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용어500(24)여의륜관음~연비~오도송
315. 여의륜관음 (如意輪觀音)
여의륜관음은 여의보주(如意寶珠)의 삼매(三昧)속에서 항상 법륜(法輪)을 굴려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로서 부귀. 권력, 지혜 등의 모든 염원을 성취시켜주는 것으로 신앙되고 있다.
곧 여의륜관음은 세간의 재물과 출세간의 재물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분입니다. 즉 돈, 권력, 명예가
세간의 재물이요, 복덕과 진리를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출세간의 재물이다.
여의륜관음은 팔이 여섯 개인 육비(六臂)의 좌상(坐像)으로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육비 중 오른쪽 첫째 손은 뺨에 대고 중생을 구제할 방법을 생각하는 사유상을 취하고 있으며,
둘째 손에는 여의보주, 셋째 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다. 왼쪽 첫째 손은 아래쪽의 산을 누르고 있고,
둘째 손은 연꽃, 셋째 손은 법륜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여섯 개의 팔은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여의륜관음은 동양 삼국 중 특히 일본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연대가 있는 불상이나 불화가 전무한 상태이며, 여의륜관음을 염송하거나
기도하였다는 기록 또한 찾아볼 수가 없다.
316. 여의주 (如義珠) ☀불교에서 나온 말
글자 그대로 뜻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 있는 구슬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왕의 뇌(腦)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면 독(毒)이 해칠 수 없고,
불(火)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아수라(阿修羅)와 싸울 때 부서져 남섬부주(南贍部洲)에 떨어진 것이
변한 것이라고도 하며,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님의 사리(舍利)가 불법(佛法)이 멸할 때에
모두 변하여 이 구슬이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도 전하여진다.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은 두 손에 이 보주(寶珠)를 가졌고, 사갈라 용왕(龍王)의 궁전에도 있다고 한다.
밀교(密敎)에서는 이것을 극비밀(極秘密)로 여겨 대비복득원만(大悲福德圓滿)의 표시(表示)로 삼고 있다.
317. 연 (輦)
연(輦)은 속세에서는 임금이 탔을 뿐 일반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인데 불교에서는
재의식(齋儀式)에 이용하였다. 이를 시련(侍輦)이라고 하는데 절 문 밖까지 연(輦)을 메고 나가 신앙의
대상과 재를 받을 대상을 도량으로 모셔오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연(輦)의 형태는 임금이 사용하던 것과 모양이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조그만 집 모양으로 생겼으며
안에 사람이 앉을 만한 공간이 있고 앞뒤에서 네 사람이 가마채를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매어서
운반하게 되어 있다. 특히 부처님을 조성하여 법당(法堂)으로 모시는 운반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318. 연기 (緣起)
불교교리의 기본원리는 연기(緣起)에서 시작된다. 즉 모든 만물 현상은 원인이 있음으로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싯달타 태자가 깨달은 진리도 바로 연기적 세계관이다.
연기는 인과법, 인연법, 연생연멸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데 불교의 연기관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로 강조되어왔다. 연기는 A에 의해 B가 생긴다는 뜻으로 모든 현상은 무수한 조건이
서로 관계하여 성립되며 독자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소멸함에 있어서도 그 원인이 제거되는 것이지 자연적인 소멸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실세계의 고통에 대해 고통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깨달음을 통해 밝힘으로서
이를 소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님을 본다”
<아함경>
☀ 12연기 (12緣起)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십이연기(因緣)의 이치를 관상(觀想)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십이연기라는 것은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무명(無明:근원적인 無知)임을 연기의 이치에 의거해서 밝히고
무명을 없애면 괴로움이 없어진다고 보는 근거이다.
그 열두 가지는 무명ㆍ행ㆍ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생ㆍ노사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 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왜 괴로움이 있는 것일까? 늙음과 죽음(노사:老死)이 있기 때문이다.
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 태어남(생:生)이 있기 때문이다.
왜 태어남이 있는 것일까? 있음(유:有)이 있기 때문이다.
왜 있음이 있는 것일까? 집착(취:取)이 있기 때문이다.
왜 집착이 있는 것일까? 갈애(사랑,애:愛)가 있기 때문이다.
왜 갈애가 있는 것일까? 감각(수:受)이 있기 때문이다.
왜 감각이 있는 것일까? 접촉(촉:觸)이 있기 때문이다.
왜 접촉이 있는 것일까? 여섯 가지의 지각기관(육입,六入:눈 귀 코 혀 몸 뜻)이 있기 때문이다.
왜 지각기관이 있는 것일까? 정신과 육체(명색,名色)가 있기 때문이다.
왜 정신과 육체가 있는 것일까? 식(識;우리의 인식을 성립시키는 것) 이 있기 때문이다.
왜 식이 있는가? 인간의 행위(행,行)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인간의 행위가 있는 것일까? 우리의 의식 속에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봄으로써 결국 모든 괴로움의 근원을 무명임이 판명된다. 뒤집어 말하면 무명을 없앨 때
순서에 따라 고뇌도 없어진다.
☀
또한 한 생각 어리석음이 생사의 연기를 일으키는 것을 12연기라는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다.
1. 어리석은 한 생각 이 무명(無明)이,
2. 어리석은 행동(행:行)을 일으켜,
3. 어리석은 세계를 인식(認識)하게 되면‘
4. 어머니 배속에 들어가 정신과 육체를 만들고, 명색(名色:정신과 육체)
5. 그 육체위에 눈, 귀, 코, 혀, 몸, 뜻의 기간을 만들어,(육입:六入)
6. 태어나서는 세상을 따라 접촉(觸)하다가
7. 보고 듣고 깨닫고 알아(수:受)
8. 좋아하는 것은 사랑하다가 애(愛)
9. 마침내는 그것을 취(取)하여
10. 새로운 업을 지으니 유(有)
11. 그 업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켜 생(生)
12. 늙고 병들어 죽게 한다. 노병사(老病死)
이것을 12인연의 순행(順行)이라 한다면
12인연의 역행(逆行)은
1. 죽음(老病死)을 없애려면 생(生)을 없애야 하고
2. 생을 없애려면 업(有)을 없애야 하고
3. 업을 없애려먼 취착심(取,집착)을 없애야 하고
4. 취착심을 없애려면 목마른 사랑(갈애,愛)을 없애야 하고
5. 목마른 사랑을 없애려면
6. 보고 듣고 판단하는 감각작용(수,受)을 없애야 하고
7. 감각작용을 없애려면 접촉심(촉,觸)을 없애야 하고
8. 접촉심을 없애려면 눈,귀,코,혀,몸,뜻의 6입(六入)을 단속하고
9. 육입을 단속하려면 정신과 육체(명색,名色)를 밝혀야 한다.
10. 정신과 육체를 밝히려면 부모님의 태속에 들어갔던 그 일념을 다시 한 번 생각(식,識)해 본다.
11. 그리하여 잘못된 행위(行)를 반성함으로
12. 최초에 한 생각 어리석었던 것(무명,無明)을 뒤집어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 12인연 (十二因緣)
범부로서의 유정(有情)의 생존이 열두 가지의 조건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
① 무명(無明): 미혹(迷惑)의 근본인 무지(無智) ② 행(行): 무지로 인해 선악(善惡)을 짓는 것.
③ 식(識): 과거세의 업을 의지해서 태(胎)에 드는 것.
④ 명색(名色): 태중에 있으면서 몸과 마음이 점점 발육하는 단계.
⑤ 육입(六入): 육입은 육처(六處)라고도 하고 육근(六根)이라고도 하는데 안이ㆍ비ㆍ설ㆍ신ㆍ의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감각 기간을 갖추어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
⑥ 촉(觸): 2,3살에 사물에 대해 잘 식별하지 못하는 단계.
⑦ 수(受): 6,7세 이후 사물에 대해 고락(苦樂)을 식별하고 받아들이는 단계.
⑧ 애(愛): 14,15세 때부터 애욕이 왕성해지는 시기.
⑨ 취(取): 성인이 되어 욕망이 더욱 강해져서 하고자 하는 바와 얻고자 하는 것을 취하는 시기.
⑩ 유(有): 애(愛) 취(取)의 번뇌를 의지해서 많은 업을 쌓아서 다음 세상에 받을 종자(業)가 있는 것.
⑪ 생(生): 현재에 쌓은 업(業)으로 미래에 태어남. ⑫노사(老死): 늙어서 죽는 것.
319. 연꽃
연꽃 문양은 사찰 장식 문양(文樣) 가운데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연꽃이 불교의
내밀(內密)한 종교적ㆍ신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과 동시에 시각적으로도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연꽃은 인도(印度)의 고대 신화(古代,神話)에서부터 등장(登場)한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고대 인도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신비적 상징주의(神秘的,象徵主義) 가운데에
혼돈(混沌)의 물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精靈) 나라야나(narayana)의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났다고 하는 내용의 신화가 있다.
이로부터 ‘세계연화사상(世界蓮花思想)’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연꽃은 창조ㆍ생성(生成)의
의미를 지닌 꽃으로 인식되었다.
‘세계연화사상’은 불교에서는 ‘연화화생(蓮花化生)’의 의미로 연결되었다.
사찰 벽화(壁畵)나 불단 장식(佛壇,裝飾) 중에 동자(童子)가 연꽃 위에 앉아 있거나 연 밭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묘사(描寫)하고 있는 것은 화생(化生)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이와 같은 예(例)는 양산 통도사 계단의 석등에 새겨진 연꽃과 동자의 문양(文樣)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파주 보광사 대웅전 뒤쪽 판벽(板璧)에 수십 송이의 만개(滿開)한 연꽃마다 보살과 동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연꽃이 연화화생의 상징형으로 표현된 좋은 사례가 된다.
<부처님의 수기설법(隨機說法) 中에서> 불교 경전에는 연꽃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오고 특히 최고
경전이라고 불려지는 묘법연화경, 화엄경<『妙法蓮華經』『華嚴經』> 등 에서도 가르침을 연꽃에
비유(比喩)하여 가르침을 폈다.
또 부처님이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서 사방(四方)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있을 때 땅에서 연꽃이 솟
아올라 태자를 떠받들었다고 경전은 적고 있다.
⌾ 연화심(蓮華心):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하여 근본 마음은
물들지 않는 청정한 마음이므로 우리의 마음을 연꽃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 연화좌(蓮華座): 불보살(佛菩薩)이 앉으시는 자리를 말하는데 이는 사바세계의 진토(塵土)와 같은
곳에 중생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 연화의(蓮華衣): 스님들의 법복인 가사(袈裟)를 뜻하는 것으로 가사의 청정함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서 연꽃에서 출생한 세계, 또는 연꽃 중에
함축(含藏)된 세계란 뜻이다. 연화장세계는 향수로 된 바다 가운데 커다란 연꽃이 피어 있듯 본래
불보살이 천 잎의 연화대에 앉았는데 천 잎이 각각 한 세계가 되고 그곳에 화신(化現)한 일천(一千)
석가모니불이 계시며 다시 백억 나라에 모두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 한다.
여덟 개의 꽃잎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꽃 문양(文樣)은 불교의 교의와 신앙체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불, 보살을 그 지위에 따라 배열하여 그린 그림인 밀교(密敎)의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多羅)를 살펴보면 연꽃 중앙에 대일여래를, 그 주변 여덟 개의 꽃잎에 각각 네 부처와 네 보살을 배치해 놓고 있다.
이것을 중대팔엽원(中臺八葉院)이라 부르는데, 팔엽 연꽃 문양은 바로 이 “태장만다라(胎藏界曼多羅)”를 상징(象徵)하고 있는 것이다.
팔엽(八葉:여덟 개의 꽃잎) 연꽃 문양의 중심 부분은 근본 진리를 드러내는 법신에 해당하고,
주변의 여덟 개 꽃잎은 부처의 대비(大悲)의 방편으로 나타난 네 부처와 네 보살을 의미한다.
팔엽(八葉) 연꽃 문양은 여덟 개의 꽃잎이 각기 분리되어 있지만 연꽃의 중심에 붙어 있는 것처럼
네 부처와 네 보살은 결국 하나의 법으로 귀결(歸結)된다는 불법(佛法)의 진리를 상징(象徵)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印度)에서는 연꽃을 진귀한 꽃으로 여겼으며 청ㆍ홍ㆍ황ㆍ백연화(靑, 紅, 黃, 白蓮花) 등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에서 백연화(白蓮花)는 번뇌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무구(淸淨無垢)의 불법성(佛法性)에 비유 되었다.
연꽃에는 각 부분마다 불교의 원리를 말하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 활짝 핀 연꽃잎은 우주 그 자체를 상징
⌾ 줄기는 우주(宇宙)의 축(軸)을 의미
⌾ 연밥에는 9개의 구멍이 있는 이는 구품(九品)을 말하며
⌾ 3개의 연뿌리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의미
⌾ 연꽃 씨는 천년이 지나도 심으면 꽃을 피운다하여 불생불멸(不生不 滅)을 상징한다.
연꽃은 꽃망울의 맺힘과 동시에 蓮實(연씨)도 함께 맺혀 나오고 꽃이 핌과 동시에 연실(蓮實,연씨)도
함께 실과(實果)로 성장되어 나오다 꽃이 완전히 만개(滿開)했을 때 연씨도 완전히 익어 가는 것은
인과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因果同時)으로 풀이되고 있다.
즉 연꽃은 처음 꽃잎이 피어나면서는 그 속의 열매를 보호(保護)하고, 꽃잎이 떨어지면서 열매를
내 보이며, 꽃잎이 떨어지면 드디어 잘 익은 열매만 남게 된다.
이것은 연꽃의 속성으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비유한 것으로 처음에는 방편의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차츰차츰 제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려 드디어는 방편은 떨어지고 진실한 모습,
즉 실상만이 남아 천지 우주 이대로 극락이요 불국토임을 연꽃으로 비유한 것이다.
연꽃은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보살이 앉아 있는 자리를 연꽃으로 만들고 연화좌(蓮華座) 또는 연대(連臺)라 부르는 것은
사바세계(裟婆世界)에 있어도 고결(高潔)하고 청정함을 잃지 않는 불․ 보살을 연꽃의 이런 속성에
비유한 결과이다.
관음보살은 손에 활짝 핀 연꽃이나 연꽃 봉오리를 들고 있다.
오른 손은 ‘선물을 하사하는 듯한 동작’으로 아래로 내리고 있는 반면에,
왼 손은 연꽃이나 연꽃 봉오리를 들고 있다.
관음보살이 연꽃 위에 앉아 연꽃을 들고 있는 것은 보살의 청정무구(淸淨無染), 또는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들어내고자 한 것이며, 그것은 곧 관음과 관음 신앙의 성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연꽃은 한없는 자비(慈悲)와 사랑하는 번민(憐愍), 그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영성(靈性)을 상징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관음보살이 쥐고 있는 연꽃은 관음보살의 현존(現存)을
의미하는 징표(徵表)인 셈이다.
연꽃봉오리에 대해 말하자면, 밀교(密敎)의 설에 우리의 심장을 육단심(肉團心)이라하며
이 형상(形象)이 연꽃이 봉오리 진 것 같다고 하였다.
또한 연꽃은 청정(淸淨)ㆍ미묘(微妙)의 상징형(象徵形)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는 꽃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연꽃이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뻘 흙에 물들지 않으면서 맑고 미묘(微妙)한
향기(香氣)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스님들이 입는 가사(袈裟)를 다른 말로 연화복(蓮華服) 또는 연화의(蓮華衣)라고 하는 것도
세속(世俗)의 풍진(風塵)에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320. 연비 (燃臂)
불자들이 오계(五戒)를 수지(受持) 하거나 스님들이 득도식(得道式)을 할 때 팔뚝의 일부분이나
손가락을 불로 태우는 연비의식을 거행한다.
연비의식은 초심지에 불을 붙여 살갗을 태우는데 향을 이용하기도 한다.
달마가 면벽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신광이 찾아와 도(道)를 묻자 달마는 믿음을 표시하라고 했다.
이에 신광이 칼을 뽑아 들고 왼쪽 팔을 끊자 달마는 비로소 혜가라는 법명을 주고 법을 설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육신이다.
그러나 불법의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이 믿음은 도를 위해 자기 육신마저도 바칠 수 있는 용맹심을 발휘한다. 이런 까닭에 불법에 대한
믿음과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의 상징적 의미로 연비의식을 한다.
321. 열반도(부처님, 涅槃圖)
열반(涅槃)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에서 온 말로, 원래 “불어서 끈다”는 뜻으로
번뇌의 불을 끈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열반은 탐욕(貪)의 소멸이며,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痴)이
소멸됨을 뜻한다. 적정(寂靜), 적멸(寂滅)이라고도 한다. 시작이 없고, 변화가 없고, 소멸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고, 전생(轉生)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이룬 후 45년간의 중생제도를 마치고 붓다는 일행과 함께
숲 근처의 망고 밭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순타라는 대장장이로부터 공양을 받게 된다.
그때 먹은 음식이 상하여 세존의 병세를 더욱 악화시켰는데, 병세가 악화되는 데도 불구하고 붓다는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쿠시나가라로 갔다. 마지막 목적지까지 길을 가기가 대단히 힘들었으나
간신히 강을 건너 말라족이 다스리는 지역의 도성인 쿠시나가라에 도착했다.
일행은 우파바르타나를 향해 남동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사라숲에 이르렀다. 숲에 도착하자마자
붓다는 아난에게 사라쌍수 사이에 자리를 깔게 하고서 머리를 북으로 두고 서쪽으로 향해 사자처럼
누워서 정념((正念)ㆍ정지(正智)에 머물렀다.
그리고 끝내 그런 자세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80세에 멸하셨는데, 비통에 잠겨 있는 사부대중과
천룡팔부중의 모습, 짐승과 미물들까지 슬퍼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각 장면은 세존의 행적에 대해 묘사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존의 마지막 안거 때 왕사성에 흉년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편찮으신 세존은 떠날 때를 아시고 차바라탑에서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너희들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기를 등불 삼고, 가르침(法)을 등불 삼을 일이지 남을 등불 삼지
마라.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고 말씀하신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이다.
세존께서 ‘순타’에게 설법하시고 공양을 대접받게 되는데, 아주 진귀한 전단나무 버섯을 삶아 세존께
올렸지만 음식이 상했으므로 편찮으신 몸에 병까지 얻게 된다. 순타가 슬퍼하자 세존께서는
“부처가 처음 도를 이루었을 때 공양한 사람과 부처가 멸도 할 때 공양한 이의 공덕은 똑같다.”고
위로하신다.
세존께서는 아난에게 원한다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음을 세 번이나 묻고 있으나 마왕 파순의 방해로
아난은 결국 듣지 못한다. 세존께서 이에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열반을 결심하게 되는데,
비통해 하던 아난이 부처에게 장례법에 대해서 묻자 전륜성왕의 장례법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먼저 향을 탄 목욕물에 몸을 씻기고 새 무명천으로 감되 차례로 5백 겹을 감아서 황금관에 넣은 뒤
거기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황금관을 쇠로 된 큰 외관에 넣고 전단나무 외관을 다시 그 밖에 겹쳐 두르고 갖가지 이름 있는 향을 쌓아 그 위를 두텁게 입힌 뒤 화장한다. 화장 후 사리를 수습하여 사거리에 탑을
세우고 탑 표면에 비단을 걸어서 바른 교화를 사모하게 하여 많은 이익을 얻도록 하라고 당부하신다.
그리고 구시성에 들어가시어 말라족의 출생지로 향한다.
“쌍수(雙樹)사이에 누울 자리를 마련하되 머리는 북쪽, 얼굴은 서쪽을 향하도록 해라.
왜냐하면 내 가르침이 멀리 퍼져 북쪽에서 오래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아난이 자리를 마련하자 세존께서 승가리(僧伽梨:설법할 때 또는 마을에 들어가 걸식할 때 입는 법복)를 네 번 접어 그 위에 누우셨는데, 사자처럼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발을 포개고 있다.
부처님은 최후 설법으로 “비구들이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한량없는 선(善)을 이루라. 함부로 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마라. 이 세상 만물로써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사라쌍수 아래에서 부처가 열반에 드시자 도리천의 천자들이
우발라화(懮鉢羅華:푸른 연꽃, 부처의 눈에 비유됨), 발두마화(鉢頭摩華:붉은 연꽃),
구물두화(鳩勿頭華:붉은 연꽃의 일종), 분타리화(分陀利華:흰 연꽃, 부처의 가르침에 비유됨)를 뿌리고
천상의 전단향 가루를 세존과 대중 위에 흩뿌렸다. 범천왕과 제석천, 도솔천에 계시던 어머니 마야부인이 구름을 타고 하강하고 있으며 비사문천왕, 범마나 비구, 도리천의 왕 석제환인 등과 함께 비구들은
너무도 비통함과 슬픔으로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말라족 사람들은 열반을 알린 후 동쪽 성문으로 들어가 거리를 다니면서 백성들이 유해에 향과 꽃과
음악으로 공양하게 한 후 서쪽 성문으로 나가 화장하고자 하였으나 천자들이 평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방해를 한다.
천자들이 유해를 7일 동안 모셔놓고 꽃과 음악으로 예경하고 공양한 후 세존의 유해는 평상 위에 놓이고, 말라족 청년들은 깃발을 들고 양산을 씌운 후 꽃과 음악을 연주하며 다비장으로 향하고 있다.
동쪽 성문으로 들어가서 북쪽 성문으로 나가 희련선 강을 건너 천관사에서 부처의 유해를 평상에
내려놓는다.
불도를 독실히 믿던 로리라는 말라족 대신의 딸이 수레바퀴만한 황금꽃을 유해에 공양하고 있다.
어떤 노파는
“말라족 사람들이 큰 이익을 얻었다. 세존께서 최후로 이곳에서 멸도하시니 온 국민이 공양하는구나.”
하며 크게 기뻐하고 있다.
천관사에 이르러 황금관의 향나무 더미에 불을 붙이려고 하나 불이 붙지 않자 아나율 존자는
“지금 마하가섭이 제자들을 데리고 오고 있는데, 화장하기 전에 세존의 모습을 뵙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 뜻을 알게 된 천자들이 불이 붙지 않도록 방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한편 니건자를 만나 부처의 열반을 전해들은 마하가섭이 급히 돌아가는데 석가족 출신 비구인 발난타는 “잔소리하는 세존이 없으니 이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기뻐하고 있다.
가섭은 더욱 슬퍼하며 도착 즉시 세존의 유해를 뵙고 싶어 아난에게 세 번이나 청했지만 거절당한다.
하지만 마하가섭이 향 더미로 다가가자 외관에서 두 발을 나란히 내보이신다.
그때 사부대중과 천상의 모든 천자가 예배드리자 발은 홀연히 사라지고 세존의 금관이 스스로 들려
옮겨진다. 이에 마하가섭이 게송을 읊자 향나무 더미는 저절로 타올랐다.
부처의 사리는 구시국 백성들이 한때 분골(分骨)을 거절하여 전쟁의 위기로까지 치달았으나
향성(香城:드로오나,바라문) 사제의 지혜로 위기를 막아낸다.
유골은 여덟 부족에게 분배되었으며 구시국ㆍ파바국ㆍ차라파국ㆍ나마가국ㆍ빌제국ㆍ가유라위국ㆍ
비사리국ㆍ마갈타국이 사리를 여덟 등분하여 각자의 나라에 사리탑을 세우게 된다.
향성 사제는 사리를 한 병에 한 섬 가량씩 담아 고르게 분배하였다. 향성사제는 사리를 분배할 때의
병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탑(甁塔)을 세우고, 필발 마을 사람들은 잿더미를 가지고 탑(灰塔)을
세우게 된다. <김현준저,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111쪽에는 사리를 분배받은 것은
①마가다국의 아자타샤트루왕 ②바이샬리의 릿차비족 ③카피라성의 석가족
④알라캅파이 부리족 ⑤라마그라마의 콜랴족 ⑥베티두비파의 바라문
⑦파바의 말라족 ⑧쿠쉬나가라의 말라족 등이었다. 그들은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탑을 세웠는데
이를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고 한다. 그리고 배분을 중재했던 드로오나는 사리가 들어 있었던 병을
받아 병탑(甁塔)을 세웠고, 귀늦게 당도한 핍팔리바나의 모랴족은 남은 재를 가지고 가서 회탑(灰塔)을
세웠다. 모두 합하여 ‘근본십탑(根本十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세존 생전의 머리털을 가지고 있던 이에 의해 머리털 탑(髮塔)이 세워진다.
세존께서 마하가섭 존자에게 법통을 전한 징표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를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첫째, 염화미소(拈花微笑)로서 세존께서 영취산에서 가르침을 설할 때, 범천왕이 꽃비를 공양하자
세존께서 꽃 한 송이를 들고 빙그레 웃으실 때 아무도 그 뜻을 몰랐으나 가섭 존자만이 홀로 빙긋이
웃었다(破顔微笑). 이때 세존께서 부처의 지혜(正法眼藏)와 깨달은 마음(涅槃微笑)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했다. “꽃을 드니 미소 지었다.”는 염화미소는 세존이 스스로 체득한 깨달음은 말이나 문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의미로서, 이 말은 송대(宋代)이후 널리 퍼져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 선종의 기틀이 되었다.
두 번째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坐)는 세존께서 설법을 하고 계실 떄 가섭 존자가 뒤늦게 도착하자 세존께서 그에게 앉은 자리의 반쪽을 비켜주어 앉게 하고 가사로 등을 덮어 주신 일이다.
세 번째는 세존께서 두 발을 내보이신 장면인 곽시쌍부(槨示雙趺)로,
이렇게 하여 세존의 법통이 마하가섭 존자에게 전해진다.
<탱화 288쪽 김의식저 운주사>
322. 열반, 열반송 (涅槃,涅槃頌) ☀불교에서 나온 말
범어의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이다. 즉 불이 꺼진 상태를 나타낸다. 우리는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욕망의 불길 때문에 잠 못 이룬다. 열반이란 이 욕망의 불길이 잡힌 상태다.
그래서 고통이 없는 지극히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적정(寂靜)ㆍ원적(圓寂)ㆍ해탈(解脫)ㆍ도피안(到彼岸)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흔히 큰스님이 돌아가시면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즉 죽음을 열반이라고 표현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나 열반이 죽음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열반은 정진으로써 얻어지는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한 아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선(禪)의 세계에서 죽음은 곧 기쁨이다. 그래서 선사들의 다비식에 가보면 조사(弔辭)에서
모두들 “이 사바세계에 다시 오셔서 중생들을 미혹으로부터 깨쳐 달라” 고 주문한다.
많은 선사들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전 생애를 걸쳐 실현해온 깨침의 실체를 남긴다.
그것을 열반송(涅槃頌) 또는 임종게(臨終偈)라고도 한다.
“천 가지 계책과 만 가지 생각
불이 벌건 화로에 한 송이 흰 눈이네
대지와 허공이 찢어지네.”
청허선사의 임종게다.
서산대사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불러모아놓고 단정하게 임종게(臨終偈)를 읊었다.
그리고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
법신을 이룬 아름다운 선사의 열반을 한번 상상해 보라. 선사들의 열반송(涅槃頌)은 그 뜻대로 기쁨의
노래다. 생과 사의 경계를 초월한 선사들의 삶은 이미 현실세계를 떠나있기 때문이다.
법신을 이룬 선사들이 죽음을 앞두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은 바로 우주적(宇宙的)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쁨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선의 가르침이 갖는 뛰어난 삶의
가르침이다. 일체의 속박을 벗어난 우주적 법신을 이룬 사람들이 노래한 열반송(涅槃頌)은
문자의 세계를 떠나 아름답다. 그것은 열반송이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닌 실체하는 현존의 삶을
그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323. 염불 (念佛) ☀불교에서 나온 말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 한다”는 말이다. 큰 소리로 독송함이 좋다.
이 소리는 내심의 소리며 진리의 소리며 지혜를 증장시키는 소리이다.
염(念)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마음이다.
현재의 생각을 연속하는 항상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함이 염불이다. 여럿이 모였을 때는 큰 소리로 염불 독경함이 좋다.
염불을 큰 소리 내어서 일심으로 하는 자는 열 가지 즐거움(樂)이 생기는데
이것을 염불자십락(念佛者十樂)이라고 한다.
1) 성중래영(聖衆來迎): 임종시 아미타불과 관음, 대세지 두 보살 등 성 중이 맞으러 와서
정토로 인도해 준다.
2) 연화초개(蓮花初開): 연화에 의해 극락에 태어난다.
3) 신상신통(身相新通): 몸이 깨끗하고, 항상 광명이 있으며, 멋지고, 5통의 자재를 얻는다.
4) 오묘경계(五妙境界): 5종(색,성,향,미,촉)의 대상이 절묘한 것을 말한다.
5) 쾌락무퇴(快樂無退): 극락에 왕생하여 얻어지는 맑음으로 잃어지지 않 는다.
6) 인접결연(引接結緣): 인연이 있는 사람을 인도하여, 극락으로 간다.
7) 성중구회(聖衆俱會): 성중이 한곳에 회합하여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법락을 얻는다.
8) 견불문법(見佛文法): 극락에 왕생하면 항상 아미타불을 보고 깊은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9) 수심불공(隨心佛供): 마음대로 부처님께 공양한다.
10) 증진불도(增進佛道): 극락에 왕생하면 자연히 불도를 증진한다.
<김길상 편, ‘불교대사전’ 홍법원 1998, 1761쪽 참조>
☀ 염불법 (念佛法) <김현준저,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 240쪽>
예로부터 전래되는 염불법은 수없이 많다. 입으로만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는가 하면, 고요히 앉아 부처님의 형상을 관념(觀念)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도 있고, 일체만유의 진실한 자성(自性)인 법신(法身)을 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도 있다.
그리고 좌선할 때처럼 선정에 들어서 부처님을 관하는 정업염불(定業念佛)과 가나 있으나 앉으나
누우나 한결같이 염불하는 산업염불(散業念佛)도 있으며, 더러운 세계를 싫어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며 염불하는 유상업염불(有相業念佛)이 있는가 하면, 비록 염불하여 정토를 구하나 자기 몸이
곧 정토라고 보는 무상업염불(無相業念佛)도 있다.
또 그 방법상에 있어서는 속도와 음율을 달리하는 오회염불법(五會念佛法)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낮은 음성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다가
제2회에는 약간 음을 높여 역시 느리게 부르며,
제3회에는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부른다.
제4회에는 점점 급하게 부르다가,
제5회에는 앞뒤 사이의 간격없이 ‘아미타불 아미타불…’ 네 자만을 부르는 것이다.
이때 한숨에 108번 이상을 염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이미 염불로 인한 염력(念力)이 생긴 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염불 삼매는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때에 이르면 마(魔)를 경계해야 한다.
수행이 깊으면 마도 따라서 치성해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 마 또한 우리의 마음을 모으면,
마는 오히려 우리의 수행을 도와줄 뿐이다. 수행자가 두려워 할 것은 결코 장애나 마가 아니다.
일념의 상태, 일심의 염불이 되지 못하는 것 외에 수행자가 따로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다.
☀ 고성염불십종공덕 (高聲念佛十種功德)
일자공덕능배수면 一者功德能排睡眠 이자공덕천마경포 二者功德天魔驚怖
삼자공덕성변시방 三者功德聲遍十方 사자공덕삼도식고 四者功德三途息苦
오자공덕외성불입 五者功德外聲不入 육자공덕념심불산 六者功德念心不散
칠자공덕용맹정진 七者功德勇猛精進 팔자공덕제불환희 八者功德諸佛歡喜
구자공덕삼매현전 九者功德三昧現前 십자공덕왕생정토 十者功德往生淨土
첫째는 졸음을 없애주는 공덕이요.
둘째는 마구니가 놀라서 도망하는 공덕이요.
셋째는 염불소리가 시방에 두루한 공덕이요.
넷째는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쉬는 공덕이요.
다섯째는 다른 음성의 장애를 받지 않는 공덕이요.
여섯째는 염불하는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공덕이요.
일곱째는 용맹스런 정진을 성취하는 공덕이요.
여덟째는 부처님이 기뻐하시는 공덕이요.
아홉째는 삼매가 뚜렷하게 들어나는 공덕이요.
열째는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공덕이 있네.
324. 염색 (染色) ☀불교에서 나온 말
출가해서 삭발하고 염의를 입어 수행자가 되는 것을 ‘삭발염의(削髮染衣)’라 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법의에 쥐색 계통의 검정색을 물들여 입었다.
진달래 뿌리나 물푸레나무를 숯으로 구워 절구에 빻아 숯물을 들이는데 이를 치의(緇衣),
혹은 흑의(黑衣)라 한다. 치의를 입는다고 하여 치문(緇門)이라 한다.
흐릿한 가사의 빛깔을 ‘염색’이라 했던 것이 변하여 ‘물들이다’는 의미가 되었다.
325. 염주 (念珠) ☀불교에서 나온 말
불자들이 기도를 올리거나 참회정진을 할 때 염주를 사용한다.
염주(念珠)는 ‘생각하는 구슬’이란 뜻으로 수를 헤아리는데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수주(數珠)라고도 한다. 염주는 중국 수나라 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북방불교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다.
한 줄에 여러 개의 알이 꿰어져 있는 염주는 서로의 인연이 얽혀있는 인드라망적인 불교관을 표현하며
번뇌를 끊는 도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비공지경>에 보면 염주의 구슬을 세는 것은 부단광불(不斷光佛)의 덕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외 염주(念珠)의 공덕을 찬양한 경전으로는 <교량수주공덕경> <목화자경> <금강정유가염주경> 등이 있다.
☀ 염주(念珠)는 보통 108개의 염주 알을 기본으로 하는 최승주와 1080개의 상품주, 54개의 중품주,
그리고 27개의 염주 알로 만든 하품주로 구분된다.
☀염주의 종류
ㆍ자거주(紫渠珠): 향나무 등 붉은 나무 ㆍ목주(木珠): 모감주 나무
ㆍ보리자주(菩堤者珠): 보리수 열매 ㆍ연자주(蓮子珠): 연꽃씨
ㆍ금강자주(金剛子珠): 옥, 쇠붙이 ㆍ동주(銅珠): 구리
ㆍ수정주(水晶珠): 투명한 유리수정 ㆍ진주주(珍珠珠): 불투명한 유리진주
☀ 염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부처님의 제자 중에 벙어리가 한 사람 있어서 늘 남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부처님은
그의 전생을 관하여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전생에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법을 물으러 오는 사람에게 늘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하고 지나친 겸손을 떨며 귀찮아하고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죄가 쌓여
그만 현세(現世)에는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에게 염주(念珠)를 만들어 주시며, 그가 염주를 돌리며 입을 오물오물하면 다른
사람이 그가 염불(念佛)을 하거나 염주(念珠)를 세는 줄 알지 벙어리임을 모를 것이고,
따라서 조롱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
326. 영산재 (靈山齋) ☀불교에서 나온 말
영축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의 모습을 이 세상에 재현한 의식이다.
온 세계 모든 성현과 스님을 청하여 봉양(奉養)하며 법문을 듣고 시방의 외로운 혼령을 천도하고 무
주고혼 영가들에게 장엄한 법식을 베풀어 극락왕생 하도록 하는 의식이다.
흔히 불교에서 영혼천도(靈魂薦道)를 위해 개최하는 49재 등의 의식을 영산재라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영혼을 천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법회로서 부처님의
설법회상인 영산회상을 재현하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이 의식은 우선 영산회상도를 야외에 내거는 괘불의식(掛佛儀式)에서 시작된다.
이어 찬불의식의 일환으로 범패와 의식무용을 하고 여러 가지 예의를 갖춰 부처님께 예배를 올린다.
찬불의식(讚佛儀式)은 불, 보살이 강림하는 것을 맞이하는 듯 꽃을 흩날리며 찬불가를 연주하며
바라춤 등을 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발원을 모은 축원문을 낭독하고 신도들의 분향예배(焚香禮拜)를
끝으로 회향한다.
회향의식(回向儀式)은 대중들이 십바라밀정진의 의미를 담아 도량(道場)을 돌며 독경한다.
영산재(靈山齋) 의식은 단순한 제례의식의 범주를 넘어 사찰대중이 신앙과 문화를 공유하는 장으로
승화되고 있다.
327. 예수재 (豫修齋)
예수재란 살아 있을 때 공덕을 쌓아서 사후(死後)에 지옥에 가지 않도록 법의 공덕을 저축하는 의식을
말한다. 원래 중국 도교(道敎)에서 행하던 시왕신앙(十王信仰)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 의식은 다신교적(多神敎的)인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으며 지장신앙(地藏信仰)과도 연관되어 있다.
형식을 보면 삼신(三神)을 모신 불단을 법당 안에 설치하고 동쪽에는 지옥세계의 중생을 구원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서쪽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護法善神)을, 법당 밖에는 염라대왕
(閻羅大王)을 모신 명부시왕단(冥府十王壇)을 설치한다.
이는 생전(生前)에 명부전에 복을 많이 쌓아서 사후 염라대왕을 만나면 극락에 갈 수 있는 심판을
받도록 하는데 있다.
이 의식에서는 각자 생년월일에 따라 갚아야 할 빚이 있는데, 이 빚을 부지런히 경전을 읽고 보시를 통해 갚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의식은 개인적인 발원에 의하지 않고 많은 대중이 모여 행한다.
328. 오계 (五戒)
불교의 이상(理想)인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윤리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불교적 규범이 계(戒)이다.
부처님께서 계를 제정하신 이유를 사분율(四分律)에서
“첫째는 교단이 질서를 잡기 위해서요, 둘째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요, 셋째는 대중을 안락하게
하기 이해서요, 넷째는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기 위해서요, 다섯째는 이미 믿은 이를 더 굳세게 하기
위해서요, 여섯째는 다루기 어려운 이를 잘 다루기 위해서요, 일곱째는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요, 여덟째는 현재의 실수를 없애기 위해서요, 아홉째는 미래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요, 열번째는 바른 법을 오래 가게 하기 위해서다.” 라고 하셨다.
계(戒)에는
⌾근본오계(根本五戒), ⌾팔관재계(八觀齋戒), ⌾십중대계(十重大戒), ⌾48경계(四十八輕戒),
⌾사미(니)십계<(沙彌(尼)十戒>, ⌾비구 250계(比丘 二百五十戒), ⌾비구니 348계(比丘尼三百四十八戒)
등 여러 가지가 있다.
☀ 근본오계(根本五戒)는
1)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불살생계:不殺生戒):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다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바란다.
2) 도둑질을 하지 말라(불투도계:不偸盜戒): 경제생활의 덕목으로 다른 사 람의 물건은 그가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것이므로 그것을 훔친다는 것 은 남의 노동의 대가를 훔친다는 뜻이다.
3)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불사음계:不邪淫戒): 이것은 이성(異性)문제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규범으로 요컨대 부부(夫婦) 이외에는 관계를 갖지 말라는 것이다.
4) 거짓말을 하지 말라(불망어계:不妄語戒): 이것은 인간의 진실에 관한 불교의 교훈이다.
5) 술을 마시지 말라(불음주계:不飮酒戒): 술을 마시면 맑은 정신을 잃고 정확한 판단력이 흐려져
삿된 생각을 하게 되므로 생긴 것이다.
329. 오도송 (悟道頌)
문자(文字)밖에 사는 선문(禪門)에 문자로 알 수 없는 경지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선사들의 일생의
정신사가 올곧게 담겨있는 오도송(悟道頌)이 그것이다.
대나무 소리를 듣고 깨친 선사,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깨친 선사, 30년 만에 집에 돌아와 마당에
핀 꽃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선사의 모습은 드라마틱할 정도로 재미있다.
선(禪) 수행에 용맹 정진한 선사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한 게송을 오도송이라고 한다.
짧은 싯구 형태로 표현된 오도송은 깨달음의 진리를 넘어 자연과 인간의 회환을 담고 있다.
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은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담겨있다. 또한 활발한 창조성과 천지를 개벽할
자유로운 정신사가 그대로 체현되고 있다.
길 없는 길에서 끝없는 길에서 찾아낸 환희심(歡喜心)의 절정은 비수(匕首) 같은 직관(直觀)이 숨겨져
있다. 먼 우주의 티끌 속에서 찾아낸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기 때문이다.
선사(禪師)들의 오도송은 현대에 와서 이른바 선시(禪詩)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현대와 와서 시인들은 선사들의 선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시인들의 새로운 활로로도
모색되고 있다.
대지선사는 하늘을 가득 덮은 흰 눈을 보고 이렇게 노래한다.
“저 허공이 부서져서 흰 티끌이 되고
산과 들은 높낮이가 없어지고 사람도 보이지 않네
마른 나무 등걸에 한 송이 꽃 피어나
하늘과 땅 이전의 봄을 부르고 있네.”
☀ 오도송의 소재, 꽃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
꽃은 산, 물과 함께 가장 오래되고 간결하고 정겨운 순우리말이다. 산과 물이 만나는 자리에 꽃이 핀다.
꽃은 불교의 핵심인 연기(緣起)와 공(空)을 표현하는데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일까, 꽃은 선지식들이
깨닫고 난 뒤 읊는 오도송(悟道頌)의 소재로도 자주 활용됐다.
“한 그루 매화나무를 심었더니 옛 바람에 꽃이 피었구나. 그대 열매 를 보았으리니 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라는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스님의 전법게(傳法偈)부터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 나는 꽃처럼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산에는 꽃이 피네>”라는 산승 법정스님의 잠언까지, 꽃은 깨달음 혹은 늘 깨어있는 삶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 나타난다.
꽃의 비유는 중국에 불법이 뿌리내리게 된 역사를 꽃에 빗댄 혜능스님의 설법
<육조단경>에서 절정을 이룬다.
<육조단경>제 29장 ‘전게(傳偈)’편에서 혜능스님은 선대의 다섯 조사(祖師)가 가사(袈裟)를 전하고
법을 부촉한 게송을 외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본시 당나라에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 하노니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 라” (초조 달마스님의 게송)
“본래 땅이 있는 까닭에 땅으로부터 씨앗 꽃 피나니 만약 본래로 땅이 없다면 꽃이 어느 곳으로부터
피어나리오.”(2조 혜가스님)
“꽃씨가 비록 땅을 인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나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3조 승찬스님)
“꽃씨에 나는 성품 있어 땅을 인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나지 않는 도다.”(4조 도신)
“유정(有情)이 와서 씨 뿌리니 무정(無情)이 꽃을 피우고 정도 없고(無 情) 씨앗도 없나니(無種)
마음 땅에 또한 남이 없도다.” (5조 홍인스님)
달마스님이 설법한 무심(無心)의 이치를 꽃을 매개로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다.
6조 혜능스님은 선대의 노래 뒤에 자신의 깨달음을 착어했다.
“마음의 땅이 뜻의 씨앗을 머금으니 법의 비가 꽃을 피운다. 스스로 꽃 뜻의 씨앗을 깨달으니,
보리의 열매가 스스로 이루는 도다.”
삼라만상 스스로가 부처라는 선언이며 남의 법에 의지하지 말고 불퇴전의 기세로 정진하라는
대중에 대한 격려가 녹아 있다.
대부분의 오도송은 미당 서정주의 명시 ‘국화 옆에서’와 비슷한 골격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시구처럼, 진리를 바깥에서 구하다 결국 실패하고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진리가
어디에나 편재(偏在)해 있음을 깨달았다는 식이다.
‘국화 옆에서’는
“종일토록 봄을 찾아 다녔건만 봄을 보지 못하네
산으로 들로 짚신이 다 닳도록 헤맸네
돌아와 매화 향기를 웃으며 맡으니
봄은 가지 끝에 벌써 무르익었네.
(진일심춘불견춘 망혜답파령두운 귀래우파매화취 춘래지상이시분
:盡日尋春不見春 芒鞋踏破嶺頭雲 歸來偶把梅花臭 春來枝上已十分),”라는
오도송의 현대적 변주다. 이 오도송의 작가는 송나라 당시 어느 비구니 스님으로 추정된다.
꽃은 봄의 환유(換喩)로도 쓰인다. 계절의 변화는 무상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대자연의 영원한 순환이다. 꽃은 순간이자 영원인 현재에 대한 형상화다.
“봄에는 아름다운 백화가 만발하고 가을에는 밝은 달이 온 천지 비추도다.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 불어오고 겨울에는 아름다운 흰 눈이 날리도다.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
(춘래백화추유월 하유량풍동유설 양무한사궤심두 편시인간호시절
:春來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