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한민족의 상고사上古史 정립이 시급
오늘날 우리 한민족韓民族을 돌아볼 때,
역사상 경제적으로는 가장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음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겠으나,
반면에 제 민족의 상고사를 스스로 잘라 버리고,
일부 외래종교 광신도들이 국조 단군상의 목을 치러 다니고 있음은
가장 부끄러운 일이다.
필자는 그 주된 이유를 멀리는 무수한 대내외 전란으로 사적이 거의 없어져서 한반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부득이 우리의 상고사 자료를 의도적으로 깍아내린 중국 역사서에 의존하여 짜집기식으로 편찬하였기
때문이고,
가까이는 일제가 침략하여 고의적으로 왜곡시킨,
더구나 상고사를 일본역사보다 능가할 수 없도록 제거해버린 상태에서 국사교육을 받은 자들이
조국 광복이래 50년이 넘도록 학연과 인맥으로 주도하고 있는 식민지사관 때문이라고 강조하여 지적하는 바이다.
필자가 「동이東夷」와 「치우蚩尤, 소호少昊」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67년부터 중화민국 국립정치대학에 초빙교수로 근 10년간 대만에 체류하면서,
한편 국립 대만 사범 대학 중국문학과박사과정에서 수학修學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만 사범 대학 대학원에서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13경(十三經)에 독서보고 과정을 거치면서
국내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치우(蚩尤)」를 알게 되었다.
그 뒤 1984년에 중국대륙과 백두산을 다녀온 뒤부터 중국의 지인들과 연락하면서
사기史記·한서漢書 등에 기록된 산동성山東省의 치우대왕蚩尤天王의 능陵을 찾기 시작하였다.
2000년 11월 2일 산동대학(山東大學)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를 마친 뒤,
4일에 그동안 치우(蚩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준 陳秉忠 선생의 안내로 1997년에 처음 발견하였다는
치우능(蚩尤陵)을 찾아 汶上縣으로 갔다.
우리를 10里 밖까지 출영한 현縣 의 대표들이 어찌 알고 날짜에 맞추어 왔느냐고 물었다.
바로 내일이 음력 10月 10日로 옛날에는 치우사당蚩尤祠堂에 모여 치우기(蚩尤旗)를 높이 세우고 제祭를 지냈다며,
유사이래 한국인韓國人이 이곳에 최초로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시 파괴되어 당시는 밀밭으로 변하여 있었으나,
앞으로 현縣에서 복원하겠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귀국한 뒤 치우(蚩尤)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시작하였다.
1996년에 「대동이문화연구회大東夷文化硏究會」를 창회創會하여 매월 재야사학자를 초청하여 연구발표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 목적은 이 땅에서 하루속히 식민지사관을 없애고 정통사관正統史觀을 확립하고자 함이었다.
요즘은 한자교육 추진운동이 더 시급하여 월례연구발표회를 열지 못하고 있으나, 앞으로
「대동이문화大東夷文化」부흥을 위하여 관심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희구하는 바이다.
아직도 「동이東夷」(동쪽에 활 잘 쏘는 민족)의 참뜻을 모르고, 「동쪽 오랑캐」라는 뜻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전통문화연구회」를 중심으로 교육용기초한자 1,800字의 대표훈代表訓을 정할 때,
필자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이夷」자를 「오랑캐 이」에서 「큰활 이」자로 정하였으니,
앞으로는 모두 「큰활 이」자로 일컬어 주기를 이 기회를 빌어 당부하는 바이다.
중국에서는 종래 黃帝(황제헌원씨)만을 시조로 모시더니,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炎帝(염제 신농씨)를 포함하여 중국인은 염.황 자손 (炎·黃 子孫)이라고 선양宣揚하더니,
1990년대에 와서는 탁록에다 치우(蚩尤)까지 시조로 모신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건립하면서부터
황제黃帝·염제炎帝·치우제蚩尤帝의 삼시조시대를 열고 있다.
(펀주: 위 세분 다 동이족. 한국인은 동이족이 대다수. 중국인들은 한족이 대다수.)
한족漢族 외에 55族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오늘날의 다원적인 중국을 이끌기 위한
고차원의 사관史觀에서 창출된 역사 만들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韓民族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무지로 위대한 조상을 잃고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음이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치우천왕蚩尤天王에 대하여 하루속히 전국민이 새로이 인식하여 조상을 찾고, 상고사를 올바로 정립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중국의 문자학자 이경제李敬齋는
"대저 동이東夷는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곧 화목 자상하고, 무력武力보다는 예술藝術을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을 들면 순舜임금이다.(맹자는순임금을 동이인東夷人이라고 말하였다)
지극히 어질고 (至仁), 지극히 효도(至孝)하여,
남에게 천하天下를 양위하고,
또한 천하를 다시 남에게 양위함은 참으로 예로부터 세상에 다시 없는 지극히 성聖스러움인 것이다.
(中略)
우리 나라(中國) 문자文字는 동이인東夷人이 다 창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契(설)이 널리 보급하였기 때문에 문자 만든 공功이 설(契)에게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동토東土와 서토西土의 옛 문자를 대략 비교하여 보면,
곧 동이東夷가 문자文字의 지혜에 대해서는 서하西夏보다 우수하고,
동이인東夷人이 먼저 교육권敎育權을 장악하였으므로
諸夏(하나라)가 모두 동이東夷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였다.)
라고 말한 바와 같이
중국문화는 곧 동이문화(東夷文化)를 받아들여 이룩되었으며,
이른바 한자漢字는 모두 동이족東夷族이 창조創造한 바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고사의 역사를 모르고,
오늘날 우리 나라 지식인들까지도 한자는 중국민족이 만든 문자를 빌어다 쓰는 차용문자(借用文字)로 알고 있으며,
한글만이 國字(나라글)라고 선동하면서,
한자漢字를 폐지하고 한글 전용(專用)을 주장함은 참으로 개탄을 넘어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4대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황하문명은 결코 중국 한족의 문명이 아니라,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의 문명文明이라는 분명한 사실史實을 새로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 사실史實이 밝혀지게 되는 날, 한국韓國의 역사歷史가 개창改創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계역사世界歷史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필자는 반드시 이 동이족사東夷族史 곧 한민족韓民族의 상고사上古史가 반드시 올바로 밝혀질 것을 확신하는 바이며,
이 찬란한 대동이민족사(大東夷民族史)를 우리 후손들에게 찾아주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한글 전용(專用)을 주장하는 일부에서는 동이(東夷)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고 하는데,
25사(二十五史) 중의 동이전東夷傳을 자세히 읽어본다면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므로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
백만대군으로도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을 수 없지만
단 한사람의 落水穿石(떨어지는 물이 돌을 뚫는) 문필로는 되찾을 수 있다
현재 산동성 문상현 남왕진에서 복원되고 있는
치우대왕총(마땅히 능陵이라고 해야 하겠으나 중국에서 발견된 옛 비석에 「치우총」으로 되어 있다)의
대역사는
비록 중국中國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의 상고사上古史를 되찾고, 위대한 조상을 숭모하는 정신에서
뜻있는 분들께서 물심양면으로 적극 성원하여 주시기를 ...
二. 치우(蚩尤)는 누구인가?
최근 중국의 사학자 鄒君孟은 <치우蚩尤>에 대하여
" 동한東漢의 학자로 예를 들면 高誘, 馬融 등 모두 다
<치우>는 구려(九黎)의 군장君長이라고 하였다.
(中略)
나도 기본적으로 徐旭生 선생의 의견에 동의하여 <치우>는 동이東夷 집단에 속한다고 여긴다.)이라고
한 바와 같이
<치우蚩尤>는 <구려九黎>의 군장君長으로서 동이족東夷族의 우두머리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미 후한시대後漢時代의 공안국孔安國도
"<구려국>의 군주는 <치우>이다.(九黎君號蚩尤是也)"라 하였다.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치우蚩尤>에 대하여 일반 사학계 교수와는 달리
"지금까지 전설의 인물로만 여겨왔던 <치우천왕蚩尤天王>은 역사적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치우대왕과 민족사관, 2001. 3. 치우연구 창간호)고 역설하였다.
동이족東夷族으로서 <치우蚩尤>의 활동시대는 죽서기년竹書紀年과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 의하면
<황제헌원씨>(黃帝)가 기원전 2706년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2599년에 물러났으니,
<치우蚩尤>는 동시대 인물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4700년전이 됨을 알 수 있다.
<치우蚩尤>와 <염제 신농씨>(炎帝)가 소를 주主토템으로 하고,
현무 곧 거북과 뱀의 교접을 부副토템으로 하였으며,
<황제헌원씨>(黃帝)가 곰을 토템으로 하고,
소호(少昊)가 새를 토템으로 한 것으로 볼 때,
필자의 소견으로는 본래 이들이 모두 북방北方의 동이족東夷族으로서 중원中原으로 남하南下하여 탁록에서 패권의 다툼을 한 것이지,
다른종족간(異族間)의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황하문명黃河文明은 곧 한족漢族의 문명文明이 아니라 동이족東夷族의 문명文明임을 재삼
강조하는 바이다.
국내에 전래되는 <치우장군蚩尤將軍>의 자취
오늘날 한국사韓國史에서 치우장군蚩尤將軍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민속적인 면에서는 도처에 면면히 지속되어 오고 있다.
다만 그것이 치우장군蚩尤將軍과 관계가 있음을 모를 뿐이다.
먼저 한강漢江의 「뚝섬」에 대해서 살펴보면,
본래 치우장군蚩尤將軍의 사당을 모셨기 때문에
치우기蚩尤旗를 뜻하는 「둑纛」(쇠꼬리나 꿩꽁지로 꾸민 깃발 둑, 치우기 둑 字라고도 함)字를 써서
纛島(둑도) 곧 「둑섬」이라고 일컬었던 것인데
경음화硬音化되어 「뚝섬」이 된 것이다.
뚝방이 있어서 뚝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근래까지 纛神祠(둑신사)가 전해 내려오다가 어느 해 장마에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서울市에서는 뚝섬(纛島)에 「치우사蚩尤祠」를 복원하여 민족정기를 앙양시킬 것을 제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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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육군사관학교에 보관된 옛날 투구에 <치우상蚩尤像>이 새겨져 있음은
옛날에 출전할 때는 <치우蚩尤>를 군신으로 모셨던 <치우사당蚩尤祠堂>에서 먼저 승전을 기원하는 제祭를 지냈음에서 연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진시황은 드디어 동쪽으로 바다까지 행차하여,
명산대천 및 八神에게 제를 지내는 예를 행하였다.
(中略)
八神 가운데 세 번째를 병주(군신)라 하여 <치우>를 제사 지냈다."
"번쾌가 한고조를 모시고 왔다. (中略)
패정에서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면, 진시황이나 한고조 등이 <치우사蚩尤祠>에서 제祭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2002 월드컵」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깃발에
<치우상蚩尤像>을 그려 넣은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치우장군蚩尤將軍>의 역사를 온 국민,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었음을 기리는 바이다.
「붉은 악마」라는 호칭에 대하여,
붉은 깃발을 상징으로 내세웠던 공산도배들에게 6.25 때 심하게 당했던 기성세대들은 거부감을 갖고 있으나,
중국에서 옛날 <치우장군蚩尤將軍>의 천하무적의 용맹을 오히려 증오하여 「악마」라고 칭한 기록이
있고,
"常以十月祀有赤氣出如絳, 民名爲蚩尤旗"(皇覽)라 하여
매년 10월 <치우사蚩尤祠>에서 제를 지낼 때는 붉은 기운(赤氣)가 하늘에서 내려와
붉은 비단을 늘어뜨린 듯하여 백성들이 (치우기蚩尤旗)라고 했다는 바와 같이
이번에 온통 붉은 색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붉은 악마」는
흔히 말하는 악마가 아니라, 4700년만에 <치우장군>이 환생한 모습과 기백을 상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첫댓글 이 글은 한국고대사, 한민족이 옛 제국를 찾아서 -카페운녕자 발송메일에서 날라온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