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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DNA
나는 성장기에 몇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남들처럼 신장이 크지 못하다는 것이었지만 아버지도, 5.16 혁명주체들이 중앙청 탱크 앞에 버티고 선 레이벤 박정희 장군도 단신이라 조금은 위안이 되었고
또 한 가지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명제로 형제들과는 달리 좀 '안 생겼다'라는 부분으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용모 준수한 부모 형제들과는 달리 생김에 자신이 없었고 아버지는 항상 "우리 영명이는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라고 놀리는 통에 정말로 영도다리 밑에 버려졌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가졌었지만 어머니의 지극정성 베푸시는 사랑으로 이 생각을 고쳤었다. 의문은 남았지만.
‘나는 누굴 닮아 이 모양 일꼬?’
그런데 몇 일전.
칠순을 넘긴 서울의 큰형으로부터 어머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외할아버지 사진을 발견했다는 메일과 함께 1920년대 사진 두 장을 첨부했고 사진 아래에 댓글을 달았다.
'사진에서 본 외조부님은 흡사 너 사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닮았다. 무섭게 신기하다. DNA의 흐름이'
내가 봐도 그랬다.
첨부 파일로 온 80여 년 전의 가족사진은 일제의 단발령으로 삭발하고 두루마기를 입은 아저씨와 여염집 여자들이 흔히 쓰는 수건으로 머리를 가린 아주머니가 다섯 살 즈음의 잔뜩 굳은 표정의 여식을 가운데 두고 촬영된 단란하지만 카메라 공포증에 걸린 무표정한 일가족 그림이었는데 사진속의 아저씨는 누가 콕 찍어서 '영명이 외할아버지' 라고 부연 할 필요도 없이 바로 '나'를 보는 느낌이 꽂혔다.
내가 조금 젊었었고 두루마기를 입으면 바로 이 그림이 연출 될 것처럼.
'아!- 내 피가 외가로부터 이어져 흘러 왔구나.'
기왕지사 사진을 찾은 김에 ‘행여 교회문서나 국가기록 어딘가에 외할아버지의 3. 1 독립만세 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흔적을 찾아보라’는 큰형의 제의에 '당기는 핏줄'과 잊고 지내던 '외가 쪽의 한 많은 사연'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나라 위해 몸을 던진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의욕에 불을 댕겼다.
먼저 원적지 거제면에 신청하여 돌아가신 어머니의 제적부에서 외할머니 흔적을 찾고 외할머니 원적부를 역추적하는 과정에 거제면직원의 수고로움이 한 몫을 했고 외할머니의 원적을 근거로 국가 보훈처와 국가 기록원 아울러 공훈전산 자료관의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외할아버지의 독립 운동사를 찾아 독립유공자 서열에 올려드려야 한다는 못난 후손으로서의 최소한 예의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랬다.
훑어보는 자료에는 근대 100년 전후 격동기는 무능한 위정자와 간교한 매국노로 인해 나라 잃은 국민들이 겪는 서러운 역사가 점철되어 있었다. 당시 어느 민초들이 한 맺힌 질곡의 세월을 보내지 않은 가문이 있었겠냐만 나의 친가뿐 아니라 외가까지 정말로 지난한 삶을 이어 온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더구나 외가에서 겪은 근대 100년사는 나라 빼앗긴 현실 속에 단란한 한 가정이 무참히 깔아뭉개지는 비극영화의 교본을 보는 듯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1914년 10월 16일 출생하여 2000년 11월 2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평안북도 창성군 전창면 신평리에서 광산업을 하며 전창교회 집사 일을 보던 아버지 박찬소(朴燦韶)와 포목상을 경영하고 같은 신앙을 가진 어머니 강신소(姜信韶)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나 부유하고 화목한 교인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고 짐작 된다.
외조부모님은 일찍이 자식 여섯을 두었으나 모두 영유아 때 잃고 절망 하던 중 전창교회 강제희 장로의 권유로 신앙을 갖고부터 어머니를 낳아 유아세례까지 받을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고 교회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장섰고 가업을 잘 운영하여 부유한 살림을 하였을 것이다. 어머님이 1919년 당시 ‘다섯 살로 추정’되는 시절에 귀한 ‘가족사진’을 남기기란 어려운 일반 가정 살림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니까. 더구나 시절이 나라를 빼앗기고 모든 국민이 일제로 부터 핍박을 받는 때였으니.
국가보훈처를 검색하고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코너에서 외할아버지의 함자를 검색해도 발견치 못하였으나 국가 기록원과 공훈전자 자료관의 ‘독립운동사 제 2권’을 훑다가 더디어 흔적을 발견했다.
아!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미력한 후손들이 3.8선 이북에서의 독립운동사는 김일성 치하에 있어서 어떤 경로로라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지례짐작으로 포기하다시피 하였는데. 이 미련한 쯔쯔쯧!!!
일제의 만행을 되새김하는 의미에서 내가 찾은 자료를 삭제 가감함이 없이 아래와 같이 인용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5권
삼일운동사 상. 평안남북도에서의 운동 제 3절
제6장 평북 북부지방 중 제 3절 창성군편
『창성은 강계·자성·후창·위원·초산·벽동 등과 함께 이른바 강병(江邊) 7읍(七邑) 중에 드는 산읍이다. 이 고을도 압록강 상류를 사이에 두고 남만(南蠻)과 연접해 있기 때문에 재만 독립운동전선과 직결되어 투쟁이 전개되었다.
1 읍내(邑內)의 시위투쟁
창성읍내에서는 3·1운동 거사 이전에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직접 연락의 줄이 닿아 있었다. 남강은 서울서의 33인 민족대표단의 구성과 거족적 궐기 계획의 책정이 무르익어 갈 무렵이 민족적 성사(盛事)에, 특히 산음지대 동포들도 충분히 참여할 기회를 가져야 하겠다 생각하고 33인 동지들인 양전백(梁甸伯)·유여대 등과 상의하고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을 창성·삭주(朔州)·벽동 등 3고을에 밀파하였다.
송 목사는 창성 읍내에서 당시 읍내 교회 장로이던 강제희(康濟羲)를 찾아보고 남강의 밀지를 전하였다. 강 장로는 찬성하고 창성군 군내에서의 거사 책임을 인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운동비에 보태 쓰라고 현금 1백 20원을 지급해 주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중진적 인물인 동시에 사업계에서도 유력하여 읍내에 본점을 두고 삭주와 전창면(田倉面) 등 2곳에 지점을 두고 상업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읍내 교회도 자기가 주창하여 크게 신축 중에 있었다.
드디어 3월 1일이 되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만세 시위투쟁이 벌어지자 창성 거사의 책임을 지기로 이승훈과 약속했던 강재희는 초조하기만 하였다. 왜냐 하면 이일을 해 내려면 일신상의 희생을 각오하여야 할 터인데, 가사와 사업 그리고 신축중인 교회당 공사 등으로 신경을 쓰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일본 헌병 분대에서도 헌병보조원 1명을 강 장로 상점에 파견하여 그의 동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분대장 문마(門馬)라는 자는 가끔 강 장로를 찾아와 그의 의중(意中)을 타진해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우리측에서도 강 장로에 대한 기대가 컸으므로 어떤 사람은,
“창성은 벙어리만 살고 있나요? 왜 다른 곳과 같이 소리치지 못합니까?”
하기도 하였다.
“이러다가는 후일 창성 사람은 갓을 쓰고 나들이하지 못할까 보오.”
하며 강 장로가 속히 행동을 취하기만을 재촉하기도 했다. 천도교인 김염복(金念福)은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서,
“강 장로 어쩔랍니까?”
하고 항의조의 귓속말을 던지고 갔다.
강 장로는 이 이상 시간을 천연시킬 수 없었다. 그는 단호한 결심을 하고, 헌병 분대장에게 전창지점(田倉支店)의 결산을 보기 위하여 거기 갔다가 내일 돌아올 것이라 말하고 그들의 승낙을 얻었다.
강 장로서는 미행(尾行)을 당하지 않는 것만이 다행이었다.
전창은 읍내에서 30리 떨어진 곳이요, 헌병기관도 20리 밖에 있었다. 강 장로는 전창에 도착하자 즉시, ‘결산 중 외인 출입 사절’ 이라는 표찰을 써 붙이고 문을 굳게 닫은 후 전창교회 집사 박찬소, 권찰 강정식(康貞植)·황대붕 그리고 전창지점 주무(主務) 전봉재(全鳳梓) 등 여러 사람들과 긴급 회동하여 창성 전군에서의 거사계획을 수립,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읍내의 거사 날짜는 4월 1일 상오 10시로 한다.
(2) 읍내 회집 장소는 서문 밖 들판으로 한다.
(3) 적군을 영외(嶺外) 4개 면(面)과 영내 5개 면의 2부분으로 나누어 거사하되 영내 5개면은 읍내 집회에 동원하고, 영외 4개면은 대유동교회(大楡洞敎會)가 주동하는 대유동 집회에 동원 참가케 한다. 단 대유동 교회가 주동하는 연락책임은 전창교회가 지고, 전창교회는 또한 영내 5개 면의 동원 책임을 진다.
(4) 대중 동원을 위하여 각 면에 동원 책임자 5명씩을 선정하여 밀파하고, 이들 동원책임자는 각 부락에 잠입하여 4월 1일 아침 일찍이 읍내 집회장소로 모이도록 이 집에서 저 집 릴레이식으로 전령을 전달한다.
(5) 당일 소용될 국기 등속은 강 장로와 읍내 동지들이 준비하여 둘 터이니 사전 발각될 우려가 있으므로 대중들은 그런 것을 소지하고 다니지 말 것.
역사적인 4월 1일은 왔다. 강 장로는 이날 아침 9시 50분에 헌병 분대장 문마에게 통고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우리는 오늘 독립선언 축하식을 위하여 모인다. 우리 행동은 어디까지나 질서정연하고 생명 재산에 대하여 일체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이 명시하고 있는 바다. 만일 그대들이 경찰권에 자세(藉勢)하고 부당하게도 우리 집회를 제지 혹은 간섭하려 든다면 어떠한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그때에는 책임은 그대들에게 있을 것이므로 미리 알려 둔다.‘
고 하는 당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통고문은 당시 보통학교 학생이던 허의선이 자원하여 가지고 가서 전달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우리 민족의 일반적 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각이 되자 읍내와 각 면에서 동원되어 모인 회중이 2천 명 가량에 달하였다. 일본 기록에도 약 1천 명이라 하였으니 산읍 집회 치고는 그 규모가 컸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강제희가 높은 돌각담 위에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회중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한 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시내로 시위 행진하여 들어가니 군중의 의기는 벌써 충천할 지경이었다. 군중은 열광적으로 만세를 부르고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이와 같이 시위행렬이 훨씬 전진해 나아갔을 때에 맞은편에서 분대장 문마 등 일본헌병 7,8명이 약 20미터 근거리까지 접근해 오더니 군중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표 한 사람을 보내 협상하자고 제언했다. 군중 측에서는,
“협상할 필요 없다. 우리 측 방침은 이미 그대들에게 보낸 통고장에서 밝혀 둔 바가 있으니 그것과 조금도 틀릴 것이 없다”
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일본군 50여 명 1대가 뒤쫓아 오며 헌병과 합세하여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저들이 선수를 써서 만행을 저질렀다. 협상하자는 말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못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군중은 돌을 들어 대항하였다. 그러나 돌이 총탄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전창교회의 박찬소와 권찰 강정식이 총탄에 맞아 쓰러져 순국하고, 그밖에 4,5명의 중·경상자가 났다. 군중은 부득이 해산되고 말았다. 주동 인물인 강 장로도 왼쪽 손등에 총탄이 스쳐서 피를 흘리며 피신했다. 일본 기록에는 군중이 헌병대를 습격하였기 때문에 발포 해산시킨 것이라 하고 군중 측에 사상자가 있었다는 것은 언급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중 측의 투석으로 저희 측 헌병 1명이 부상당하였다고만 했다.
그날 오후였다. 돌에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은 헌병 분대장 문마는 강 장로 집에 나타나서 임신중이어서 자리에 누워 있던 그 부인을 총 개머리로 마구 치고 또 발길로 차며,“네 사나이 내어 놓아라.”고 야단치고 샅샅이 가택수색을 하여 서적 다수와 사진첩 등을 압수해 갔다. 그리고 이번 일은 오로지 강제희에게 책임이 있으니 그만 잡으면 즉석에서 총살할 것이요, 그 이외의 관련자들은 일체 불문에 붙이겠다고 성언(聲言)하였다. 그의 내의(內意)는 강제희를 우리 손으로 잡아 바치라는 것이요, 아니면 밀고라고 하라는 것이었다. 일본헌병대에서는 혈안이 되어 강제희의 거처를 찾았으나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압록강을 건너다닐 수 있는 배들은 모두 봉인(封印)하여 억류하고 강제희의 만주 탈출의 통로를 막아 버렸다.』 -공훈전자 자료 인용-
이 얼마나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트릴 일제의 만행을 상상할 수 있는 자료들인가.
내가 청소년기부터 어머니는 3.1절 기념일에 태극기를 달 때면 “너희 외할아버지는 평안북도 창성에서 마흔네 살에 3. 1 만세운동을 주도하시다가 외경이 쏜 총탄을 이마에 맞고 현장에서 돌아가셨고 왜놈들이 시위 참가자들을 찾아 보복이 시작되자 친척들이 도피를 권유하여 외할아버지 장례도 제대로 치루지 못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스윙거’ 발틀을 등에 지고 부랴부랴 여섯 살 난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야간에 집을 나와 차단된 압록강을 넘을 수 없어서 하염없이 남으로남으로 고향 평안도와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려고 도피 한 것이 결국 경남 거제 땅에서 정착. 은거하시며 행여 외경들이 알까 두려워 만세운동이나 평안도 고향 사연조차 입에 올리지 못하고 ‘평양에서 이사 온 유랑인’으로 신분을 속여 ‘평양댁’ 이라고 부르도록 숨죽여 생활하면서 풍문을 듣고 찾아 온 사촌 오빠들에게 장례 등 고향의 소식을 들었고 하나 뿐인 혈육에 해가 미칠까 두려워 평안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생활하였으며 한두 차례 야밤에 평안도에서 온 사촌들이 은밀히 생활비를 주고 가는 것도 보았다. 홀로되신 너희 외할머니는 처절한 노력으로 하나뿐인 나를 위해 발틀을 굴려서 삯바느질로 일본 유학까지 시키며 갖은 고생을 하셨는데....... 만세운동으로 돌아가신 너 외할아버지 순국을 밝힐 수 있는 증거가 없으니 휴!--- ” 라는 슬픈 가족사를 되뇌며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리지도 못하는 착잡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셨다.
아! 늦으나마 이제라도 외할아버지의 위대한 순국행위를 세상에 알릴 수 있어서 후손으로 작은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느껴질 뿐 아니라 일제 만행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난 가족사를 되짚어 보았다는 생각과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것이 국가 간 외교관계지만 평온한 가운데라도 힘을 가져야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민초들의 생활이 편안해 진다는 보편적인 진실을 느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더 이상의 근거 자료는 찾을 수 없어서 국가기록과 호적만으로도 국가 보훈처에 외할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넣어야겠다.
어머니 생전에 원한을 풀어드리지도 못한 후손을 아마도 하늘에 계신 어머님이나 외할아버지가 조금은 이해하시리라 기대를 하고 외할아버지의 DNA를 할양 받아 형제들 보다 조금은 ‘안 생긴’내가 매우 자랑스럽다.
자! 내일 쯤 시간이 나면 보훈처로 가 볼까나.
첫댓글 홍알님 사연 아주 감명갚게ㅡ 읽었습니다. 가끔 한번씩 내뿜는 카리스마와 강단이 외갓댁으로부터 면면히 내려온 DNA덕분인것 같네요.
배꼽사진이 안 보여 유감입니다.
근데 난 교주님을 한번도 "조금은 안 생긴" 분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는디요. ㅎㅎㅎ
이런! 이런! 감사 할 데가.
사실 어머니 어릴적 사진을 실었는데 복사한 사진이 되어설랑은 고마!!!!!
만세운동 하사다가 유감스럽게 순국하신 박찬소 등 여러분께 머리숙여 명복을 빌며, 휼륭하신 분과 외손자이신 아~ㄹ께 경의를 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