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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白馬山·286m) 위치 : 경남 산청군 신안면 ★특징, 볼거리 백마산(白馬山)은 높이 보다는 인근지역의 유적지 답사와 함께 하는 실버 산행지로서 손색이 없으며 여름철에는 강과 산을 두루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백마산 일대의 경치는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적벽 아래 강변 숲 속에는 신안루를 비롯하여 경연, 담분, 유취, 매연, 우화 등 여섯 누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멀리 서울에서 도보로 8백 8십리를 내려온 길손이 이곳을 차마 그저 지날 수가 없어서 수려한 풍광에 젖어 가무와 풍악속에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가 진주를 넘어 북진하는 왜군을 맞아 한 달 이상을 버티면서 물리친 유적지다. 백마산은 삼면이 절벽으로 둘레가 2,795척이고 동남쪽은 100여 척으로 된 자연산성이다. 정상은 평탄한데 여기에는 못과 창고터가 남아있다. 또한 널따란 반석이 나타나는데 바위 표면에 지름 10~15㎝가량의 구멍들이 100여 개 보이는데 옛날 백마산성의 망루 기둥을 박았던 흔적으로 보인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이 성은 자주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진주에서 밀려든 왜적을 막기 위해서 창의병들이 이 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한번은 폭염의 7월인데 왜적이 성을 포위한 채 며칠이고 기다리는 지구전을 펼치는 가운데 성안에는 물이 떨어져서 사람과 말의 기갈이 막심하였다. 이때 한 지혜로운 장수가 말을 바위 끝에 세워두고 쌀을 말 등에 퍼서 던졌더니 산밑에서 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병에게는 그것이 마치 성안에 물이 많아서 말을 멱감기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그들은 더 오래 포위를 해도 승산이 없을 것으로 알고 퇴각하였는데 이때 성안에 있던 병사와 말이 일시에 내달아 강물을 마셨더니 신안강 물이 세 치나 줄었다는 전설이 있고 그 일로 인하여 산 이름도 동산성에서 백마산성으로 변하였다.
또한 이곳은 정유재란 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면서 합천 초계의 권율 장군영에서 출발하여 남해의 전세를 살피기 위하여 지나가는 길에 이 산에 올라보고 단성현에서 하룻밤을 유숙한 행로이기도 하다. 산행 초입 주차장 백마사 대웅전 망춘대 전망대에서 인증샷 망춘대에서 경호강 풍경 정상부근의 군사용 망루기둥 흔적 정상 표지석(286m) 정상주 한잔 생초 늘비 어탕국수집 피리 티김 어탕 칼국수 산청 약초축제장 동의전 전각전-국새를 만든 전각전 내부 가마 동의전 민홍규 씨가 전각하다 미완성으로 세워둔 현판 문제가 된 옥새 기(氣) 바위에 체험하는 사람 동의전 뒷뜰에 있는 기바위-체험 기바위 동전 세우기 박물관 박물관 내부의-아이스맨 "외찌"인 모형 동의보감 허준 선생 4대옥새의 허구 국새의 기원은 진시황 때, 봉황이 깃든 옥돌을 도장으로 새긴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새(國璽)는 말 그대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도장이다. 즉 옛날에는 왕권의 상징으로, 오늘날에는 국가의 상징으로 나라의 주요 문서에 사용하는 도장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4번째 만들어져 현재 이명박 정부에서 사용하고 있는 국새는 2007년 세불(世佛) 민홍규 단장의 총지휘 아래 인간문화재 33인의 '국새제작단'이 6개월에 걸쳐 이곳 전각전(篆刻殿)에서 제작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국새전각전이 있는 까닭은 산청에서 생산된 좋은 고령토만이 국새제작 거푸집의 필수재료가 될 수 있는데, 그러한 고령토가 산청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현재 사단법인 대한민국 국새문화원과 산청군이 시행청으로, 전각전을 비롯해 등황전, 국새전시관, 부속전시실, 수장고, 생활관, 영빈관, 부양정 등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기 위해 한창 공사를 계획 중 중단되었다.
=경찰, 경남 산청 ‘국새전각전’ 압수수색=
국새로비 의혹을 수사중인 서울경찰청이 오늘 국새 전각전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서울경찰청은 오늘 오후 경남 산청군 금서면 국새전각전 건물에 도착해 국새제작에 사용됐다는 가마 7기와 장비, 서류 등을 압수수색했는데 경찰은 이번 압수수색을 통해 국새문화원장인 민홍규 씨가 전통방식으로 국새를 만들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새 사기’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 국새 제작단장 민홍규씨가 산청군 국새전각전 사업에서도 사업비를 빼돌린 혐의가 밝혀졌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이기석 부장검사)는 산청군 국새전각전 사업에서 사업비를 부풀려 청구한 뒤 차액을 돌려받아 사용한 혐의(사기 등)로 민씨를 기소(복역 중)했다고 24일 밝혔다. 또 민씨에게 금품을 받고 민씨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 준 모 일간지 전 부장 노모씨를 배임수재 혐의로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민씨는 2007년 산청군 금서면 일대에 국새전각전을 세우는 작업을 하면서 700만원에 불과한 도자벽돌 비용을 산청군에 9500만원으로 신고해 차액을 챙기는 등 사업비용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총 1억2800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민씨는 이 돈을 생활비와 비리를 공모한 하청업자의 채무 변제 등에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민씨는 자신이 전통 방식으로 옥새를 제작한다고 속여 국새 제작을 한 혐의(사기)로 올해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노씨는 모 일간지 문화부장으로 재임하면서 민씨에게 1400만원과 금도장을 받고 수차례 민홍규의 전통방식 옥새 전각장을 홍보하는 기사를 작성해 2006년 12월 민씨가 제4대 국새제작자로 선정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원문보기: 국새 사기 사건 2010년 4대 국새에 관련된 조사에서 4대 국새 제작단장 민홍규[6]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작태가 드러났다. 국새 제작과정에서 황당한 짓들을 벌인 것이다.
우선 국새를 만들 때 생긴 잔여 금(金)을 반환해야 함에도 본인이 몰래 빼돌려서 횡령했다고 한다. 무슨 아르키메데스가 적발한 세공사도 아니고... 거기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방식대로 제작하겠다고 계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계를 사용하는 현대방식으로 국새를 제작했다. 수사과정에서 그는 아예 전통적 제작방식을 배운 적이 없는 등[7] 그가 주장하던 그의 경력이 모두 가짜임이 드러났다.
민홍규는 그동안 스스로를 전각장 석불 정기호 선생의 수제자로 자처해 왔다. 하지만 검찰 조사결과 석불 정기호 선생 생전에 두어 번 선생을 찾아왔었을 뿐,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거니와 주물 자체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실제로 4대 국새 제작 때에도 주물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시켰다고 한다. 4대 국새 제작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기였던 셈이다. 이러한 행각이 발각되기 전까지 경상남도 산청군에 민홍규를 중심으로 국새문화원을 세우기로 하고 산청군이 예산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산청군에서는 관광명소로 만들 생각으로 예산을 지원해왔는데 민홍규가 잡혀 들어가면서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 허망하게 되었다.
제일 황당한 것은 국새에 본인의 이름을 새겼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인뉴에 있는 봉황 부리 밑에 자신의 성인 '閔'을 새겼으며 대한민홍규국 도장 인면에 새긴 '대한민국' 글자 중 '대'자의 ㄷ자 안쪽에 閔弘圭作 二千七年(민홍규 작 2007년)이라고 한자로 새겨넣었다. 이스터 에그 그 외에도 봉황 꼬리에 太平年(태평년), 萬歲璽(만세새)[8]라는 글자를, 인뉴 받침대에는 太平萬年(태평만년)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원래 이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금 횡령 사실이 불거지면서 확인차 국새를 살피던 중에 발견되었다.
결국 2011년 1월 20일, 서울중앙지법 1심 재판에서 민홍규는 가짜 국새 제작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2011년 7월, 서울중앙지법 항소심에서 가짜 국새 제작 혐의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가짜 다이아몬드 국새를 판매하려 한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되어 결국 형량에 6개월이 더해져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결국 그는 다시 항소했지만, 2011년 12월 4일에 대법원은 항소심 결과인 징역 3년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형을 다 살고 나온 민씨는 여론재판의 희생양이었다느니, 진실은 승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있으면 재심이라도 청구하시지 왜? 댓글들 보면 선동의 무서움도 알 수있다
3. 서체 문제
2011년 4월 29일, 대종언어연구소[10] 박대종 소장[11]은 현행 국새의 서체가 국새규정 5조의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체로 한다'는 조항에 맞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동국정운에 따르면 大韓民國을 한글로 옮길때 땡ㅎ한민귁이라고 적어야 하고 지금 적은 것처럼 대한민국이라고 적으면 의미가 달라지며 특히 韓國이 아니라 漢國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그런데 '창제 당시의 자체(字體)로 한다'고 했지, 창제 당시의 발음으로 한다고는 안했다. 자체(字體)란 한자 뜻 그대로 글자의 서체, 즉 글꼴, 폰트를 말하는 것이지 발음이 아니다. 더군다나 박소장이 제시한 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를 바탕으로 만든 가공의 한자음이지 현실의 한자음이 아닐 뿐더러, 인공이냐 실제의 발음이냐를 떠나서 현대의 국새를 만드는데 중세의 발음으로 표기한다는 건 최소한의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이 주장 때문에 행정안전부는 '자체라는 것은 그 시절의 글자 형태를 빌린다는 것이지 표기법을 그대로 가져온다는 의미가 아니다'라는 해석을 보도 자료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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