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문학촌 문학기행 관련// 240427
황순원 문학의 동심의식과 서사구조 - ⑦ 종합
황순원은 1930년대 말기에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60여 년 가까운 세월을 창작으로 일관했다. 작가로서 황순원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성취는 수준 높은 단편의 세계라고 할 것이다. 황순원의 첫 단편집 「늪」은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식민지적 현실 혹은 근대적 세계화와 불협화음을 그 주조로 하고 있는 바, 작중 인물들은 모두 도시와 농촌, 새것과 옛것의 경계선상에서 혼란을 겪는 존재들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들의 혼란은 ‘떨림’이라는 독특한 신체 감각으로 표출된다. 또한 그들이 처한 삭막하고 암울한 환경은 단절된 가족관계와 결부된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과 가족관계의 단절을 가져온 가장 현실적인 원인은 문명의 부작용으로 인한 모성의 부재와 가족해체라 보고 있으며 외부적 현실상황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목도하고 동심의식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세계의 부정적 모습에 대한 심화된 비판의식을 보여주던 황순원은 두 번째 단편집 「기러기」에서 자아와 세계의 불화를 해소할 의식적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작품집 「기러기」에서부터는 근대적 세계와 점차 거리를 두게 되는데, 동심과 모성에 대한 동경, 조화로운 농촌 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가진 어린이와 노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근대적 세계의 실상 탐구보다는 전근대적인 세계와의 친화성에 강하게 경도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황순원은 근대화의 맹목성을 비판하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재인식을 강화함으로써 근대 일변도의 시대감각에 저항하는 작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반근대적 의식은 작품 속에서 모성성, 설화성으로 발현되는데 이는 바로 황순원 문학이 가진 본질적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심을 지향하는 황순원 소설은 개인적 체험이나 당대 현실을 작품화할 때 동화적 요소를 작품 구조화의 원리로 활용하여 당대적 문제에 접근하는 특성을 보인다. 「닭제」에서의 소년의 아픔과 미소, 모티프로 차용된 설화라든가, 「가랑비」에서 전쟁속에서 가족을 잃은 경관이 산사람의 가족에게 보복을 시도할 때 보여주는 어린 생명에 대한 연민의 감정, 「소나기」에서의 어린 소년, 소녀의 순수한 사랑 등은 장편소설의 주인공이 삶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에서 한층 구체화되는 바, 이는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동심의식을 투영하여 문학적 진정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황순원 소설 전반에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은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동심 지향성과 필연의 관계에 놓인 탈현실적인 성격은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유년기 자아로의 퇴행으로 평가될 소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취하는 소설적 제재가 특정 영역에 국한되고 주인공이 대체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황순원 소설이 내장한 진폭이 그다지 넓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 경향은 단편에 비해 장편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의 6.25전쟁에 의한 상처, 「일월」에서의 신분 관념, 「움직이는 성」에서의ㅣ 사회정의 문제는 동화적 상상력이 투영될 가능성이 상당히 낮은 것이다. 따라서 장편소설에서는 단편적인 동화적 구조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창작 방법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황순원은 장편소설 창작에서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지 못하고 장편소설의 미달태인, 즉 ‘단편같은 장편’에 머무는 한계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황순원 소설의 장점은 익숙한 일상 세계를 독특한 미학적 장치를 통해 낯설게 보여주고, 궁극에는 일상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준다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학」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통로를 열어 주었고, 「차라리 내 목을」같은 작품은 인간의 위선적인 면모를 가차 없이 폭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평가해야 할 점은 황순원 소설이 한국 근대 문학에서 무조건적으로 미화되는 유토피아적 동심, 고향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동심 세계 역시 성인 못지않은 상처와 고통, 좌절이 깃든 세계라는 점을 문학적으로 각인시켰다는 사실이다.
황순원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이들은 일반적인 아동문학에 등장하는 마냥 행복하거나 순진한 인물도 아닐뿐더러, 일방적인 피해자로서 수동적인 위치에 머무는 존재도 아니다. 또한 아이들이 성인을 위한 회상이나 추억의 매개라는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아이 / 어른, 전통 / 근대, 인간 / 시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따라서 황순원 소설의 동심 지향성에 대한 탐구는 비단 한 작가에 대한 탐구일뿐만 아니라 문학의 본질적 기능과 우리의 근대성 일반에 대한 탐구라고 할 것이다.
황순원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주로 등장하는 유년은 이후 많은 작가들이 그의 소설에서 역할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청준의 「침몰선」(1968), 김승옥의 「생명연습」(1962), 윤흥길의 「황혼의 집」(1970)과 「장마」(1973),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1979)와 「유년의 뜰」(1981), 김원일의 「노을」(1977)과 「마당 깊은 집」(1987), 김주영의 「도둑견습」(1975), 최인호의 「처세술 개론」(1971), 양귀자의 「원미동시인」(1986), 은희경의 「새의 선물」(1995) 등이 직간접적으로 황순원 문학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작가들은 순수유년의 세계에 침잠하여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따뜻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또 현실세계의 타락한 가치에서 유년의 심상이 상처받는 모습을 통해 현실의 가치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유년기 아동의 시점을 중요한 매개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일군의 작가들은 성장기에 편재한 6.25의 비극적 상흔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김원일의 「어둠의 혼」 이래 유년기 아동의 시점은 분단과 전쟁의 폭력적 현실에 가냘프고 순수한 개인을 대비시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윤리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들 눈에 비친 전쟁의 참상은 어떤 이념이나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극이며 희생을 강요한 기억 속의 불가해한 상흔으로 나타난다. 어린 존재의 시선을 빌려 포착된 전쟁양상은 비록 가족사적 체험에 한정된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아동들의 연약함마저 아랑곳하지 않는 무자비한 현실을 대비시켜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황순원이 「학」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바 있는 동심 회복을 통한 이념적 대립의 극복이라는 서사 구조와 문학사적 연관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정수현, 『황순원 소설 연구』, KSI한국학술정보(주),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