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
☞ 바둑판. 배구공 갖고 가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 7여단 35대 대장 김일옥 중령은 대구사람, 33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전주사람 이었다. 35대대 3중대장 박병수 대위는 전북 김제사람 이었다.
박병수 대위는 <5월 17일 저녁에 트럭으로 여단본부를 떠났는데,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는 것을 놀러 가는일 정도로 생각했다> 고 말했다.
박씨는 또 <우리 부대는 주둔지가 전북이라서 그런지 전라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고 했다.
실탄은 개인별로 가져가지 않았으며. 소나무로 만든 진압봉을 하나씩 들 고 갔다는 것이다. 시위진압 기구는 진압봉과 사과탄이 전부였고. 방석모· 방패· 최루탄 발사기는 없었다고 한다.
☞ 지역감정에 흔들리지 않아
7여단 35대대 3 중대장 이었던 박병수씨는 <그때 시위 현장에 나가 있었던 우리는 식사보급 차량이 접근하지 못해 비상특전 식량만 먹었고. 더운 밥을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잠을 거의 못 잔데다가 배도 고프니 앉기만 하면 잠이 오더라> 고 했다.
이런 사정은 11여단 도 마찬가지 였다고 한다. 한 장교는 <공수여단 병력을 일부러 굶기고 술을 먹였다는 유언비어도 있는 모양인데. 굶긴 것은 시위대 이고, 술을 마신듯 눈이 충혈된 것은 잠을 못 잤기 때문 이었다> 고 했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박병수씨는 <경상도 군인들이 씨 말리려 왔다는 유언비어에 전라도 출신 공수부대원들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으나 나 개인으로는 이런 식으로 과연 동향의 시민들을 진압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때 11여단의 대대장 이었던 한 현역 대령은 <전라도 출신 부대원들이 동요한다는 보고를 받고 그들을 잠시 뒤로 물린 적이 있었다> 고 했다.
장사복씨는 <전교사의 기간 사병들은 과반 수가 호남인 이었으나 크게 동요하지는 않더라> 고 했다.
3여단의 경우, 4명의 대대장 가운데 한 명이 전라도 출신, 11여단의 경우, 세명의 대대장은 각각 경상도, 안성, 서울 출신이었고. 7여단의 경우, 한 명은 전주, 다른 한 명은 대구출신 이었다
(소준열씨의 민화위 증언에 따르면 7여단 장병의 약 40%는 호남사람 이었다고 한다).
☞ 추가 투입해도 밀리는 공수부대
공수 제 3여단이 열차편으로 청량리역에서 광주로 떠난 것은 5월 20일 새벽 1시였다. 최세창준장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20일 아침 7시에 광주역에 도착. 바로 전남 대학교 교정으로 갔다.
이날 아침과 점심을 비상 식량으로 때운 3여단은 4개 대대를. 전남대 입구, 금남로, 광주역에 각각 배치 하였다. 오후 6시 30분, 제3여단의 치중대 소속 트럭 2대가 주부식을 수령하기 위해 전남대를 나섰다.
5백 m 쯤 갔을 때 차량 시위대와 부딪쳤다. 무기가 없던 치중대 병사들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달아났다.
시위대는 트럭을 밀어 넘어 뜨렸다. 전남대 입구를 지키던. 3여단 16대대가 출동했다. 차량 시위대가 진중으로 돌진하여 사병 한 명이 깔려 죽었다.
이날 오후 아세아 자동차 광장 앞에 세워 두었던 군수차량 3백14대, 민수 차량 82대, 기타 18대 등 모두 4백 14대의 차량이 시위대에게 넘어갔다.
기동력을 가진 시위대가 사태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5월 20일 부터는 엄청난 군중의 절대수 때문에 공수부대는 곳곳에서 고립되고, 밀리면서 기가 죽어갔다.
7여단의 박병수씨는 <20일 밤에는 군중 속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분산. 고립을 면하기 위해 전남 도청쪽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우리를 포위한 군중 가운데서 술취한 사람이 바로 가까이 까지 다가 와, 이런 새끼들 죽여야 한다고 욕설을 해도 가만히 있어야 했다. 진압봉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잘못하면 작살날 판이었다> 고 했다고 한다.
실탄 없는 M16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 M16을 반납하게 해달라는 건의도 올라왔으나 묵살 되었다. 11여단의 한 대대는 아예 대검을 반납한 뒤 진압에 임했다.
당시 11여단의 한 대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데모 군중은 수십만 명으로 불어 나는데. 상부에서는 선무로써 대응 하라고만 하고, 부하들은 실탄을 달라고 호소해 왔다.
20일부터는 우리 공수부대가 수모를 당해야 했다. 적극적인 진압을 포기하고 방어적인 진압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시위대와 대치하여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어떤 시위 군중은 공수부대원의 헬미트를 몽둥이로 툭 툭 치면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 병사한테 어떻게 참았느냐고 물었더니, 애인 생각만 했다고 하더라. 유방을 우리가 도려냈다고 하는데 대검으로는 찌를 수는 있지만 벨 수는 없다. 한번 실험해 보라>
20일 밤 10시쯤에는 전남도청 앞에 서 시위대가 장악한 버스가 경찰부대로 돌진. 경찰관 네 명이 깔렸으나 포위한 군중 속에 갇혀 지연되는 상황 이었다.
☞「특전사의 작전일지」는 5월 18일의 상황을 이런 요지로 기록하고 있다
<18일 새벽에 전남대, 조선 대학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있던 40 여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오전 9시쯤 전남 대학교에 들어 가려던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주시 중심부 금남로로 이동, 계속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지며 대항 하였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최근의 민화위 증언에서 <전국 31개 대학과 1백 36개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배치 시켰다. 이 조치로 학생 시위는 중지되고 평정을 되찾았다. 단 하나의 예외가 전남대학 이었고 이로써 광주사태가 시작 되었다> 고 했다.
광주시민 측에선 5·17 조치를 광주사태의 시발로 보고 이에 저항한 전남대생의 시위를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발상의 출발점 부터가 다른 것이다.
군쪽에서는 실정법을, 시민측에선 역사성과 도덕성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전교사 참모장 장사복씨는 <경찰에 의한 시위진압과 군의 진압, 그것도 계엄령 하에서 이루어진 군에 의한 진압을 같이 봐서는 안된다> 고 주장했다.
소준열 당시 전남북계엄분 소장은 88년 1월의 민화위 증언에서 <검시 결과, 군인이 사용한 M 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 뿐이었다> 고 말했었다.
나머지 총상 사망자는 카빈 등으로서 시민끼리의 오인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20명이 맞아 죽었다, 7명이 찔려 죽었다는 이 원시사회적 공포가 정글도 아닌 대도시의 대낮에 그것도 중인환시리에 연출 되었다는 것이 광주사태가 확대 일로로 치달은 기폭제 였던 것이다.
☞ 11여단에 출동 명령
정사령관은 <광주사태가 심상치 않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려고 왔다는 등.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서울 사람인 당신이 좀 내려가 주어야겠어>라고 했다고 한다.
11여단이 충장로에 이르렀을 때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고 특전사 작전일지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11여단 63대대 소속의 김동철 병장은 <돌을 맞고 흥분하지 않을 군인이 어디 있겠는가. 계엄군에 돌 던지고 공공건물을 불 태우는 사람은 폭도들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김일성이 쳐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장사복 당시 전교사 참모장은 <공수 부대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놀랐다. 군중들이 그들에게 둘러싸인 계엄군 장갑차의 잠망경을 부수고 해치를 열려고 해서 안에 있던 소대장이 위협사격을 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도 난다.
18일의 7여단에 이어 19일엔 11여단. 20일엔 3여단, 21일엔 20사단 병력을 잇따라 불러 내리게 된 것도 당초에 이런 사태를 예기하지 못해 병력의 축차 투입이라는 진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 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 이었던 한 대령은 <우리는 시위 진압용 이라고는 진압봉 하나 밖에 없었다. 방석복, 방패도 없었다. 안면을 보호하는 방석망 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지에서 철사를 구입하여 손으로 만들어 철모에 매달았다. 하도 엉성하여 작은 돌을 맞아도 찌그러지면서 얼굴을 때리는 한심한 상황 이었다>고 했다.
그는 또 <한 중대의 반 이상이 부상을 당해 진압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11 여단 참모장 이었던 양대인씨는 <공수부대원이 돌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왜 사진이나 비디오에 안 나오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 출신의 현역 대령은 <과잉 진압이란 표현에는 불만이다. 나는 흥분된 양쪽이 부딪쳐서 스파크 현상을 일으킨 것이 광주사태의 본질이라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11여단의 부지역대장 김태룡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곳에서 부상 당해 한측 다리를 못쓰고 있다. 차라리 진상조사가 철저히 됐으면 좋겠다. 너무 군인들만 몰아붙이는데, 나는 내 부하가 시위대의 APC장갑차 돌진에 의해 치어 죽는 것은 목격 했었다.
우리는 광주로 갈 때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어떤 선입견 없이 진압에 임했다.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군인에게 돌을 던지고, 동료가 다치니까. 아무리 부하를 말려도 강경진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더라.
진압봉 하나 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가 돌에 맞아 죽을 판인데… 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지리에 밝아 더 열심히 진압에 나섰다>
11여단 소속 사병이었던 경기만씨는 <조선대학교 CP에서 광주가 고향인 한 동료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가족이 믿지 않는 것이었다.
전라도 출신이 진압군으로 내려왔을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여단의 김모 소령은 전남사람 이었다. 지역대장으로서 진압 일선에서 악전 고투했는데. 동생이 시민측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고 했다.
☞ 실탄은 지급 않아
당시 11여단 참모장 양대인 중령은 조선 대학교의 여단 사령부에서 시위 현장에 나가 있는 세 대대장들과 무선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상부에서는 절대로 시위대와 부딪치지 마라. 선무 하라고 지시가 내려 왔다. 현장 상황을 알기 위해 전남 도청쪽으로 나가 보았다.
한 중년 남자가 자기집 공사장에 쌓아 둔 벽돌을 시위대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그대로 였던 내가 말렸더니. 그 남자가 하는 말이. 내 벽돌 내 마음대로 하는 데 웬 상관이냐는 것이었다.
시위자와 구경꾼이 구별되지 않아 진압이 어려웠고, 시위 가담자가 아닌 시민들에게 구타가 가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우리 여단의 경우, 대대마다 한 상자분의 경계용 실탄밖에 없었고 이 실탄은 대대장이 자기 지프에 봉함하여 싣고 다녔으므로 쏠 실탄이 없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 이었던 한 현역대령은 <부하들이 군중 속에서 고립되어 실탄을 달라고 무전으로 수 십번 호소해 왔다.
나는 참모장에게 실탄 지급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 했는데, 참모장이 선무에 주력하여 좀 참아 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야이 xx야. 네가 현장을 모르니까 그 따위 소리하는 모양인데…라고 상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