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 감독’ 임권택씨 |
▶ 1970년 3월 동양방송(TBC) 전파를 탄 일일극 ‘아씨’는 방송 시간에 전국의 수돗물 사용량이 줄 만큼 텔레비전 드라마의 큰 힘을 보여줬다. |
▶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대수가 400만 대를 돌파한 1970년대 후반, 오락프로 ‘쇼쇼쇼’는 국민의 피로해소제였다. |
정확히 40년 전, 그해 신인감독 임권택은 세 편의 영화를 찍었다. 신성일·김승호 주연의 ‘나는 왕이다’, 신영균·허장강 주연의 ‘빗속에 지다’, 신영균·김지미 주연의 ‘왕과 상노’다.
“지금하곤 비교할 수가 없어요. 카메라도 툭하면 고장 나고, 한두 달에 영화 한 편을 뚝딱 만들었지요. 필름이라도 많이 쓸 수 있나, 편집이란 것도 별로 없었죠. 거의 찍은 대로 붙여서 극장에서 틀었어요.”
그는 요즘 달라진 충무로를 실감한다. 한국영화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서편제’(1993년)의 연작에 해당하는 ‘천년학’은 컴퓨터 그래픽(CG)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 “바다를 끼고 하늘로 웅비하는 거대한 새를 어떻게 카메라로 잡아내겠어요. 지금까지 구상만 있었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죠.”
임 감독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40년 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하지만 관객만 놓고 볼 때 옛날이 문득 그리워질 때도 있다. 60년대는 충무로의 황금시대였던 까닭이다. 65년 한 해에만 189편이 제작됐고, 68년에는 한국영화사에 남을 기록인 212편이 선보였다. 69년의 총 관객은 1억7304만 명(영화진흥위원회 통계). ‘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로 편당 관객 1000만 명을 넘어선 지난해 제작된 한국영화는 총 82편. 관객은 1억3200만 명을 기록했다.
요즘 같은 멀티플렉스도 없던 시절, 오락이라곤 거의 영화밖에 없었던 당시 사람들은 화면에 줄이 가고, 의자가 삐걱거리는 극장에 앉아 일상의 시름을 달랬다.
또 60년대는 라디오의 시대였다. 63년 음반 판매 10만 장을 처음 돌파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도 라디오란 미디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제개발에 불을 댕긴 ‘도약의 시대’에 스크린과 라디오는 서민들의 둘도 없는 휴식처였다.
70년대는 TV가 열었다. 67∼68년 10만 대에 그쳤던 텔레비전은 77년 400만 대를 돌파했다. 사람들은 드라마 ‘아씨’에 눈물을 훔치고, 오락프로 ‘쇼쇼쇼’에 장단을 맞췄다. 남진·나훈아·이미자·최헌 등이 해마다 가수왕 자리를 놓고 다퉜다. 당시 TV는 3공화국의 강력한 지원하에 국민의 여가를 책임지는 매체로 뿌리내렸다. 사실 TV의 등극은 지구촌의 공통 현상. 록그룹 버글스(The Buggles)는 79년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발표하며 라디오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노래했다.
TV는 80년 12월 컬러 방송이 시작되면서 또 한번 ‘탄력’을 받았다. 81∼82년 200만 대에 그쳤던 컬러 TV는 85∼86년 500만 대를 기록했다. 90년대에는 가전업체들이 ‘컬러 TV 한 집 2대 시대’를 알리는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다. 70년대 초반 동네 만화방에서 10원을 내고 김일의 프로레슬링을 흑백으로 보았던 초등학생은 80년대 대학생으로 자라 프로야구 컬러 생방송에 흠뻑 빠졌다.
그런 TV도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95년 케이블 방송, 2002년 위성방송, 2005년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이 시작되면서 ‘다채널 다매체’ 시대가 만개했다. 안방극장이란 단어는 이제 ‘유물’로 잊힐 상황. 휴대전화 하나로 음악도, 방송도, 영화도 즐기는 이른바 ‘토털 엔터테인먼트 시대’가 바짝 다가온 것이다.
90년대는 대중문화의 폭발기였다. 그전의 영화·방송이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면 90년대 이후의 문화 주도권은 민간으로 넘어갔다. 영화에선 강우석 감독이 ‘투캅스’(1993년), ‘마누라 죽이기’(1994년)를 잇따라 흥행시키며 상업영화의 새 장을 열었고, 방송에선 SBS ‘모래시계’(1995년)가 ‘모래시계 세대’란 신조어까지 낳았으며, 가요계에선 ‘서태지와 아이들’(1992년 데뷔)이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음악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2000년대의 중추는 인터넷과 모바일. 순간의 클릭 한 번에 영화·드라마·뮤직비디오·게임 등 각종 영상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무언가 흥밋거리를 찾아 바쁘게 눈을 돌리는 ‘디지털 유목민’도 넘쳐난다. 프랑스 학자 기 드보르는 이런 시대를 ‘스펙터클 사회’라고 명명했다.
2005년의 대중문화는 생활방식이다. 단순한 여가, 혹은 소일거리가 아닌 현대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당연히 스타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업계에선 대략 하루 400∼500개의 연예소식이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것으로 추정한다.
가히 ‘선데이서울’의 부활이다. 68∼91년 발간된 선데이서울은 시시껄렁한 불륜부터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까지 꼬치꼬치 캐냈던 연예 주간지. 한국 성인만화의 원조인 박수동의 ‘고인돌’도 선데이서울에 74년부터 17년간 연재됐다. 당시 독자들은 남이 볼까 창피해 선데이서울을 책상 밑에 숨겨 보거나, 읽고 난 뒤 불쏘시개로 썼으나 현대판 선데이서울은 인터넷으로, 모바일로, 위성방송으로 날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 선데이서울을 제목으로 딴 영화도 9월 개봉한다. 수준 낮은 문화로 홀대받았던 대중문화의 당당한 자기선언이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산업이다. ‘딴따라’로 비하됐던 연예인이 ‘벤처 기업가’로 대접받는 사회다. 지난해 한류 열풍은 둘째치고 올해 영화 ‘외출’이 다음달 아시아 10개국에서 동시 개봉하고, 드라마 ‘대장금’이 홍콩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며 한국음식 특수가 인 것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문화=산업’‘상상력=국력’으로 통하는 세상, ‘제2의 배용준’‘제2의 보아’를 키워내는 정책 또한 정교해질 시점이다. 고급·대중문화의 무의미한 구분을 넘어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는 21세기 한국을 구원할 키워드이기에….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 조용필 가수 |
조용필 가수
고교를 졸업한 1968년, 음악이 좋아 기타 하나 달랑 들고 가출했다. 미8군 클럽 작은 무대에서 거인 조용필(55)의 꿈은 싹을 틔웠다. 40년에서 딱 3년이 모자란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민 가수’가 됐다.
그에게는 ‘국내 가수 최초’라는 수식어가 훈장처럼 줄줄이 따라붙는다. 80년 발매한 공식 1집 ‘창밖의 여자’는 독집 음반 국내 최초로 100만 장(골든 디스크)을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81년 7월 미국 카네기홀에서 단독 공연을 했고, 이듬해엔 일본 NHK 리사이틀홀 무대에 섰다. 83년에는 일본 NHK 등 4개 방송사에서 조용필 특집을 마련했다. 88년엔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중국에서 공연했고, 89년에는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99년에는 교수·평론가 등 10여 명이 모여 ‘조용필학’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대중문화 현상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접근이었다. 데뷔 31주년이었던 그 해, 대중 가수로는 처음으로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 무대에 섰다. 그리고 2005년, 국내 최대 규모인 총 관객 30만 명 동원을 목표로 전국 월드컵 경기장 투어를 하고 있다.
고비도 물론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대마초 사건’에 묶여 3년간 활동 금지를 당했고 94년에는 대형 뮤지컬을 올리겠다며 벼르다 돌연 취소해 3억여 원을 날렸다. 와신상담이란 말은 그를 위해 있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쉬는 동안 창법을 갈고 닦았고, 뮤지컬 실패 후 꾸준히 준비해 3년 뒤쯤이면 작품을 완성할 예정이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지켜온 원동력은 뭘까.
“저는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냥 음악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경희 기자
8년째 두드리는 '난타'
12년째 달리는 '지하철 1호선'
20세기 대중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문화상품의 ‘브랜드화’다. 대중의 폭발적 관심을 끌었던 작품들은 속편을 빚어내고, 또 10년 이상 장기 공연되는 작품도 많다. 장수상품·효도상품으로 부를 만하다. 충무로의 대표적 사례는 ‘애마부인’ 시리즈. 1982년부터 95년까지 총 11편이 만들어졌다. 1대 안소영, 2대 오수비, 3대 김부선 등 ‘육체파 애마’들은 80년대 절대권력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대중의 욕망을 대변했다. 시인 유하는 ‘파리애마’에서 “심야다방 만화가게마다 절찬리에 상영 중인 깊이 더 깊이, 피스톤 신화. 단속반이 뜨면 헉헉대는 화면은 잽싸게 보도본부 24시로 바뀌지”라며 80년대 한국의 겉과 속을 풍자했었다.
요즘도 충무로에선 시리즈 영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할리우드처럼 한국 영화계도 ‘브랜드 상품’을 수용할 만큼 덩치가 커졌다는 증거다. ‘여고괴담 4’를 비롯해 ‘공공의 적 2’‘몽정기 2’ 등이 선보였고, ‘조폭마누라 3’를 포함해 ‘두사부일체’‘가문의 영광’‘동갑내기 과외하기’ 등의 속편도 준비 중이다.
효도상품은 공연계에 풍성하다. ‘아침이슬’의 김민기씨가 연출한 ‘지하철 1호선’은 올해로 12년째. 공연 횟수도 2700여 회에 이른다. 도마를 내리치는 부엌칼의 신명난 리듬을 무대화한 ‘난타’(사진)는 기획의 중요성을 새삼 알렸다. 97년 호암아트홀 초연 이후 지난 6월까지 24개국 150개 도시에서 공연됐다. 국내 공연 4200회(관람객 138만 명), 해외 순회공연 790회(71만 명), 미국 오프브로드웨이 공연 580회(73만 명) 등 국내외 5600회 공연에 관객 223만 명을 동원했다. 대형 뮤지컬 ‘명성황후’는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 등 국내외 650회 공연에 관객 85만 명을 불러들였다.
TV에선 KBS ‘전국노래자랑’이 맏형이다. 80년부터 현재까지 1200여 회 방영됐다. 드라마로는 KBS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가 730회를 넘었다. 2002년 종영한 MBC ‘전원일기’(22년간 1088회)도 두고두고 기억된다.
박정호 기자
밥차…CG…충무로 신직종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 영화도 예외없다. 요즘 영화 촬영장의 필수 품목은 ‘밥차’. 예전에는 식당이 없는 오지를 갈 경우에나 밥차가 따라갔으나 요즘에는 언제, 어디든 밥차가 출동한다. 영화 규모가 커지고, 스태프도 늘어나면서 밥값 또한 만만치 않으니, 가격 저렴하고 이동성 뛰어난 밥차가 인기다. 한끼 4000원에 아침·점심·저녁 세 끼 식사를 제공하는 업체만 10여 곳에 이른다.
한국영화의 업그레이드가 가속되면서 충무로의 ‘신직종’도 늘고 있다. 제작·마케팅 등 분야별 전문화가 활발하다. 눈에 띄는 변화는 1인 기업의 활성화. 카메라·조명·크레인 등 촬영 장비를 트럭에 싣고 전국을 누비는 ‘소사장’이 많다. 예전에는 영화진흥위원회나 렌털업체의 도움을 받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분야별 개인사업가에게 의존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도 최근에 뜬 직종. 미술·의상·소품·세트 등을 총괄하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영화 전체의 ‘때깔’을 책임진다. 컴퓨터 그래픽(CG)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디지털 테크니션’의 영역도 확장되고 있다. ‘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웰컴 투 동막골’‘청연’‘태풍’ 등에서 CG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인터넷에 이어 모바일 홍보도 세분화됐고, 예고편 전문 제작업체도 성업 중이다.
박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