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
극락보전에서 천불전 쪽으로 30m 정도 가다보면 미륵전 못 미쳐 남향으로 서 있는 비를 만나게 된다. 이 비는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864~917)의 탑비(塔碑)로, 비명(碑銘)은 ‘고려국 고무위갑사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병서(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幷序)’이며, 당시 태상(太上)인 최언위(崔彦위,868~944)가 글을 짓고, 유훈률(柳勳律)이 썼다. 비문 끝에 ‘개운삼년세차병오오월경인삭이십구일무오입(開運三年歲次丙午五月庚寅朔二十九日戊午立)’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946년(고려 정종 1)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는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비문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무주(武州) 출신으로 법휘(法諱)는
형미(逈微)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882)인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조선사에게 찾아가 선법을 배웠다. 2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심인(心印)을 받고 효공왕 9년 (905)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가 대사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라 한다.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는 양각으로 뚜렷이 조각한 용두(龍頭)로서 여의주를 머금은 입은 투조되어 있다. 두 귀의 모습은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 듯 조각하여 사납게 표현하였고,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갑문을 정연하게 양각하였다.
비좌(碑座) 전후 2면에는 운문(雲文)을 조각하고 양측에 안상(眼象)을 각각 조각하였다. 비신 위의 이수(이首] 이首)에는 3단의 받침을 복판연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이수는 상하 2석으로 겹쳐 쌓았으며 중앙에 방형의 전액(篆額)을 마련하고 있으나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수 주위는 모두 반결 운룡문(雲龍文)과 반결 쌍용문(雙龍文)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사실성을 띠고 있는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다. 현재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406cm, 비신 높이는 250cm, 이수 높이는 56cm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금동아미타삼존상과 많은 사람들의 원불인 천불상이 각각의 번호를 가진 채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는 중앙에 삼존불과 그 뒤로 천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조성연대는 건물의 건립시기와 같이 하는 1970년대 후반이다. 삼존불상은 동제(銅製)로 중앙의 본존은 좌상에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좌, 우 협시는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로, 좌협시는 보관에 화불이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지만 우협시 보살은 정확한 명호를 알 수 없다. 천불상 역시 삼존불상과 마찬가지로 재질은 동제이며, 한 틀에서 주조하여 불상의 상호가 모두 동일하다.
[무위사 월출산 산신각....보통 산신각이 제일 위에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막돌과 흙으로 다진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한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편액에는 '월출산 산신각(月出山 山神閣)'이라 적혀 있고 '법철(法哲)'이 썼다고 씌어 있다. 바위산과 그 사이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의지한 채 호랑이에 걸터앉아 있는 산신을 그린 것이다. 산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동자는 허리춤에 호리병을 찬 채 커다란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동자가 서 있는 곳이 공중인지 바위 끝인지 불명확한 점 등 구도가 다소 불안하다. 구름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소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지 않고 잘린 듯하며, 달인지 해인지 분간되지 않는 일월(日月)이 표현되어 있다. 하단에 기록된 화기에 의하면 이 산신탱은 1991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조성하여 강진 무위사로 옮겨 봉안한 것으로, 화원은 김소영(金昭映)임을 알 수 있다.
[무위사 산신각 내부엔 호랑이탄 산신이....]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되어 있던 석불입상을 옮겨와 봉안하고 있다.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은 자연석에 부조(浮彫)로 새겨 모셨다. 이마 위의 육계와 머리형태가 마치 여성의 올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신(佛身) 주변에 화염문 광배를 선각한 점이나 목의 삼도와 수인 등에서 여래(如來)임을 알 수 있다. 부숭부숭한 눈두덩에 입술이 두껍고 인중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츠린 듯 좁게 표현되어 있다. 원래 이 석불은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마을 독지가들에 의해 무위사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현재 하단부가 마루바닥 밑으로 들어가 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마루까지, 218cm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막돌로 기단을 형성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은 다음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주두(柱頭)를 놓고 창방을 걸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의 장혀 사이로 소로를 끼웠다. 가구(架構)는 앞뒤 평주 위에 대량(大樑)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놓은 다음 종보를 얹은 5량집이다.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상 등을 봉안하였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그 주위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판관, 사자, 귀왕, 장군상이 배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상은 목조로 되어 있으며, 민머리형에 원만한 상호를 띄고 있다. 통견의 법의에 지물은 들고 있지 않으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사람이 죽으면 이 명부시왕에게 심판을 받게 된다는데...첫번째 7일간은 제1 진광대왕에게 눈이 지은죄를 심판받고, 두번째 7일간은 제2 초강대왕에게 귀가 지은죄를 심판받고, 세번째 7일간은 제3 송제대왕에게 코가 지은 죄를 심판받고, 네번째 7일간은 제4 오관대왕에게 혀가 지은 죄를 심판받고, 다섯번째 7일간은 제5 염라대왕에게 몸이 지은 죄를 심판받고, 여섯번째 7일간은 제6 변성대왕에게 뜻이 지은죄를 심판받고, 일곱번째 7일간은 제7 태산대왕에게 속마음으로 지은죄를 심판 받는다고 합니다.
무위사 3층석탑은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여러 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식이 연결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개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2ㆍ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 외의 부재는 완전한 상태로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비교적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탑의 조성연대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의 조성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고려 초기로 여겨진다. 현재 전남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396cm이다.
[다시 무위사 경내에서 내려서면서 천왕문쪽으로....]
[무위사앞 전통찻집 "무위다원"...]
[무위다원 에서 차 한잔....]
[무위다원의 실내에서....]
무위사에 와서 한 바퀴 돌아나온다음 무위다원에서 또 많은 것을 만난다. 보기만해도 탐이나는 다기세트들로 눈을 유혹하지만 차를 마시는 공간이 또한 차맛을 더해주는 것 같은 다원이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다른곳에서는 볼 수 없는 극락보전내의 아미타삼존벽화와 관음벽화 그리고 사자등에 올려진 법고도 눈여겨 볼 만한 문화재라는데 볼 수는 있어도 사진촬영을 할 수가 없어 눈에만 넣어가지고 와 조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