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박 완 서
“나한테 업히지 않겠어요?”
그 여편네는 정말 나에게 등까지 들이댄다. 나를 얕잡고 있었다.
“내가 업히면 아마 진창이 댁의 장화 속까지 넘쳐들걸요.”
이런 대화를 나와 그 여편네는 형편없는 진창길 한가운데서 주고받았다.
정말 형편없는, 이것이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이 진창길에 긴 치마에 고무신 차림으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이미 버선이나 신 꼴을 돌보기는 단념하고 있었지만 이곳 진창은 그저 진창과는 달라 그 저변에 집요한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내 발을 빨아들여 도무지 놔주려 들지 않았다. 천신만고 발을 빼면 영락없이 고무신은 진창 속에 남게 마련이었다. 다시 고무신 속에 발을 넣어 끌어올리자니 그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 보행인들 얼마나 더뎠겠는가.
그 여편네와 나는 처음부터 동행이었던 것은 아니고 진창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장화를 신은 그녀가 뒤에서 따라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와 내가 아주 생면부지의 행인끼리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 한 동네 한 이웃에 살면서 말을 건네보기만이 오늘이 엉망진창 속에서 처음이었다.
우리집 장독대에 올라가 장을 뜨려면 그녀네 뒤뜰과 둬뜰로 면한 그녀의 남편의 화실이 보였다.
늘 고담(枯淡)한 물빛 항아리를 그리던 부스스한 사나이. 그림에 대한 안목이 별로 없는 나는 그가 늘 같은 그림만 그리고 있는 것같이 보일 만큼 그는 늘 항아리만 그렸었다. 그의 화실에는 참 여러 모습의 항아리 그림이 첩첩이 늘어갔다.
그러던 것이 요즈음은 통 화가가 보이지 않더니 그림까지 치워지고 그 방에는 딴 살림이 들어섰다. 방을 세놓은 모양으로 좁은 뒤뜰에 움막 같은 부엌까지 생겼다. 그러자 장독대에 올라가는 게 나에게 장을 뜨는 것 외에는 아무런 뜻도 지닐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남의 안살림까지 엿볼 수 있게 집끼리는 다붙었으면서도 대문은 좀 멀어 윗골목과 아랫골목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 아마 그녀와 사귈 기회가 없었나보다.
“이걸로 신을 동여매요.”
그녀는 핸드백을 뒤적이더니 나일론 끈을 꺼내서 나에게 주며 친절하게도 내 상반신을 부축까지 해주었다. 나는 이미 버선과 신의 구별도 없이 뻘건 진흙투성이인 발에 그래도 신을 동여맸다.
그리고 둘이 같이 걷기 시작했다. 한결 걸음을 옮기기가 수월했다.
“그럼 댁의 설희도 저 학교에?”
나는 아직도 망망한 진흙탕 지 건너 언덕에 자리잠은 A여중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토해내고 말았다.
그녀의 딸 설희는 절름발이였다. 왼발을 앞으로 내디딜 적마다 넓적다리서부터 흐느적흐느적 흔들리는 꼴이 금세 고꾸라질 듯이 불안해 뵈는 깐으론 꽤 잘 걷는 편이었는데도 비 오는 날이라든가, 길이 미끄러운 겨울날 같은 때는 곧잘 처녀 티가 나게 다 큰 설희를 자못 가뿐히 업고 등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선 이상하리만큼 조금도 모성애의 센티멘털한 면의 노출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미소로울 뿐 결코 측은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도 가을 소풍날을 잊을 수 없다. 찹부금 일소라나, 그래서 소풍도 입장료나 교통비가 필요 없는 화계사로 정해졌다. 내 딸 연이는 국민학교 마지막 소풍이니 엄마도 같이 가자고 졸라 따라나섰더랬는데 설희 엄마도 있었다. 설희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나는 설희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 연이와 설희도 친하지 않았고 별로 사교적이 못 되는 나는 이날도 바로 이웃인 그 여편네와 인사를 나누질 못했다.
“차라리 결석을 시킬 일이지.”
나는 설희가 한쪽 발을 흔들흔들 흔들며 찔룩거리는 게 측은하다 못해 화가 나서 설희 엄마가 퍽 주책없는 여자로 여겨졌다.
설희는 미아리 삼거리까지 잘 따라가다 차차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설희 엄마는 냉큼 설희를 업더니 줄곧 앞장서서 갖가지 신나는 노래를 선창하며 가는 것이었다. 덕택에 우리는 조금도 피곤한 줄 모르고 어깨춤을 추며 잘 걸었다.
아까 그 여편네가 자기에게 업히라고 등을 내밀었을 때만 해도 나는 장화가 넘칠 것을 걱정하면 했지 어른이 어른을 업자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것도 그녀의 이런 인상 때문이었을 게다.
“설희는 바로 이웃의 Q여중에 넣을 수도 있었잖아요? 신체불구아에게 주는 특전으로…….”
그녀는 대답 없이 나보다 조금 앞서 진탕길을 성큼성큼 잘도 걷는다. 나는 왠지 다시 한번 가을 소풍날의 그녀를 생각하며 어쩌면, 굳이 불구아의 특전을 거부한 심보는 소풍날 결석을 안 시킨 심보와 같은 게 아닐까, 그런 심보를 도저히 이해할 것 같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려본다.
“설마 아침에 이 길을 설희 혼자 보내진 않으셨겠죠?”
나는 진창에 깊숙이 빠져 허우적대던 한쪽 발을 겨우 빼며 그녀의 뒤통수에다 대고 악을 썼다.
“그러믄요. 아침에 데려다주고 볼일 보고 다시 오는 길이랍니다. 아침나절엔 얼어서 이렇진 않더군요. 낮엔 어지간할 거다 싶어 미리 장화를 신었더니 한결 편하군요.”
그녀는 내가 장화를 못 신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던지 이렇게 자기 장화 변명을 했다.
천신만고 도달한 A여중은 담도 없이 을씨년스럽게 겨우 여남은 개의 교실을 갖춰놓고 있었다. 그러나 게시판에 붙어 있는 삼 년 후의 A여중 투시도와 육 년 후의 A여중고교의 조감도는 유수한 대학 캠퍼스가 무색하리만큼 호화찬란했다. 나는 이런 그림을 보며 문득 조감도를 굳이 오감도로 고집한 슬픈 시인 이상(李箱)을 생각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A여중에서 자모회가 있었다. 전체 자모회가 아니라 몇몇 선택된 자모들의 은밀한 모임인데 어쩐 일인지 나도 초대되었다. 그 무서운 진창을 이제서야 포장중이라나 아무튼 자갈이라도 깔려서 한결 걷기가 수월했다.
교사(校舍)는 여전히 초라한 채 투시도와 조감도만 없다면 영락없이 촌의 간이학교였다. 다만 둘레의 자연만이 놀라운 변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A여중 둘레는 옛날부터 진상 배로 유명한 배 고장이라 온통 배밭인데 마침 배꽃이 만개해 있었다.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이렇게 무리져 만개한 배꽃을 보기는 처음이 었다. 창백하리만큼 흰 꽃의 꽃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갓 활짝 열린 순간, 미풍도 낙화가 애석해 잠깐 쉬고 있는 듯 주위는 화창하고도 고즈넉했다.
풍염한 도화의 말로가 육감적인 복승아이듯 이화의 결실이 청아한 배인 건 아주 당연했다.
진흙탕에서 만난 지 두 달 만에 설희 엄마와 나는 이런 황홀경에서 다시 만났다. 자모회에서의 귀로, 우리는 배나무 그늘에서 쉬며 이런 아름다운 고장의 A여중에 우리 딸들이 배정된 건 얼마나 다행이냐고 행복해했다. 참, 참 얼마나 다행이냐고 우리는 잠시, 방금 있었던 자모회의 불쾌한 안건도 잊은 채 거듭거듭 이 배나무골을 칭송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사우思友〉였던가 〈봄처녀〉였던가 아무튼 오랜만에 노래까지 뽑았다.
그래도 설희 엄마가 먼저 자모회의 불쾌한 안건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뭐라구? 기가 막혀, 기부를 만원씩이나·…·아니지 참 만원 이상이랬던가? 아이 기맥혀.”:
그녀가 별안간 무릎을 탁 치며 서둘자 나도 정신이 들고 덩달아 기가 막혔다.
“뭐 교문도 만들고 담도 쌓고 운동장에 흙도 사다부어야 아이들이 놀 수 있을 게 아니냐구? 그것도 안 해놓고 뭬 급해 부리나케 학교 간판 먼저 붙여놓고 지금 와서 그것도 말이라고 해? 철면피! 뭐 만원씩? 아니 그 이상이랬지. 아이 분해.”
몰론 나도 분했다.
“왜 연이 엄만 가만히 있었수? 딴 년들도 그렇지, 손톱에 빨간 칠만 하면 제일인가. 아가린 뒀다 뭣들 하누?”
이제 막 욕이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완전히 대죄의 폼이다. 자기는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차마 그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내가 손톱에 물 안 들인 것만 천만다행으로 행여 ‘그년들’ 속에서 나만은 제외됐거니 여긴다.
“이사장인가 뭔가 그 맹랑한 녀석이 뭐랬드라, ‘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기란 참 의외의 고충과 애로가 많습니다 , 아니, 담 쌓고 교문 다는 게 의외의 고충이면 피아노나 농구틀쯤은 뭐가 될꼬? 도대체 누가 이 진흙구덩이에 학교를 설립하랬나. 그러구 보니 연이 엄마, 우리가 이 학교를 지원한 게 아니잖우? 어디 이름이나 듣던 데유. 컴퓨터가 배정을 했으니까 왔지. 그래 제아무리 컴퓨터가 바다 건너온 양도깨비로서니, 있지도 않은 학교에 배정을 했을 거야 만무 아뉴? 안 그래? 학교가 있으니까 했겠지. 제놈들이 하꼬방같이 꾸며놓은 학교 간판을 달았으니까 했지. 결국 일은 제놈들이 저질러놓고 아무 죄도 없는 우리한테 돈을 뜯어 잇속 차릴 궁리부터 해? 장돌뱅이만도 못한 얌체들.”
설희 엄마의 입은 자꾸 거칠어진다. 나는 물론 이의가 없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배꽃이 좋았다.
“돈만 있으면야 기부 좀 해도…….”
나는 겨우 이 렇게 대꾸했다.
“돈!”
나는 그녀가 날 몹시 나무랄 줄 알았는데 의외에도 나의 ‘돈만 있으면’ 에 쉽게 동조해주었다.
우리는 배나무 밑에서 ‘돈만 있으면’ 을 한없이 주고받았다. 비로소 생기와 탄력이 넘치는 화제를 찾은 것이다.
처음엔 ‘돈만 있으면’ 어떻게 멋있게 품위 있게 살 것이냐로 마치 무슨 상품 광고처럼 멋과 품위를 부르짖다가 자꾸자꾸 벼락부자처럼 타락해가면서 돈의 씀씀이가 속악(俗惡)을 극해갔다.
우리가 부자가 아니란 걸 깨달은 건 역시 설희 엄마 쪽이 먼저였다. 나는 암만 해도 좀 더디다. 그녀는 한슴을 폭 쉬더니 입을 다물어버렸고 나도 덩달아 침묵할 수밖메 없었다.
입 언저리부터 서서히 피곤이 전신으로 퍼졌다. 심신이 허탈했다. 돈이 있다가 없다는 건 암만 해도 억울하고 참담했다.
한참 만에 설희 엄마의 마디 굵은 두둑한 손이 내 손을 꼬옥 쥐더니,
“연이 엄마, 난 돈이 있으면 정말로 하고 싶은 건 딱 한 가지라우. 우리 설희 미국 같은 데 데려다가 수술 한번 받아봤으면…….”
그녀의 가슴에 맺힌 한 같은 게 내 가슴에도 뭉클 와 닿았다. 순간 그녀와 나는 여느 이웃끼리나 여느 자모끼리보다는 좀더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도 뭔가 입에 발린 수다가 아닌 속말을 하고 싶어진다. 그러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건 이혼이라고 여직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하마터면 그것을 입 밖에 낼 뻔했다.
가까스로 그 말을 안 하고 견딜 수는 있었지만 불쑥 내 의식의 표면으로 부상한 이 놀라운 생각은 실로 오래 전부터 아마 ‘그 일’ 이 있은 후 줄창 내 심층에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거니 싶어 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한번 떠오른 생각을 다시 그 심층으로, 잠재의식 속으로 밀어넣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날 이후 자주자주 이혼을 생각했다.
이혼함으로써 남편을 ‘그 일’ 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자. 그리고 나도 남편이 나를 보는 그 시선, 성한 사람이 문둥이를 보는 것 같은 증오와 연민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상상만으로 날 듯한 상쾌감이 왔지만, 이혼으로 남편의 아내 노릇, 두 아이의 어머니 노릇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면 심한 무서움증을 느꼈다. 그것 말고 내 쓸모는 무엇일가? 나는 아주 수습할 수 없이 암담해지면서 설희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에게 의논을 하면 마치 진창에서 나일론 끈을 줄 때처럼 신속하고 적절한 도움을 줄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급하게 장독대에 올라가 담 너머로 그녀를 불러놓고는 기껏 아이들 월말고사 얘기라든가, 딸기잼이니 마늘장아찌 담그는 얘기를 하다 마는 게 고작이었다.
실상 나는 두려웠다. 이혼 이야기를 하자면 꼭 ‘그 일’ 을 털어놔야겠고 ‘그 일’ 을 안다면 그녀 또한 내 남편처럼 성한 사람이 문둥이 보듯이 나를 보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노염(老炎)이 기승을 떠는 늦여름의 오후. 설희 엄마는 우리 집에 마실을 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손바닥만한 마당에 심어놓은 일년초들은 미처 개화나 결실도 못 본 채 노랗게 시들어가고, 유리창은 부옇고 커튼은 바랜 채였다. 때맞춰 솎아주고 물을 주고 하는 최소한의 보살핌조차 못 받은 채 시들어가는 꽃밭에서 엿뵈는 안주인의 나태랄까, 메마름이랄까, 이련 생활의 황폐는 꽃밭 말고도 우리집 도처에서 민망하도록 비죽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에 일거리를 가져서인지 제대로 집 한 번 휘둘러보지 않은 채 마루에 앉자 일손을 계속했다.
나는 비로소 그녀가 얼마나 레이스 뜨기에 놀라운 솜씨를 가졌나를 보았다.
“어머! 예삐라. 뭐 할 거예요?”
“깃이에요. 카디건이나 심플한 원피스에 달아서 멋 좀 부릴 수 있는 깃.”
깃? 그건 너무도 섬세하고 우아했다. 저런 깃을 목둘레에 단다면 마치 갓 피어난 마가랫 꽃송이 사이로 고개를 내민 기분일 게다.
“그래요? 어쩜! 이제 설희 엄마도 모양 좀 낼려나봐.”
“모양은…… 삯일이라우.”
그녀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일손만 놀렸다. 나는 그녀가 나보다 조금쯤 더 가난하다고 짐작한다. 그리고 전서부터 궁금한 것, 세놓은 화실에 대해서도 좀 알 것 같다.
“저 실례지만 설희 아빤 뭐 하시는지?”
“외국에 그림 공부하러…….”
“그럼 파리?”
나는 공연히 설렌다.
“아아뇨, 미국.”
나는 실망했다. 미국에서 물빛 항아리를 그리는 부스스한 무명화가를 나는 왠지 상상할 수 없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우?”
일손을 쉬지 않은 채 불쑥 묻더니 내 대답도 안 기다리고,
“칠석이래.”
또 한동안 잠자코 일손만 놀리더니,
“연이는 올 여름에 피선가 바캉슨가 보내봤수?”
“아직…….”
“젠장 그래도 아직 이래네. 여름 다 보내놓고…….”
나는 멋쩍게 픽 웃고 말았다.
“연이 엄만 돈이 아까워서, 너무너무 아까워서 뼈가 저려본 적 있수?”
그녀는 처음으로 일손을 놓고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넓게 퍼진 기미가 유난히 눈에 띈다. 문득 그녀가 살기를 얼마나 어려워하고 있나를 알 것 같으면서 동병상련 같은 아픔을 느낀다. 그녀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독백처럼 띄엄띄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레이스 뜨기를 열심히 해서 만원 가까운 돈을 모았다. 설희를 데리고 이삼 일 물놀이를 즐기려고. 실상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는 집세와 약간의 이자놀이쯤으론 시어머니 모시고 모녀가 겨우 먹고살기가 고작이었다.
그런 돈에서 오천원을 오늘 시어머니가 무당집에 가서 칠월칠석 치성을 드려야겠다.고 가지고 갔다는 것이었다.
“드리지 말지. 요샛세상에 치성은 무슨…….”
나도 그 돈이 무척 아까워서 악을 썼다.
“연이 엄만 우리 시어머닐 잘 몰라서 그래. 그분은 결코 남에 의해 설복당하거나 감동당하거나 하다못해 패배라도 당할 분이 아냐. 벽창호가 뭔지 연이 엄만 아마 상상도 못 할걸.”
“어쩌면…… 소리없이 원만하신 줄 알고 있는데.”
“소리가 없을 수밖에, 대화가 없으니까. 이제 나는 그분이 흑을 백이라고 우겨도 네, 네, 하게끔 길들여진걸. 그러자니 또 신경의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섣부른 대화로 바윗돌과 맞붙은 맨주먹처럼 피 맺히고 아파하기보다는 낫거든. 그렇지만 오늘 일은 너무 억울해요.”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여자들끼리의 진정한 의미의 성의 있는 위로가 무엇인가를. 그것은 오직 자기보다 좀더 불행한 경우를 목격하게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답답하고 서러웠던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맥이 쑥 빠지는 듯 허전하면서도 시원했다.
우리 식구는 남편과 연이 민식이 남매, 그리고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6·25 때 단 하나의 오빠가 의용군으로 나가자 나는 그만 외딸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딸에게 얹혀사는 노인네답지 않게 늘 당당했다.
아마 그런 당당함은 그분의 성품에서도 연유하겠지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대지 삼십 평 건평 십팔 평의 블록집이 어머니의 소유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남편은 남편대로 불손할 정도로 오만함으로써 처가살이의 열등감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런 까다로운 사이를 마무려서 하루하루를 별탈 없이 꾸려가기란 퍽 고달팠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남편은 때로는 더할나위없이 다정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서럽도록 유순하고 부드러워지는 침실에서의 격정이 지난 후의 고즈넉한 한때, 남편은 내 귓전에 은밀히 속삭였다.
“여러 가지로 당신한테 미안해 죽겠어. 나라고 맨날 말단 공무원 노릇만 하겠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구, 형편이 조금만 피면 우리 제일 먼저 집을 장만합시다. 우리들의 집! 장모님이야 워낙 여장부니까 혼자도 넉넉히 사실 수 있을 테고,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들의 집에 모셔도 좋지. 우리들의 집에 모시면 나도 떳떳하고 노인네도 기가 좀 꺾이겠지. 안 그래?”
그날 밤,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정말 쥐구멍에도 볕이 들려나, 남편이 근무하는 ×× 청의 청장으로 남편의 대학 시절의 은사가 부임해오더니, 이번 인사이동에 국장 과장 자리에도 남편의 대학 선배가 많이 들어서게 되자 갑자기 남편의 승진 전망도 밝아졌다.
만년 계장을 면할 차례가 코앞에 다가온 듯했다. 그러나 바로 코앞에 매달린 행운인데도 좀처럼 입 속으로 굴러들어오지는 않은 채, 뭔가 곧 행운이 올 듯 올 듯한 예감은 활기찬 것이었으나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남편은 때로는 지나치게 명랑했다가는 다시 손댈 수 없이 침울해지는 둥 감정의 균형을 점점 잃어갔다. 나는 그런 그를 보기가 매우 괴로웠다.
어쩌면 그때 나는 벌써 불길의 냄새를 맡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란 불길을 예감하는 육감이 따로 있는 법이다.
처음엔 그저 일이 뜻대로 안 되는 데서 오는 막연하고 어둑한 예감이었으나 어느 날, 문득 누가 나를 미행하고 있다는 느낌에서부터 차츰 예감은 구체화돼 갔다.
시장바구니를 든 말단 공무원의 찌든 여편네가 미행을 당했다면 누구나 신경과민이라고 웃을 소리기에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의구(疑懼)는 의구를 낳았다.
허구한 날 골목 어귀 구멍가게에서 오징어로 소주를 마시던 남자가, 휴일날 창경원에서 아이들과 목마를 타는 나의 바로 뒤 목마를 타고 태연히 출렁이고 있는 걸 어찌 예사로 보아넘길 수 있겠는가.
엉뚱한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집을 찾는 척 안채를 기웃대던 신사와 며칠 후 불고기판을 사라고 끈덕지게 치근대던 외무사원과 너무도 닮은 걸 어떻게,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겠는가. 내 이런 병적인 수집은 날로 늘어나 이제 불길은 결코 터무니없는 예감만으로 그칠 수 없는, 곧 당면하게 될 실제로 구성돼가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식구는 차례차례로 모 정보기관에 연행돼갔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내 육감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곳에는 나의 과거와 현재 또 삼십팔 년 동안 살아오면서 맺은 온갖 인연(人緣), 지연(地緣)의 말초적인 부분까지가 유리상자의 표본처럼 질서 있게 정리돼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이런 소리밖에 할 소리가 없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나를 중심으로 한 내 주변의 세밀한 조감도를 본 것이다.
채광이 시원치 않은 음침한 방인데도 굳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나를 심문하는 그 기관원의 눈앞에서 나는 자꾸 벌거벗은 듯한 착각을 느끼고 수치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는 냉엄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여북해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그가 알고 있는 내가 훨씬 더 진짜 나려니 여기고 있었다.
그는 내가 망각한 것까지—6·25 때 피난 갔던 외가댁 마을 이름까지 또 비교적 손이 번성한 외가의 하고많은 사촌에서 십몇 촌까지의 친척 이름까지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완벽히 알고 있었다. 그 앞의 내 기억력은 여명의 별들처럼 빛을 바래갔다.
내 기억으론 내 외당숙이 조성구였지만 그가 조정구라니 조정구가 틀림없다 싶었다. 그가 설사 내 딸 연이가 현이라고 했다면 아마 내 딸은 현이였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앞에 그렇게 무력했고 그는 그렇게 전능했다. 그는 내가 완전히 허탈 상태에 빠진 것을 확인한 후 비로소 엄숙히 선언했다.
6·25 때 의용군으로 나간 오빠가 이북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곧 남파되리라는 것이었다. 먼저 남파됐다가 체포된 간첩에 의해 확인된 정확한 정보란다.
오빠는 오면 반드시 집에 들를 테고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는 물었다.
“어떡하긴요. 그야 당연히 시, 신고를 하거나 자수를 시켜야죠.”
나는 아주 밉고 서툴게 아양을 떨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주머니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협조해줘서 고맙다고 덧붙였다. 나도 고맙다고 서너 번 고개를 조아리고 또 한번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놓여났다. 남편과 어머니가 같은 꼴을 당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충청도 진천에서 거의 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외가와 그 밖에 오빠가 알 만한 대소가가 다 한 번씩 그런 일을 당한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대문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는 날이 시작되었다.
“말이 자수지, 그놈이 벌써 마흔인데 그곳에 계집 자식이 없을 리 없을 톄니 이 에미 말을 들을까? 계집 자식 생각이 앞설 테지. 차라리 넘어오다…….”
어머니는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닦는다. 그러나 나는 다음 말을 알고 있다. 나도 방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머니 보다 훨씬 진작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넘어오다 차라리 사살되 었으면 하고.
간첩이 된 혈연과는 상봉이 몰고 올 사건과의 당면이 두려운 나머지 십팔 평 블록집 속의 안일이 소중한 나머지, 어머니와 나는 마녀(魔女)보다도 더 잔인해졌다.
그러나 오빠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그 전능한 선글라스에 의해 십팔 평 블록집의 안일은 앗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점점 거칠어지며 폭음이 잦아졌다. 장가를 잘못 가서 신세를 망쳤다는 것이다. 간첩 처남을 두었으니 무슨 수로 승진을 바라겠느냐, 승진은커녕 언제 모가지가 날름 날아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집구석이라고 찾아들어와야 언제 또 간첩 처남이 돌아와 총을 들이 댈지 모르니 술이라도 안 마시고 어쩌겠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정말 그런가? 남편은 승진은커녕 계장급이면 돌아가면서 한번씩 자재 구입 이다 시찰이다 해서 외국 바람 쐴 기회가 오게 마련인데 그런 데서까지 번번이 제외되었다. 남편은 점점 더 폭음으로 난폭해지고 술이 깼을 때의 그는 나를 대하기를 성한 사람이 문둥이 보듯 증오와 연민으로 대했다. 그것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설희 엄마는 나를 성한 사람이 문둥이 보듯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통한 도움도 주려 들지도 않았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에이 지긋지긋해. 살아가기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걸치적대는 것도 많은 놈의 세상…… 당신이나 나나 어디로 훨훨 이민이나 갈까?”
나는 물론 반대했다. 이민이 어디 그렇게 떡 먹듯이 쉬우냐고 대꾸해줘도 되는 것을 마치 훤히 트인 이민길을 굳이 거절이라도 하듯이 모든 출국을 여행이건 유학이건 이민이건 이 나라에 돌아와서 봉사할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은, 도피성 띤 모든 출국을 맹렬히 매도했다. 그 동안 서른여덟의 찌든 여편네는 주체성이니 사대주의니 하는 어려운 말을 몇 번이고 써가며 마치 금메달을 목에 결고 태극기를 우러르는 올림픽 선수보다도 더 애국적이었다.
내가 이렇게 열렬하게 애국적인 동안 그녀는 깃을 하나 다 떴다. 그리고 담담히 돌아갔다.
어떤 가을날, 그녀는 불쑥 나에게 설희 아빠가 미국에서 보험회사에 취직을 했다고 알려준다. 보험회사라니……
물빛 항아리를 그리던 남자, 나에게 남아 있던 소녀적인 것의 마지막 우상은 이렇게 해서 허물어졌다.
그해 겨울, 그녀는 까다로운 출국 수속을 하느라 또 영어도 배우러 다니느라 몹시 바쁘더니 다시 한번 배꽃이 필 즈음 마침내 수속을 마치고 두 장의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날짜만 꼽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곰곰이 생각했다. 서른여덟의 여편네의 마지막 센티는 뭔가 물질적인 것 말고…… 를 궁리하고 있었다.
나는 장 위에서 몇 년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옛 트렁크를 꺼냈다. 그 속에는 나의 처녀 때로부터 결혼 초기에 걸친 시기, 내 모든 감수성이 아름다운 것을 향해 활짝 열렸을 임시의 컬렉션이 들어 있었다. 나는 특히 미전(美展)의 펨플릿을 많이 모았더랬어서 거의 백여 장이 남아 있었다.
드디어 나는 그중에서 십여 년 전에 발족했다가 그후 흐지부지되고 만 ‘신상’ 이란 젊은 반추상화가들의 제1회 그룹전의 펨플릿을 찾아냈다. 설희 아빠도 ‘신상’ 의 동인이었다. 펨플릿으로 된 목록에서 설희 아빠의 사진과 약력, 물빛 항아리도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녀에게 석 별의 표시로 주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이의 야망의 시절이 여기 있군요.”
그러나 이미 그의 야망은 미국이란 고장에서 보험회사 사원으로 퇴색하고 만 것이다.
두 여편네는 같이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내일이 떠날 날인데 초저녁부터 비가 지적지적 내리고 있었다.
“연이 엄마, 내일 나를 배웅해줘요, 공항까지. 그리고 우리 시어머닐 좀 돌봐줘요.”
그녀는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여직껏 공항이란 데를 가본 적이 없었다. 친지 중 외국에 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미리 집으로 찾아가 인사를 치렀을 뿐. 과히 친하지도 않은데 외국만 간다면 어중이떠중이 공항까지 나가 법석을 떠는 것이야말로 사대주의, 사대주의 중에도 가장 촌티 나고 치사한 간접적 사대주의라는 게 내 지론이었다.
그러나 나는 설희 엄마의 청만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언제 비가 내렸더냐 싶으리만큼 깨끗이 갠 날이었다. 마침 오월, 김포가도의 신록이 눈부셨다. 어젯밤의 비로 말끔히 목욕을 끝낸 신록은 마치 이 나라를 영 떠나려는 한 여편네의 망막에 스스로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새겨주려고 별렀던 것처럼 놀랍도록 싱싱했다.
택시 앞자리엔 설희 할머니가 앉고 뒷자리엔 설희, 설희 엄마, 나 이렇게 셋이 나란히 앉았다. 별안간 그녀가 나를 부둥켜안더니 세차게 흐느꼈다.
“어쩜! 아름다워요. 다시는 다시는, 못 보겠죠.”
나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점찮게 나무랐다. 돌아와야 한다고, 설희 수술도 받고 설희 아빠도 어떡하든 다시 그림 공부를 계속해 대성해서 돌아와야 한다고 격려했다. 그녀는 곧 울음을 그치고. 그렇고말고, 암 그렇고말고 하며, 알맞게 맞장구를 쳐주기까지 했다.
비행기는 거의 세 시간이나 연발했다. 연발의 세 시간은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의 석별의 정을 완전히 김빠지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설희 엄마는 숙녀처럼 성장한 설희를 별안간 덥석 업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트랩을 올라 기체 속으로 사라졌다.
비로소 나는 피곤을 느꼈다. 피곤은 한꺼번에 왔다. 나는 설희 할머니를 돌보기는커녕 노인네에게 매달릴 만큼 피곤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도 오늘 아침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한 것이다.
게다가 틀니까지 쑤시기 시작했다. 나는 서른여덟에 벌써 아랫니의 어금니가 전부 틀니 였다.
그 틀니는 해넣은 지가 삼 년은 되었고, 몸에 닿는 것에 좀 지나칠 정도의 결벽성을 가진 나는 실상 내 경제사정으론 분수에 넘칠 만큼 고가로 한 것으로 일류 치과에서 해넣은 것이어서 처음부터 크게 불편한 줄 몰랐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가끔 마음이 울적하다든가 몸이 불편할 때에는 이 틀니가 쑤셨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틀니가 얹힌 턱뼈가 쑤신달까.
의사는 뭐 인체의 거부반응이라든가 하는 어려운 말로 내 동통을 진찰하고 시일이 지나면 자연히 나을 거라 했지만 삼 년이지 나도록 거부반응은 불쑥불쑥 나를 괴롭혔다.
그 동통과 중압감은 경우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있는데 오늘은 아주 심한 편이었다.
틀니가 천근의 무게로 턱뼈를 눌러 꼭 턱이 떨어지고 말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턱을 받쳐도 보고, 슬슬 주물러도 보고, 더위 먹은 짐승처럼 턱을 축 늘어뜨려 입을 헤벌리고 침을 흘려도 보았으나, 턱뼈가 부서질 듯한 동통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몸의 온갖 신경이 턱뼈를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전신에 퍼진 듯, 중압감에 수반한 동통은 턱뼈에서 목구명으로, 귓속으로 골로 퍼져 내 두상은 완전히 틀니의 횡포가 지배했다.
누가 이런 고통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틀니를 빼는 길밖에 없겠는데 나는 틀니를 빼고 있는 내 모습에 늘 몸서리를 쳐왔으므로 차중에서나 길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차마 그 짓은 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가까스로 내 집 문 앞까지 왔을 즈음 나는 거의 발광 직전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크게 벌리고 침을 질질 흘려가며 틀니를 뽑아냈다.
양쪽 두 개씩 도합 네 개의 어금니가 심어진 반달 모양의 섬세한 백금 틀은 내 손바닥에서 거의 무게를 지니지 않은 채 차게 빛났다.
마침내 무서운 동퉁과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내 몸은 가볍다 못해 공중으로 둥실 뜨는 듯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가벼울 수가, 우화이등선 (羽化而登仙)이란 이런 기분을 두고 이름인가.
나는 내 편안감을 충분히 만끽하기 위해 몸을 장판 위에 눕혔다. 그 여편네 설희 엄마는 지금쯤 어디를 날고 있을까? 제아무리 공중에 떠 있기로서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온갖 사는 어려움부터 벗어났기로서니 지금의 나만큼이야 가볍고 편할쏘냐. 나는 코웃음을 친다.
지금의 내 팔자는 그렇게 편타.
그런데 아까부터 누가 대문을 조심스럽 게 두들기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가 누구냐고 몇 번 묻는 것 같다.
그래도 대답 없이 똑똑 두들기기만 한다. 어머니의 신소리가 들린다. 나는 별안간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한다.
대문 소리가 나고 아주 낮은 대화가 들린다. 분명 상대는 남자다. 그것도 사십대의 남자.
남의 이목을 꺼리듯 대화는 여전히 수군수군 낮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만 것이다! 이제 끝장이다. 파멸이다. 오오 이렇게 파멸이 쉬 올 줄이야.
숨 죽은 대화는 아직도 계속된다. 어머니는 자수 권고에 실패한 눈치다. 이렇게 오래 끄는 걸 보니.
가엾은 어머니! 어쩌면 그 남자는 어머니에게 도리어 월북을 권하고 아니 협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강제로 납치하려는 거나 아닌지.
그렇게끔 내버려둘 수는 없지. 나는 벌떡 일어난다. 그 남자와 죽든 살든 결판을 내고 말 테다 나에게 ‘그 남자’ 는 이미 조금도 오빠일 필요가 없다. 그냥 ‘그 남자’ 다.
막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문을 걸고 돌아 들어온다.
“아유 별 끈덕진 사내도 다 봤네. 월부책을 사라고 어찌나 조르는지…… 말이 그렇게 청산유수고 신수도 희멀겋던데 고작 월부장사밖에 해먹을 게 없나, 쯧쯧.”
나는 다시 장판방에 눕는다. 한숨을 휴우 내쉰다. 그런데 이미 좀 전의 편안감은 없다.
옴짝달싹할 수 없으면서도 펄펄 뛰지 않고는 또 못 배길 것 같은 중압감과 동통이 여전하지 않은가? 이미 입 속엔 빼버릴 틀니도 없는데.
빼버릴 틀니가 없기에 그 고통은 절망적이다.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여직껏 얼마나 교묘하게 스스로를 이중 삼중으로 기만하고 있었나를.
내 아픔은 결코 틀니에서 기인한 아픔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설희 엄마가 부러워서, 이 나라와 이 나라의 풍토가 주는 온갖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녀가 부러워서, 그녀에의 선망과 질투로 그렇게도 몹시 아팠던 것이다.
나는 그런 아픔이 부끄러운 나머지 틀니의 아픔으로 삼으려 들었고, 나를 내리누르는 온갖 한국적인 제약의 중압감, 마침내 이 나라를 뜨는 설희 엄마와 견주어 한층 못 견디게 느껴지는 중압감조차 틀니의 중압감으로 착각하려 들었던 것이다.
비로소 나는 내 아픔을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내 아픔을 정직하게 신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교하고 가벼운 틀니는 지금 손바닥에 있건만 아직도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또하나의 틀니의 중압감 밑에 옴짝달싹 못하고 놓여진 채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