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의 실천(번뇌를 벗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草隱]

아침 5시 30분, 늦게 든 잠이 깨지도 않았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웬 전화일까? 가만히 생각하니 어제 저녁 농장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받았던 전화가 생각났다.

"갑자기 보상문제 때문에 하우스에 있는걸 꺼내아해서요. 내일 아침 3시간쯤 꼭 좀 부탁드릴께요."

아니! 여차하면 더위땜에 상해버릴까 홀몸 보전하기도 부담스런 이 염천지절(炎天之節)에 땀나게 웬 하우스 일을...

이럴경우 나는 할말이 없어진다. 분명코 지나간 어느 순간 몇몇 수요자들에게  "나 백수는 시간이 많아 지체할 수 없는 사람이니 필요할때 불러 이용하시오. 댓가는 점심한끼에 막걸리 한통이면 족하고, 그 이상은 절대 사양입니다."라고 공언한 사실이 있기에 그렇다.

인건비를 받지않고 일을 돕다는게 서로에게 조금은 어색한 일이지만, 같이 일하며 속내를 다 털어놓고보면 어려울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교인 집에서도 막걸리를 요구하는 편이다.

많은 일은 아니지만 그러다보니, 전정가위질, 삽질에 손가락과 손목이 나빠졌다. 서툰 것일까?

나보다 2살 아래인 주인 영감이 트럭을 몰고왔다. 갇혀살다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길가 들판은 어느새 벼들이 허벅지가 통통하게 굵었고, 풍성한 수확을 위한 체형불리기에 돌입하고 있는 듯했다. 

하우스엔 주인외에 또 다른 영감이 와 있었다. 부산을 근거지로 상당한 기술을 가진 사람인데, 한동안 쉬고 있단다.

그런데 일을 나보다 잘한다. 전문 농사꾼이 아닌 사람에게 내가 지는 편이 아아니었는데, 따라하기가 바쁘다. 힘든 것하고 잘하는 것은 틀린다. 무엇이든 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손재주도 출발하나 보다.

일은 전화상의 내용과는 달랐다. 봄에 심었던 토마토 잔재를 걷어내는 일이었다. 다들 해본 솜씨라 진척이 빨랐다.

늙은이 셋이 하우스 한동을 치우고나니 9시가 되었다. 비가 하우스 지붕을 두드리더니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하우스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주인장은 요즘 사흘이 멀다하고 병원출입을 하면서도 평생 함께해온 땅떼기를 차마 놓지못한다. 나보다도 주변머리가 없고, 일욕심은 독으로 많은 편이다. 모은 돈은 자식에게 더러 준 것 같고, 분명한 것은 골병이 그에게 남았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오늘 계획된 일은 끝났다. 덥다 더워. 나머지 한동은 다음기회로 미루어 두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사시공양(巳時供養 : 사찰용어로는 점심을 뜻함)을 마치고, 강한 햇살을 피하여 서둘러 전철 다리밑에 자리를 잡았다. 3차선 대로변이라 일감 다투는 대형덤프트럭들이 바퀴가 타듯 열기를 내뿜으며 질주한다. 조용한 곳에 머물지 않고 왜 하필 이곳에 앉았느냐면, 그런 곳엔 이렇게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앉을만한 의자가 없어 잠시나마 호사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가고싶은 곳은 시원한 다리밑인데, 그곳은 장기 바둑을 두는 터줏대감 영감들이 선점하여 끼어들기가 쑥스럽다.

왠지 다리밑이 생각나는 것은 옛부터 삶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다리밑은 오갈데 없는 거지들의 보금자리였고, 옛날 할머니들께서 그곳으로부터 주워왔다던 우리들의 고향인 셈이다.

올해도 삼복더위는 지구온난화를 등에 업고,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려는 듯 맹위를 떨쳐댄다. 이 나이쯤엔 걸맞잖게 자식들 눈치보며 휴가를 이야기 한다거나, 역병이 창궐하는 시기에 낯선곳 나들이란 애초 생각을 아예 접고, 혼자 있을때 그저 찬물에 밥한그릇 말아 먹는 것이 가정과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다.

기억엔 별로지만, 이때쯤 나의 생일이 자리잡았더라. 6.25동란 중에도 힘겨운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던 시절즈음이다. 나는 올해부터는 양력을 환산하여 그 날을 태생일로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애 엄마가 서둘러 통발을 보냈기에, 모처럼 아들에게는 옆집 김영감네는 뭘 사 보냈더라고 말을 꺼내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물욕과 의욕이 사라진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굳이 서운하다면 한묶음에 만원짜리 양말정도가 요긴하겠다만, 택배비 비중에다 며늘애가 자존심 상해 할것만 같다. 그렇다고 삼시세끼 밥만 먹으면 되니 쌀포대를 사서 보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코로나로 길이 막히니 손자녀석이 할애비 얼굴은 잊지 않았을까?

2~3년 전까지만 하여도 더위에 대항하여 이열치열(以熱治熱)이란 극한처방에다, 육신으로 극복하려 노력하느라 등줄기 땀깨나 흘렸다. 이를테면 배낭에 물 두통 넣고, 마트에서 일용할 양식(빵)을 산후 시외버스에서 내려 땡볕에 하루종일 지치도록 걷는 것이다.

처음에는 땀이 나고 더위를 피하기 위해 그늘에서 쉬어가기를 자주 하였으나, 정작 땀에 옷이 모두 젖다보면 어느새  이열(以熱)에서 치열(治熱)로 전환 됨에 오기가 생겨났었다. 그렇게 나홀로 다니며 사진도 찍고, 기억에 남길 꺼리를 메모하며, 낮선사람들과 대화를 통하여 세상살아 가는 이치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런 밤에는 열대야라는 한여름밤의 잠못이룸의 처방은 여행피로라는 특제약의 효능으로 쉽게 치유되었다.

그러한 호시절에는 사철 가리지 않고 인근 지방의 주요 산하를 섭렵(涉獵)했고, 조선시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지 않았다면 나라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헛소리도 자주 하였것다. 그러나 작금은 비련의 가면무도회를 하듯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거리를 둔채, 그들과는 소 닭보듯, 닭 소보 듯 해야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엇그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 있었다. 거리의 방랑객(?)처럼 허름한 차림에 짧은 셔츠의 앞가슴 단추를 온통 풀어젖힌 60대 남자이다. 여자애들이 보면 어쩌려고? 사실 내놓고 다니는 면적을 따지자면 그네들이 더할테지만...

걸음걸이도 서툰데다 장애가 있는지 어릴때 읽었던 어느 소설내용이 연상되었다.

감성여린 여학생들이 한쪽 어깨가 내려간 선생님더러 6시 5분전이란 별명을 붙였는데, 이 남자는 그렇게 표현하자면, 6시 15분정도나 된다고 해야할까? 걸을때마다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내려갔다. 그는 그저께 내가 앉은 곁을 지났고, 어제는 먼발치, 그리고 오늘도 나의 곁을 또다시 지나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왔다갔다 왕복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33~4도 한더위에 도대체 왜 저럴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족이나 잠을 자는 거쳐는 있을까? 하여간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면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이 남의 인생에 관여하는 나의 배부른 심사가 될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덤프트럭의 굉음을 들었다.

남들이 나를 설마 그사람의 부류에 포함하진 안겠지! 생각도 해보고... 얼마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데 그가 길가에 앉아 땀을 닦고 있었다. 내가 말을 걸었다.

"아니 이 더위에 뭣한다고 땀을 그렇게 흘려요?"

"....."

말없이 씨익 웃는다. 그런데 이빨 빠진 그의 모습이 순진~무궁이었다.

"운동을 하는 겁니까?"

"예"

"운동도 정도껏 해야지. 이 더위에... 집은 어디에요?"

"삼0동"

"아! 그래요. 그럼 쉬다 가세요."

돌아서며 그에게서의 운동이란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동네를 벗어난 곳, 습득된 습관일까? 아니면 소리없는 몸부림일까,

다행이 그는 정신이나 언어 장애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앞가슴의 단추를 풀어헤친 모습이나 전체적인 차림새는... 그렇다고 그의 표정으로 보아 세상을 비관한다거나, 남의 주목을 받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연초엔가 몇년째 매일 들판을 달리던 아가씨가 있었다. 사람들도 이상하게 바라 보았다(Mad women?). 유별난 사연이라도 있나 궁금하여 달리는 그녀를 불러세우고 사연을 물은 적이 있었다. 대답은 그냥 자신과의 싸움이라 답했다.

이쯤해서 생각나는 단어 번뇌! 사는 것은 모두가 번뇌이다. 인간은 왜 그러한 번뇌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창조주는 인간더러 동물의 이름짓기 권한을 부여하시고, 그들까지 다스리기를 원하셨는데, 왕국의 장남으로 태어난 붓다는 왜 속세를 마다하고, 깨달음의 고행길로 접어 드셨을까? 그렇다면 불교 범망경(梵網經)에서는 현생에서 사람이 옷깃을 스치려면 전생에서 500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만남의 소중함은 또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까?

오래전 어느 작가가 쓴 '초의선사'에서 수행의 의미와 의로움을 읽었다.  번뇌를 벗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설마 그것에서 끝나려고?

붓다의 유언 마지막은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 고 하셨다.

그러하니 기왕에 쌓아놓은 인연들이 소중해서라도 좋은 만남은 이어 가는게 좋을 것 같다.

부득이 최초의 불교경전 [숫타니파타]에서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몇단락을 가져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쓰지 말고, 모든 생물을 그 어느 것이나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연정에서 우환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친구를 동정한 나머지 마음이 얽매이면 손해를 본다.

가까이 사귀면 이런 우려가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애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하고,

또한 여러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산산히 흐트러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우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이 내게는 재양이고 종기이고

화이며 병이고 화상이고 공포이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러한 두려움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