에, 그럴듯한 인간의 욕망의 색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계속해서 펼쳐질 수밖에 없다(마4:9). 초등학교 4학년 사회 교과서 3단원 첫 차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모두가 동의한다. 아이들도 알고 있는 악의 세계를 예수 믿는다는 어른들이 동의를 안하니, 확실히 진리는 나이와 상관없고, 배움과 상관없다.
인간의 언어자체가 욕망의 도구이다. 성경에 쓰여있는 ‘말씀’을 보는 인간 자체가 이미 욕망덩어리이다. 비어진 어떤 것을 채우기 위한 필요 욕망에 의해 말씀을 문자로 대하게 되는 것이다. 욕망 자체가 인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내 모습을 확인하기 전에 보게 되는 것은, 여러 모습의 욕망덩어리이다. 거기에 잘 맞추어 주어야 내가 인정받으며 착하고 성실하게, 복 받으며 잘 살게 되리라는 본능이 작용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욕망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욕망이 나를 일생동안 지배하는 것(히 2:15-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이다.
윤리란, 도덕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끊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불편하지 않게 욕망의 수위를 조절해주고 한계선을 제공해줌으로써 이 세상의 질서가 보기좋게 재편되어 나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즉 욕망에 놀아나는 인간에게 오히려,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며 위선과 가식을 더해가도록 부추기는 세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똑똑한 아이들일수록 자신의 욕망을 시기적절히 잘 이용하며, 이러한 욕망이 마음껏 펼쳐지도록 잘 도와주는 부모가 성공하는 자식을 키워낸다.
이 욕망을 끊을 장사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열심히 율법 지켜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애쓰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다가와, 내가 하나님이다,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했을 때, 결국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욕망하는 인간의 결국임이 판명난 것이다.
오직 십자가의 현실만이 인간의 욕망하는 현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죄로 공격해줄 때(고전 2:2), 즉 욕망하는 나의 주체가 아무것도 아닌 객체로 돌려질 때, 성도는 언제나 반발함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가 들어올 때는 성도를 죽이면서 들어오는 것이 맞다. 그리하여 ‘그렇게 말하는 너도 네 욕망대로 십자가를 끌어다 쓰는 것이 아니냐?’라고 지적할 때, “맞습니다.”인정하며 영이신 말씀 앞에서 ’나의 욕망의 현실'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실‘로 지적받고 죄인으로 쓰임받음을 마땅하게 여기게 된다. 말씀 앞에서 수시로 반발할 때마다, 자기 자녀를 죽음가운데로 밀어 넣으시는(고후 4:10-11) 주님을 고마워하며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십자가의 은혜를 말함이 끝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 있으니(요일4:10)’에서 ‘여기’가 어디인가?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확증(롬5:8)되었다는 것이 아니던가? 그 십자가의 사랑이 밀려들어온 성도만 굳이 자기 행위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하신 일만으로 충분히 기뻐하며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다지 염려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나도록 그들을 쓰시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사단에게 넘겨주기까지 하시면서(고전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