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예견과 다윗
삼상16:1
(삼상 16:1, 개역)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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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분주하게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은
인간들의 의도나 의지를 비켜지나갑니다.
심지어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들의 시도나 노력도
전혀 하나님에게 먹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한가롭게 지내면서
인간들의 요구조건이나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직접 나서서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실패없이 챙기십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뭐냐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6-8에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참 어려운 대목은,
소위 복음을 전하는 그 자들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이치가
이 복음 안에 포함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마땅히 구원받는다’는 식의 주장은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복음이 될 수 없고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근원을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말고 다른 근원을
따로 만들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복음 전하는 자나 집단도
복음 속에 자신의 곁다리를
끼어넣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버림과 선택의 근거가
구원받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는 자에게
버림받는 근거가 있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버림과 선택의 근거는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이것을 연결시킨 것이
바로 ‘족보’라는 겁니다.
족보란 선택과 버림을 결정짓는
외부적 근원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스마엘은
아무리 해도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에서는 아무리 해도
이삭의 족보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이삭은
아무리해도 아브라함 족보에 포함되고,
야곱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삭의 족보에서 빠져나갈 도리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3-6에 보면,
그에게만 쏠리는
특별한 족보가 나와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에 대해서
버림받은 자의 입장에서
너무나도 일방적 족보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버림받은 자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이 족보만이 생명책에 기록된 족보가 맞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족보에 따라 운명을 결정짓는 겁니까?
그것은 결국
끝이 다른 두 노선으로
미끌어져 이어내려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한국버스가 좋고
여유롭고 편리하다고 해서
노선이 다른 버스에 올라 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봐도 천국과 지옥으로 통해서는 노선이
인간 세상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구별될까요?
찾는 사람이 많은 쪽은 멸망의 길이요,
찾는 사람이 적은 쪽은 생명의 길입니다.
즉 사람들의 원하는 식으로 가서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성취욕에 몰말라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성취욕에 의해서
결정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복음으로만 결정됩니다.
이 복음 안에는
이미 족보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본성이 포함되어서 작용합니다.
그러니까 선택하는 것도
사람들을 좋게 해서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버리는 것도
그냥 밉다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서 일하십니다.
마치 끈끈이가 놓여 있는 광안에서는
쥐가 요지부동을 못하는 것처럼
버림받을 자도
십자가 복음이 늘 싫어지게 되어 있고,
선택받을 자도
오로지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은 감격을
갖게 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평생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의 위력을
체험해보는 세월입니다.
그리고 불신자의 한평생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복음을 앞세워
자신을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는 운명인 것을
체험하는 한평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버려야 버림받는 것이요,
만약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면
결코 버림받지 못하고
기어이 선택받아 지옥보다 못한
천국에 들어가야 될 팔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를 보게 되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으로 인하여 선택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선택의 의미를
그는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복음을 전하고부터는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받게 됩니다.
즉 자신은 생명을 전하고 복음을 전했는데
예레미야가 자기보고
욕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도 예레미야가
선지자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그 내부에 예수님의 씨가
착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이 착상되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복음의 움직임에 따라
인생이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의 의사가
자기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이새의 아들 중에
누구 하나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말은
이미 사울왕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선택에는
반드시 버려지는 인물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냥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한 일을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오로지 이 선택을 보여주기 위한
전지전능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조차 여기에 관여못합니다.
이새의 아들들을 사열하면서
사무엘은 큰 아들을 차기 왕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뜻조차 물리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장과 용모조차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내부에 들어있다는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비록 다윗은 그 현장에서 없고
멀리 양을 치고 있어도
하나님의 선택된 작업에
전혀 지장되는 요인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작업에는
실패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