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1호 :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서울 地藏庵 木造毘盧遮那佛坐像)
이 불상은 현재 종로구 창신동 지장암 대웅전의 삼신불상(三身佛像) 중 중앙에 있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1924년 강재희(姜在喜) 거사가 지장암을 중창하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앉은 높이가 117.5cm달하는 중형의 목조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이 상에서는 푸른 명주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이 발견 되었다. 그 발원문에서 이 불상의 원 봉안처는 조선시대 왕실의 부녀자들이 출가 수행하던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이며, 광해군의 정비인 장열왕후(章烈王后)가 광해군과 세자, 세자빈, 본인 및 작고한 친정부모, 작고한 대군과 공주의 천도를 위해 모두 11존의 불상과 불화를 동시에 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상은 11존상 중 하나이며, 현재까지 밝혀진 유일한 예에 속한다.
이 불상은 당대 최고의 고승 벽암 각성(碧巖 覺性)의 감수 아래 현진(玄眞), 응원(應元), 수연(守衍), 옥명(玉明), 법령(法玲), 명은(明訔), 청허(淸虛), 성인(性仁), 보희(普熙), 인균(印均), 경현(敬玄), 지수(志修), 태감(太鑑) 등 13명의 조상화원(造像畵員)과 성옥(性玉), 승일(勝一), 밀연(密衍), 의인(義仁) 등 4명의 치장(治匠)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17세기 각기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조각승들로 당시 자인수양사 불사(佛事)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불상은 광해군의 정비인 장열왕후가 직접 발원하여 조성한 왕실발원 불사라는 역사적인 가치와 17세기 전국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공동작업으로 이룩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2010.1.4 지정분)
제1622호 : 서거정·기순 필적(徐居正·祁順 筆蹟) 경기도박물관
이 서첩에는 1476년(성종 7) 1월말에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사신 호부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東莞人, 1460년 진사, 자 致和, 호 巽川)과 사신일행을 맞이했던 원접사(遠接使)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글씨가 함께 실려 있으며 표지에는 ‘천사사한진적(天使詞翰眞蹟)’이라 쓰여 있다. 서첩 앞쪽에는 기순이 40일쯤 머문 뒤 3월 11일에 의주 의순관(義順館)에서 당시 통역을 맡았던 사역원정(司譯院正) 장유화(張有華)에게 지어 써준 <오언장시(五言長詩)>가 실려 있고, 서첩 뒤쪽에는 당시 원접사(遠接使) 겸 관반(館伴) 겸 반송사(伴送使)를 맡았던 좌참찬 서거정이 그해 유월 갑술일에 역시 장유화에게 지어 써준 <증장원정서(贈張院正序)>가 실려 있다(앞쪽 탈락). 말미에는 이 서첩을 얻은 사람이 ‘1718년(戊申)에 이 필적을 김홍기(金弘基:자 復初)에게서 얻어 이를 첩으로 장황했다’는 1736년(영조 12) 구월 소망일(小望日)의 발문이 딸려 있다.
조선 초기의 서예유물은 매우 희귀한데, 이 서첩은 원형그대로 남겨진 15세기 조선의 문인명필 서거정의 대표적인 필적이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 사신의 필적이 함께 실려 있어 양국의 교류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필적이다. 각 글씨 끝에는 연월일과 관직, 인명(人名) 그리고 자호(字號)가 기록되어 있고 이 필적의 전래과정을 알려주는 영조 12년의 발문은 작품의 가치를 한층 높여 주고 있다. 서거정이 행서(行書)로 쓴 원문은 그의 문집인 「사가집(四佳集)」 권6 「증장원정서(贈張院正序)」에 실려 있으며, 「통문관지(通文館志)」 권7에도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제1623호 : 성수침 필적(成守琛 筆蹟) 대전선사박물관
표지에 ‘청송서(聽松書)’라고 쓰여진 이 서첩은 16세기 학자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이 당나라 가도(賈島), 두목(杜牧), 이상은(李商隱)과 송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칠언시를 쓴 것이다. 종이 바탕을 줄[行]에 따라 잘라 첩장하였다. 송명흠(宋明欽, 1705~1768)후손의 기증품으로 송명흠의 아버지 송요좌(宋堯佐, 1678~1723)의 [청은당(淸隱堂)]이란 인영(印影)이 있다. 성수침은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 명필로 필적은 드문 편이다. 현재 그의 소자(小字)는 몇몇 전하고 있는 상황이고 대자(大字)는 목판밖에 전하지 않는다. 이처럼 큰 글자로 쓴 작품이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문 예이며 담묵(淡墨)을 즐겼던 그의 특징이 또한 잘 나타나 있다. 서예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제1624호 : 양사언 초서(楊士彦 草書) 서강대학교
16세기 문신·시조작가·초서명필로 유명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필적으로 당나라 저광의(儲光羲)의 오언시 「낙양도(洛陽道)」 5수 가운데 제1수를 쓴 것이다. 원래 첩이었던 것을 근대에 축으로 개장하였다. 양사언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6?)와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초서 명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금강산과 같은 선경(仙境)을 좋아하고 세속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듯이 글씨에서도 당나라 장욱(張旭)과 회소(懷素)의 방일(放逸)한 초서를 매우 애호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양사언의 필적으로 봉래유묵(蓬萊遺墨, 제1539호)(연세대 중앙도서관)은 국한문을 섞어 쓴 자작시문 원고로 문학연구 자료로 귀중하다. 또『근묵(槿墨)』(성균관대박물관)에 실린 시고(詩稿) 등 몇몇 소품이 전한다. 이에 비해 이 오언시 필적은 둥근 원필세(圓筆勢)의 빠르고 거침없는 대자초서(大字草書)로 자유분방하고 도가적 기풍의 예술세계를 가졌던 양사언의 성품과 그가 지향한 초서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초성(草聖)이라 불렸던 그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명작으로 평가되며, 더욱이 뒤쪽에 조선후기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1749년 발문(3건)과 조명교(曹命敎,1687~1753)의 발문이 딸려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제1625호 : 황기로 초서(黃耆老 草書) 오죽헌·시립박물관, 박우홍
제1625-1호 : 황기로 초서-이군옥시(黃耆老 草書-李羣玉詩) 오죽헌·시립박물관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5~1575?)가 당나라 이군옥(李 玉)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다. 그는 낙동강 지류 천보탄(天寶灘) 가에 매학정(梅鶴亭)을 짓고 살았던 처사(處士)로서 회소(懷素)의 방일한 초서를 애호하고 또 회소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동해옹(東海翁) 장필(張弼, 1425~1487)을 따랐다.
이 초서는 회소와 장필을 배워 활달하고 운동세가 많은 획법과 변화로운 짜임을 잘 구사한 예이다. 이 필적은 황기로의 사위 덕수이씨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의 후손인 이장희(李璋憙, 1909~1998)가 수집한 것으로 그의 장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하단 부분에 몇 글자 탈락되었으나 황기로의 묵적 가운데 대폭(大幅)이며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제1625-2호 : 황기로 초서-차운시(黃耆老 草書-次韻詩) 박우홍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5~1575?)가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짓고 쓴 초서이다. 말미에 “축(軸)에 청천(菁川:柳希齡, 1480-1552), 영천(靈川:申潛, 1491-1554), 귤옹(橘翁:尹衢, 1495~?), 송강(松江:趙澄, 1511~1574?), 서하(西河:?)의 시(詩)가 있어 몇번씩 반복함에 그칠 수 없어 이에 시를 짓다”라고 하여 제작동기를 알 수 있으며 말미에 “고산 매학정 주인 쓰다(孤山梅鶴亭主人書)” 라고 한 것에서 진적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필적은 지금의 소장자가 입수할 때 가로로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액자로 개장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도 글씨가 손상되지 않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또 [백봉(白峯)]이란 솥모양 인장〔鼎形印〕이 다섯 군데 찍혀있고 말미에 [태사지후 충신지손(太師之后 忠臣之孫)]이란 장방인(長房印)이 찍혀있는데, ‘백봉’은 안동김씨 김수빈(金壽賓 1626~?)의 호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안동김씨 김선평(金宣平)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의 한 사람이므로 그 후손에게 이러한 인문(印文)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초서 필적은 규모는 작지만 필획이 매우 간정(簡淨)하고 운필이 활달하여 황기로 글씨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는 뛰어난 수작(秀作)이다.
제1626호 : 김현성 필적(金玄成 筆蹟) 김민영
선조~광해군 때의 명필이던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이 1614년에 북애(北崖) 이증(李增, 1525~1600)의 절구와 율시 9편을 행서로 필사한 것이다. 이증은 한산이씨로 예조판서로서 아천군(鵞川君)에 봉해지고 의간공(懿簡公)에 추증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말미의 제사(題辭)에 그 사연이 적혀 있는데, 김현성이 이증의 아들 만사(晩沙) 이경함(李慶涵,1553~1627)과 교분이 있어 필사에 응하였던 것이다. 김현성은 조선전기부터 유행되던 송설체(松雪體)의 명가인데, 특히 성수침(成守琛, 1493~1564) 등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유려한 서풍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시첩의 글씨는 15세기 안평대군을 이은 16세기 조선화 된 송설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63세의 노숙한 필치라는 점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필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바탕을 잘라 장황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며, 특히 말미의 제사를 통해 필사동기와 연대를 알 수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
제1627호 :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 七言詩) 칠장사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이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각행 7자)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되었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裵吉基)의 1966년 발문이 있다. 바탕은 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다만 줄[行] 사이가 좀 더 밝다. 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濟月堂)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칠장사는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한 1623년에 인목왕후가 친정아버지와 아들(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아 중창한 사찰로 이곳에는 인목대비가 썼다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사경>이 전래되었는데(현 동국대박물관 소장), ‘인목왕후 칠언시’와 서풍이 같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어필과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이 어필을 나무판에 모각한 것(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과 검은비단에 금니로 모사한 것이 전하는데(국립중앙박물관, 德 2053) 모두 이 어필과 자형이 같다.
다만 모본에서는 칠언절구 28자를 3행으로 배열하고(각행 10자) 글자 사이를 조절하였다. 조선시대 열성(列聖)의 어필이 많이 모각되었는데,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原蹟)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제1628호 : 효종어필 칠언시(孝宗御筆 七言詩) 국립중앙박물관
효종(孝宗, 1619~1659)이 「제어옥후소천(題於屋後小泉)」이란 어제칠언시(御製七言詩)를 종이바탕에 행초(行草)로 쓴 것이다. 족자에 장황되었는데, 어필 위쪽에 붙인 황색 마름무늬 비단에는 “효묘어필진적(孝廟御筆眞蹟)”이란 제서(題書)가 쓰여 있다. 효종어필로서 어찰(御札) 등이 실린 «효종대왕어필»첩(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롯하여 몇몇 소품(小品)이 알려져 있으며, 대형 목판에 모각한 것도 전한다(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 이에 비해 이 필적은 묵적(墨蹟)으로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크며 또 행초를 섞어 자신감 있게 쓴 점에서 효종어필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제1629호 : 신한첩(宸翰帖) 국립청주박물관, 계명대학교
제1629-1호 : 신한첩-신한첩 1(宸翰帖-宸翰帖 1) 국립청주박물관
효종(孝宗, 1619~1659), 현종(顯宗, 1641~1674), 인조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가 효종의 셋째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보낸 한글어찰을 모은 첩이다. 숙명공주는 청평위(淸平尉) 심익현(沈益顯, 1641~1683)과 혼인하였다. 수록된 어찰은 효종 7통, 현종 2통, 장렬왕후 2통, 인선왕후 54통 등 모두 65통이다. 현재 제1면은 따로 떼어져 액장(額裝)되어 있으며, 제2면은 분실되었으나 사진은 남아 있어 원래 66통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어찰첩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의 «신한첩(宸翰帖)», 오죽헌시립박물관의 “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로서 현종,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숙종의 한글어찰을 수록한 «어필첩(御筆帖)»등과 함께 조선왕실의 한글어찰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또한 한글서체 변천과정에서 고체(古體)에서 궁체(宮體)로 가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대표적인 필적이 다수 수록되어있어 관련분야 연구 자료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첩은 표지가 개장되었지만 첩 크기나 수록 어찰에서 계명대 소장품과 짝을 이루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제1629-2호 : 신한첩-신한첩 2(宸翰帖-宸翰帖 2) 계명대학교
이 첩은 효종(孝宗, 1619~1659), 현종(顯宗, 1641~1674), 숙종(肅宗, 1661~1720),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가 효종의 넷째딸 숙휘공주(淑徽公主)에게 보낸 한글어찰을 모은 것이다. 숙휘공주는 연일정씨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과 혼인하였다. 수록된 어찰은 효종 2통, 현종 3통, 숙종 6통, 인선왕후 18통, 명성왕후 2통, 인현왕후 5통 등 모두 36통이다. 처음의 장황 그대로 남아 있는데, 표지에 “신한첩 곤(宸翰帖 坤)”이란 제서(題書)가 쓰여 있듯이 원래 건·곤(乾·坤) 2첩이었다.
이 첩은 앞쪽에 실린 정제현의 후손 정진석(鄭晉錫, 1779~?)의 1802년 한글 지문(識文)을 통해 제작내력을 알 수 있다. 그중 “건(乾)인 즉 사조(四祖) 어필(御筆)이시오 곤(坤)인 즉 육성(六聖) 언찰(諺札)이시라” 했는데, ‘사조 어필’은 국립청주박물관의 효종·현종·장렬왕후·인선왕후 어찰을 가리키며, ‘육성 언찰’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의 효종·현종·숙종·인선왕후·명성왕후·인현왕후 어찰을 가리킨다. 또 한글 필치가 국립청주박물관의 “○○대왕어셔”나 “○○왕후어셔”라고 쓴 것과 같아 이들 첩이 건·곤으로 함께 장황되어 짝을 이루었다고 추정된다.
이 어찰첩은 국립청주박물관 소장«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 오죽헌시립박물관의 “명안공주 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로서 현종,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숙종의 한글어찰을 수록한 «어필첩(御筆帖)»등과 함께 조선왕실의 한글어찰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제1630호 : 숙종어필 칠언시(肅宗御筆 七言詩) 경기도박물관
숙종(肅宗, 1661~1720)이 인조 때의 명상(名相)이던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문집 『백헌집(白軒集)』을 살펴본 뒤 이경석 후손에게 내려준 어제어필의 칠언시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묵적(墨蹟)의 숙종어필 가운데 가장 신빙할 만한 예로서 채색꽃무늬를 찍은 어찰지(御札紙)를 사용한 이 어제어필은 열성어제(列聖御製)인 『숙종어제(肅宗御製)』에도 실려 있어 어필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전서(篆書)로 ‘숙종성제보묵(肅宗聖製寶墨)’ 이라고 음각한 갑(匣)에 보관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이경석이 1668년 11월에 현종(顯宗)으로부터 하사받은 궤장(几杖) 및 그것을 받았을 때의 잔치 장면을 묘사한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보물 제930호)과 더불어 의미 있는 필적이다.
제1631호 : 영조어필(英祖御筆)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원박물관
제1631-1호 : 영조어필-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祠宇祭文原稿)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1694~1776)가 1726년 11월 6일에 친어머니 숙빈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생신을 맞아 숙빈묘(淑嬪廟)에 올렸던 제문의 원고이다. 주홍색 화문 비단에 싼 표지에는 “어제친제제문초(御筆親祭祭文草)”와 “영조어제어필, 숙빈최씨궤연 및 정빈이씨사우치제문 「발본」(英祖御製御筆, 淑嬪崔氏几筵 及 靖嬪李氏祠宇致祭文 「抄本」)”이라 쓰여 있다. 또 제문 뒤에는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眞宗:孝章世子, 1719~1728)의 생모인 정빈이씨(靖嬪李氏, 1694~1721)에게 올리는 짧은 축사(祝詞)도 함께 쓰여 있다. 숙빈최씨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7세에 입궁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었고, 1694년 9월 13일 창덕궁에서 영조를 낳았으며, 1718년(숙종 44) 3월 19일 49세로 사망하자 그해 5월 12일 양주 땅(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냈다. 영조는 1725년(영조 1)에 사친(私親:친어머니)을 위해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하여(현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七宮) 어머니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소령묘(昭寧墓), 육상묘(毓祥廟)이던 것을 1753년에 소령원(昭寧園),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의 어필은 전반적으로 희귀한 편이다. 하지만 영조는 역대 국왕 중 어필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에 속한다. 시문, 판각으로 전하는 현판, 글씨 등 내용과 크기에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이 원고는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낱장이 아닌 왕실의례용 공첩(空帖)에 직접쓴 희귀한 예이다. 안진경체를 토대로 하고 영조의 성정기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조 특유의 서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33세의 필적이다. 내용 또한 사친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제1631-2호 : 영조어필-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昭寧墓碣文原稿)
영조가 51살 때인 1744년(영조 20) 7월에 사친 숙빈최씨의 소령묘의 묘갈문을 짓기 위해 쓴 초안 원고이다. 이 원고에는 어머니 조상의 이름과 추증 연월, 어머니가 궁에 들어간 나이 등이 비어 있는데, 현재 숙빈최씨의 무덤 소령원(昭寧園)에 세워진 묘갈문에는 모두 채워져 있으며 내용도 일부 추가되었다. 또 원고에서는 영조가 전면대자(前面大字)를 쓰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비음(碑陰)을 쓴다고 했는데, 현재 묘갈문에는 전면대자와 음기 및 위쪽 전자(篆字)를 영조가 쓰고, 묘표(1718년)·묘비(1725년 신도비)·묘갈을 세운 곳과 묘갈을 세운 월일을 서평군 이요에게 쓰게 하여 묘갈 받침대인 농대석(籠臺石)에 새긴다고 되어 있다. 이 원고는 영조가 즉위한 뒤 사친에 대한 추숭사업의 과정에서 남긴 필적의 하나로서 영조의 까다로운 성격이 그대로 연상되는 영조 노년의 독특한 어필서풍을 보여준다. 이 원고는 장서각에 소장된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와 더불어 의미 깊은 필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1631-3호 : 영조어필-읍궁진장첩(英祖御筆-泣弓珍藏帖) 수원박물관
이 서첩은 영조(英祖, 1694~1776)의 여러 어제어필을 모은 것이다. 겉표지에 “영조어필 읍궁진장(英廟御筆 泣弓珍藏)”이라 쓰여 있는데, 읍궁이 송시열(宋時烈)의 은거처였던 괴산군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3곡 읍궁암(泣弓巖)과 어떤 관계인지는 미상이다. 서첩 앞쪽에 “1761년 정월 16일에 내의원(內醫院)에 답한다(辛巳正月十六日藥院批)는” 부전지(附箋紙)가 있는 비답(批答)을 비롯하여 사언시고(四言詩稿)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사언시고 중에 1770년(영조 46)7월 11일에 쓴 ‘서시옥당(書示玉堂)’은 충자(冲子:世孫 정조)와 옥당(玉堂:홍문관) 관원에게 내린 것으로 『임하필기』에 관련내용이 보인다. 또 그때 썼을 것으로 보이는 ‘학사관(學士館)’ 대자(大字)도 실려 있다. 이 어필첩은 영조어필을 모은 몇몇 서첩 가운데 수록 필적이 정선되고, 영조 노년인 1761년, 1765년, 1770년의 연대가 있으며, 조선후기 궁중장황으로 꾸며지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어필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제1632호 : 정조어필(正祖御筆) 국립(중앙·진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제1632-1호 : 정조어필-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正祖御筆-贐提學鄭民始出按湖南)
국립진주박물관
이 서축(書軸)은 1791년 2월에 정조(1752~1800)가 호남으로 부임하는 정와(靜窩) 정민시(鄭民始, 1745~1800)를 위해 지어 써준 행서 칠언율시이다. 바탕은 짙은 분홍 비단으로 금니(金泥)와 은니(銀泥)로 모란, 박쥐, 구름무늬 등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글씨 앞쪽에 「시경(詩經)」 「천보구여(天保九如)」 구절을 새긴 [如山如阜如岡如陵如川之方至如月之恒如日之升如南山之壽如松柏之茂]이란 타원형 양각인(陽刻印)이 찍혀있고 말미에 [홍재(弘齋)][만기지가(萬幾之暇)]라는 정방형 음양각인(陰陽刻印)이 찍혀 있다.
이 서축은 경남 사천 출신의 재일교포사업가 김용두(金龍斗)씨가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일본식으로 장황되어 있다. 축을 보관하는 오동상자의 뚜껑 겉면에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가 1930년 윤6월에 “정조황제어제어필(正祖皇帝御製御筆)”이라 쓴 제서가 있고, 뚜껑 안면에는 친일인사 정병조(鄭丙朝,1863~1945)의 같은 해 발문과 일본승려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의 1940년 발문이 쓰여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문상정사(題汶上精舍)>와 함께 정민시에게 내려준것으로 이런 형식의 정조어필 가운데 서예적 기량이 가장 높은 40세 기년작(記年作)이다.
제1632-2호 : 정조어필-제문상정사(正祖御筆-題汶上精舍) 국립중앙박물관
1798년 9월에 정조가 정와(靜窩) 정민시(鄭民始, 1745-1800)의 문상정사(汶上精舍)에 대하여 지은 어제어필 칠언시이다. 옅은 분홍 종이에 금니로 운룡문(雲龍紋)을 그린 화려한 바탕에 행서로 쓴 것이다. 머리와 말미에 각각 [규장지보(奎章之寶)]와 [홍재(弘齋)]·[만기지가(萬幾之暇)]라는 정조의 어용인(御用印)이 찍혀 있다. 현존하는 정조어필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며 보존상태도 매우 좋다. 또한 연청색과 상아색 비단으로 꾸민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궁중표장(宮中表裝)을 보여주고 있다. 서체 역시 정조가 이전에 쓴 글씨보다 더욱 두터운 필치에 파임이나 갈고리부분에서 안진경의 유풍이 두드러져있다. 승하 2년 전에 쓰인 것으로서 만년의 대표작으로 예술성이 뛰어나 정조어필의 최고작으로 평가된다. 이 서축은 내용·서체·장황등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궁중글씨문화를 대표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1632-3호 : 정조어필-시국제입장제생(正祖御筆-示菊製入場諸生) 한국학중앙연구회
1798년 9월 9일 성균관에서의 국제(菊製)에서 정조가 낸 어제(御題)의 뜻을 유생들이 이해하지 못해 백지와 거친 답안이 나오자, 정조가 여러 유생에게 내보였던 초고의 별유(別諭)이다.
이에 관한 내용은 「승정원일기」, 「정조실록」, 「홍재전서」에서 모두 확인 된다. 닥종이 3장을 이어붙인 큰 폭으로 글자 사이에 더 써넣거나 적절치 않은 글자를 먹으로 뭉개고 다시 쓰기도 했다. 별유 앞쪽에 “대다수 선비의 실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바로 나의 수치이다. 그래서 이렇게 초기(草記)를 환급하여 특별히 그대들에게 유시하는 것이다”라는 구절과 「정조실록」에 “어서(御書)로 제생에게 유시하기를…”라는 구절을 통해 이것이 어필 초고(草稿)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종이바탕 위쪽에는 이 별유를 게시하기 위해 잘랐던 칼집 자욱이 여섯 군데 보인다. 이것은 조선시대 임금이 성균관 유생에게 내린 별유로서 보기 드문 예이며, 정조말년의 다른 어필에 비해 필치가 활달하며 서폭도 매우 크다. 또한 정조의 모훈(謨訓) 자료로 봉모당(奉謨堂)에 전래되어 온 점에서도 귀중한 필적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당시 행사의 면모와 제왕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어 역사적·학술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가치가 인정된다.
(2010.2.24 지정)
제1633호 :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龜尾 大芚寺 乾漆阿彌陀如來坐像)
대둔사 건칠여래좌상은 정상계주만 이후의 보수일 뿐 원래의 상태가 잘 남아 있는 작품이다.
X-ray 촬영 결과 상호와 불신은 건칠로 제작되고 양손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균형잡힌 비례와 이중의 대의를 입은 착의법, 감탕기법으로 만들어 붙인 나발, 양 무릎 밑으로 모아진 양쪽의 대의자락 그리고 왼쪽무릎에 늘어진 소매 자락 등에서 고려후기 14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더구나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은 나주 심향사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 몇 사례가 있을 뿐인 귀한 재료인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13세기의 복잡한 형식에서 점차 단순해져가는 단계에 해당하는 양식을 보이는 작품으로서 건칠이라는 재료적 특성과 1m(105.5cm)가 넘는 크기다.
비록 이 불상의 제작연대와 조성주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경북지역에서 드물게 확인되는 건칠기법으로 일정한 두께로 완성도 높은 불상을 만들어 낸 점에서나 고려후기 불상에서 조선 초기 불상으로 이어지는 불교조각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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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3호 |
제1634호 |
제1634호 :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聞慶 大乘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及 腹藏遺物)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과학적 조사(성분분석, X-ray)를 하던 중 불상 의 머리에서 “大德五年辛丑五月二十日 宮闕都監錄事別將丁承說印出”의 묵서가 적힌 기록이 발견되어 연대는 1301년에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일체보협인다라니(1292년)와 태장경만다라에도 연대가 있고, 묵서가 적힌 향낭 등도 출토되었다. 이 다라니를 포함한 복장물은 처음 불상을 제작하였을 때에 납입한 것으로 추정되어 이 아미타여래좌상이 14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엑스레이 촬영 결과 정상계주 역시 신체와 같은 동으로 제작되었음이 밝혀져 현재 상태의 정상계주 표현이 원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도 확인된다. 대체로 13세기말 14세기의 고려불상이 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 불상 계통이 개성지역에서 유행하였던 것에 비해 이 문경의 대승사 불상은 그 이전 시기인 고려중기 불상의 전통을 이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이 전통은 역시 13세기로 추정되는 서울 수국사의 아미타불상이나 청양 장곡사의 약사불상(1346년)으로 전개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으로 평가된다.
이 불상은 묵서명 다라니를 통해 1301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고려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특히 이 시기 유행한 금동불상 중에서 조형적 완성도가 비교적 높고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하다.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복장에서 수습된 다라니 12매는 고려 충렬왕 18년(1292)과 27년(1301)경에 판각 또는 인출되어 금동아미타불조성시에 불복장에 납입(納入)되어진 것으로 “大德五年五月二十日 宮闕都監綠事別將丁承說 印出”의 묵서명은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미타불조성에 있어 필수적인 다라니로 흩어져있는 불복장 일괄유물을 체계화시키는데 보완이 되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복장유물
1. 아미타삼존다라니 (충렬왕27년 1301, 印本 다라니로서 ‘大德五年(1301)辛丑五月二十日宮闕都監綠事別將丁承說印出’의 墨書가 있음)
2. 금강계만다라 (충렬왕18년 (1292)刻, 印本 다라니. 至元 29年(1292) 僧齋色開板의 간기와‘張頤’의 묵서있음)
3. 아자범자원상태장계만다라 (고려후기, 인본(印本) 다라니로서 ‘同願戒淸’, ‘同願僧鳳’의 시주자(施主者) 묵서(墨書)가 있음)
4. 향낭 (고려후기, 향낭(香囊) 표면에 묵서(墨書)가 있음)
제1635호 :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尙州 南長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이 불상은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원문에 따르면, 순치 2년(조선 인조 23, 1645)에 수많은 사부대중의 참여하고, 지희(智熙)스님의 증명 아래 청허(淸虛), 영색(英賾), 현욱(玄旭), 천휘(天輝), 나흠(懶欽), 법찬(法燦) 등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 제작의 수조각승 청허는 17세기 대표적인 조각승 청헌(淸憲)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 불상은 17세기 전반기의 특징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데, 즉 양감이 강조된 방형의 큼직한 얼굴, 당당한 어깨, 넓고 안정된 무릎, 강직한 힘이 느껴지는 선묘를 추구하여 건장하면서도 평담한 형태미를 보여 주는데, 청헌의 작품과 양식적으로 흡사하다.
한편 이러한 형태미는 임진왜란 이후 자존심을 회복한 불교 재건사업과 맞물려 새롭게 대두된 양식적 경향으로 이해된다. 남장사 삼존상은 발원문을 통해 아미타·관음·대세지의 아미타삼존형식의 상으로 관음과 대세지 보살상의 착의형식에서 변화를 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례이다. 또한 17세기를 대표하는 청허 유파에 의해 조성된 작품 중에서 비교적 연대는 늦어나 조각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대표작품으로 볼 수 있고, 조성연대가 분명하여 조선 후기 조각사 연구의 기준자료가 되는 귀중한 작품이다.
제1636호 :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榮州 浮石寺 石造釋迦如來坐像)
부석사 자인당에는 거의 같은 규모의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2구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이며, 1구는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의 도상특징을 보여준다.
이 삼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1.5km 지점에 위치하는 東方寺址에서 1957년에 옮겨 온 것이다. 이들 삼존 중 비로자나불 2구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20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으로 지정되었다. 자인당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두 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7사자, 합장 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좌 뒷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은 특이한 예로 주목되며, 높고 화려한 대좌는 양감이 강조된 불상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삼단대좌와 불상은 다소 장식화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의 전형양식을 보여주고 있고, 보물 제220호와 같은 사지에 유존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삼불(삼신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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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7호 :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醴泉 龍門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이 여래상의 몸 안에서는 원문과 시주자 목록 두 장이 발견되었는데, 1515년 4월 9일에 고쳐 만들었다는 개조(改造)이라는 개조기록을 비롯하여 이를 만든 화원과 목수 철장의 이름 그리고 수백 명에 이르는 시주자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다. 상화원(上畵員) 이영문(李永文)의 주도하에 만들어졌음을 밝혀 승려가 아닌 일반 장인에 의해 주도된 16세기 전반의 중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이중의 대의를 걸친 불상으로 가슴과 옷주름, 무릎과 발 등의 표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신체의 볼록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 특징이다. 특히 눈 꼬리가 길고 앞으로 튀어 나온 양감 있는 얼굴 모습과 자연스러운 옷 주름 등은 조선전기인 15세기의 전통이 남아있어 16세기에 이르러 평면적인 경향으로 변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16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명문불상이 극히 적게 남아 있는 조선전기의 조각 상황, 우수한 조형성 등에서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제1638호 : 구미 수다사 영산회상도(龜尾 水多寺 靈山會上圖)
1731년에 조성된 이 불화는 도익(道益) 등 4명의 화승이 제작한 석가모니후불도이다. 8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 제자, 사천왕, 8금강 일부, 타방불 등이 본존인 석가모니를 둘러싸고 시립하였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권속들이 작게 묘사되어 자연스럽게 본존에게로 보는 이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
불, 보살의 원만한 상호와 녹색과 적색을 주조로 한 차분한 색조, 천의와 법의를 가득 메운 화려한 문양, 균형 잡힌 안정된 신체표현, 유려하면서도 세밀한 필치 등 18세기 전반기 불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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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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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9호 : 대구 동화사 보조국사지눌진영(大邱 桐華寺 普照國師知訥眞影)
고려시대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으로, 흰색의 장삼과 가사를 입고 등 높은 의자에 앉아 석장을 쥐고 오른쪽으로 몸을 튼 자세로 앉아 있는 국사의 모습을 그렸다.
송광사 국사전 보조국사 진영(1780년)과 동일한 초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섬세한 필치의 인물묘사와 담채색에 가까운 옷의 채색기법 등에서 그보다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화사 사명당대사진영(보물 제1505호)과 세부표현 및 필선 등 화풍이 매우 유사하여 동일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므로 보조국사진영 가운데 시기가 가장 올라가며 특히 화질의 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판단되었다. 현존하는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 가운데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제1640호 : 문경 김룡사 영산회괘불도(聞慶 金龍 寺 靈山會掛佛圖)
1703년에 수원(守源)을 비롯한 6명의 화원이 제작한 괘불도로, 오른손을 내리고 서있는 석가모니와 그를 둘러싼 많은 권속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한 모습은 당시 상주, 문경 등 경상북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괘불도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많은 인물들을 배치하면서도 불격(佛格)에 따라 크기에 차이를 두어 표현함으로써 권속 간의 위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본존과 멀어질수록 크기를 작게 하여 본존을 더욱 돋보이게끔 하였다. 불, 보살을 제외한 인물은 바림질기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10대 제자와 사천왕, 팔금강은 세밀하고 능숙한 필치가 돋보인다.
이 괘불도는 17세기 경상도 지역의 괘불도 양식을 계승하는 한편, 이후 봉정사 괘불도(1710년), 상주 남장사 괘불도(1788년)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영남지역의 영산회괘불도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유려하면서도 세련된 필치와 정연한 구도, 적색과 녹색의 안정감이 있는 색감이다.
제1641호 : 상주 남장사 감로왕도(尙州 南長寺 甘露王圖)
이 불화는 1701년 탁휘(卓輝) 등의 화승이 그린 감로도로서 18세기의 감로도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각 장면 옆에는 방제를 적어 내용을 밝히고 있어 감로도의 도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필치가 유려하며, 채색은 분홍색과 노란색 등 밝은 채색을 사용하여 화면 전체가 밝아 보이는 한편 금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화려한 느낌을 준다.
화면을 3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칠여래와 인로왕보살, 지장보살, 관음보살을 배치하고, 중단에는 제단과 그 앞에서 의식을 행하는 승려들, 하단에는 고혼들의 다양한 모습을 질서정연하게 묘사한 이 감로도의 구성은 차후 18세기 감로도의 전형을 이루었다. 남장사 감로도는 감로도 도상 변천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가가 그룹별 도상의 묘사도 뛰어나다.
제1642호 : 안동 봉정사 영산회괘불도(安東 鳳停寺 靈山會掛佛圖)
이 그림의 화면구성은 기본적으로 경상도 지역 영산회괘불화 도상과 유사하나 좌우 8구의 협시보살을 비교적 크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앙에 커다랗게 표현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8보살과 10대 제자가 둘러싸고 있는 간단한 구도를 취하고 화면에 도상들을 부각시켜 꽉차게 묘사하였다.
입상의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과 권속들이 둘러싼 이와 같은 형식은 18세기 경상북도에서 유행하던 것인데, 다른 작품에 비하여 보살이 본존의 어깨부분까지 올라오는 등 크게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불보살상의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양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육신선과 옷의 처리는 비교적 굵은 선묘로 힘 있고 유연하게 처리한 것이 돋보인다.
색채는 주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천공에는 백색 화문을 흩뜨리고, 황색과 분홍색, 녹색 채운을 활용하여 화사함을 더하고 있다. 아울러 보살상의 하반신 수식 장식에는 금박으로 처리하여 포인트를 주고 있다. 이 작품은 18세기 괘불탱 중에서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풍도 뛰어난 작품이다.
제1643호 : 안동 봉정사 아미타설법도(安東 鳳停寺 阿彌陀說法圖)
이 그림은 조선조 후기 아미타설법도상의 규범이 되며 또한 17세기와 다른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회화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1713년 도익(道益) 등이 조성한 아미타불화로서,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제자, 벽지불, 사천왕, 팔금강 등을 배치하였다. 다른 불화에 비해 본존의 비중을 작게 함으로서 다수의 권속들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화면을 구성하였다. 원만한 상호묘사와 균형 잡힌 신체묘사, 유려한 필치, 금니의 화문 등 동일한 화승이 제작한 1731년 수다사 영산회상도 및 삼장보살도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제1644호 : 예천 용문사 천불도(醴泉 龍門寺 千佛圖)
천불도는 유존 사례가 극히 드물어, 1709년에 화승 도문(道文),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이 제작한 용문사 천불도는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 천불도는 석가팔상도와 같은 시기인 1709년 제작된 그림으로 당시 불사와 후원자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질서 정연한 배치, 이지러짐이 없는 형상과 필선 등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현존하는 천불도는 선운사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는 1754년 작품이 있을 뿐 매우 희귀하다. 또한 1754년 선운사 천불도가 모두 5폭으로 그려진데 반하여 한 폭에 천불을 모두 그린 것으로, 현존 천불도 가운데 시기가 가장 앞설 뿐 만 아니라 많지 않은 18세기 초반 불화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후기 천불신앙을 전해주는 예로서도 중요하다.
제1645호 : 안동 광흥사 동종(安東 廣興寺 銅鍾)
16세기에 만들어진 범종으로는 백련사종(白蓮寺鐘, 1569년), 안정사종(安靜寺鐘, 1580년)과 태안사종(泰安寺鐘,1581년), 광흥사종(廣興寺鐘, 1583년), 갑사동종(甲寺銅鐘, 1584년)등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광흥사종은 전통형을 주로 따른 작품으로 17세기 전형적인 전통형종으로 정착을 이루어 나가는 과도기적 경향을 보이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경향은 갑사동종이 중국종 양식을 따르면서도 한국종 양식을 가미하여 적절히 혼합을 이루는 데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광흥사 동종은 현존 수량이 얼마 되지 않는 16세기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비록 크기가 60cm정도에 불과한 중종(中鍾)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세부의 문양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절제된 안정감을 보여준다. 특히 안정된 자세와 우아한 의습, 섬세한 보관과 얼굴을 지닌 보살입상은 4면에 새겨져 이 범종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범종은 조선 중기 동종의 대표적인 특징과 양식을 잘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된 명문의 내용을 통해 조선중기 장인사회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제1646호 :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初雕本 佛說迦葉赴佛般涅槃經) 불교중앙박물관
이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은 11세기에 판각한 초조대장경에서 인출한 것으로,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이다. 재조대장경인 해인사대장경 소재 본은 서명이『가섭부불반열반경(迦葉赴佛般涅槃經)』으로 되어 있다. 3장(張)에 불과한 짧은 단권경(單卷經)임에도 문자 간에 차이가 있어서, 초조장경과 재조장경의 비교연구 및 서지학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현재 국내에 전래되고 있는 초조본 가운데 불복(佛腹)에서 수습된 사례가 분명하게 확인된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은 실정인데, 조계종 불교문화재 일제 조사 과정에서 수습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례로 평가된다.
판각술도 뛰어나고 지질도 대단히 우수하여 광택이 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고려의 우수한 인쇄술을 보여주고 있다.
제1647호 : 길흉축월횡간 목판(吉凶逐月橫看 木板) 성주군 심원사
이 책판은 고려 고종 6년(1219) 6월에 부석사에서 판각한 것으로 판각장소와 년대가 분명한 책판으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한다. 고려시대의 책판으로 현존하는 유물로는 고려 고종23년(1236)에서 38년(1251) 사이에 판각된 고려 재조대장경인 팔만대장경판(국보)과 불교관련 서적의 책판이 대부분이고, 일반도서의 책판은 수종에 불과하다.
이 책판의 성격은 인간이 범백사(凡百事)를 행할 때에 날짜에 따라 정해진 길흉(吉凶)이 있다고 보는 성명학(星命學 : 운명학) 및 오행사상(五行思想)에 따라, 사안(事案) 별로 길일과 흉일을 월별로 나누어 횡간식(橫看式)으로 기록한 것으로, 택일(擇日)에 참고하기 위하여 관련되는 각종 유서(類書)에서 휘집한 선택서(選擇書)의 일종이다. 한 면에는 흉일에 속하는 구초일 종식(九焦日種植) 등 11가지 사안을 제목화 하여 제시하고, 월별로 해당 일자를 간지로 표시하였는데, 그중에서 장단성일(長短星日)과 천지앙일(天地殃日)조에는 장문의 주석을 달아 이 날을 범했을 때 따라오는 모든 재앙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실수로 장단성일을 범한 경우에도 광수공덕(廣修功德)의 방법으로 재화(災禍)를 면할 수 있다고 한 것인데, 이는 불교를 통하여 공덕(功德)을 쌓으면 재앙을 면할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오행사상(五行思想)과 결부된 성명학(星命學)과 불교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보여주는 자료로 생각된다. 당시 대찰인 부석사에서 원당주(願堂主)가 이름을 밝히며 이러한 책판을 간행하였다는 것은 포교와 방식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다른 1면에는 밭갈기에 좋은 날 등 농사와 관련된 길일에 속하는 사안 20가지가 같은 방식으로 열록(列錄)되어있다.
이 책판은 비록 1장에 불과하나 판각시기와 판각장소 및 판각자가 밝혀진 책판으로는 초기의 것에 속할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일반인의 생활과 관련된 사안들이라는 점에서 13세기 초의 불교학, 서지학 및 민속학적으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
제1648호 :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
(醴泉 鳴鳳寺 境淸禪院慈寂禪 師陵雲塔碑)
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境淸禪院慈寂禪師陵雲塔碑)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승려 자적선사(慈寂禪師, 882~939년)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로 선사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의 명으로 태조 24년(941)에 세운 탑비(塔碑)이다.
이 비의 음기(陰記)에는 10行의 음기가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도평성(都評省)에서 홍준화상(洪俊和尙:慈寂禪師) 중도(衆徒)의 우법사(右法師)에게 보낸 첩문(帖文)과 탑비의 조성과정에 관한 것이다.
특히 첩문은 이두문(吏讀文)으로 작성된 공문으로 고려 초기의 공문서의 양식과 당시 이두의 용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비문의 일부가 결락되어 있으나 비문의 중요 내용은 거의 파악이 가능하며 비의 형태 또한 귀부의 머리부분만 결손 되어 있을 뿐 그 잔여 부분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탑비의 주인공인 자적선사는 여주 고달원의 원감대사를 조사로 하고 그의 뒤를 이은 창원 봉림산문의 개산조 진경대사의 법통을 다시 이어 받음으로써 혜목산문 또는 봉림산문의 선맥을 고려시대까지 전승시킨 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탑비의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 최언위가 짓고 비문의 서체는 중국의 명필 구양순의 필적을 집자하였으며 고려 최초의 이두문자까지 남아 있어 고려초기의 문장과 서예를 잘 보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문은 고려초기의 불교사와 예술사 연구 및 국어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제1649호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
(서울 開運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發願文)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단엄한 상호, 세련되고 뛰어난 조각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감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 등이 잘 어우러진 매우 완성도 높은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불상은 1280년에 중수된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더불어 현재까지 발견된 고려후기 불상 중에서 1274년이라는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불상은 적어도 13세기 전반에는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이 매우 드문 현실에서 이 불상은 더욱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1m가 넘는 큰 규모에 아산 축봉사라는 원래의 봉안 장소 및 1274년의 하한연대, 우수한 조형성은 물론 현재의 보존 상태 또한 매우 좋은 편이다.
제1650호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
(서울 開運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腹藏典籍)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 전적의 고사경(古寫經)과 고판경(古板經)은 사경체자(寫經體字)와 사경형식(寫經形式)으로 되어 있어 국내 전존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판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사경형식으로 되어 있는 자료의 권수제(卷首題)는 수당대(隋唐代) 및 신라사경의 형식과 동일하며 행자수(行字數)도 26행 17자본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고판경의 경우도 24행과 17자본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대체로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사성(寫成) 또는 간행된 화엄경으로 진본(晉本, 60권), 주본(周本, 80권), 정원본(貞元本, 40권)등 3본 화엄경이 모두 고루 들어 있다. 시기적으로 형태적으로 매우 희귀한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와 함께 서지학, 서예, 화엄경 판본 연구 및 불교사 연구 자료로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