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 48 - 청태종이 병자호란을 일으키니 인조는 남한산성과 삼전도로!
청나라는 내몽골로 원정해 링단칸을 죽이고 몽골을 차지한후 원나라 옥새를 얻어 1636년 4월에 국호를 후금
에서 청(淸) 으로 바꾸면서 홍타이지는 황제로 즉위한후 청군은 농민반란이 심각해진 틈을 타서 5~ 9월에
만리장성을 우회하여 명나라 본토를 침공해 산서성, 하북성을 쑥대밭을 만들고 성경으로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1637년 초에 병자호란시 청군은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20일치의 군량만 준비하였으니 단기전으로 조선을 굴복
시킬 작정이었는데.... 원래 기병이 주력인 유목민족 군대는 많은 군량을 휴대하지 않으니, 성경 주변에
팔기군을 주둔시켰다가 공세에 들어갈때 소량 군량을 휴대해 전선에 나가고 여의치 않으면 돌아오는 형식입니다.
병자호란도 그렇지만 옛 몽골군도 그러했듯 정묘호란과 영원성 전투만 하더라도 한달 이내 작전 기간을 정해
두고 작전목표가 불분명해지거나, 장기전으로 흘러 식량이 바닥날 것 같으면 물러갔으니 농경민족의 보병
과 다른 점으로 진퇴가 자유롭다는 것인데, 고려나 조선은 이걸 우리가 적을 물리친 "승리" 라고 착각한다는?
청은 1차 선봉대 300명, 2차 선봉대 1,000명, 3차 선봉대 3,000명, 동로군 8,500명,
본군 8,600명, 후미군 12,900명, 기타 11,000명(쿠툴러로 정규군을 보조하는
한족 하인들) 등 총 4만 5천여명의 침공군을 조직하여 조선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게 됩니다.
1636년 음력 12월 2일, 청태종은 명군의 침공에 대비해 성경에 정친왕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
을 남겨두고 잉굴다이, 마푸타를 지휘관으로 하여 한족, 몽골인, 만주족 혼성 부대 45,000
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하니 12월 8일 300기의 선봉대가 위장한 채로 압록강을 도하했습니다.
300 기병은 큰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홍타이지는
부대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한번에 같이 이동하지 않고 이들을
몇몇의 작은 부대로 나누어서 다양한 루트와 시간차를 두고서 진격시켰습니다.
특히 청나라 선봉대 300기는 상인 복장으로 위장하고는 다른 곳을 공격하지 않고 계속 한성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조선 백성들은 그냥 청나라의 상인단이 왔거니 하며 별로
경계하지 않았으니 이들이 황해도까지 왔을때야 조선 조정은 청군의 침략을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조선도 대비를 안한게 아니라서 의주부의 백마산성에서 임경업 휘하에 최소 4,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청나라는 이를 무시하고 신속히 남하했으니....
이후 모든 산성을 우회해 청군은 단 4일 만에 개성에 도착했고 이후도 신속히 남하했습니다.
조선군이 퇴로를 차단한다면 보급로가 끊겨 그대로 궤멸당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대담한 작전이었지만 청군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수도로 돌진하는 이른바 "참수작전: 을 실시한 것인데, 조선군은 산성에 틀어
박혀 청군이 말에서 내려 성벽을 기어오르면 활로 싸우려고 했지만 산성은 물론 평지성도 그냥 지나쳐 남진합니다.
청나라는 10년전 정묘호란의 교훈으로 성을 아무리 많이 함락시켜도 조선은 항복하지
않겠지만 조선왕을 사로잡으면 전쟁은 바로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을 사로잡는다는 전략" 으로 조선군을 무시한채 바로 한성으로 돌격했던 것입니다.
또한 조선 조정이나 왕실이 강화도로 피난갈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화 해협을 건널수 있는 수군도 준비했으니..... 청나라는 조선의 전략 전술을
제대로 예측하고 철저히 준비했던 것으로 조선군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 당황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에 대한 종합적인 軍事史(군사사) 연구서인 유재성의 丙子胡亂史 (병자호란사)
에서는 청군의 병력을 "128,000명" 이라 하면서 여러 부대의 편제와 규모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바 있지만 이것 역시 사료적 근거가 없이 임의로 작성한 것 입니다.
청군은 8기 6만 정도였으니 병자호란때 조선에 쳐들어온건 정규 병력 34,000명에 쿠툴러 ( 한인
수송 노동자) 11,000명을 합한 45,000명 정도였다고 볼수 있으며 여기에 '보오이 니루' 로
부터 2천명의 갑사를 동원했다고 보더라도... 참전 인원의 총수는 약 47,000명으로 여겨집니다.
홍타이지 1632년 차하르(몽골) 원정은 "10만명" 에 달하는 많은 병력이 집결했다고 했지만 그대로
믿기 어려우니, 실제 작전에 참여한 병력은 大同宣府 邊外 (대동선부 변외) 로 출동한
좌익군 1만과 歸化城 (귀북성) 일대로 향한 우익군 2만을 합친 3만여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의 도원수 김자점은 황해도 정방 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청나라군이 침공했다는
봉화를 믿지 못해 거듭 북쪽으로 전령을 보내 이를 확인하게 했으니, 이미 청군 선봉대는
지나가 버렸고 본대가 평안도 순안 근처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12월 13일 마푸타는 300 기병의 앞에 선발대 몇기를 보내 길잡이로 삼아 황주목에 도착했는데, 김자점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선역에 매복했으니, 조금후 마푸타가 보낸 본군의 선발대 300명이 동선역을 지나가자
이완은 1차 선봉대 뒤에 오는 본군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무시하고선발대를 공격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다음날 12월 14일 2차 선봉대 청군의 기병 본대 1천명이 황주목에 도착하자 김자점은 다시
동선역에 매복하는 작전을 계획하니, 이완은 어제 전투로 이미 적이 동선역 매복을
알 것이라고 말했지만 김자점은 듣지 않고 다시 한번 매복 기습을 실행하지만 실패합니다.
적의 남하를 막아보려 했으나 청 선봉대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한성으로 급행했고, 남하한 선봉대
는 몇 안되니 정방산성을 지키며 적의 본군의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는데.... 1차
선봉대를 그냥 보낸 탓에 인조가 당황하여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는 원인이 되었으며,
그후 인조의 서신이 당도하니 12월 20일 김자점은 5천명 전군을 인솔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합니다.
인조가 청의 선봉대에 길이 막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SOS 를 쳐서 도원수를 부른
것으로.... 사흘후 12월 23일 청의 도르곤이 이끄는 좌익군이 황주목에 도착했는데, 주민들을
통해 김자점의 병력이 선봉대를 쫓아 남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병력을 떼어주며 추격하라고 명합니다.
김자점은 12월 24일 토산에 영을 세우는 중이었는데.... 청군이 이튿날 동틀 무렵에 기습하자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해 우왕자왕하다가 김자점 휘하 조선군 일부는
산위로 패퇴했고, 그외 다른 장교들도 자신의 휘하에 수십명씩 이끌고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다음날 12월 26일 김자점은 군사를 풀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2천명 (5천에서 3천이 줄어들었음!)
으로 남하를 개시해서는 12월 30일 양평의 미원에 도착하여 각지 근왕병의 재규합을 시도합니다.
임진왜란 시절 일본군이나 정묘호란 때 후금군 처럼 조선군의 산성을 일일이 점령하려 한다면 칩거와 농성이
의외로 시간을 버는 방법이 되었을 것이지만, 병자호란에서는 오직 수도를 향해 최대한 빨리 남하
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청나라에게는 방해가 되지 않아 조선군의 전략이 청군에 좋은 일을 해준 격이었습니다.
급보를 접한 인조는 두 왕자 (봉림대군·인평대군) 를 비롯한 비빈들과 문반, 무반과 그 가족들에 종묘사직의
위패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뒤따라가려 했지만, 이미 청군 선발대가 서대문
근처 홍제원 까지 도착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고, 결국 인조는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대청국 (大淸國) 관온인성황제는 조선국왕에서 조서를 내려 유시 (諭示) 한다.“너희는 명나라를 도와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 요동을 점령하자 너희는 우리 백성을 유인해 명나라에 바쳤다. 짐이 진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벌을 내린 것은 이 때문이다. 강대함을 믿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없이 군대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겠는가”
“ 너는 왜 지모있는 자로 계책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싸우는 대열에 나서게 해서 일전 (一戰) 을 시도하지
않느냐. 너희가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우리 지경에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짐에게 귀순코자 했을때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원나라 때 조선은 공물을 바치기를 그치치 않았다. 어찌 하루아침에 오만해졌단 말이냐. 글을 거절해 받지 않은
것은 너희 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조선은 요, 금, 원 세나라에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신 (臣)
이라 일컬었다. 너희 나라는 '신하로서 북쪽을 바라 보면서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이냐?”
“성곽을 비우고 궁궐을 버려서 처자와 헤어지고 단신으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목숨을 연장해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면서 이 치욕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무엇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여인의 처소에 들어앉아 달게 여긴단 말인가. 네가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너를 그대로 내버려두겠느냐.”
청군은 식량등 물자를 현지에서 약탈로 조달하며 기동력을 발휘해 한성에 들이닥첬는데 현지 조달로는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으니 상당한 모험을 벌인 것으로 일단 내몽골은 정리했지만 배후에는 명나라가 있었으며,
만주에는 기근이 들어 식량도 부족했으니 오직 "왕" 을 잡기 위해 수도에만 집중적으로 공격해 들어온 것입니다.
조선군으로서는 민간의 막심한 피해를 무릅쓰고 고구려 처럼 청야전술을 시행하는 것이 방어
전략의 핵심이었으니.... 인조가 멀리 도망쳐 근왕군을 모으고, 청군의 기세를 죽이면서
시간을 끌면 청군이 더 이상 못 버티고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전략이었습니다.
조선이 제대로 구사할수 있었다면 청군은 여수전쟁때 우중문이나 여요전쟁 때의 요성종, 소배압 꼴 나기 십상
이었겠지만, 조선군의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으니 청군의 진격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고
애당초 농성 (籠城) 에 들어간 병력을 제외하고는 전략적으로 기동할수 있는 야전군이 집결해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선군은 청군의 남하를 저지 못했고, 8일 만에 수도 한성을 내주면서 임진왜란 때의 기록(19일)
을 큰 차이로 경신했으며, 이후 청나라가 장사꾼 행렬로 위장한 300기 기병으로 강화도로
가는 길도 차단해버리는 바람에 강화도로 피신도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로오사 선봉대는 300기에 불과했고, 후속 본대는 뒤따라오는 중이었음에도
조선은 어이없게도 이들을 수만여명에 달하는 청군의 본대 병력이라고..... 착각하고
말았기 때문인데, 임진왜란 때 선조 처럼 후방으로 도망칠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군대와 기동력 도 없이 도망친다면 일본으로 도주하지 않는 한 청군의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청군이 병력을 쪼개 시차를 두고 내려왔으니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은 청군의 총 규모가
어느정도인지 언제쯤 다 진군할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 근왕 (勤王)
을 위해 섣부르게 남하하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청군의 전략적 승리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 자체의 방위력은 충분해 전쟁 초반의 공방전에선 조선군이 선전
하였으니 12월 18일 원두표 군사들이 출전해 6명의 청군을 죽였고,
이틀 뒤 20일에는 신경진의 군사가 출전해 30명의 청군을 죽이고 적의 진입을 저지하였습니다.
심지어 19일에 청군이 공성을 위해 서양 대포인 홍이포를 남한산성에 끌고 와 쐈을 때는
되려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저격하여 청나라 포병을 공격해
격퇴시켜버리는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으니 청군이 유일하게 고려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며칠 전에 적이 망월대(望月臺) 밖에 대포를 설치하니 신경진이 사졸들에게 천자포
(天字砲) 를 쏘도록 하여 오랑캐 장수와 졸개 몇명을 맞추니 흩어져 갔다.
적이 또 10여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 (南隔臺) 밖에도 7~ 8대를 설치했다.”
“홍이(紅夷) 포 라고 하니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리를 날수 있었는데, 행궁
(行宮) 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으니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 에 떨어져
기와집 세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 연려실기술
하지만 남한산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미처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해,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4,000여섬, 간장 100여독에 불과하였으니 군사 12,000
여명이 먹기에는 50일 분이며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설상가상 이었습니다.
결국 포위된지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되는데..... 더구나 청나라 병사들은 조선 보다도 더 혹독한 만주의
추위에 단련된 자들이라 들판에서 야영함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에게 더 큰 타격이었습니다.
1월 23일 남한산성군 수백명이 체찰부와 행궁 앞에 몰려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며 시위를 벌였으며
청군의 홍이포 포격으로 남한산성이 쑥대밭이 된 1월 26일에도 병사들이 행궁 앞에서 척화신
압송을 요구했는데, 우승지 이행원이 칼을 빼어 들고 나무라자, 병사들은 "칼을 빼어 든 모습이
용맹해 보이는데 기왕이면 적진에 가서 그 대단함을 보여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라며 야유합니다.
어떤 병사는 "척화를 주장했으면 이기는 방법도 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척화신들을 적진에 묶어 보낼 것이 아니라 장수로 삼아 싸우게 하시지요..."
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으니..... 평시에는 상상도 못 할 광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좌의정 홍서봉이 "오늘날 군사들의 마음이 외적 보다 심각하다 (今日軍情, 甚於外敵)" 고 할 정도였으니,
그 전에 벌어진 강화도 함락과 상관없이 이미 남한산성에는 항전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셈입니다.
1월 26일에 장수와 사졸들(신경진과 구굉의 진영의 장사들) 이 또 대궐 아래로 나아가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낼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대포에 맞아서 성첩이 모두 다 파괴되어 사세가 이미 더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문사들은 단지 고론(高論) 만 일삼고 있으니 문사들에게 망월대를 지키고 막도록 하소서.”
대궐에 들어가 진달하려니 승지 이행원(李行遠)이 말하기를, “비록 위태롭고 급박한 날을 당했더라도
대내(大內)가 멀지 않은 곳에서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병조 낭청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대궐문을 지키면서 어찌 난병(亂兵)이 여기에 이르게 하였는가.” 하면서 칼을
뽑아 들고 쳐죽이려고 하니 장수와 사졸들이 말하기를 “승지가 칼을 뽑으니 용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적을 베는데는 용감하지 못하고 도리어 죄 없는 사람의 목을 베려 하는가. 승지는 재주와 꾀가 있는 것
같으니일 오랑캐의 진중에 데리고 가면 성공할수 있을 것이다. 속히 나오라. 속히 나오라.”하자, 동료들이
권하여 이행원을 피하게 하였다. 임금이 다른 승지를 시켜 군사들을 타이른 뒤에야 진정되었다.《병자록》《잡기》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등장하였듯이 성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12월 25일경 가마니를 지급했으며 또한 굶어
죽게 될 말을 잡아 병사들에게 먹일 것을 도체찰사가 제안하여 나흘 후인 1월 1일에 병사들에게
지급하는데, 그러나 가마니를 줬다가 말을 먹여야 한다며 다시 뺏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만 사실입니다.
사흘후 1월 4일에 비변사에서 사복시(말을 관리하는 부서)의 말과 역말이 굶어 죽을까 두렵다며 밤에 성첩에서 보초
서는 병사들로부터 가마니를 다시 거두어 들일 것을 제의하고 인조가 승낙하니, 음력 1월 4일은 양력 1월 29일로
현대의 남한산성 기준만 해도 평균기온 영하 4도 내외, 최저기온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가 기승인 때입니다.
"그러나 점점 기후가 포근해져 군사들이 추위에 떨거나 동상에 걸리는 일이 매우 위급한 정도가
아닙니다" 운운하니... 그로부터 열흘 후에 "성첩을 지키던 병사들중에 얼어 죽은 자가
나왔다." 고 합니다. 적은 계속 공격해 오는지라 상시 긴장해야 하는데 눈, 비가 내려
옷이 젖어버려 얼어 죽을 날씨에 고작 가마니 따위나 줬다가 며칠만에 말 먹인답시고 뺏어갑니다.
척화파 대신들은 전투에는 나가지도 않으면서 병사들이 밤새 성첩을 지키느라 동상에 걸릴 때, 노비들을 시켜
나무를 해와 따뜻한 방에서 자고는 날이 새면 임금 앞에 나와 말로만 적에게 항복하면 안된다고 게거품을
물면서 병사들만 싸우라고 강요하지 정작 자기들은 창자루 잡을 생각은 전혀 안하고 오직 붓자루만 잡겠다는...
그러니까 조선 유학자 사대부들은 공맹과 주자며 명나라 황제의 은헤를 들먹이며 결사항전을 외치지만
정작 자기들은 "전투에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고" 뒷전에 편안하게 앉아서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었습니다. 말로만? 이정도면 병사들의 전의를 생각할게 아니라 반란이 안 일어난게 천운 입니다.
청군 선봉장인 마부대가 지휘하는 청나라군 부대는 기병으로 이뤄진 수천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10일도 안되어
한성에 입성했으나, 계속 강행군을 한지라 매우 지쳐있었으니 이때 조선군이 공격했으면 손쉽게 승리할수도
있었지만 여러길로 나뉘어 여러부대가 순차적으로 한성에 입성했기 때문에 조선은 수십만 대군으로 착각했습니다.
한성에 입성한 청군은 자신들은 황제의 명을 받아 왔다며 "조선 백성은 생업에 종사하라" 며 무차별 학살이나
약탈 같은 짓은 하지 않았으니 세계 전쟁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처 같은 착한 양반(?) 들 인데....
인류 5천년사 전쟁에서 살인과 약탈에 방화를 하지않는 인자한(?) 군대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축이나 젊은 여인들은 자기 군영으로 끌고 갔으니 조선 여인들은 그 수모를 차마 어찌 견뎠을까요?
주화파 최명길은 피난가는 인조와 떨어져 한성에 남아 마부대와 강화를 타진했고 마부대는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
군신관계 수립 이야기는 하지 않고 "대신(정승급)과 왕자를 보내면 강화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는 답을 하니
12월 15일 최명길은 마부대 군대와 남한산성에 도착해 혼자 성 안으로 들어가 인조에게 마부대의 뜻을 전합니다.
이런 유화책은 선봉대가 수천명에 불과할 정도로 적은 병력이기 때문에 청태종이 이끄는 수만명의
본대가 오기 전까지 조선군의 반격을 막으려는 계책이기도 했으나, 조선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니 인조는 정묘호란 때 종친인 원창군을 왕자라고 속여 청군과 강화를 이끈것
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종친인 능봉수 이칭과 형조판서 심집을 각각 왕자와 대신으로 가장해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부대나 청군은 두번 속는 바보가 아니었고, 전쟁 직전에 강화를 위해 심양으로 가다가 붙잡힌 사신 박난영
에게 진짜 왕자와 대신이 맞는지 확인하게 했는데, 박난영은 사르후 전투후 포로로 잡혀있다가 정묘호란때
후금군과 함께 귀국했고, 후금은 조선군 장수급 포로들에 후대했으므로 박난영이 믿을만 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난영은 청군의 기대와 달리 진짜가 맞다고 이야기 하니 마부대는 거듭 인질을 심문했고,
결국 심집은 자기가 대신급은 아니라고 실토했으며.... 이칭도 겁에 질려 아무말도
하지 못하니 화가 난 마부대는 박난영을 참수하고, 인질들을 남한산성으로 돌려
보내면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야 강화협상을 시작할수 있을 것이다" 라고 조선 조정을 압박합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세자를 보내는 문제로 며칠을 갑론을박하며 시간을 끌었고 12월 21일,
마부대는 조선측에 사절을 보내 "황제가 친정해 개성까지 이르렀으니, 앞으로는
본관이 아니라 황제폐하가 직접 강화협상을 주재하실 것이다" 라고 통고하며 협상을 중단합니다.
조선은 12월 27일 이기남을 보내 청군 진영에 술과 고기를 전달했지만 마부대는 어차피 팔도의 물건이 청군
손아귀에 있는데, 성내에 굶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도로 가지고 가 굶주린 신민들에게 나누어주라며
비아냥거렸으니.... 적진을 떠보려던게 오히려 적이 자신들의 상황을 줄줄이 꿰고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됩니다.
조선군이 가만히 있던것은 아니어서, 남한산성 내에서도 소규모 부대가 출격하여 청나라군 전초부대를 기습해
전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런 작전은 외부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지만 전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나가기는 불가능했고..... 남한산성 내에서는 외부의 소식을 제대로 알수가 없었습니다.
8도의 근왕병이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지방군은 평시에는 훈련하지 않고 농한기에만 형식적으로 했으며, 지방군
이 훈련을 열심히 하면 오히려 "의심" 을 받기 쉬웠으니.... 그 이유는 인조 자신이 지방군인 황해도 평산부사
이귀의 병력으로 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청군은 손쉽게 각개격파를 노릴 수 있었습니다.
도원수 김자점이 1만 7천 병력을 가지고도 양평에 숨어 나오지 않으며 임경업의 4천이 하릴없이
백마산성에서 웅크리고 있는 가운데, 강원도 김화로 온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 3천은 한 싸움에 괴멸당햇지만 산위에 진을 친 평안 병사 유림의 2천은 적을 물리칩니다.
하지만 남은 병사가 천여명에 불과하니 더 싸울수 없는지라 후퇴했으며 강원도 관찰사 조정호는 검단산에서 패했고
함경도 관찰사 민영휘도 패하고 흩어지는데 이들중 일부는 양평에 주둔한 도원수 김자점에게로 찾아갑니다.
충청관찰사 정세규가 험천전투에서 패한후 전라병사 김준룡의 2천은 용인 광교산에서 홍타이지의 매부 슈무루
양구리 (舒穆禄 揚古利) 를 비롯한 청군의 장수 3명을 조총으로 사살하는등 승전했으나 탄약과 식량 부족으로
수원으로 후퇴하니 전라감사 이시방은 6천 을 가지고도 겁에 질려 공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소멸되어 버립니다.
경상도 관찰사 심연은 3만 속오군을 소집해 북상하며 앞서 보낸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의 8천은 광주 쌍령에 진을
쳤는데.... 청군은 3천으로 선봉 33기가 4천 허완의 진영으로 쇄도하자 겁에질린 조선군은 함부로 총을 난사하다가
탄약이 떨어진 것을 안 청군이 쇄도하자 도주하는데... 좌병사 허완은 말에서 떨어져 도망치는 아군에 밟혀죽었습니다.
그후 청군 3백이 4천명 우병사 민영 진으로 돌진하니 조선군은 총을 난사하다가 화약을 분배하는
중에 폭발사고로 전멸 당했는데.... 1월 28 저 쌍령전투에서 지휘관 8명 중 장수 2명과
부장 5명등 7명이 전사하고 김충선 혼자 살아 패잔병과 함께 후퇴하니 여주에
있던 경상감사 신원등 2만여명 조선군은 공포에 질려 멀리 조령을 넘어 경상도로 후퇴해 버립니다.
김충선 곧 사야가 (沙也可)는 임진왜란때 일본군 장수로 유학을 흠모하던 자라 조선에 귀순해
조선군에게 창술과 검술에 조총술을 가르치니 김해 김씨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받고
자헌대부에 올랐는데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및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도 공을 세운 것입니다.
그의 가문에 전해오는 바에 달하면 광주(廣州) 쌍령 싸움에서 오랑캐 500여명을 베었으나 임금이 항복하자
통곡하며 대구로 돌아갔다는데.... 저 전투는 조선군이 몰살당했는데 500명이나 베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인 그가 3천명이나 데리고 조선에 귀순했다는게 황당한 이야기이듯
말도 안되는 소리라? 가토 진영에서 그의 부하는 많아야 100명도 안되는 수십명 정도였을 것으로 봅니다!
1차 전투에서 승전한 평안병사 유림과 전라병사 김준룡이 후퇴한건 조선군은 조총병인데 단 하루 전투로 총탄과 화약
이 소진된데다가 식량이 떨어졌으나 보급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도원수 김자점의 1만 7천이 인근인 남한산성의
임금을 구원하지 못한것은 "야전에 대한 두려움" 이며 경상감사와 전라감사가 전투 없이 도주한 것은 "공포심" 이라?
제일 큰 문제는 도원수 김자점은 남한산성에서 멀지 않은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들은 함경도에서 동원된 병력과 합세했고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하니 양평의 군세는 17,000명에 달했지만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군대라 편제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 사이 한양은 8일 만에 함락되었고 도원수 김자점은 양평에서 움직이질 않자 답답한 인조는
심기원을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 로 삼고 남쪽의 근왕군을 지휘하도록 했으나,
심기원은 남쪽 근왕군은 만나지도 못한채 북쪽 김자점이 군대를 주둔한 양평으로 갔습니다.
인조가 김자점을 삭탈한뒤 심기원을 임명한게 아니라 그냥 도원수에 임명하였기에 한 군대에 도원수
가 둘인 상황이 벌어지니,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포위를 뚫자는 김자점과 아직 그럴 상황이
아니라며 반대하는 심기원의 의견이 충돌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군대는 이도 저도 못합니다.
남한산성은 원래 피난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임금이 조정을 이끌고 장기간 버틸 식량 등이 없었고
겨울의 혹한은 매서웠는데, 열약한 상황에서 지역의 근왕군들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청군의 포위를 뚫지 못했고, 정예군은 지휘관이 2명인 채로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자점이나 심기원이 장수감이 아닌데도 도원수로 임명한 것은 두 사람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공신으로 인조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인데, 자고로 장수가 유능해 신망을 얻고
군공까지 높으면 역심을 일으킬지 모르니 이를 염려해 임금은 측근을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입니다.
명나라 정통제가 몽골 오이라트를 정벌하기 위해 친정하면서 50만(?) 대군의 총사령관으로 "환관 왕진" 을
임명한 것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16만 대군의 총사령관에 20살 우키다
히데이에를 임명했고 정유재란 14만 일본군 총사령관에 16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임명한 것이 그러합니다.
이는 인조도 반란으로 왕이 됐고 또 이괄의 반란을 겪은 만큼 군사령관에는 능력보다는 믿을수 있는 심복을 임명하는
것이니 이순신이 스스로 죽은 것도, 만약 살랐으면 결국 험한 꼴을 봤을 가능성이 높은데 “장수의 전공이
높으면 임금도 시기하고 하늘도 미워한다”고 했으니 전사하는게 서로 윈윈이라? 아들과 조카의 벼슬은 높아졌으니...
예전에 모문룡 휘하 명나라 수군이 청나라에 항복한지라 그 수군 덕분에 강화도까지 손쉽게 함락되자
결국 인조와 대신들은 견디지 못하고 성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항복하니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니 인조 15년(1637년) 음력 1월, 병자호란이 일어난지 고작 한 달 20여일 만이었습니다.
성 밖에서는 지휘권이 분산되어 통일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는 가운데, 남한산성 내에서도 포위를 뚫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니 12월 29일, 반정공신인 영의정 김류의 주도로 남한산성 포위를 뚫기 위해 조선군은 성문을
열고 나가 청군에 대해 대규모 반격작전을 펼쳤지만 청군의 계략에 걸려 참패해 다급하게 성으로 후퇴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의 지구전에 넘어가지 않게 조선 국왕만을 목표로 진군했는데, 지방에서 농군을 병사로
징집하는 속오군 체계까지 동원했다면, 10만명을 모병해 3-4만에 불과한 청군을 양으로는
압도할수 있었겠지만, 전근대적인 교통사정으로는 전쟁터까지 내보내려면 몇달이 걸릴지 모릅니다.
더구나 지방병들은 도별로 모집되어 축차적으로 전쟁터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숫적 우위도
살리지 못했고, 평소에 전혀 훈련이 안된 오합지졸인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들
로서 누르하치 이래 수십년간 전쟁만을 해온 만주병들을 이긴다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청군은 대포까지 동원해 남한산성을 포위하면서 동시에 계속되는 조선군의 구원을 물리치는 중에 남한산성
내의 인조와 장병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는데 인조가 버티자 결국 강화도를 공격했으니 방어를
맡았던 장신과 김경징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고, 결국 청나라 수군에 단 하루만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맙니다.
모문룡의 부하들이 1633년 100여척 함대를 거느리고 요동반도로 가서 청나라에 귀순했기 때문에 청나라도 수군이
있었으며 모문룡의 부하들은 서해안에서 해적질 하던 자라 서해의 물길을 잘 알고 있었으니 강화도에 상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장신과 김경징은 청나라에 수군이 없다고 여겨 놀다가 당한 것이니 고정관념이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설로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강성하였고, 동해여진(야인여진) 은 소규모 부족들이 난립해 먹잇감이 되는
상황에서 1605년부터 우라 부잔타이와 건주 누르하치의 동해여진 강탈전은 수많은 동해여진족들의 목숨을
위협하였고 두만강 일대에 여진족들이 조선으로 도망쳐 조선 국적 여진인 향화호인(向化胡人)이 되었습니다.
누르하치의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족은 수천명으로 이들은 배를 잘 몰아서 서해안의 어부
가 되었다가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군에 투항하는 자도 있었고 청군의 강화도 공격시
물길과 물때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하여 강화도 함락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도르곤은 강화도 앞 문수산에 도착해 공격하지 않고 홍이포 3~ 4문으로 위협사격을 하며 썰물이
오길 기다려서는 11시경 썰물이 되자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움직이질 못하는 틈을 타서
청군은 작은 배나 뗏목을 타고 도강을 시작하니 조선 수군은 강화도 주변에서 지켜보기만
했고, 청군은 모문룡의 잔당 또는 귀화여진인들의 활약으로 강화도를 단 하룻만에 함락한 것입니다.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봉림대군과 왕족들은 청군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얼마후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로 가게 되는데.... 인조가 항복한 이유는 북남 각지에서 오던
근왕군이 전부 격퇴당한데다가 최후의 거점인 강화도가 함락당했기 때문에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만약 근왕군이 모조리 무너졌어도 강화도라도 사수했다면 대몽항쟁 때와 달리 장기전에 대한
대책도 없던 청군은 철수하거나 인조만 잡아가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인데, 강화도가
함락됨으로써 조선 정부 전체가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항복을 거부했다면 백제 멸망이나 고구려 멸망때 처럼 왕족과 대신이며 수도 한성 부유층은 전원 만주땅으로
잡혀갔을 것이며, 심지어 국왕도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데 남한산성은 극도로 열악한 상황으로 조선군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었으니 병사들은 척화대신들을 청군에 압송하라고 시위를 벌이던 중이었습니다.
음력 1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여러차례 청군과 화평 교섭을 진행하며 몇차례 망신을 당하던
중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단 소식에 마침내 전의를 상실하여 1월 27일에 항복 문서를 보냅니다.
“조선 국왕 신 이종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성지(聖旨) 를 받들건대
‘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책망하는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줄 아니, 넓은 도량을 베풀어 그대가 새로와지도록 허락하고, 성에서 나와
짐을 대면하도록 명한다. 지난날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남조(南朝)의 본보기를 삼으려 한다’ 고 했습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주는 큰 덕에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신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두려운
마음을 품은채 머뭇거리느라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나아가서 용광 (龍光) 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수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신이 3백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일이 어긋난다면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성자(聖慈)
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 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귀순할수 있는 길을 열어주소서”
최명길은 인조의 굴욕을 줄이기 위해, 곤룡포를 입을 것을 허락해줄 것과 삼배구궤두 대신에 홍타이지를 향해
절을 하는 것 정도로 노력을 했지만 용골대는 완강했고, 죄인인 인조가 정문인 남문으로 나오는
것도 허락할수 없다고 거부했으며 김상헌과 정온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니 죽을 용기도 없었다는....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냥(兩), 백은(白銀) 1천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장, 청서피(靑黍皮) 3백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권, 오조룡석
(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 (細麻布) 4백필, 각색 세포 (細布) 1만필, 포 (布) 1천 4백필, 쌀 1만포 (包) 를 정식 (定式) 으로 삼는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홍타이지에게 갓에 철릭 차림으로
“삼궤구고두” 의 항복 의식을 치르는데 세번 엎드려서 각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으니, 아홉차례나 머리를 땅에
찧어 피가 나는 의례인데, 19세기말에 고종은 청나라 사신이 가져온 국서에 3궤 9고두 대신 3궤 8고두를 행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