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5.수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출 20:3
*제목; 십계명(2) 코람데오
1. 다정도 병이다.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첫째는 말을 하지 못함이요,
둘째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음이다.
또 셋째로는 “다정(多情)”이다.즉, 너무 많이 사랑하면 마음이 아프다. 사랑도 적당히 해야 한다. 적당히 사랑한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너무 사랑하면 우리는 기대하기 시작한다. 상대도 그런 사랑을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특히 사람이라는 동물은 그렇지가 않다. 상대가 많이 사랑해주면, 처음에는 고맙다가 점점 더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먼저 사랑한 사람은 결국 상처를 입게 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면, 갚음을 기대치 않고 사랑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고려시대 문신인 이조년의 시조가 떠오른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3)
이화(梨花)에 월백(月白)ᄒᆞ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 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ᄂᆞᆫ
다정(多情)도 병(病)인양ᄒᆞ야 잠못드러 ᄒᆞ노라
- 이조년 -
다정은 항상 병이 된다. 하나님을 우리를 향한 마음 때문에 얼마나 많이 아프셨을까? 그래서 결국 독생자 외아들을 죽여야 하는 지경(?)까지 가신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배워보자.
2. “나 외에” (알 파님)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여기서 “나 외에”는 히브리어로 “알 파님”이다. 굳이 영어로 해석하자면 “before my face”이다. 나와 너의 얼굴 사이에 즉, 나와 너의 관계 사이에 다른 것을 끼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유일신론의 주장하시는 소리가 아니다. 신앙의 정결성(순수성, 단일성 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을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유목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백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편 23편)이신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이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달려졌다. 그들의 주 업이 목동에서 농사로 바뀌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유목신”이 아니라 “정착신”이 필요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유치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간다. 이를 종교라고 부른다.)
그런데 당시 가나안에는 이미 정착신이 존재했다. 농사의 신(비를 관장하는 신)인 “바알”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아울러 바알 신을 함께 섬기기 시작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가장 첫 번째로 제시하는 삶의 원칙이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즉, 너희와 하나님 사이에 엉뚱한 것들은 놓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가리게 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점 퇴색시켰다. 우상을 두는 것 자체보다도 이 우상이 하나님을 가리는 것이 더 큰 문제요 죄이다.
삶에 따라 요구(기도제목?)도 달라진다. 그런데 요구에 따라 우리는 신앙관이나 신관도 바꾸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는 삶을 잘 살아야 혹은 삶의 환경을 잘 구성해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음성과 뜻과 얼굴을 가리게 하는 것들을 제거해 나가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
첫 이스라엘은 “바알”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 그들은 보다 현실적인 신에 이끌려 생명을 주시는 여호와보다 밥을 주는 바알을 더 많이 좇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주로 바알을 좇는다. 이것이 바로 “종교 혼합주의”이다.
이러한 종교혼합주의에 온 몸을 불살라 대적한 사람이 있다. 바로 “엘리야”이다. 그는 혼자서 대세(?)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한다. 그래서 결국 승리한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이름의 의미가 참 새롭다.
“엘리야”= “리”(나의) + “엘”(하나님은) + “야”(오직 여호와뿐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종교혼합주의에 물들어 있다. 분명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나, 그 보다도 더 바을(맘몬, 돈)의 말을 잘 듣는다.
이제 우리도 “엘리야”를 외쳐야 할 때가 왔다. 왜냐하면 밥을 얻고 생명을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밥과 생명을 모두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3. 우리의 궁긍적 관심을 돌려라!
이제 밥에서 생명으로, 생활에서 삶으로 그 관심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이결국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신학자 ‘틸리히’는 그래서 하나님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다음 두 가지 구절을 깊이 가슴에 새김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려 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5)
밥도 중요하다. 그러나 밥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밥을 주시는 생명을 잊어버리지 말라. 이것을 바꾸는 이스라엘은 결국 망했다. 너도 망의 길을 가려는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호 2:8)
너가 그렇게 좋아하는 밥도 바알을 위하여 쓰는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이를 잊지말라!
이제 다시 너의 심장에 선포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3)
하나님과 너 사이에 다른 것을 끼우지 말라. 오직 하나님 앞에 너, 너 앞에 하나님만 세우라.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이를 칼빈은 “코람데오”라고 표현했다.
첫댓글 십계명의 제일계명은 우리를 위한 계명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알 파님) 우상을 세울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는 전혀 영향력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은혜를 놓칠까봐 "노심초사"하시는 마음이 바로 제일계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