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溫陽)은 충남 아산군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을 고려초에 온수군으로 고치고 현종때 천안부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 태종때 온창이라 하다가 다시 온수현이라 하였으며, 세종때 온양군이 되었다.
방씨는 중국 하남성,낙양현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주나라 때 대부 방숙(方叔)의 후예로 전한다. 온양방씨는 중국 산동 사람인 방지(方智)가 당나라 한림학사로서 669년에 나당동맹의 문화사절로 동래하여 설총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여 불교의 전성시대인 신라에서 유학의 체계를 수립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경북 상주)에 뿌리를 내렸다.
그후 그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운(方雲)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에 봉해지고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 3읍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군 팔동리 과안산은 <방씨를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배방산(裵方山)으로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누대로 온양지방에 살면서 방지(方 智)를 시조로 하고 운(雲)을 1세조로하여 온양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방씨의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개성(開城), 강화(江華) 등 26본이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며 근대에 와서는 온양으로 단일화하고 있다.
그후 온양방씨는 12세에 이르러 문정공 우선(于宣)과 그의 아우 우번(于番), 목사 득세(得世)의 아들 대에서 아래와같이 분파 되었으나
|
장암공 서[曙]를 파조로하는 |
판서공파(判書公派) |
|
간의대부 현[縣]을 " |
간의공파(諫議公派) |
|
안렴사 훤[暄]을 " |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
|
군위군 적[迪]을 " |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
|
우번(于番)을 " |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
신제(臣悌)를 " |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
|
신우(臣佑)를 " |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 |
안렴사공파 훤(暄)과 상락부원군파 신우(臣佑)는 절손되었고 현재는 5파만 세계가 이어진다.
방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목종때 도첨의 정승을 지낸 중탁(仲鐸)과 현종때 중랑장으로 강감찬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온양군에 봉해진 휴(休)가 유명했으며, 휴의 증손 유(裕)는 문하시랑에 이르러, 대호군을 지낸 아들 재(宰), 대제학에 오른 증손 희진(曦進) 등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유영(有寧)이 중종조에서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순조조에서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자 정주성함락에 공을 세웠던 우정(禹鼎)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할 때 쓴 [서정일기]는 역사적인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기전(基典)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에서 은양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육성에 공헌했다.
한편 소파 정환(定煥)은 일제때에 민족사상 혁명의 선구자로서 짧은일생을 나라를위해 바쳤다. 특히 그는 아동문학에 전심,[사랑의 선물],[어린이]등의 잡지를 창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의 정수를 이루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9,317가구, 81,4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