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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6. 25 (일)
東方十八賢
先賢遺蹟踏査資料
-율곡 이이, 우계 성혼선생의 파주 유적-
成均館靑年儒道會 大邱廣域市本部
목 차
○율곡(栗谷)이이(李珥)선생 /01
-영정/01
-연보/05
-정치사상/16
-철학사상/19
○신사임당(申師任堂)/26
○매창(梅窓), 이우(李瑀)선생 /33
○자운서원(紫雲書院) /36
○화석정(花石亭)/41
-화석정사진/42
-자운서원배치도/42
-율곡선생묘소/43
○우계(牛溪)성혼(成渾)선생/44
-가계 및 수학/44
-율곡과의 사칠이기설 논변/44
-관직사체/45
-임진왜란 중 시무소 상소/46
-저술/47
-참고문헌/47
-우계선생묘소/48
-우계선생신도비/48
-우계선생글씨/49
-우계선생사당/49
율곡(栗谷)이이(李珥)선생
(율곡선생 영정)
선생의 성은 이(李)씨요 ,휘는 이(珥)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에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 자는 숙헌(叔獻),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이라고 하였다.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보물 제 16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파주의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화석정시"와 1545년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하였는데,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1551년 16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만에 하산하여 강릉 외가에서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좌우명으로 삼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듬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경상북도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론에 관해 토론하였다. 당시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어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며, 그해의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한 인물)이라고 일컬어졌다. 과거시험에서 율곡이 지은 "천도책"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마음을 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귀천을 가리지 말고 어진 이를 기용하여 조정을 맡길 것,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1568년(선조 1) 2월 사헌부지평을 거쳐 성균관 직강으로서 천추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해에 우계 성혼과 '지선흥중'과 '안자격치성정지설'을 논하였으며, 11월에는 이조좌랑에 재임중 외조모 이씨의 병환이 위독하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갔다. 이때 사간원에서는 외조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릴 수는 없다고 하여 파면함이 옳다고 탄핵하였지만, 선조는 "비록 외조모라도 정이 간절하면 어찌 안 가볼 수 있겠는가. 효행한 일을 가지고 파직시킨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기각하였다. 선조는 1569년 6월 그를 홍문관교리에 임명하면서 이조에 명하기를 "외조모를 뵈러 가는 것이 비록 법전에는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이 사람만은 벼슬을 그대로 두고 왕래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그를 총애하였다.
같은 해 대표적인 시무책으로 알려진 "동호문답"을 저술하여 당시의 사회. 경제적 폐단을 개혁코자 하였다. 1570년 10월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처가인 해주 석담으로 물러 나와 문하생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설하는 일을 낙으로 삼다가 이듬해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그후 이조정랑. 의정부검상 등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해주에 있으면서 고산의 석담구곡을 찾아 풍류를 즐기면서 네번째 굽이의 이름을 송애라고 하고 기문을 짓는 한편, 거기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정진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571년 6월 청주목사로 나가서 청주의 '서원향약'을 만들어 풍속 교화에 힘쓰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이때 우계와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등을 논하였다.
1573년 7월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귀경하여 세 번의 상소를 통하여 허가를 받아 8월 다시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서 '감군은'이란 시를 지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물러가려고 청해서 물러감을 얻었으니 무척이나 만족할 것이요. 그러나 저마다 모두 물러날 뜻을 가지면 누가 나라를 보살필 것이요."라고 하자, 율곡은 웃으면서 "만일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벼슬아치에 이르기까기 모두다 물러날 뜻을 가지기만 한다면 나라의 정세는 저절로 큰길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나라를 유지 못할 까 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라고 응답하였다.
9월 다시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된 후 곧이어 승정원동부승지로서 경연참찬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직하고, 이듬해 1월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를 올려, 정책을 세워도 백성을 구하는 실효가 없다는 등 7가지 시폐를 지적하고 재앙을 막아낼 계책과 진덕하는 공을 말하였다.
1574년 3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후 10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로 내려갔다. 그해 가을 옛 성현의 말 가운데 학문과 정치에 귀감이 될 구절들을 모아 '성학집요'를 편찬하였다. 1577년 해주 석담을 내려가 생활하면서 '격몽요결'을 저술하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하는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사회에서 '소학'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서책중의 하나였다. 애매하고 몽매한 것은 쳐서 없앤다는 제목처럼 격몽요결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충. 효. 학. 행을 강조하며, 일상생활에서 도리를 터득하여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었다.
1583년에는 시국에 대한 '육조계'를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시정코자 하였다. 그 내용은 불필요한 관직을 없앨 것, 지방의 여러 고을을 병합하여 행정을 간소화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에 대한 법규를 개정할 것, 공사노비들에게도 속량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재할 것 등으로 사회개혁을 통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추구하였다. 또한 이때 선조에게 "지금 나라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사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북방의 전쟁터로 보낼 때에 군마가 부족하여 말을 바치는 노약자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것을 말을 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탄핵 내용은 그 같은 일을 임금의 재가없이 함부로 했다는 것과, 그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할 적에 누적된 피로로 승정원에 이르지 못하고 병조로 들어가 누워있었는데 그것은 율곡이 권력을 잡아 교만해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박순과 성혼이 상소하여 변호했으나 양사에서 합동으로 다시 탄핵하자 태학생 및 호남과 호서의 유생 800여 명이 그 부당함을 극력 상소하여 오히려 동인의 박근원 등이 유배되었다.
그의 정치이념의 기초는 왕도정치, 인정에서 출발하는 애민정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인정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은 나라에 의거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거한다. 백관을 창설하고 여러 직책으로 가른 것은 오직 민생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민본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건적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1569년 저술한 동호문답의 '논안민지술'에서 다섯 가지의 큰 폐해를 지적하였고 1574년에 상소한 만언봉사에서도 상하가 서로 믿는 성실이 없는 것과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는 성실이 없는 것 등 7가지의 병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폐단이 만연된 당시의 사회를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당시의 보수적 집권층과는 달리 시대의 상황에 따른 법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제도라도 오래 지나면 폐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조정의 성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정치는 시의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시의 적절한 제도를 새로 마련하여 백성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경장기로 보았다. 민생의 어려움이 극에 달해 있는 당시에 상황을 직시하였으며 변법과 개혁을 통해 국가의 쇄락을 막을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조세법. 공물법. 노비법. 적서차별법 등의 각종 법규를 실정에 맞게 고칠 것을 내세웠다. 이이의 사회. 정치적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국방론이다. 집권통치자들이 태평성세만을 노래하면서 국방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는 당시의 형편을 통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국방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키는 것을 내세웠다. 또한 유사시에 대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나라의 세력이 매우 약하여 10년 이내에 국가에 화가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따라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군사에게는 호별세를 면해주고 무술을 단련시키며 6개월 만에 교대로 서울을 지키도록 하다가 변란이 일어날 때는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는 등 위급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10만양병설에 대하여 류성룡 등은 태평한 시대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10만양병설이 제기된 후 8년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율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하기도한 그의 시무논적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종사되었다. 율곡선생문집이 있다.
Ⅰ. 年譜
1536년(중종 31년) 음력 12월 26일. 출생
현 강릉시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1) 몽룡실2)에서 태어나다. 선생의 원래 고향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이다. 서너 살 때부터 글자 익히기에 열심이었으며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 살 때에 할머니에게 한시 구절을 말해 놀라게 하였다.3)" 석류껍질 속에 빨간 구슬이 부서져있네. 石榴皮裏碎紅珠 "
1541년(중종36년) 6세
강릉 외가에서 어머니를 따라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에 있는 서울집으로 가다.
1542년(중종 37년) 7세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글을 배우고 진복창전4)을 짓다.
1542년(중종 38년) 8세
화석정5)에서 시를 짓다.
1548년(명종 3년) 13세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다.
1551년(명종 6년) 16세
어머니 신사임당6)의 상을 당하다. 이 해에 어머니의 행장을 짓다.
1553년(명종 8년) 18세
가을에 심상을 마치고 관례를 하다.
1554년(명종 9년) 19세
우계성혼7)과 교분을 맺다. 이 해 3월에 금강산에 입산하다.8)
1555년(명종 10년) 20세
봄에 강릉으로 돌아오다. 이 해에 자경문9)을 짓다.
1556년(명종 11년) 21세
봄에 서울 집으로 돌아가 한성시에 응시하여 장원하다.
1557년(명종 12년) 22세
9월에 성주 목사 노경린10)의 딸 곡산 노씨와 혼인하다.
1558년(명종 13년) 23세
봄에 도산에 가서 퇴계11)를 만나다. 이때 명필 황기로12)를 찾아 만나다. 겨울에는 별시에 장원하다.
1561년(명종 16년) 26세
5월에 아버지 이원수공의 상을 당하다.
1564년(명종 19년) 29세
7월에 생원진사에 합격하다. 8월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어명으로 어제율시를 짓다.
1565년(명종 20년) 30세
봄에 예조좌랑으로 전임되다. 8월에 보우13)와 윤원형14)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1566년(명종 21년) 31세
3월에 정언이 되다. 5월에 시무삼사를 상소했다. 겨울에 이조좌랑이 되다.
1567년(명종 22년) 32세
6월에 명종이 승하하자 퇴계에게 상서하여 국장을 논하고 대행대왕의 만사를 짓다.
1568년(선조 원년) 33세
2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고 성균관직강이 되다. 겨울에 홍문관 부교리지제교 겸 경연지독관 춘추관기주관이 되다. 11월에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외할머니 이씨의 병환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오다.
1569년(선조 2년) 34세
6월에 다시 교리에 임명되다. 7월에 조정에 돌아오다. 8월에 외할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9월에 동호문답15)을 지어 올리고 시무구사를 상소했다. 10월에 휴가를 얻어 강릉으로 돌아와 외할머니의 상을 곡하였다.
1570년(선조 3년) 35세
4월에 교리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다시 오르다. 10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해주로 가니 그곳은 선생의 처가이다.
1571년(선조 4년) 36세
1월에 해주에서 파주로 돌아와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다. 여름에 교리에 임명되었고 의정부검상사인 홍문관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가다. 6월에 청주목사가 되다.
1572년(선조 5년) 37세
3월에 병으로 서울로와 여름에 부응교가 되었으나 신병 때문에 사퇴하고 율곡으로 돌아가다. 우계와 함께 이기 인심도심을 논하다. 8월에 원접사종사관. 8월에 사간원사간. 12월에 홍문관응교, 홍문관전한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다 사퇴하다.
1573년(선조 6년) 38세
7월에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다. 8월에 율곡으로 돌아가다. 9월에 다시 직제학에 임명되다. 이 해에 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승진하다. 이황에게 시호를 지어 주도록 임금께 청원하다.
1574년(선조 7년) 39세
정월에 우부승지로 승진되고 만언봉사16)를 지어 올리다. 병조참지에 임명되다. 3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다. 4월에 병으로 우부승지를 사퇴하고 율곡으로 돌아가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다.
1575년(선조 8년) 40세
3월에 병으로 율곡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다. 6월에 차서를 올려 군덕을 노하고 사서소주를 산정하다. 9월에 성학집요17)를 지어 올리다. 10월에 대학연의를 진강하다가 극기복례를 논하다.
1576년(선조 9년) 41세
2월에 율곡으로 돌아가다. 10월에 해주 석담18)으로 돌아가다. 12월에 입경하여 병조참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다.
1577년(선조 10년) 42세
12월에 격몽요결19)을 완성하고 향약회집법과 사창을 세울 것을 의논하다.
1578년(선조 11년) 43세
은병정사20)를 신축하고 그 북쪽에 주자사를 세우고 문헌서원학규를 짓다. 3월에 대사간에 임명되다. 4월에 율곡으로 돌아가다. 5월에 만언소를 지어 올리다.
1579년(선조 12년) 44세
3월에 도봉서원기를 짓고 소학집주를 완성하다. 5월에 보화조정의 도를 진술하다. 7월에 구용첩을 발하다.
1580년(선조 13년) 45세
5월에 기자실기를 짓고 이 해에 정암 조광조21)의 묘지명를 짓다.
1581년(선조 14년) 46세
정월에 차서를 올려 정사를 바르게 하고 천담을 휴식케 할 것을 청하다. 4월에 구민책을 의논하기를 청하는 한편 변통폐법과 개정공안, 병성주현, 구임감사, 용현수기, 거사붕화 조정할 것을 청하다.
6월에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예문관제학에 특진되고 동지중추부사를 맡다.
10월에 자헌대부호조판서에 승진되고 조광조, 이황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하다. 회재대학보유후의를 저작하고 격몽편과 학부통변을 발하다.
11월에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다. 이 해에 경연일기를 완성하다.
1582년(선조 15년) 47세
정월에 이조판서가 되다. 7월에 인심도심설22)을 지어 올리다. 김시습23)전과 학교모범24) 급사목을 짓다. 8월에 형조판서에 임명되다. 9월에 의정부우참찬이 되어 숭정대부를 가 했으며 이달에 만언소를 지어 시폐를 진술하다. 12월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서로 민폐를 진술하다.
1583년(선조 16년) 48세
2월에 시무 6조를 진술하다. 4월에 시폐의 봉사를 올려 연전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겸하여 서얼허통과 공사천중 재능이 있는 사람을 속량할 것을 건의하다. 이 해에 국방을 위하여 양병 10만을 해야 한다는 탁견을 건의했다. 6월에 사임하고 율곡으로 돌아가다. 7월에 다시 석담으로 가다.
1584년(선조 17년) 49세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의 우사에서 별세하다. 3월 20일에 파주 자운산 선영하에 장25)하다.
Ⅱ.정치사상
선생이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26)말~선조27)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20) 문정왕후28)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29)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선생은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 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선생의 붕당관은 선생이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 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선생은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ꡐ중쇠기(中衰期)ꡑ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ꡐ경장론(更張論)ꡑ이다.《만언봉사》에 의하면ꡐ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ꡑ고 하면서 ꡐ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ꡑ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선생이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30)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선생은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경장론은 동․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Ⅲ.철학사상
선생의 학문을 말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리학설이다. 선생이 성리학에 관한 글이 많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체계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 성우계와 왕복논쟁한 인심도심과 사단칠정설31)이다.
선생은 주자나 퇴계의 이기설과 같이 우주의 형성을 이기로 보고 우주내의 삼라만상이 모두 이와 기에 의하여 이룩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주자가 이와 기를 판이한 이체이물로 보고 퇴계가 이와 기를 순수 이원론적 견지에서 본 것과는 그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이점이 조선의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말이라면 한마디의 용훼도 못했음에 비하여 선생은 자의식을 표출시킨 뚜렷한 자주정신의 소유자였기에 후세의 뜻 있는 사람들에게서 길이 숭모되는 하나의 까닭이다.
선생은 이와 기를 우주의 근원으로 보고 있는 것은 주자나 퇴계와 그 견해가 같지만 앞에서의 두 사람이 이원론적인데 비하여 선생은 기를 주재하는 것이 이이고 기는 이를 승하고 있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어 주자와 퇴계와는 견해를 다리하고 있다. 즉 이와 기는 이물도 아니고 그렇다 하여 완전한 일물도 아니며 다만 이가 아니면 기가 근저할 수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의착 할 수 없는 까닭으로 하여 이와 기와의 관계는 하나이되 둘이고 둘이되 하나라고 했다.
하나 즉, 일물이 아니라는 것은 이기가 서로 분리하지는 아니하지만은 그 묘합한 가운데 이자리, 기자기로 서로 협잡하지도 아니한다는 데 연유하고 있다. 한편 이물이 아니라는 말을 비록 이자리, 기자기라 할지라도, 서로 선후가 없고 이합도 없으며 혼연일체의 상태로 있는 탓으로 이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동과 정이 단이 없고, 음과 양이 시가 없으니 기가 무시한 것은 이가 무시한데서 유래하고 있다 했다.
또한 이는 한결 같을 뿐으로 본시 편과 정, 청과 탁, 통과 새 순수와 잡박의 별이 없는데 이를 탄 기는 운동과 가변성을 지니고 있어 이 기가 운동하여 천지만물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비록 하나이기는 하지마는 가변성 있는 기를 태우고 있으므로, 그 조화가 무궁하여 천지에 있어서는 천지의 이가 되고 만물에 있어서는 만물의 이가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사람의 이가 된다.
이런 까닭에 삼라만상이 다 고르지 못한 것이 기의 소위라 하겠으나 이 기는 이가 주재하고 있으므로 끝내는 우주의 모든 현상은 이에서 연유했다고 설론하였다.
선생의 통체일태극설도 이것을 바탕으로 귀납시킨 것이다. 즉 천지인물이 각 그 이가 있으나 천지의 이가 곧 만물의 이이고 만물의 이가 곧 사람의 이라고 주장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 하겠다. 선생은 이를 형이상으로 보고 기를 형이하로 보았으며 모든 물체의 가변적 현상의 총화를 기로 보고 동시에 기 자체내에 내재하고 있는 주재적 원리를 이라고 했다.
즉 이기의 관계를 일이이, 이이일 이라 설하여 이기 양자는 혼연한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한편 이 관게를 다시 분석하여 이는 기라고 하는 활동체에 의하여 비로소 정주자가 되고, 기는 그의 내재적 주재자인 이가 아니면 현상되지 못한다 하며, 이 양자의 상호관계를 발한 것은 기요 발하게 하는 것은 이이니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바가 없다. " 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자주하기를 "비록 뒷세상에 성인이 다시 나타난다 할지라도 나의 이 설을 바꿀 수가 없다." 고 못을 박고 자신을 나타냈다. 주자의 학이라면 무조건 승복해야 하고 이에 반론을 편다던가 그 이론에 비판을 가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었던 시대에 당당하게 그 학문적 소신을 피력했음은 선생이 뚜렷한 자주성의 대학자였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선생의 학문세계에 대하여 놓일 수 없는 것이 심성론이다. 선생은 사람의 심성을 이기의 합성으로 보고 심의 체의 미발을 성, 심의 용의 기발을 정, 교계적량을 의라 한 것은 주자나 퇴계와 별로 견해가 다를 바 없지만,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설에 대하여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선생의 인심도설은 선조 5년에 우계의 질문에 답한 서간답서를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므로 여기 선생의 답서를 요약해 본다.
심은 본시 하나로되 인심과 도심 둘로 분리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성명 즉 이성에서 나오는 도심과 형기 즉 감성에서 나오는 인심의 별이 있기 때문이다. 또 정은 다 같지마는 이것을 혹 사단이라고도 하고 혹 칠정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만을 말 할 때와 기를 겸하여 말 할 때가 다른 까닭에서이다. 사람의 마음이 처음에 성명이성에서 출발하였다가도, 중간에서 사의를 섞는 다면 이는 시작은 도심에서 했으나 끝은 인심으로 맺은 것이며 이와는 반대로 사람의 마음이 처음은 감성에서 출발하였다가도 그것이 정리에 어긋나지 아니하면 이는 도심이다. 정리에 틀린 발심이라 할지라도, 곧 비를 깨닫고 이를 극복하여 사심에 끌리지 아니하면 도심의 종을 맺을 수 있다. 라고 설론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인심이 라는 것은 감관적인 기에 쏠리는 마음으로 이르는 것이고, 도심은 이성적 도의적인 이에 합치하는 마음이다. 인심과 도심이 상반개념이지만 상호불가침의 절대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서로 극복할 수 있는 관련성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사단과 칠정과의 관계는 칠정의 개념의 외연이 사단의 개념의 외연보다 커서 칠정은 사단을 포괄할 수 있으나 사단은 칠정을 포괄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그 이론이 정연할 뿐만 아니라 선학들의 학문을 답습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 선학들의 모든 학설을 두루 고찰하고 연구하여 자기의 사색과 체험을 토대로 독창적 경기를 개척하고 있다.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선생과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선생은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ꡐ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ꡑ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ꡐ사단대칠정ꡑ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생은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ꡐ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ꡑ라고 하여ꡐ기발이이승지ꡑ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ꡐ칠정포사단ꡑ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32)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ꡐ이기지묘(理氣之妙)ꡑ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선생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선생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선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ꡐ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ꡑ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33)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선생은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선생은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선생의 저서로는 율곡전서(栗谷全書),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집주개본(小學集注改本), 중용토석(中庸吐釋), 경연일기(經筵日記) 등이 있으며 연시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34)가 유명하다. 선생의 참고문헌으로 율곡선생문집35),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월사집(月沙集),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 남계집(南溪集), 관시록(觀時錄), 운암잡록(雲巖雜錄), 백사집(白沙集), 조야첨재(朝野僉載),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유자후(柳子厚)율곡선생전(栗谷先生傳), 황의돈(黃義敦)이이(李珥)(朝鮮名人傳),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 이병도(李丙燾) 자료한국 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 (同)이율곡(李栗谷)의 입산동기(入山動機)에 대하여(朝鮮史學 1-1 1926), 김경탁(金敬琢) 율곡(栗谷)의 연구(硏究), 박종홍(朴鍾鴻)이이(李珥)(한국의 인간상 제2권) 박종홍, 《한국사상사론고》, 서문당, 1977. 송석구, 《율곡의 철학사상연구》, 형설출판사, 1987. 유승국《율곡철학의 근본정신》,《동양철학연구》, 동방문화연구원, 1988. 이동준, 《율곡의 성리학과 사회철학》,《한국사상사대계》Ⅳ,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4. 이병도, 《율곡의 생애와 사상》, 서문당, 1973.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9. 이준호 편, 《율곡의 사상》, 현암사, 1973. 장지연 저, 柳正東 역, 《조선유교연원》, 삼성문화문고, 1979. 채무송,《퇴계율곡철학의비교연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74. 한국철학회, 《한국철학연구》 중, 동명사, 1978.한국철학회, 《한국철학사》 중, 동명사, 1987.현상윤, 《조선유학사》, 중서관, 1949. 황의동, 《율곡철학연구》, 경문사, 1987. 등 자료들이 수없이 많다.
신사임당(申師任堂)
신사임당(1504 ~ 1551)이름은 인선. 사임당(師任堂)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10)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신명화의 딸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신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李元秀)공과 결혼하였다. 이때 학문을 열심히 닦기로 약속하고 떠난 남편 이원수가 아내 신사임당을 그리워하여 밤중에 돌아오자 되돌려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날, 사임당은 남편인 이공과, 10년 동안 서로 헤어져 학업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맺었다. 마침내 이공은 사랑하는 부인을 처가에 남겨 두고 서울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이공은 며칠동안 계속 집으로 되돌아 왔다. 사임당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바느질 그릇 에서 가위를 끄집어내어 이공 앞에 놓고, 심각한 목소리로, ꡒ나는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오래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결이라도 해서 내 인생을 마치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ꡓ
이 말 한 마디에 이공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하고 부인과 작별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이공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뜻을 이루었다. 또한 남편 이원수가 당숙인 우의정 이기(李芑)36)의 집을 드나들자 이를 말렸다.
그것은 이기가 1545년(인종1) 윤원형과 함께 당파 싸움을 일으켜 죄 없는 많은 선비를을 모함하여 죽였기 때문이다. 이원수는 이러한 신사임당의 말을 받아 들여 뒷날 당파 싸움의 화를 당하지 않았다. 신사임당은 그저 평범한 아내가 아니라, 남편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강인한 품성을 지닌 아내였다.
신사임당은 네 아들과 세 딸을 낳아 사랑으로 키웠다.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갖도록 엄격하게 교육을 시켰는데, 신사임당의 자애로운 성품과 행실을 이어받아 일곱 남매는 저마다 훌륭하게 자랐다. 그 가운데에서도 율곡 이이의 인품과 학문은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한국의 대표적 여성상으로 꼽히고 있는 신사임당은 그 스스로 대단한 예술가적 자질을 갖춘 천재였다. 어려서부터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고, 시와 그림에도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그림 솜씨는 대단하여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보고 똑같이 그렸을 정도였다. 이후 안견의 화풍에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정교함을 더한 신사임당은 조선 최고의 여류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산수화와 풀, 벌레, 포도 등을 그리는데에도 독특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신사임당은 한시에도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원수를 따라 시댁인 한양으로 오는길에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며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사친(思親)> 등은 매우 훌륭하다37).
어린 시절 어느 날 꽈리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림 속의 메뚜기를 닭이 와서 쪼아 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 아울러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닦아 예술가인 동시에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부인으로, 또 훌륭한 어머니로서 우리 나라 여성의 모범이 되어 존경을 받고 있다.
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어느 쪽에서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부인의 치마가 다 젖었다. ꡒ이를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옷을 버렸으니….ꡓ그 부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왔던 것.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 때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말했다. ꡒ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보겠습니다.ꡓ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신사임당에게 옷을 벗어 주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다. 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랐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ꡒ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ꡓ 과연 신사임당의 말대로 시장에 치마를 파니 새 비단 치마를 몇 벌이나 살 수 있는 돈이 마련됐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연산군 10년인 1504년 아버지는 명화(命和)와 어머니 용인 李씨 사이에서 태어나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 (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했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했으나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선생의 탄생설화가 있는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으며38)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수송동(壽松洞)과 청진동(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은 당호로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화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인물로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ꡒ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ꡓ고 격찬했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머리〔馬蹄蠶頭〕 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ꡒ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ꡐ안견의 다음에 간다.ꡑ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ꡓ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사임당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만한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그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 「초충도」들은 한결같이 단순한 주제, 간결한 구도, 섬세하고 여성적인 표현, 산뜻하면서도 한국적 품위를 지닌 색채감각 등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사실상 조선시대의 모든 초충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 분야의 절대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작(眞作)보다는, 그의 작품이라 추축되는 작품들이 많이 전해진다. 1551년 신사임당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은 뛰어난 화가인 동시에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부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곱 남매를 키운 훌륭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신사임당은 우리 나라 여성의 모범이 되고 있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본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매창(梅窓),옥산(玉山)이우(李瑀)
천재 가문에 또하나의 천재(이율곡의 아우) 이우 "왕대밭에 왕대난다" 조선왕조 천재가문인 이율곡, 신사임당 가문이 배출한 또 하나의 천재 가 있다. 바로 이율곡의 누님 매창 그리고 동생 이우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맏딸 매창(1529~?)과 막내아들 옥산 이우(1542~1609)는 둘 다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시화(時畵)에 능했다39).
특히 이우(李瑀)공은 조선조 통털어 시, 서, 화, 금 (詩, 書, 畵, 琴)에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4절로 불려지는 유일한 인물이다40). 천불여이물[天不與二物]이라 하여 하늘은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대개 용모가 뛰어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어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행동이 뛰어나면 지성이 모자라고, 이렇듯 여러재능을 겸비하기란 천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그림은 물론 시와 글 가야금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고 특히 어머니의 화풍을 따라 초충[草蟲], 사군자 등을 잘 그렸으며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벌레인 줄 알고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아들 경절도 서, 화, 금(書, 畵, 琴)에 뛰어난 삼절이었으며 신사임당의 삼절과 자신의 사절을 합치면 십절이 탄생되어 불세출의 기록을 역사 속에 남겼다. 신사임당 家의 천재적 재능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며 역사속의 거울이 되고 있다.
이우(李瑀)[1542~1609]공은 조선 중기의 서화가로서 본관 덕수(德水)41). 자 계헌(季獻). 호 옥산(玉山)․죽와(竹窩)․기와(寄窩). 파주에서 성장하였다. 초명은 위(瑋)․후(珝)이며, 좌찬성에 추증된 元秀의 아들이며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동생이며 사임당(師任堂) 신씨의 아들이다. 벼슬은 빙고별좌(氷庫別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비안현감과 괴산․고부군수를 거쳐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시․서․화․금에 두루 능하여 사절(四絶)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글씨는 행서․초서를 잘 쓰고 그림은 특히 초충(草蟲)과 사군자․포도 등을 잘 그렸으며 화풍은 어머니의 화풍을 따랐다 한다. 신사임당에게서도 볼 수가 있는데, 오늘날 사임당의 필적이라든가 초충도(草蟲圖)라고 전하는 작품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의 차남 옥산 이우(1542~1609)의 작품이다.
이옥산은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글씨를 배웠고 커서는 장인인 매학정42) 고산 황기로(黃耆老)43)의 필체를 익혔기 때문에 어린시절과 장성한 뒤의 작품 경향에 차이가 있다44). 유작으로는 개인 소장의《설중매죽도(雪中梅竹圖)》,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노매도(老梅圖)》《수과초충도(水瓜草蟲圖)》, 그리고 《포도도》등이 전한다. 강릉시 저동의 호해정(지방유형문화재 제 62호)에 옥산(玉山) 이우(李瑀)의 시문(詩文)이 있으며 구천서원45)에 배향되었다.
자운서원 (紫雲書院)
경기도 파주시46) 법원읍 동문리 산5-1번지 에 있는 서원.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1615년(광해군47) 7)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어 1650년(효종 원년)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1713년(숙종48) 39) 김장생(金長生)49)과 박세채(朴世采)50)를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다가 1868년(고종51) 5) 흥선대원군52)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9년 지방 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여 1975년과 1976년에 보수하였다.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설계하였다. 사당은 6칸으로 익공계(翼工系) 형식 팔작지붕이며 이이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외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夾門)은 양측면을 박공으로 마감한 솟을대문 모양이며, 묘정비(廟庭碑)53)가 세워져 있다. 좌우 능선에 신사임당 묘(기념물 제14호)와 이이선생의 묘소54)(기념물 제15호)가 있다. 매년 8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낸다. 입구에는 이이선생 신도비(향토유적 제6호)55)가 있으며 주변에 유명한 화석정이 있다. 기타 파주지역에는 반구정56), 황희정승묘소57), 파산서원58), 허준선생묘소59), 윤관장군묘소60), 공순영릉61)의 유적지가 있고 율곡기념관62), 임진각, 통일공원등의 관광지와 파주군 주관으로 율곡문화제63)가 매년 개최된다.
화석정(花石亭)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을 한 정면3간, 측면 2간의 정자다. 송림에 둘러 쌓여 임진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폼이 운치있다.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1호로 지정된 화석정은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임진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수려한 경관에 위치해 있다.
율곡 선생의 5대 조부, 강평공 이명신에 의해 세종 25년(1443년) 창건된 것을 성종 9년(1478년)에 선생의 증조부이신 이의석이 중수하고, 몽암 이숙함이 "화석정"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후에 율곡 선생이 다시 중수하여 사용을 하던 이 정자는 설화64)가 전한다. 율곡이 자주 이곳 화석정에 들러 묵상을 할 때면 항상 기름걸레로 마루 바닥을 닦도록 시켰다고 한다.
율곡은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고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유서를 남긴 율곡은 나라가 어려울 때 열어 보라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개성으로 도피하던 선조가 임진나루에 도착했으나, 칠흙같은 밤이기 때문에 건널 수가 없었다. 이때 율곡이 전한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라는 유서대로 불을 지펴 임진나루 일대는 환해지고, 임금은 무사히 강을 건너 피신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소실되어 80년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년)에 선생의 종증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에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화석정이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임진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관도 뛰어나다.
花石亭(李珥)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산토고윤월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숲 속의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은 끝이 없네
멀리 강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구나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도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소리가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화석정
자운서원배치도
율곡선생 묘소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
1535-1598(중종30-선조31) 본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黙庵) 또는 우계(牛溪)이다. 시호 문간(文簡)이며, 현감 수침(守琛)65)의 아들로 서울 순화방(順和坊:지금의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Ⅰ. 가계 및 수학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초시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 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Ⅱ. 율곡과의 사칠이기설 논변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 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하였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일찍이 이황을 사숙하였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중용》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Ⅲ. 관직사체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아니하였고, 그해 12월에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75년 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하였으나 병으로 사체(辭遞)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지평 등을 제수하였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그의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지평· 예빈시판관· 장흥고주부· 종묘서령· 광흥창주부· 장령·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년 정월에는 종묘령(宗廟令)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 해 2월에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하여 진달하였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해 3월에는 장령에서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이어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更張)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미숙(米菽)을 하사하면서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 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하였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그는 경연석상 또는 상소로 계속 퇴귀(退歸)를 청하였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薪炭)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에 승배(陞拜)되었다. 그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는 다시 집의(執義)·사옹원정(司饔院正)· 사재감정(司宰監正)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니, 그 이듬해에 특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그의 관계 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이가 죽자 사귀(辭歸)를 청하였으나 허여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으며, 그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하여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를 하였고,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하였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하자 동인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지만, 사실은 그는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한 것이었다.
1590년에는 양민(養民)·보방(保邦)·율탐(律貪)·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귀향하였으며, 1591년에《율곡집 栗谷集》을 평정하였다.
Ⅳ. 임진왜란 중 시무소 상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다가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하면서 불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편의시무9조 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유호(留扈)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을 건의한 이정암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그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에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하였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견(嚴譴)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Ⅴ. 저술
저서로는 《우계집》 6권 6책과 《주문지결 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 爲學之方》 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廡)되었다. 제향 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Ⅵ.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牛溪集, 牛溪年譜, 牛溪先生年譜附錄, 牛溪先生年譜補遺, 牛溪先生年譜後錄, 燃藜室記述(李肯翊)
儒敎淵源(張志淵)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東國文廟十八賢年譜(韓國名賢遺蹟硏究所, 1966)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韓國儒學史(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7). 〈宋贊植〉
우계선생의 묘소
우계선생의 신도비
우계선생의 글씨
우계선생사당
1) 강릉오죽헌 약사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조부 이사온의 집이었던 것을 무남독녀 이씨 부인이 상속받았다. 이씨부인은 서울 신명화공과 결혼 다섯 딸을 두었으니 그 중에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서울 이원수공에게 시집을 갔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이곳 친청에서 지내는 때가 많았기 때문에 율곡선생은 이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외조모 이씨 부인이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분재기에 따라 율곡의 이종제 권처균에게 상속 되었으며, 오죽헌이란 명칭은 집 주위에 오죽이 많아 권처균의 아호를 오죽헌이라 부른데서 비롯된 것이다. 1788년 율곡선생의 친필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는 어제각을 건립하였다. 1961년 11월 제1회 율곡제전을 시작으로 그 이후 매년 10월에 봉행하고 있다. 오죽헌은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으며,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오죽헌 연혁
오죽헌은 연산군때 병조 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의 집으로 사위 이사온이 물려 받았다. 사임당의 외조부인 이사온 공은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다만 사임당의 모친인 이씨부인 한 분을 두었다. 이씨 부인이 서울 신명화 공과 결혼하였으나 그 또한 아들이 없이 다섯딸을 두었다. 이씨부인은 무남독녀 였으므로 출가 후에도 줄곧 오죽헌에서 생활하였는데 부모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친정의 집이 남편 신명화공의 소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후 신명화공의 둘째 따님인 사임당은 서울의 이원수 공과 결혼을 하였지만 친정 어머니 이씨부인을 모시기 위해 친정에 와서 기거하는 때가 많았으므로 율곡선생이 이곳 오죽헌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뒤에 사임당이 서울 시댁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이곳에는 이씨부인만 홀로 지내다가 90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가 신명화공이 돌아 가신지 오래이고, 사임당 또한 세상을 떠 난지 열 여덟 해이였으며, 이원수공도 세상을 떠난지 여덟 해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율곡선생의 맏형 선이 뒤를 받들어야 했지만 그 또한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선의 아들 경진이 있었으나 나이가 어려 가정의 모든 일을 율곡선생이 주관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 서른 다섯 살 되던 해이다. 율곡선생은 외조모가 생전에 남긴 분재기에 따라서 오죽헌을 넷째 이모의 아들인 권처균에게 주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로부터 권처균의 소유가 되어 후손에 의해 관리되어 왔다. 오죽헌이라는 명칭은 집 주위에 오죽이 많아서 권처균이 그의 아호를 오죽헌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1504 년 (연산군 10년)사임당이 이곳에서 출생하다. 1536년 (중종 31년)율곡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1788년 (정조 12년)정조대왕이 오죽헌에 전해오는 율곡 유물인 격몽요결과 어려서부터 쓰던 벼루를 친히 보고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에 명하여 유물을 보관하는 어제각을 건립하게 되었다. 1962년 강원도는 오죽헌을 보수하엿으며 11월에 율곡선생의 추모제인 율곡제 행사(제1회)를 봉행하였다. 또한 1963년 2월 7일 정부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오죽헌을 보물 제165호로 지정하였으며, 1964년 율곡선생기념사업회가 율곡의숙을 건립하였다. 1965년 율곡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사임당과 율곡선생의 영정이 제작되어 몽룡실과 문성사에 봉안되었다. 1970년 어제각 및 담장과 축대의 보수를 시작하였고, 1972 년 어제각 및 담장과 축대의 보수를 마무리 하다. 1974 년 오죽헌의 정화사업 계획을 수립하다. 1975 년 오죽헌 정화사업이 시행되었다. 1976년 4월 3일에 정화사업을 완료하였으며. 5월 7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여하였다. 1987년 어제각 복원. 1988 년 입지문 신축. 1991년 사단법인 율곡학회를 창립하였다. 1994년 관리사무소를 신축하고, 출입문 신축. 1996 년 안채 복원하였다.
2) 오죽헌 몽룡실
우리나라 주택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 집에서 이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부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반 크기의 온돌방 그리고 반칸폭의 툇마루로 된 단순한 일자형 평면의 집이다. 커다란 장대석을 한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익공으로 처리한 이익공양식의 집이다. 도리는 굴도리이고 그를 운두가 낮은 장혀로 받치며, 다시 그것을 주간에서는 창방위에 왕자 모양의 화반으로, 기둥에서는 첨차 위에 소로를 놓아 받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양측면에 합각을 형성한 팔작지붕이다. 정면에는 띠살창호를, 측면에는 골판문으로 된 덧문을 달았다. 온돌방은 벽과 천장을 모두 종이로 마감하였고,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마감 하였으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또 오량집의 가구들은 모두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데,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위에 얹고 그 위에 종보를 놓고, 다시 초각한 판대공과 첨차로써 마루도리를 떠받게 하였다. 합각 밑부분에는 귀틀을 짠 뒤 우물천장을 만들어 서까래가 모여드는 것을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주택양식에서는 보기 드물다. 쇠서의 곡선에는 굴곡이 남아 있으며 첨차의 형태는 조선 말기적인 주심포집과 공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심포집에서는 익공집으로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 이다.
3) 율곡의 유년시절 일화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상 이름을 떨친 사람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남다른 면모를 지닌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율곡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릴 때의 일화로부터 특이한 점이 많다. 율곡이 3세 때 외조모 이씨가 석류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고 묻자 "은행은 껍질 속에 덩어리 푸른 구슬 머금었고, 석류는 껍질 안에 부스러진 붉은 구슬 싸고 있네"라고 고시(古詩)중의 한 구절을 들어 답하였다는 일화 속에서 남달리 총명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의 학문적 천재성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4세 때, 「史略」을 읽다가 훈장선생이 잘못 떼어 읽는 구절을 지적 한 일이다. 또한 7세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유명한 化石亭 시는 8세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율곡은 이러한 슬기로운 자질뿐 아니라 천품이 매우 어질었던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그것은 율곡이 5세 때 '어머니 사임당이 몹시 아파 온 집안이 경황이 없자 집안 사람들 몰래 외조부 사당에 가서 엎드려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 같은 해 여름 어느 날 큰비가 내려 동네 냇물이 넘쳐흘렀는데 어떤 사람이 내를 건너다 넘어져 위태롭게 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웃었는데 어린 율곡만이 기둥을 안고 안타까워하다가 그 행인이 무사히 건너자 안도의 기색을 나타내었다는 일화도 있다. 또 열 한 살 때 아버지가 병환에 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서 바치고 사당 앞에서 기도한 일도 전해지고 있다. 율곡은 이처럼 천부적으로 지혜로운 자질과 착한 성품을 갖추고 있어 후일 도학자로서 경세가로서 대성할 기틀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어머니이자 스승이었던 사임당이 별세하자 정신적 충격과 슬픔으로 인해 금강산 절로 들어가 불교적 소양을 쌓게 되었으며 후일 이것이 그의 학문적 세계의 폭과 깊이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전기소설<<이율곡>>여덟살의 천재소년 율곡이 사는 마을에 벼슬아치 한 사람이 살았다. 이름은 진복창, 그는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벼슬아치였다. 솟을대문이 선 진복창네 대궐 같은 큰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랑거렸다. 뇌물 짐을 진 하인들을 거느린 양반들이었다. 대부분 진복창에게 뇌물을 바치고 부탁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진복창의 집에서는 늘 고함 소리가 골목 밖까지 들려왔다. 진복창의 목소리였다. 자기 집에 뇌물을 가져오거나 부탁을 하러 오는 사람들을 공연히 큰소리로 꾸짖는 소리였다. 그러면서도 뇌물 짐을 도로 내보내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짐짓 겉으로는 정직한 체 하면서 안으로는 뇌물을 챙기는 엉큼하고 교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율곡의 눈에는 이런 진복창의 허세와 부정 그리고 거짓스러움이 영 못마땅하게 보였다. 그래서 어린 율곡은 <진복창전>이라는 글을 써서 그를 비판했다. 군자는 덕을 안으로 쌓기 때문에 그 마음이 늘 편하고 고요하다. 그리고 소인은 악한 것을 안으로 쌓기 때문에 그 마음이 늘 편안치 않는 법이다. 내가 진복창의 사람됨을 보니 속으로는 편안치 않은 생각을 품고 겉으로는 편안한 체한다. 저런 사람이 큰 권세를 부리게 되면 뒷날 나라에 걱정스러운 일이 끝이 없을 것이다. 율곡은 어린 눈으로 진복창의 장래를 이렇게 예언하며 자신은 절대로 진복창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과연 진복창은 어린 율곡이 예언했던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겉으로만 훌륭한 척하여 한때 벼슬이 대사헌에까지 올랐는데, 권세를 잡자 악독한 사람으로 변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독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명종 임금 때는 소윤파의 우도머리이자 임금의 외삼촌인 윤원형이 권세를 휘두르자, 그 앞잡이가 되어 윤원형을 싫어하는 사람은 모조리 붙잡아다 죽이거나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래서 진복창 때문에 까닭 없이 피를 보는 사람이 숫하게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허세와 부정은 오래가지 않는 법입니다. 진복창 자신도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함경도 삼수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율곡은 어릴 때부터 이처럼 머리가 뛰어나고 부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5) 화석정 花石亭(경기도지정문화재),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 , 지정년월일 1974년 9월26일, 시 대 조선중기, 소재지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소 유 자 덕수이씨종중 , 율곡 이이(李珥)선생의 본향인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은 원래 고려말 대유학자 인 길재(吉再)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기록은 없다. 그후 세종 25년(1443)에 율곡선생의 5대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세운 것을 성종 (成宗)9년(1478) 선생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이숙함(李叔咸)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때 불타없어져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顯宗)14년(1673)에 율곡선생의 증손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건물의 정면중앙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있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선생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歲賦詩』가 걸려있다.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숲속정자에 가을이 이미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먼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6) 1504년(연산 10년) 10월 29일 출생. 현재의 강릉시 죽헌동 와가인 오죽헌에서 고려 건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18대손인 신명화공과 이사온공의 따님이었던 이씨부인의의 둘째 딸로 태어나다. 1510년(중종 5년). 7세 어려서 외조부 이사온이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안견의 화풍을 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할 뿐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다. 1516년(중종 11년). 13세 부친 신명화공이 진사 시험에 오르다. 1522년(중종 17년). 19세 덕수이씨 원수공에게 출가하다. 출가후 그대로 친정에 머물러 있던 중 11월 친정 부친이 별세하다. 1524년(중종 19년). 21세 서울에서 맏아들 선이 태어나다. 1529년(중종 24년). 26세 맏딸 매창이 태어나다. 1536년(중종 31년). 33세 이른 봄 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닷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다. 다시 그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선생이다.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고 한다. 1541년(중종 36년). 38세 강릉 친정에서 어머니를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가며 대관령에서 시를 읊다.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다. 네째 아들 우가 태어나다. 서울에 살며 홀로 계신 친정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읊다. 1550년(명종 5년). 47세 여름에 부군 이원수공이 수운 판관이 되다. 1551년(명종 6년). 48세 5월 17일 새벽, 병상에서 2, 3일 만에 홀연히 별세하다. 세곡을 운반하는 일로 평안도에 갔던 부군과 두 아들은 그날 서강에 도착하여 부인의 별세한 소식을 듣다.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사 지내다. 모든 여성의 사표로 덕과 학문, 예능을 고루 갖춘 여류문인이자 화가, 서예가로 우리겨례의 영원한 어머니이며, 우리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현모양처이다. 사임당은 어려서 부터 조선조 화단의 태두 안견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산수, 포도, 초충도에 남다른 솜씨를 보였으며, 여성으로서의 교양과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19세 때 이원수공과 혼인한 후에 아버님이 일찍 별세 하셨으므로 홀어머니 이씨를 모시고 친정에 살면서 서울 시댁과 율곡리 (현 경기도 파주)를 내왕 하였다.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산을 날아 내리네./ 이 시는 사임당이 38세 때 강릉 친정으로 어머님을 찾아 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에서 오죽헌쪽을 바라보면서 홀로 계시는 늙으신 어머님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사임당이 33세 되던 해 1536년(중중 31년) 12월 26일 새벽에 검고 큰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선생이다. 그 방을 몽룡실이라 하는데, 일설에는 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하신 곳이 봉평이라고도 한다. 그 까닭은 부군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으로 여러 곳을 다니게 되었는데 지금의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의 속칭 판관대에 우거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38세 때에 강릉 친정을 떠나 서울 시가(수진방 : 현 청진동)로 옮겨 사시다가 삼청동에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 48세 였다. /어머님 그리워.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자나 깨나 꿈 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 모래톱에 흐트락 모이락, 고깃배는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까./ 이시도 같은 무렵 서울 시댁(수진방)에 계실때 늘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님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사임당은 일찍 학자의 집안에서 자라나 엄격한 교훈 밑에서 유학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탐독하여 시와 문장에 능하였다. 글씨에도 고상한 정신과 기백이 넘쳐 흐르며 기품있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한 예찬은 많은 사람들의 발문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여류의 으뜸이다. 또한 시, 서, 화에 걸친 수많은 걸작들을 남기고 있다. /살아 계실 제, 밤마다 달을 향해 비옵는 마음, 살아 계실제 다시한번 뵈옵고저.../이 시는 전편이 전해지지 못하고 첫머리 한 귀절만 전해온다. 역시 어머님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7) 성혼 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 ․묵암(黙庵). 시호 문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 ․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ꡒ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ꡓ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 ․황신(黃愼) ․이귀(李貴) ․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5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8) 율곡의 시묘살이와 생애에 얽힌 설화
명종이 등극하자 서정을 쇄신할 위사공신 홍언필이 영의정에 오르고 전임 대사헌 진복창(陳復昌)은 을사사화(乙巳士禍)직후 사관으로 있던 안명세(安明世)를 비롯하여 반대세력의 사람들을 무고한 죄목으로 죽이고 혹은 귀향을 보냄으로서 조정의 신진학자와 문신들을 일소하게 되었다. 이를 근심한 명종 임금은 명종 3년(1548) 4월에 별시문과(別試文科)를 비롯하여 진사시를 시행하게 되었는데 과거가 학문연구의 기본목표는 아니었지만 부모에게 효도하는 의미로서 율곡선생은 13세때 어린 나이로 초시인 진사시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관들이 여러답안들을 심사하여 장원을 뽑아놓고 보니 어린소년 율곡선생의 걸작품으로 승문관에서 모두 놀라움을 금치못한 특례라 하겠으며 이는 우리 나라 유교문화의 대종이 될 등용문이었다. 명종 5년(1550) 율곡이 15세 당시 아버지 이원수공이 찰방직에서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승진된 이듬해 봄 청진동에서 삼천동으로 집을 옮기고 관서지방을 순찰하게 되었는데 맏아들 선(璿)과 셋째아들 이(珥)를 대동하고 한양을 떠나 수개월이 지나 공무를 마치고 명종 6년(1551) 5월 17일 마포서강나루터에 도착하자 부인의 별세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유달리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율곡 소년에게는 실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슬픔속에서 고향인 파주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하에 안장하게 되자 어린 소년 율곡 선생도 16세 당시 시묘살이를 하게 되었다.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살아야 하며 울고, 웃고 고뇌와 번민을 겪어야 하는가, 날이 갈수록 율곡은 극도로 비관하여 허무감에 사로잡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친우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송익필(宋翼弼), 성혼(成渾)등은 율곡을 위로하기 위하여 효도의 길을 상하지 말라며 사서오경(四書五經) 책자를 묘막으로 보내주었다 한다. 그리하여 독서에 전념하면서 3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시묘살이를 마치고 명종 8년(1553) 18세때 어머님 ꡒ신사임당 행장기ꡓ를 지었으며 외조부 신진사의 행장기와 외조모 용인이씨의 감천기(感天記), 진복창기(陳復昌記)를 지었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울적한 심회를 풀길이 없어 발길닿는대로 거닐다가 뚝섬 강건너 봉은사(奉恩寺)를 가게되었는데 승방에 들러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탑상위에 있는 불교서적을 뒤적이게 되었다. 어쩌면 인생문제를 풀어볼 해답이 그 책안에 담겨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하여 불교에는 죽음에 대한 해명의 철학이 있다는 것과 내세관(來世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은 그전에도 묘막에서 중국의 노자와 장자(老子, 莊子)의 철인의 글(189종)을 읽은바 있지만은 허무감에 사로잡힌 율곡은 인생문제의 규명을 시도하며 선학에 입문할 것을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온 후 19세 되는해 봄 금강산으로 입산하게 되었다. 속세(俗世)를 등지고 금강산으로 입산한 율곡은 마하연(摩河衍)에 이르러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으로 눈을 감고 정좌하여 모든 계율(戒律)을 굳게 지키며 침식을 잊고 불도를 탐구하기에 정진하였다. 이렇게 성도(成道)의 경지에 들어선 율곡은 금강(金剛), 봉래(蓬萊), 풍악(楓岳), 개골(皆骨) 산중의 유명한 선방과 이름높은 대사(大師)를 찾아다니며 문답식으로 불도의 진리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유교에서 시발하여 불교의 선학에 들어간 율곡이 2년동안 정진하여 그 철리(哲理)를 규명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암굴(岩窟)속의 노승(老僧)과 대담중 그 질문에 응한 율곡의 선학에 대한 답변은 ꡒ고기가 물속에서 뛰고 솔개가 하늘을 날음은 위아래가 마찬가지고 저런것 모두가 색(色)도 아니요 공(空)도 아니다. 즉 어약연비상하동 적반비 색연비공(魚躍鳶飛上下同 適般非色鳶非空)이라 하였다. 율곡이 선학을 탐구한 결과로 얻은 인생문제의 해답은 불교가 인간세상의 무상에 환멸을 느끼고 내세(來世)의 복락(福樂)을 기원(祈願)하며 속죄하는 수양으로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수업임을 알았으며 ꡒ인간의 도리를 먼저 깨달은 자가 후진을 지도하고 구제하며 함께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자는 목표 즉 세상을 건지고 천하를 다스려보자는 이상(理想)에 있거늘.ꡓ 부모형제 처자를 저버리는 윤리를 저버리고 혼자만이 공문(空門)에 도취함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유학의 인생철학으로 돌아와 현실을 긍정하고 경국제민(經國濟民)을 위한 학문의 길로 매진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9) .자경문(自警文) (한국문집총간 44집 302쪽)
1.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2.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3.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제 때가 된 뒤에 말을 한다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다.
4.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일은, 그런 힘을 얻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정력(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힘)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잡념이 분잡하게 일어날 때에 의식적으로 그것을 싫어해서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분잡해지는 것과 같다. 금방 일어났다가 금방 없어졌다가 하여 나로 말미암지 않는 것같은 것이 마음이다. 가령 잡념을 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은 내 가슴에 가로질러 있으니, 이것 또한 망녕된 잡념이다. 분잡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정신을 수렴하여 집착없이 그것을 살필 일이지 그 생각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부해나가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안정되는 때가 있게 될 것이다. 일을 할 때에 전일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또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이다.
5.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유념하여 게을리함이 없다면, 일체의 나쁜 생각들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6. 萬惡 皆從不謹獨生 모든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생겨난다.
7.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다.
8.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그냥 가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변하여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오똑히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 된다.
9.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10.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에, 만약 해야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일체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으니그르니 하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11.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12.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해야 한다.
13.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한 집안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지 아니함은 단지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14.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 서도 안 된다.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십분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든 일어나 두루 걸어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15.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된다.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늦추지도 않고 서둘지도 않으면서 죽을 때까지 해나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10) 노경린 盧慶麟 [1516~156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곡산(谷山). 자 인보(仁甫). 호 사인당(四印堂).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학유(學諭)를 거쳐 지평(持平)에 진급하였으나 사감(私感)을 품은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파천되었다.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서원을 세워 유학(儒學)을 크게 장려하였으며, 1557년(명종 12)에는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그 뒤 숙천부사(肅川府使)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1564년에 가자(加資)되었다.
11)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경북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堣)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 ․박사(博士) ․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 ․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 ․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芑)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 ․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 ․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 ․聖學十圖 ․自省錄 ․朱書記疑 ․心經釋疑 ․宋季之明理學通錄 ․古鏡重磨方 ․朱子書節要 ․理學通錄 ․啓蒙傳疑 ․經書釋義 ․喪禮問答 ․戊辰封事 ․退溪書節要 ․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12) 황기로[黃耆老]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초서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았다.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벼슬은 별좌를 지냈다. 필법이 뛰어났으며 특히 초서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그의 서체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년에 낙동강의 서쪽 보천산(寶泉山) 위에 정자를 짓고 필묵과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근묵〉 등에 진적이 전하며, 〈관란정첩 觀瀾亭帖〉․〈대동서법 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금석으로는 1555년(명종 10)에 승지 이번(李蕃)의 비문을 썼다. 저서로 〈고산집〉이 있다.후에 율곡과는 사돈지연이 있었다.
13) 보우 普雨 [1515~1565] 조선 중기에 불교의 전성시대를 이루게 한 승려. 호 허응당(虛應堂) ․나암(懶菴). 1530년(중종 25)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 들어가 참선(參禪)과 경전(經典) 연구에 전심하고, 6년 만에 하산하였으나, 관(官)의 횡포로 사찰이 파괴되고 주지(住持)가 투옥되는 사태에 직면, 다시 입산하였다. 1548년(명종 3)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어 당시 질식상태에 있던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550년 선 ․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1551년 선종 판사(禪宗判事)가 되어 권신 윤원형(尹元衡) ․상진(尙震) 등의 도움으로 300여 개의 사찰을 나라의 공인(公認) 정찰(淨刹)로 만들었으며,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승려 4,000여 명을 선발하여 자격을 인정하는 한편, 과거에 승과(僧科)를 두게 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한때 춘천 청평사(淸平寺)로 옮겼다가 1559년 다시 봉은사로 돌아왔는데,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올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조야의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유림(儒林)의 성화에 밀려 승직이 박탈되고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참형(斬刑)되었다. 보우가 죽은 뒤 불교는 종전의 억불정책(抑佛政策)시대로 되돌아가 양종제도(兩宗制度)와 승과제도가 폐지되는 등 심한 억압을 받게 되었다. 저서에 《허응당집(虛應堂集)》 《선게잡저(禪偈雜著)》 《불사문답(佛事問答)》 등이 있다.
14) 윤원형 尹元衡 [?~1565] 본관 파평(坡平). 자 언평(彦平). 소윤(小尹)의 영수이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세력을 잡아 세자(世子:仁宗)를 폐위하고, 경원대군(慶原大君:明宗) 환(緝)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모의로 세자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과 다투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파직당하였으나 다음 해 명종이 즉위, 이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면서 득세, 대윤의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을사사화의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1546년(명종 1), 형 원로(元老)와 권세(權勢)를 다투어 유배하게 하고, 이듬해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1548년 이조판서, 1551년 우의정, 1558년 다시 우의정을 거쳐서, 1560년(명종 15)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지고, 1563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강음(江陰)에 귀양가서 죽었다.
15) 동호문답 東湖問答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이이(李珥)가 자신의 정치관(政治觀)을 문답식으로 서술하여 선조에게 올린 글. 1569년(선조 2)에 완성된 것으로서, 이이가 34세 되던 해 홍문관교리로 동호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면서 쓴 것이다. 내용은 군도(君道) ․신도(臣道) ․군신상득지난(君臣相得之難) ․동방도학불행(東方道學不行)․아조고도불부(我朝古道不復)․당금지시세(當今之時勢)․무실위수기지요(務實爲修己之要)․안민지술(安民之術)․교령지술(敎令之術)․변간위용현지요(辨奸爲用賢之要)․정명위치도지본(正名爲治道之本)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율곡전서(栗谷全書)》 제15권에 들어 있다.
16) 만언봉사 萬言封事 율곡 이이(李珥:1536~1584)가 성학(聖學)의 대요(大要)를 적은 책.
《갑술만언봉사(甲戌萬言封事)》라고도 한다. 1574년(선조 7)에 지어 올린 봉사(封事)로서, 주로 성학의 대요를 논하였고, 수기안민지요(修己安民之要)와 기천영명지술(祈天永命之術)에도 언급하였다. 전문(全文)이 율곡집(栗谷集)에도 실려 있다.
17) 성학집요 聖學輯要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李珥:1536~1584)가 1575년(선조 8) 제왕의 학문 내용을 정리해 바친 책. 8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율곡전서》에 실려 있다. 16세기에 사회와 정부를 주도하게 된 사림파는 개인의 수양과 학문이 사회 운영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신유학의 이념을 매우 강조하였으며, 최고 권력자인 군주의 수양과 학문에 대해서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반인 교육을 위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함께, 16세기 후반 사림파의 학문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이이의 교육에 대한 대표적 저술이다.1편은 임금에게 이 책을 올리는 의미를 밝힌 ꡐ진차(進箚)ꡑ와 서문, 통설 등을 실었고, 2~4편은 ꡐ수기편(修己篇)ꡑ으로서 자기 몸의 수양에 대한 내용을, 5편은 ꡐ정가편(正家篇)ꡑ으로 가문을 바로하는 법을, 6~7편은 ꡐ위정편(爲政篇)ꡑ으로 올바른 정치의 방법을, 8편은 학문과 위정의 바른 줄기를 밝힌 성현도통(聖賢道統)을 담았다. 저자는 사서와 육경에 담긴 도를 개략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수기 ․정가 ․위정편은 각기 총론과 여러 개의 각론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본 구도는 《대학》을 따른 것으로서 수기편은 《대학》의 수신(修身)에, 정가편은 제가(齊家)에, 위정편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해당한다. 마지막의 성현도통은 《대학》의 이념이 구현되어온 맥락을 설명하였다. 이후 경연의 교재로 실제 국왕의 학문에 많이 이용되었지만, 일반 사족(士族)들의 학문에도 매우 중요한 저술이었다. 홍대용(洪大用)이 사회를 운영하는 학문으로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과 함께 이 책을 중시한 예에서도 나타나듯이, 개혁의 방향을 탐색하는 데도 오랫동안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18)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의하면 해서지방의 명승지로서 총수산(增秀山) ․석담(石潭:海州) ․구월산(文化) ․백사정(白沙汀:長淵)의 4곳을 들었다. 그중에도 해주의 구곡담(九曲潭)을 자세히 들고 이이(李珥)가 살던 곳이라고 말하였다. 이중환(李重煥: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에는 ꡐ면악(綿岳)의 한 가지가 동쪽으로 뻗어 연안(延安) ․배천(白川) 들에 이르는데, 이곳은 해주의 동쪽, 후서강(後西江)의 서쪽, 보련강(寶輦江)의 하류 북쪽에 각각 해당하며 큰 강, 높은 산, 넓은 평야가 모이는 곳이 되고 조석(潮汐)이 드나들고 기름진 평야가 아름다워, 마치 중국의 강회(江淮)지방의 풍경과도 같아 가장 살만한 곳(最爲可居地)ꡑ이라고 연백지방을 가거지로서 극찬하고 있다. 그리고 해주의 승천(昇天) ․송화(松禾) ․수회촌(水回村)을 실로 살 만한 곳(實爲可居地)이라 하였고, 그 외 가거지로서 황주(黃州) ․봉산(鳳山) ․재령(載寧) ․문화(文化) 등 야중팔읍(野中八邑)을 들었고, 장연 ․풍천 등 해상십읍(海上十邑)은 명승지가 많아 사람이 못살 곳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조선 8도의 가거지를 그리도 찾으려고 애쓰던 이중환은 결국 연안에서 최후를 마쳤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의 <상택편(相宅篇)>에는 석담 ․수회촌 ․채촌(采村:新溪) ․화촌동(花村洞:綿岳의 東쪽) ․주구(舟邱:兎山)의 다섯 곳을 가거지로 들었다.
19) 격몽요결 擊蒙要訣 1577년(선조 10) 이이(李珥)가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 저술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여러 형태로 간행되었다. 예를 들어 1629년(인조 7)에는 황해감사가 수백 권을 인쇄하여 조정에 바쳐 반포하게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예조에서 《소학》 《오륜가(五倫歌)》와 함께 간행하였다. 《율곡전서(栗谷全書)》에도 실려 있다.해주에서 학도들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기초교육에 대해 정리한 것으로서, 저자가 국왕의 학문을 위해 저술한 《성학집요(聖學輯要)》, 관학(官學) 교육을 위해 저술한 《학교모범(學校模範)》에 대응하는 책이다.조선 전기를 이끌어온 훈구파가 남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문물과 제도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하여, 16세기 이후의 사림은 종래의 학문이 시가와 문장[詞章]을 중시하고 근본이 되는 경학(經學)과 이학(理學)을 소홀히 하여 학자들이 학문의 방향을 알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먼저 자신을 수양[修己]하여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중종때의 사림이 어린이에게 일상생활을 가르치기 위한 《소학》에 성리학의 요체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그 책을 대대적으로 보급하고 깊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학문의 방법과 내용을 일신하여 그들 중심의 사회질서를 새로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소학》 외에도 《동몽수지(童蒙須知)》를 비롯한 여러 아동 교육서가 번역되고 널리 보급되었으며, 나아가 박세무(朴世茂)의 《동몽선습》이나 유희춘(柳希春)의 《속몽구(續蒙求)》와 같은 교육서들이 직접 편찬되었다. 이이는 성리학을 체질화한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그들의 이념을 국정 전반에 본격적으로 적용해 나가던 선조 초년의 정치와 사상을 주도하던 인물로서, 이 책도 단순히 아동을 교육하기 위한 개인저술이 아니라 학문을 통해 사림파의 이념을 사회 저변에 확산하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초기 사림 이래의 《소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결실을 맺은 저술이다. 1635년 이이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한 유생들이 이 책을 《성학집요》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 꼽고 학자 일반의 일상생활에 극히 절실한 책이라고 높인 것은 위와 같은 까닭에서였다. 앞머리에 저자의 서문이 있고, 10개 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마다 여러 항목이 나열되어 있다. 학문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하여 일상생활을 마땅하게 해나가는 것일 따름이라는 입장에서 저술되었다. 물론, 이 때의 일상생활은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성스러워야 하며, 신하는 충성되고, 부부는 유별해야 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고, 어린 자는 나이가 많은 자를 공경해야 하고, 붕우(朋友)된 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글을 읽어 이치를 연구하여[讀書窮理]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을 밝힌 다음에, 깊은 경지로 들어가 올바름을 얻고 밟아 실천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도(中道)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학도에게 뜻을 세우고 몸을 삼가며 부모를 모시고 남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 바로 마음을 닦고 도를 향하는 기초를 세우도록 노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며, 동시에 저자로서도 스스로를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하였다. 제1장 입지(立志)에서는 학문에 뜻을 둔 모든 사람이 성인(聖人)이 되기를 목표로 하여 물러서지 말고 나아가라고 하였으며, 제2장 혁구습(革舊習)에서는 학문 성취를 향해 용감히 나아가기 위해 ꡐ마음과 뜻을 게을리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모방할 뿐 안일한 것을 생각하고 얽매임에 깊이 물들어 있는 것ꡑ 등 구체적 조항 8개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제3장 지신(持身)에서는 충신(忠信) 등 몸을 지키는 방도를 제시하여 뜻을 어지럽히지 말고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제4장 독서는 독서가 도에 들어가기 위한 궁리의 전제가 되며, 단정한 자세로 깊이 정독할 것을 가르치고 독서의 순서를 제시하였다. 즉, 먼저 《소학》을 읽어 부모 ․형 ․임금 ․어른 ․스승 ․친우와의 도리를, 《대학》과 《대학혹문(大學惑問)》을 읽어 이치를 탐구하고 마음을 바로 하며 자기를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도를, 《논어》를 읽어 인(仁)을 구하여 자기를 위하고 본원(本源)이 되는 것을 함양할 것을, 《맹자》를 읽어 의(義)와 이익을 밝게 분별하여 인욕(人慾)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할 것을, 《중용》을 읽어 성정(性情)의 덕이 미루어 극진하게 하는 공력과 바른 자리에 길러내는 오묘함을, 《시경》을 읽어 성정의 그릇됨과 올바름 및 선악에 대한 드러냄과 경계함을, 《예경》을 읽어 하늘의 도를 이치에 따라 적절하게 드러내는 것과 사람이 지켜야 할 법칙의 정해진 제도를, 《서경》을 읽어 중국 고대의 요순과 우왕 ․탕왕 ․문왕이 천하를 다스린 큰 줄기와 법을, 《역경》을 읽어 길흉 ․존망 ․진퇴 ․소장(消長)의 조짐을, 《춘추》를 읽어 성인이 선(善)을 상주고 악을 벌하며 어떤 것은 누르고 어떤 것은 높여 뜻대로 다루는 글과 뜻을 체득하여 실천하라고 하였다. 위 책들을 반복 숙독한 다음에 《근사록(近思錄)》 《가례(家禮)》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와 기타 성리설을 읽어 의리를 몸에 익히고, 여력이 있으면 역사서를 읽어 식견을 키우되 이단과 잡류의 책은 읽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서 정립된 독서 순서와 방법은 조선의 사림파가 그들의 사상체계를 세워 유교의 모든 경전과 성리서를 조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학문적 성과이다. 제5장 사친(事親)에는 평상시의 부모 섬기기를 비롯하여 부모의 뜻이 의리에 어긋날 때 자식이 부드럽게 아뢰어 뜻을 바꾸게 하라는 것 등의 내용이, 제6장 상제(喪祭)와 제7장 제례(祭禮)에는 그것들을 주희의 《가례》에 따라서 할 것과 반드시 사당을 갖추라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제8장 거가(居家)에는 부부간의 예를 비롯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가산을 관리하는 방법이, 제9장 접인(接人)에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교양이, 제10장 처세(處世)에는 과거를 거쳐 벼슬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자세가 실려 있다. 이러한 구성과 내용은 학문에 뜻을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몸을 바로 세우고 사회에 나가 활동하도록 하는 성리학의 근본이념을 일상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데 이기철학이 바탕이 되며, 부모 자식 간의 효가 사회질서의 근본이념을 이루고, 향촌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사족(士族)들이 사회를 주도하던 조선시대에는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였다. 그러나 사회 운영의 철학과 질서가 크게 바뀐 현대에는 그 내용들을 그대로 학문과 사회생활에 적용하기 어렵다.
20) 은병정사학규 隱屛精舍學規
조선 중기 이이(李珥)가 문인들을 가르친 은병정사(隱屛精舍)의 학칙(學則). 모든 운영은 자치적으로 하여 그 중에서 연장(年長) 유식한 자를 당장(堂長)으로 추대하고, 그 밑에 장의(掌議) 1명, 유사(有司) 2명을 선출하였으며, 윤번으로 직월(直月) 2명을 두었다. 정사 내 일체의 논의는 장의가 주재하고, 직월은 '선악적(善惡籍)'을 맡아 모든 문하생들의 품행을 기록하였다. 기록된 품행은 매월 초에 사장(師長)에게 보고하고, 학규에 어긋난 행실이 발견된 자는 당장과 장의에게 고하여 견책하였다. 또한 매월 삭회(朔會)를 열어 학문 진도를 평가하고, 1개월마다 교체되는 직월을 지명하였다. 그 밖에 언행․교우(交友) 등에 관한 상세한 규범도 있다.
21)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入)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ꡐ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ꡑ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ꡒ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ꡓ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22)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 유학의 심성론(心性論)에서 심(心)의 양면성에 관한 학설. 사람의 마음이란 매우 오묘한 것이어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에 대한 관심은 오랜 것으로 보이며 인심도심설의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중국 철학사에서 인심도심설에 대한 문제가 나타난 것은 중국의 고전인 《서경》의 기록에 따르면 요순시대라고 본다. 그뒤 《논어》나 《순자》와 같은 책에서 인심도심에 관련된 구절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해석은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고, 11세기 송나라의 주자(朱子)에 이르러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중용》의 머릿글에서 인심도심의 문제에 의의를 부여하고 그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주자에 의하면, 인심이란 대체로 인간의 신체적 기운에서 나타나는 것이요, 도심이란 선천적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볼 때 순수하게 도덕적인 것은 도심이요, 그 자체로서는 부도덕한 것은 아니나 신체적인 기운에 따라 부도덕으로 흐를 위험성이 높은 것은 인심이다. 사람의 마음이 원래는 한마음이지만 그것이 작용할 때 의리를 따라서 나타나면 도심이요, 신체상의 어떤 욕구를 따라서 나타나면 인심인 것이다. 따라서 도심에 대해서는 선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인심에 대해서는 선한 경우와 악한 경우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도심이란 곧 도덕적인 마음이다. 이것이 순수하게 착한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타고날 때부터 착하다고 보는 것(性善說)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인간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그리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도심은 이러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심은 성질상 매우 미묘한 것이어서, 마음의 깊은 곳을 잘 살피지 않으면 도심을 깨달을 수가 없고, 그러한 점에서 욕심에 흐르기 쉬운 것이다. 이러한 도심에 비하여 인심이란 그 자체를 가리켜 부도덕한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항상 부도덕으로 흘러갈 위험성이 있는 마음이다. 즉, 인심의 성질은 위태로운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 감각적인 욕구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며, 그런 만큼 맹목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경》에서는 ꡐ도심은 희미하다(道心惟微)ꡑ라 하고 ꡐ인심은 위태하다(人心惟危)ꡑ라 하였다. 한국철학에서 인심도심설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이다. 이황은 ꡐ인심은 칠정(七情)이 되고 도심은 사단(四端)이 된다ꡑ라고 말함으로써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인심을 인욕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인심을 나쁜 측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이는 47세 되던 1582년 <인심도심도설>이라는 글과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올리면서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논리적이고 명석하게 정리하였다. 이이는 사람의 기질이란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황과는 달리 이이는 사단이 도심인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이는 인심과 도심은 서로 시작과 끝의 관계가 있다는 이른바 ꡐ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ꡑ을 주장하고 있다. 즉 인심과 도심은 서로 쌍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인심이던 것이 나중에 도심이 되고 처음에 도심이던 것이 나중에 인심이 된다는 것으로, 인심과 도심의 상호작용을 밝혀주는 의미가 된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인심은 감성적인 것이고 도심은 이성적인 것이다.
23) 김시습 金時習 [1435~1493] 조선 전기의 학자.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 ․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ꡒ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ꡓ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총애를 듬뿍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졸하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 ․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24) 학교모범 [ 學校模範 ] 이이(李珥)가 대제학으로 재임하던 1582년(선조 15)에 왕명을 받고 택사(擇師)와 양사(養士)를 목적으로 제진(製進)한 수양서. 내용은 모두 16조로 되어 있으며, 유학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하여 가장 포괄적인 사상이 담겨져 있다. 그 서문에 ꡒ하늘이 만민을 낳으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천부(天賦)의 덕을 누구나 고루 받았건만 사도(師道)가 폐절(廢絶)하여 교화(敎化)가 밝지 못하므로 인하여, 진기(振起)하고 작성(作成)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비의 풍습이 경박하여지고, 양심이 마비되어 헛된 공명만 숭상하고 실행을 힘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朝廷)에 인재가 부족하여 벼슬자리에 허점(虛點)이 많고, 아래로는 풍속이 날로 부패하여 윤기(倫紀)가 점차 문란하여지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장차 구습(舊習)을 일소하고 사풍(士風)을 크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선비를 선택하고 교화하는 도(道)를 다하고자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아 <학교모범>을 만들어,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몸가짐과 일해 나가는 법규를 정하였으니, 모두 16조로 되어 있다. 제자된 자는 마땅히 준행(遵行)할 것이요, 스승된 자도 이것으로써 먼저 자신을 바로잡아 사표(師表)의 도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ꡓ라고 씌어 있다. 16조의 내용은 ① 입지(立志), ② 검신(檢身), ③ 독서(讀書), ④ 신언(愼言), ⑤ 존심(存心), ⑥ 사친(事親), ⑦ 사사(師事), ⑧ 택우(擇友) ⑨ 거가(居家), ⑩ 접인(接人), ⑪ 응과(應科), ⑫ 수의(守義), ⑭ 상충(尙忠), ⑭ 독경(篤敬), ⑮ 거학(居學), 독법(讀法) 등이다. 이 책은 유교정신에 입각한 당시의 교육관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25) 이이선생묘 [ 李珥先生墓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율곡 이이(1536~1584)의 무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봉분 전면에 상석이 있고 그 오른쪽에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서 있고 기단(基壇) 아래에 문인석이 있다.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에 자운서원이 있다. 이 서원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7년(1615)에 창건되었다. 6.25때 파괴된 것을 1969년에 복원하고 1974년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본 건물은 정면과 측면이 3간이고 담장 둘레가 130여 미터에 이른다. 서원앞에는 율곡원수원이 있고, 솟을 대문 입구 양쪽에 서 있는 360년생 느티나무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서원의 동쪽에는 율곡선생의 묘와 모친인 신사임당과 부친의 합장묘 등, 13기의 가족묘지가 있다. 선생의 묘는 서원이 있는 자운산의 골 안에 있다. 우거진 숲속, 멀리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능선에 가족묘역을 이루고 있는데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의아스러운 부분이 발견된다. 맨 위에 율곡선생 내외분 묘가 있는데 앞에 선생의 묘가 있고 뒤에 부인의 묘가 있어 앞뒤로 봉분이 서로 연결되면서 낙타 등 모양을 형성하고 있으니 신라왕릉에서나 더러 볼 수 있는 형상이요, 그보다 더 의아한 것은 그 밑에 일직선으로 율곡의 맏형 내외 묘, 그 밑으로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합장 묘, 그리고 그 밑으로 율곡의 맏아들 내외 묘가 있고, 그 옆으로 누이, 매부, 후손들 묘가 있는 것이다. 부모의 묘 위에 자식이나 후손의 묘를 쓰는 것은 역장(逆葬)이라고 하여 금기하던 일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런 개념이 없었기에 그리 되었는지 잘 모를 일이다.
26) 명종 明宗 [1534~1567] 조선 제13대 왕(재위 1545~1567). 자 대양(對陽). 이름 환(緝). 시호 공헌(恭憲). 중종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둘째아들, 인종의 아우. 비(妃)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의 딸 인순왕후(仁順王后). 처음에 경원군(慶源君)으로 봉해졌다가, 1545년(인종 1) 경원대군이 되었다. 인종이 죽자 12세로 왕위에 올랐으며, 처음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일파가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의 대윤(大尹)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사건, 1548년 사관(史官) 안명세(安命世)의 《시정기(時政記)》 필화(筆禍)사건, 1549년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 등으로 인하여 을사사화 이후 100여 명의 선비들이 참화를 당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는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고 불교를 중흥시켰다. 1553년 친정(親政)이 시작되나,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간섭이 여전하였다.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1563년 비(妃)의 외숙 이량(李樑)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이량도 당파를 조성하여 선비들을 숙청하려 하므로, 기대항(奇大恒)에게 밀계(密啓)를 내려 이들을 추방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일당을 숙청하고, 보우를 장살(杖殺)한 뒤 불교를 탄압하였다. 1552년 황해도 일대에서 소란을 피운 임꺽정(林巨正)을 포살(捕殺)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 남해안 일대가 소란하였으며, 여진족의 빈번한 침입으로 북쪽지방도 불안하였다. 그러나 수차(水車)를 제조하여 농사일의 편의를 도모하였고, 전함을 건조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1554년 비변사(備邊司)를 다시 설치하였고, 수륙병(水陸兵)을 관찰사의 지휘 아래 두어 공동출전하게 하는 등 국방대책을 수립하였다. 또 여러 가지 간행(刊行)사업을 전개하여 1548년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1555년 경국대전의 원전(原典) ․속전(續典) 등을 간행하였다. 1551년에는 권문세가들이 불법으로 겸병(兼倂)한 토지를 몰수하여, 이를 공정하게 재분배하는 등 치안 ․국방 ․문화창달 ․경제개혁 등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능은 양주(楊州)의 강릉(康陵)이다.
27) 선조 宣祖 [1552~1608] 조선 제14대 왕(재위 1567~1608). 초휘는 균(鈞), 휘는 공(伊), 시호 소경(昭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楫)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하동부 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 비(妃)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처음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는데, 1567년(명종 22) 명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이황(李滉)․이이(李珥)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 쇄신에 노력하였으며, 《유선록(儒先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전적(典籍)을 간행하여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 한편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선비들을 신원(伸寃)하였으며 남곤(南袞) 등의 관직을 추탈(追奪)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1575년(선조 8) 이후의 동서분당(東西分黨)과 동인(東人)의 남북분당 등 치열한 당쟁 속에 정치기강이 무너져 치정의 방향을 잡지 못하였고, 북변에서는 1583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야인(野人)의 침입이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세(倭勢)가 위협적으로 팽창하여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왜국에 보내어 사정을 살피게 하였으나 당파를 달리하는 두 사람의 보고가 상반되어 국방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허송하다가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의주(義州)에까지 피란을 하여야 하는 시련 끝에 명나라의 원조와 이순신 등의 선전(善戰)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전후 7년에 걸친 전화로 서울을 비롯한 전 국토는 유린되고 국가재정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전후의 복구사업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당쟁이 일어 그는 재위 41년간의 태반을 당쟁과 미증유의 전란에 시달리다 그 위를 암군(暗君) 광해군에게 물려주었다.
28) 문정왕후 文定王后 [1501~1565] 조선시대 중종의 계비(繼妃). 본관 파평(坡平). 성 윤(尹). 윤지임(尹之任)의 딸, 명종의 어머니.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중 보우(普雨)를 우대하여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불교중흥을 도모하였다. 보우가 주지(住持)로 있는 봉은사(奉恩寺) 근처로 중종의 능을 이장(移葬)시켰다. 1553년(명종 8) 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윤원형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하였다. 소생으로는 명종 이외에 의혜(懿惠) ․효순(孝順) ․경순(敬順) ․인순(仁順) 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孔陵洞)의 태릉(泰陵)이다.
29) 을사사화 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文定王后)측의 세력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元子) 호(岵)가,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慶源大君) 환(緝)이 각각 탄생하자, 김안로의 실각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득세한 윤원로․윤원형 형제(小尹)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大尹)와의 사이에 대립과 알력을 빚게 되었다. 인종 즉위 뒤 정계는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소윤측은 대윤측에 의해 큰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의 즉위와 함께 유관(柳灌)․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에 의해 그 파의 사류(士類)가 많이 등용되어, 기묘사화 이후 은퇴한 사림들이 다시 정권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소윤의 양세력으로 갈라졌다. 이 동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자(階資)를 박탈당하고 윤원로 역시 파직된 사건이 생겨, 문정대비․소윤측의 대윤측에 대한 불만과 함께 문정대비의 인종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되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에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재등용된 윤원로는,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鄭順朋), 병조판서 이기(李쉔),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 單)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瑠, 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死賜)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李德應)의 무고로 이휘(李煇)․나숙(羅淑)․나식(羅湜)․정희등(鄭希登)․박광우(朴光佑)․곽순(郭珣)․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健)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벽서가 발견되어, 봉성군 송인수 등이 사형,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와,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安明世)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時政記)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30) 향약 鄕約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시행주체 ․규모 ․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립약조(鄕立約條) ․향헌(鄕憲) ․면약(面約)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규(洞規) ․촌약(村約) ․촌계(村契) ․이약(里約) ․이사계(里社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시행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16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향촌사회가 동요하고, 훈구파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었다. 이에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 ․유향소(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里)를 단위로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인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족세력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할 목적에서 양반신분의 상계(上契)와 상민신분의 하계(下契)를 합친 형태의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보통 몇 개의 자연촌을 합친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목천동약(木川洞約)과 영조 때의 퇴계학파 최흥원(崔興遠)이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증보하여 사용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 유명하다. 또한 1571년(선조 4) 이이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15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이들 향약은 조선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한국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향(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면리제(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수령권(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주도하여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면을 단위로 하여 기존의 동계 ․촌계를 하부단위로 편입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주민 전부를 의무적으로 참여시켰다. 18세기 중엽 이후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제가 수령에 의한 향약의 하부구조로서 공동납체계 속에 포함되면서 그 성격이 변모되어갔고, 동계운영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층민의 요구와 입장이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층민이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하계안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사족이 주도하는 동약에서의 운영권은 기층민간의 생활공동체로서의 촌계류(村契類)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고 점차 기층민의 입장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 후반 서학(西學) ․동학(東學) 등 주자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위정척사운동에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측에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31)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32) 기대승 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 행주(幸州). 자 명언(明彦). 호 고봉(高峰) ․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전남 나주(羅州) 출생. 1549년(명종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주서(注書)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삭직(削職)되었다가, 1567년(명종22)에 복직되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執義)가 되고,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다가, 1570년(선조3) 대사성(大司成)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후에 대사성에 복직되었는데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 사퇴하고, 1572년 다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 호남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1590년(선조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저서에는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33)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유학자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 ․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 화담은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조식(曺植) ․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 들과 지리산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1544년 김안국(金安國)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燎) ․소옹(邵雍) ․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단편 논저로는 〈원리설(原理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이 있는데, 이들 논저에는 ꡐ이(理)ꡑ보다는 ꡐ기(氣)ꡑ를 중시하는 주기철학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태허설〉에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태허 또는 선천(先天)이라 하고 태허에서 생성 발전된 만상(萬象)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귀신사생론〉에서는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기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논리를 배격하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 ․박순(朴淳) ․민순(閔純) ․박지화(朴枝華) ․서기(徐起) ․한백겸(韓百謙) ․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道家思想)에도 관심을 보여 도가의 행적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그의 도가적인 성향이 소개되었다. 그의 학풍은 조선 전기의 사상계의 흐름이 주자성리학 일색만이 아니었던 분위기를 보여주며, 그의 문인들 중에서 양명학자나 노장사상에 경도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주기철학을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하여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다
34)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李珥 연시조
고산 구곡담(九曲潭)을 사람이 몰으든이
주모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즙어 무이(武夷)를 상상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 벗님 : 만년에 해주 고산에 은퇴, 은병정사를 짓고 지낸 것으로 보아 정사(精舍)의 여러 후학(後學)들 을 가리킨다고 봄
* 무이를 상상하고 : 주자가 정사를 짓고 학문을 닦던 무이산을 생각하고, (이곳에서 그는 <武夷九曲歌>를 지었음) .
* 무이(武夷) - 중국 복건성에 있는 산. 주자가 이 산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을 닦음. 구곡계(九曲溪) 가 있어 경치가 좋음.
일곡(一曲)은 어드메오 관암(冠巖)에 해 빗쵠다.
평무(平蕪)에 내 거든이 원근이 그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綠樽)을 녹코 벗 온 양 보노라.
* 관암 : 갓같이 생긴 바위
* 평무 : 잡초가 우거진 들판
이곡(二曲)은 어듸메오 화암(花巖)에 춘만(春滿)커다
벽파(碧波)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로니 알게 한들 엇더하리.
삼곡(三曲)은 어드메오 취병(翠屛)에 닙 퍼졋다.
녹수에 산조(山鳥)는 하상기음(下上其音)하는 적의
반송(盤松)이 수청풍(受淸風)한이 녀름 경(景)이 업세라
사곡(四曲)은 어듸메오 송애(松崖)에 해 넘는다.
담심암영(潭心巖影)은 온갓 빗이 잠겨셰라.
임천(林泉)이 깁도록 됴흐니 흥을 겨워 하노라.
오곡(五曲)은 어듸메오 은곡(隱曲)이 보기 됴희
수변정사(水邊精舍)는 소쇄(瀟灑)함도 가이 없다.
이 중에 강학(講學)도 하려니와 영월음풍하오리다.
* 소쇄 : 맑고 깨끗함
육곡(六曲)은 어듸메오 조래(釣崍)에 물이 넙다
나와 고기와 뉘야 더옥 즐기는고
황혼에 낙대를 메고 대월귀(帶月歸)를 하노라.
*조래 : 낚시질하는 산골짜기
*대월귀 : 달빛을 받으며 돌아옴
칠곡(七曲)은 어듸메오 풍암(楓巖)에 추색(秋色) 됴탸
청상(淸霜)이 넙게 치니 절벽이 금수(錦繡)ㅣ로다
한암(寒巖)에 혼자 앉아 집을 잊고 잇노라.
팔곡(八曲)은 어듸메오 금탄(琴灘)에 달이 밝다.
옥진금미(玉軫金微)로 수삼곡을 노래하니
고조(古調)를 알니 없으니 혼자 즐겨 하노라.
* 옥진금미 : 거문고
구곡(九曲)은 어듸메오 문산(文山)에 세모(歲暮)커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눈 속에 뭇쳐셰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전문풀이]
[1]
고산의 아홉 굽이도는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사니 벗님네 모두들 찾아오는구나.
아, 무이산에서 후학을 가르친 주자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2]
첫번째로 .... 갓머리처럼 우뚝 솟은 바위에 아침해가 비쳤도다.
잡초 무성한 들판에 안개가 걷히니, 먼 곳 가까운 곳 가릴 것 없이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푸른 숲 사이에 맛좋은 술이 담긴 술통을 놓고 벗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
[3]
두 번째로 경치가 좋은 것은 어디인가? 꽃바위의 늦봄 경치로다.
푸른 꽃을 띄워 멀리 산 밖의 들로 보낸다.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곳을 모르니, (꽃을 띄워 보내) 이 곳의 경치 좋음을 알게 한들 어떠리.
[4]
세 번째로 ......푸른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에 녹음이 짙어졌다.
푸른 숲 속에서 산새들은 높이락 낮추락 노래를 부르는데,
가로퍼진 소나무가 맑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니 여름이지만 그 경치가 시원스럽기 그지없구나.
[5]
네 번째로 .....소나무 보이는 낭떠러지 위로 해가 떠 넘는구나.
깊은 물 한가운데에 비친 바위 그림자는 온갖 빛과 함께 잠겨있구나.
수풀 속의 샘물은 깊을수록 깨끗하니 흥겨움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6]
다섯 번째로 경치 좋은 곳은 어디인가? 으슥한 절벽이 보기도 좋구나.
물가에 세워진 배움의 집은 맑고 깨끗하기가 더할 나위 없구나.
이런 곳에서 글도 가르치고 때로는 시를 지어 읊으면서 흥겹게 놀기도 하겠구나.
[7]
여섯 번째로 .... 낚시질하기에 좋은 골짜기에 물이 많이 고여 있구나.
나와 고기와 어느 쪽이 더 즐거운가?
해가 저물거든 낚싯대를 메고 달빛을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리라.
[8]
일곱 번째로 .....단풍으로 덮인 바위에 서린 가을빛이 좋구나.
깨끗한 서리가 엷게 덮였으니 단풍에 덮인 바위가 수놓은 비단처럼 아름답도다.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서 (경치에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도다.
[9]
여덟 번째로 ......거문고 타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여울목에 달이 밝다.
좋은 거문고로 서너 곡조를 탔지만
운치 높은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듣고 즐기노라.
[10]
아홉 번째 굽이는 어디인고, 문산에 한 해가 저무는구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돌이 눈 속에 묻혀 버릴까 걱정되는구나.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사람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 감상 : 43세 때 해주의 고산에서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지음. 이 작품을 화제로 김수증과 정선이 '고산구곡도'를 그렸는데, 전자에는 우암 송시열의 한역시가 5언4구로 1곡에서 9곡까지 있고, 후자에는 우암, 김수항, 송도원, 정중순, 이자삼, 김수증, 김자익, 권상하, 이동보, 송서구의 순으로 7언 4구의 한역시가 들어있다.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
* 내용 : 작자가 대사간의 벼슬에서 물러나 해주 석담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힘쓰고 있을 때, 그곳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序詩 高山九曲潭(고산구곡담)에 이어 관암(寬巖), 화암(花巖), 취병(翠屛), 송애(松崖), 은병(隱屛), 조협(釣峽), 풍암(風巖), 금탄(琴灘), 문산(文山)의 구곡을 노래했는데, 그것은 지명인 동시에 특색도 설명되어 있다.
* 주제 : 강학(講學)하는 생활과 고산의 아름다운 경치 노래.
35) 栗谷先生文集(奎5750), 李珥(朝鮮)著. 卷 11冊 木板本 28.5×20.3cm. 四周單邊 半郭:20.6×16.6cm.有界 10行 22字.版心:上下花紋魚尾.
栗谷 李珥(1536~1584)의 詩文集. 문인 朴汝龍 등이 牛溪 成渾과 問議하여 편집한文集과 守菴 朴枝華가 編輯한 詩集을 合하여 1611년(光海君 3)에 海州에서 刊行한 것이다. <奎4093>本은 活字本으로 11卷 10冊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 本보다 후에 刊行된 것으로 보이는데 刊紀는 미상이다. 李珥의 자는 叔獻, 호는 栗谷, 初名은 見龍, 본관은 德水이다. 3세 때에 말을 배우면서 文字도 알았고, 7세 때에는 四書와 諸經을 거의 통했다. 8세 때 坡州의 花石亭에서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이란 名句를 지어 이름이 났다. 13세에 進士初試에 합격하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치른 후에, 19세에는 金剛山에 들어가 佛經에 전심했고, 20세에는 다시 儒學에 귀의했다. 23세에는 退溪 李滉을 찾아가 만났다. 이 해에 別試에서 天道策을 지어 장원을 했고, 1564년(明宗 19)에 生員試, 式年文科에 모두 狀元하니 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이 해 戶曹佐郞에 初任, 禮曹佐郞, 正言, 吏曹佐郞, 持平 등을 역임했다. 1568년(宣祖 1) 32세로 千秋使의 書狀官으로 明나라에 다녀와, 弘文館副校理로 知製敎와 春秋官記注官을 겸하여 ≪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34세에 賜段讀書로 東湖의 讀書堂에서 「東湖問答」을 지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海州의 野頭村에 있을 때 從學하는 사람이 많았다. 36세에 淸州牧使가 되어 西原鄕約을 만들어 治敎에 힘썼고 이듬해 다시 病辭하고 海州의 石潭으로 돌아가 牛溪와 더불어 理氣七情, 人心道心을 論辨했다. 1573년 38세로 直提學에 복직, 이듬해 右副承旨로 「萬言封事」를 올리고, 兵曹參知, 大司諫을 지내고 黃海監司로 民弊를 改革했고 다시 病辭하고 石潭과 栗谷에서 학문을 연구했다. 40세에 다시 副提學으로 임명, 病中인데도 나아가 ≪四書小注≫를 刪正하고 ≪聖學輯要≫를 製進했다. 42세에 다시 病辭하고 石潭에 聽溪堂을짓고 후생 敎誨에 힘썼다. 이 때 ≪擊蒙要訣≫을 짓고, 石潭鄕約을 지어 施行하여서 풍속을 교화, 43세에 隱屛精舍를 건축하고 敎學에 더욱 힘썼다. 이 해에 다시 大司諫에 임명되니 사직하고 「萬言疏」를 올려 救時의 대책을 極論했다. 44세에 ≪小學集註≫를 새로 정했다. 46세에 大司憲을 지내고, 戶曹判書, 兩館大提學을 겸임, 이듬해 吏曹, 刑曹, 兵曹의 判書와 右參贊을 역임했다. 이 때 「人心道心說」, 「學校模範」,「克己復禮說」 등을 짓고, 48세에 「時務六條」를 지었다. 이 해 判敦寧府事로 東西分黨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朝鮮 儒學界에 李滉과 더불어 雙璧을 이루는 학자로 畿湖學派를 形成케 했다. 그는 學問을 民生과 직결시켰으며十萬養兵說, 大同法과 社倉의 실현 등에 진력했다. 書畵에도 능했다고 한다. 文廟에從祀, 宣祖의 廟庭에 配享했으며 坡州의 紫雲書院, 黃州의 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서원에 祭享되었으며 諡號는 文成이다. 卷頭에는 世系와 年譜가 있다. 文集 {卷1}:封事 17편(論妖僧普雨疏, 論尹元衡疏, 諫院陳時事疏, 六曹郞官論沈通源說, 玉堂陳時事疏, 陳時弊疏, 論朋黨疏 등). {卷2}:封事 7편(萬言封事, 請勿過哀疏, 陳弊疏, 辭大司諫疏 등). {卷3}:封事 17편(辭大諫兼陳洗滌東西疏, 辭戶曹判書疏, 被劾辭職疏, 陳時事疏, 辭吏曹判書疏 등). 「封事」는 모두 上疏文으로 辭職疏 이외에는 대부분이 당시의民弊를 아뢰고 그의 시정책을 강력히 청한 것이다. {卷4}:箚 13편(玉堂論僞勳箚, 辭命製醮詞箚, 陳弊箚, 玉堂論適兩司箚, 進聖學輯要箚, 司諫院請勉學親賢箚 등), 啓 18편(請??富寧府使啓, 黃海道民弊啓, 辭兵曹判書啓, 六條啓, 六疏後請罪啓 등). 箚나 啓에서도 民弊를 救하고자 하는 것과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갖도록 하려는 것이 주축이 된 다. {卷5}:書 35편(上退溪先生書, 答成浩原書, 心性情圖, 牛溪問書, 與奇明彦書, 與雲長書 등). {卷6}:書 11편(答安應休書, 答朴思庵書 등), 雜著 10편(奏本, 箕子實記, 京畿監司書, 敎黃海監司書, 敎慶尙監司書, 敎領相李鐸不允書, 敎左相朴淳不允書, 五經義, 四書疑, 對策 등). 書에서는 時事․問候에 관한 것보다는 性理學的인 깊은 論辨이 주축을 이루고있으며, 雜著는 敎書와 經傳에 관한 것이 섞여 있다. {卷7}:雜著 18편(東湖問答, 送趙汝式說, 人心道心圖說, 克己復禮說, 六條方略鎖言, 金時習傳, 張叔孝行志, 自警文, 晦齋大學補遺後議, 立後議, 策問題五, 學校模範事目, 隱屛精舍學規, 隱屛精舍約束, 示精舍學徒, 文憲書院學規)으로 說․傳․議․學規 등이 대부분이나 「東湖 問答」은 치정의 大綱을 11條로 엮은 것으로 王道政治를 실현하려는 포부를 논한 것이고, 「學校模範事目」은 擇師, 養士로 事目을 삼고 學會에 미비한 것을 보완케 하여 成均館 太學志에 기재한 것으로 학교모범인 것이다. {卷8}:序 7편(擊蒙要訣序, 聖學輯要序 등), 記 11편(李氏感天記, 輔仁堂記 등), 跋 3편(跋九容帖, 跋擊蒙編, 學部通辨跋語), 銘 1편(思庵琴銘), 表箋 4편(請褒贈韓通表 등), 公移 1편(禮曹答對馬島主書),祭文 16편(祭嘉靖皇帝文 등). {卷9}:碑銘 11편(左議政安公神道碑銘 등), 墓碣銘 8편(參判朴公墓碣銘 등), 墓誌銘(申生墓誌銘 등), 行狀 7편(先비行狀 등). 詩集 {卷1}:詞2편(浴沂辭, 祭湘靈辭), 賦 3편(理一分殊賦 등), 五言絶句 12수, 五言短律 17수, 五言古風 28수, 五言律詩 3수, 五言長篇 11수, 七言絶句 61수, 七言短律 50수, 七言古風 4수, 七言長篇 6수. {卷11}:附錄으로 李廷龜가 쓴 行狀이 실려 있다.
36) 이기 [1476~155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덕수(德水). 자 문중(文仲). 호 경재(敬齋).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6년(중종 21) 12년 동안의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근무를 마치고, 이듬해 중추부동지사 때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강진(康津)에 유배, 1537년 풀려나와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고 1542년 순변사(巡邊使)로서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침범을 막았다. 1545년(명종 즉위) 우의정에 올라 병조판서를 겸하고, 을사사화 때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과 손잡고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세력을 꺾었다. 보익공신(保翼功臣) l등으로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49년 영의정에 오르고 1551년 병으로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에 전직했다. 죽은 뒤 시호 문경(文敬)이 내려졌으나 선조 초에 훈작(勳爵)이 추삭(追削)되고 묘비(墓碑)도 제거되었다.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의 원흉(元兇)이다.
37) 思親 - 申師任堂
千里家山滿壘山 산 첩첩 내 고향 천리 련마는
歸心長在夢魂中 자나깨나 꿈속에서 돌아가고파
寒松亭畔獨踰月 한송정 가에 외로이 뜬달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砂上白鷗恒聚散 갈매기는 모래톱이 헤이락 모이락
海門魚艇任西海 고깃배는 바다위를 오고가리니
何時重踏臨瀛路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更着班衣膝下縫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踰大關領望親庭 유대관령망친정 (대관령을 넘어가 친정을 바라봄)
慈親鶴髮在臨瀛 그리운 어버이는 백발로 림영에 계시고
身向長安獨去情 내 몸은 서울을 향해 그리운 홀로 땅을 떠난다
回首北坪時一望 돌아보고 북쪽 산마을을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흰 구름이 날아가는 아래 해지는 산이 푸르도다
38)봉산서재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의 봉산서재(講修齋)는 율곡 이이 선생과 화서(華西) 이항로 선생의 영정이 있다. 봉평 시가지 진입로 국도변 평촌리 동편 산기슭에 위치한 '봉산서재'는 율곡 이이 선생의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中宗;1530년경)때 이 곳에서18년간(1526-1543) 거주하는 동안 사임당 신씨에게서 율곡선생을 잉태하였는데(1536년 봄)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창건(創建)한 사당(祠堂)이다. 1896년 이 곳 창촌에 거주하던 유학자 홍재홍(洪在鴻) 선생이 주동(主動)이 되어 고종(高宗)에게 탄원을 올려 판관대(判官臺)를 중심으로 한 사방 오리를 서재위토(書齋位土)로 하사(下賜) 받고 건축허가도 받았으나 당시 국가정변이 있어 무효가 되었다.(그때 홍재홍학자는 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상소함으로 왕이 시상열사형을 받음으로 무효가됨)다시 1904년에 태은(泰隱) 추성구(秋性求1844-1921)선생이 강릉도부에 허가서를 내서 허가를 받고 주민일동으로1906년 건축하고 1907년에 단청까지 마무리 하였다. 서재경내(書齋境內) 재실(齋室)엔 율곡 선생의 존영(尊影)과 화서 이항로(李恒老)를 모시고 지방 주민과 유림(儒林)이 춘추 (春秋)로 받들어 제사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가산문학선양회☏(033)335-2323
율곡선생의 탄생설화
봉평면 평촌리 봉산서재에는 율곡선생과 華西 李恒老선생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율곡선생의 신주를 이곳에 모시게 된 유래는 바로 봉평이 율곡선생의 잉태지가 되기 때문이다. 일찌기 율곡선생의 아버지인 李元秀공이 인천지방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산수가 아름다운 봉평에 4년간을 살았었다. 그 당시 선생의 탄생과 관련한 아래와 같은 설화를 소개한다
감찰공(監察公)이원수(李元秀)는 강직(剛直)하고 고결(高潔)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녹발홍안(綠發紅顔)의 청춘시대에 일찌기 강원도 강릉(江原道 江陵)에 찰방(察防)으로 있을 당시 장가를 들었으니 그 부인은 당시 명사(名士)로 경향에 이름이 쟁쟁하던 진사 신명화( 進士 申命和)의 귀동 따님었다. 신(申)부인은 그 아버지 신진사의 고결한 피를 받고 산수좋은 강릉에서 생장하니 만큼 인물이 비범하고 천재가 비상하여 어려서부터 시문서화(詩文書畵)가 모두 절특하니 세상 사람들이 신녀(神女)라고 칭찬하고 자기는 또 옛날 주문왕(周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이 되기를 바라면서 자호(字號)를 사임당(師任堂)이라 하였다. 그러한 재원(才媛)과 재자(才子)가 서로 혼인을 하게 되니 그 외모와 덕행이며 재예가 피차 막상막하한 것은 물론이고 금슬(琴瑟)이 또한 남다르게 좋으니 그야말로 녹수의 원앙(綠水鴛鴦)과 단산의 봉황(丹山鳳凰)이 서로 짝을 만난것 같아서 보는 사람마다 그들 부부는 천정의 배필이라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보통의 청춘남녀 같으면 그렇게 다정스럽고 재미있는 신혼부부가 서로 헤어짐을 싫어하여 겨울밤과 여름낮은 그 기나긴 시간도 지루한 것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한날 한시 같이 금슬의 낙(琴瑟之樂)으로만 만족한 생활을 하겠지만 그들 부부는 모두 인격이 상당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인 까닭에 구구하게 일시적인 환락(歡樂)에만 만족하지 않고 좀더 인격을 수양하고 좀더 학문을 연구하여서 장래 한 사회 또는 한 나라의 큰 인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혼인한지 약 오년이 지나서 어느 날 밤에 서로 의논하되 『우리 부부가 젊은 정리에 서로 떨어져 있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한집에만 그대로 같이 있게 된다면 공부에 큰 방해가 되고 따라서 장래 발전에도 영향이 퍽 많을 터이니 아무리 애정을 못 잊을지라고도 서로 십년작정을 하고 각각 떨어져서 남편된 나는 서울에 가서 글 공부를 하고 부인된 당신은 집에서 그림공부를 하되 그 기한이 되기전까지는 서로가 단 한번이라도 내왕(來往)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신까지도 일체 하지 말자』하고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아침에 원수는 그 약속을 단연 실행하려고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사랑하는 부인과 이별하고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원수가 처음에는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공명심이 많아서 가정의 재미와 부인의 애정도 모두 돌보지 않고 그 부인과 그렇게 굳은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났지만 얼마 안가서 평소에 그 부인과 서로 사랑하던 생각을 하고 또 앞으로 장차 십년이 되도록 피차 얼굴 한번도 못보며 편지 한 장도 못할 생각을 하니 앞길이 캄캄해지고 가던 발길이 저절로 돌아서져서 대관령(大關嶺)마루턱까지 갔다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기를 이틀 동안을 계속하다가 사흘째에는 남 보기에도 너무도 부끄러워 집 근처 대밭(竹林)속에 와서 있다가 밤중에 남 모르게 담을 넘어서 그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부인도 처음에는 그 남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속으로 남자의 의지가 너무 박약 한 것을 탓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대하여 그렇게 사랑하는데 마음에 흔들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하는 동정만 보았으나 며칠을 계속하여 그렇게 하고 더구나 밤중에 담을 넘어서 들어오기까지 하는 것은 집안사람 보기에 창피도 하려니와 처음 약속과 상반이 되므로 고정(高貞)한 그 부인으로서는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수가 방문 밖에 와서 여러 번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여도 절대로 열어 주지 않고 마지막에는 가위로 자기 머리털을 선뜩 잘라서 문밖으로 내어주며 『사람이란 것은 비단 부부간이라도 한번 약속을 한 이상에는 그 신의를 지켜야 하는 것인데 그까짓 구구한 애정을 이기지 못해서 신의를 지키지 못한다면 피차에 어찌 신봉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의 인격보다도 나의 외모를 더 사랑하시는 까닭에 그리하시는 것이니 나의 외모의 한부분되는 머리털을 아주 잘라서 드리는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셔서 십년동안 최초의 약속과 같이 잘 지키셔서 성공을 하시고 다시는 우리 집에 오시지 마십시오. 만일 이후에도 또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신다면 그때에는 아주 내목을 베어서 최초의 약속을 지킬뿐입니다.』 하고 말하니, 원수는 깜짝 놀라 후회하며 그 부인에게 사과를 하고 그날 밤으로 다시 담을 넘어서 서울로 간 후에는 처음 약속과 같이 십년 동안이나 한번도 되돌아 다시 가지 않고 글 공부를 하고, 신씨부인은 집에서 또 그림공부를 하되 특히 안견의 산수도(安堅 山水圖)와 포도(葡萄) 초충등을 전공하여 그 화법이 모두 신경(神境)에 이르렀다. 원수가 그렇게 공부를 하는 동안에 빠른 세월은 어느 덧 벌써 십년이 되어 약속한 기한이 되었다. 웬만한 남자같으면 그 피가 끓고 기운이 용솟음칠듯한 청춘시절에 객지에서 십년동안이나 홀애비 생활을 한다면 그 번화하고 유혹 많은 서울장안에서 반드시 화류장 같은 곳에 몇 번 발을 들여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다못해 남의 집 행랑방 출입이라도 더러 하였겠지마는 원수는 원래 강직 고결한데다가 더구나 그 부인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생명같이 사랑하는 머리털까지 자르던 일에 깊은 감동이 생겨서 십년 동안을 한날 한시 그 절조를 지키고 열심히 공부만 하였다. 그러다가 기한이 차게 되니 원수의 그 기쁨은 마치 십년 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석방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단 몇날도 지체하지 않고 만기가 되던 바로 그 이튿날에 서울을 떠나서 강릉(江陵)으로 가게 되었다. 지금 같으면 길도 좋고 자동차나 동해선의 기차 같은 것이 있어서 소위 천리강릉일일환(千里江陵一日還)으로 당일에 강릉을 갔겠지만 그때만 하여도 서울에서 강릉을 걸어가자면 거리가 워낙 멀어서 날짜도 여러날 걸리려니와 하늘이 잘 보이지 않도록 산림이 우거진 태산준령에 백주에도 화적(火賊)강도와 맹수(猛獸)들이 곳곳에 나타나서 웬간한 사람으로는 혼자서 길을 갈 엄두도 못내고 동행을 몇 사람씩 얻어야만 가게 되었다. 그러나 원수는 원래 대담한 남자인데다가 십년이나 서로 떨어져 있던 사랑하는 그 부인을 만나 보려는 정열이 타오르는 까닭에 태산준령도 평지같이 보이고 화적과 맹수도 우습게 생각되어 같은 동행도 없고 또 신변에는 몸을 보호하는 칼이나 창 같은 것도 없이 그냥 한사과객(寒士過客)의 행장과 같이 죽장망혜 단표자(竹杖芒鞋 單瓢子)에 개나리 봇짐을 해 걸머지고 좌청산(左靑山) 우록수(右綠水)에 양장구곡(羊腸九曲)같이 구비구비 뚫린 길을 유람겸 탐험겸 천천히 걸어갔다. 때는 마침 양춘가절이라 곳곳마다 기암 절벽에 두견 철쭉이 만발하여 금수(錦繡)의 세계를 이루고 나무마다 이상한 새가 노래하고 다람쥐들은 굿을 하며 춘흥(春興)을 돋우어 녹의홍상 산골 처녀들이 산으로 들로 헤어져서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나물을 뜯으며 강원도의 독특한 애조로 『형님 형님 사촌형님 시집 살이 어떱디까. 시집살이 삼년만에 삼밭같은 이내 머리 다복쑥이 되었네.』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또 천장만자 되는 높은산 절벽에서 화전농부(火田農夫)가 화전을 가느라고 역시 강원도의 긴 가락을 노랫조로 『어녀...... 어치돌지나마, 마라 한눈팔지 말고 잘 가거라 어-이놈의 소(牛)』하고 적막한 푸른산이 울리도록 처량하게 내는 소리, 그 노래를 들을 때는 시흥(時興)이 저절로 나서 다리 아픈 것과 몸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몇십수의 즉흥시를 지으면서 저절로 길을 걷게 되었다. 원수는 그렇게 길을 가는 것이 며칠이나 걸었던지 이럭저럭 강릉 땅의 대화(大和-지금은 평창(平昌)땅)까지 이르렀다. 이 대화라는 곳은 비록 산협(山挾)이지만 옛부터 큰 주막(酒幕)거리로 유명하여 인가가 즐비하고 비교적 물색이 좋았었다. 원수가 급히 그 부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으로 단 한시간이 라도 더 가고 싶었지만 그곳에 당도하고 보니 벌써 해가 저물었을뿐 아니라 여러날 행로에 몸도 피곤하고 중로에는 대관령(大關嶺)이란 유명한 큰령이 앞을 막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불가불 하룻밤을 쉬어 가야만 되게 되었다. 주막거리로 들어가서 아무집이나 깨끗한 집이 있으면 하룻밤을 자려고 한집 건너고 두집을 건너서 두루두루 정한 집을 찾는 중에 한집 문 앞을 지나려니까 소복을 입은 한 여자가 나오며 『저 손님 어디로 가시는 손님이신지 날도 저물고 하였으니 우리 집에서 하룻밤 쉬어 가십시오. 집은 비록 적고 누추하지만 식구도 단촐하여 조용합니다.』하고 말하였다. 원수는 그 여자를 한번 힐끗 쳐다보니 나이는 약 이십 오륙세 가량 되어 보이는데 비록 산촌 주막에 있는 여자이지만 얼굴도 제법 숭글숭글하고 잘 생기고 의복도 소복을 입은 것이 수수해 보이며 말씨도 또한 정다웠다. 원수는 주인만 보아도 그 집이 과히 흉하지 않는 주막으로 짐작하고 혼자 생각하기를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고 이왕이면 주인 여자가 좋은 집에서 하룻밤 자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그 여자를 따라서 갔다. 그 여자는 원수를 언제 친하였다는 듯이 특별히 친절하게 대접하여 방도 보통의 보행객을 재우는 길가 방을 주지 않고 안 건너방으로 정해주고 이부자리도 새것으로 갈아 주며 음식 범절도 특별히 지성껏 잘하여 주었다.원수는 시장한 판에 저녁밥을 잘먹고 피곤한 다리를 쉬며 한잠을 잘 잤다. 시간으로 치면 자정이 훨씬 지나 새로 한시쯤이나될까 말까 할 때에 목이 말라서 머리맡에 있는 물을 먹고 다시 누워 있으려니까 별안간 안방문이 바시시 열리며 주인 여자가 소복단장에다 주안상을 차려가지고 자기방으로 들어오며 『손님 주무십니까? 곤하시게 주무시는데 여자가 이렇게 방에까지 들어오는 것은 미안하고 황송합니다만 집에 마침 변변치 않는 술과 안주가 있기에 잡수시고 먼 나그네길의 피로를 푸시라고 가져 왔습니다.』한다. 원수도 초저녁에는 몸이 곤해서 정신을 모르고 잤지만 한잠 자고나니 잠이 잘 아니와서 갑갑하던 차에 밉지않은 안주인이 친절하게 손수 술상까지 가지고와서 술을 먹으라고 하니 여간 고맙게 생각되지를 않고 평소에는 잘 못 먹는 술이나마 열서너잔을 받아 먹고 주인 여자에게도 원수가 또한 몇잔을 권해서 남녀주객이 모두 허물없이 말하기 좋을 정도로 얼큰히 취했다. 주인 여자는 원래에 마음속에 간직한 일이 있기 때문에 먼저 원수에게 말을 건네었다. 『손님이 보시는 바와같이 저는 지금 상중이올시다. 본래는 정선(旌善)사람으로 이 집에 출가하여 집이 가난한 탓으로 부부가 주막영업을 하며 그날 그날을 지냈으나 박명(薄命)한 탓으로 금년 봄에 불행히 남편을 여의고 지금 독신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청상과부로 있어서 날마다 여러 남자 손님을 대하면서도 이때까지 다른 생각이라고는 없더니 오늘 우연히 손님을 뵈오니 처음부터 호감이 생겨서 여자로서의 체면과 염치도 불구하고 이렇게 들어온 것이니 과히 추하게 생각지 마시고 하룻밤의 가연(佳緣)을 맺어 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남자 같으면 그런 경우를 당해서 누구나 그 여자의 소청을 들어줄 뿐 아니라 먼저 자진하여서도 수작을 걸겠지마는 이원수는 원래 고결하기로 유명한 사람인 까닭에 처음에 그 여자가 그렇게 고맙게 구는 것을 보고는 퍽 감사하게 생각하였으나 다시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여러 가지가 모두 더럽게 생각되고 더군다나 그 여자가 막중한 자기 남편의 몽상을 하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너무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처음 그런 말을 할 적에는 그냥 온순한 말로 거절하다가 재삼 간청을 할 때에는 아주 정색을 하여 꾸짖어 말하고 최후에는 그런 말을 또 한다면 밤중에라도 그 집에 있지 않고 길을 떠나가겠다고까지 하니 주인 여자도 그제서는 하는 수 없이 크게 긴 한숨을 한번 쉬며 탄식하고 말하되 『사람의 운명이란 할 수 없다. 원래에 내 팔자가 기박하니 어찌 할 수 있으랴.』하고 다시 원수에게 너무 실례하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초연한 안색으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다. 원수는 그 여자를 돌려보낸 뒤에 혼자 생각에 그 여자가 보복으로 또 무슨 흉계나 꾸미지 않나 하고 무서운 생각이 나서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말똥말똥하여 밤을 새우고 이튿날 첫 새벽에 무슨 죄나 짓고 달아나듯이 그 집을 떠나서 자기 처가로 갔다. 사랑하는 부부가 햇수로 꼭 십년만에 서로 만나게 되니 그 반가움이야 이루 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더구나 두 부부가 그간에 모두 독실한 공부를 하여 피차 괄목상대를 하게되니 보통의 다른 부부가 여러 해 떨어져 있다가 만나는 것보다 더 한층 반가웠다. 그럭저럭 며칠을 지내는 중에 하룻밤에는 그 부인이 꿈에 큰대들보같은 흑용(黑龍)이 자기 방으로 들어 오더니 어린 아이를 품속에다 안겨 주었다. 그 부인은 그 꿈을 꾸고는 그날부터 태기(胎氣)가 있었다. 그 뒤 얼마 아니하여 원수는 과거(科擧)를 보려고 다시 서울로 가게 되었다. 대화 근처에 또 이르니 전날에 자던 주막 생각이 문득 났다. 원수는 전날에 그 집 여자에게 너무나 인정없이 대한 것이 후회되었다. 혼자서 다시 뒤미쳐 생각하기를 『소위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의 그만 한 소청도 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몰인정하고 졸장부의 일이니 이번에는 일부러 그집에가서 그 여자에게 지난날에 있어서의 미안한점을 사과하고 한번 호원을 풀어 주어야만 되겠다.』하고 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 그 여자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친절하게 원수에게 대해 주었다. 그 날 밤에는 원수가 그 여자를 자기 방으로 청하여 오게 하고 지난날의 미안하였다는 말을 한 다음에 그날 밤에 같이 재미있게 지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전날과 아주 태도가 달라지며 엄연히 정색을 하고 말하되 『내가 비록 삼로 가상에서 주막질을 해먹을 망정 그런 말분(末分)의 여자는 아닙니다. 내가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길가에서 오고 가는 사람을 많이 보는 관계로 남의 기색을 대강 살필 줄 알아서 전날에 당신의 얼굴을 살펴본 즉 그런 귀한 사람을 한번 낳아볼까 하는 욕심에서 여자로서 부끄러움과 창피한것을 무릅쓰고 그런 말씀을 하였으나 지금은 벌써 당신 부인의 몸에 귀한 아드님이 잉태되어 있사온데 내가 공연히 당신에게 정조만 더럽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딱 잘라서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그러나 한가지 아까운 일은 그 아이가 앞으로 출생할 때에 반드시 인시(寅時)에 낳게 되므로 일곱살 밖에 안되어서 호환(虎患)에 죽게 될터이니 그것이 걱정이 올시다.』 하니 원수는 그제야 그 여자가 보통의 여자가 아닌 줄알고 깜짝 놀라며 오늘까지의 잘못된 점을 사과하고 다시 그 아들이 어떻게 하면 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여자는 처음에 아무 말도 없더니 원수가 하도 지성스럽게 물으니까 그제서야 천천히 말문을 열면서 『속담에 말하기를 적덕(積德)한 사람의 자손은 담장밑에도 서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당신도 오늘부터라도 덕을 많이 쌓아올린다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요. 그런데 덕을 쌓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남의 생명을 천명가량 살려야 하겠는데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 사람 대신 즉 남의 집 신주(神主)가 되어 대대로 자손계승(子孫繼承)을 시키는 밤나무를 천주(千株)만 심으면 그 화를 면할 수 있는데 그것도 특별히 주의하여 그 아이가 일곱살 되는 모월 모일에 그 아이를 절대로 밖에 내보내지 말고 방속에다 깊이 숨기고, 또 늙은 중이 와서 그 아이를 보자 하거든 또 절대로 면회를 시키지 말고, 나도 많은 덕을 쌓은 사람인즉 내아들은 함부로 잡아 가지 못한다고 그 밤나무를 보이면 무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니 원수는 그의 말에 다시금 크게 놀라고 감탄하여 서울 가던 일도 중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 부인에게 전후 사연을 말하고 그때부터 고향인 화석정 앞집 주위 근처에다 밤나무 심기에 힘써서 불과 일년에 약 천주가 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십이월 이십 육일 인시(中宗三十年丙申)에 과연 신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니 그는 곧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대학자요 대정치가인 이율곡 선생(李栗谷 先生)이었다. 원수는 그를 낳은 때가 그 여자의 말과 같이 호랑이 때(寅時)인데 더욱 놀라고 신기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밤나무를 키우는데 주의를 하였다. 율곡이 다섯 살이 되던해 모월 모일이었다. 원수 부부는 그 여자의 말과 같이 그날에는 특별한 주의를 하여 첫 새벽부터 율곡을 안방 한구석에다 깊이 깊이 가두어 두고 방문까지 잔뜩 걸어닫은 뒤에 그 동네에 있는 젊은 청년들을 모아다가 특별히 지키게하고 원수는 의관을 단정히 하고 사랑에 앉아서 향을 피우고 주역(周易)을 낭독하면서 그 시간이 돌아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아니 있었더니 과연 백발이 성성한 늙은 중(僧) 하나가 갈포장삼에 굴갓을 쓰고 대문 밖에 와서 목탁을 두드리며 『관세음보살 마하살 무상심심 미묘법 백천만겁난재위』 하고 염불을 하며 동냥을 청하였다. 대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은『안에는 아무도 안계시니 사랑으로 가보시오』 하고 말하였더니 그 노승은 다시 사랑으로 와서 원수에게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하며 자기는 금강산 유점사중으로 시주를 받으러 왔다하며 『주인 아기는 어디 갔습니까?』 하고 묻는다. 원수는 그 중의 말을 듣고 크게 소리를 치며 호령을 하되 『네가 어찌 나를 속이느냐. 나도 적덕을 많이 하였는데 어찌하여 내 자식을 해치려고 하느냐. 내 자식은 감히 해치지 못할 것이다.』하니 그 노승은 조금도 무서워 하는 기색이 없이 또 말하되 『댁에서 무슨 적덕을 하였소?』 하고 반문을 하였다. 원수는 밤나무 천주를 심은 것을 말하였더니 노승은 조금도 곧이 듣지 않아 원수가 그 노승을 데리고 집 뒷산으로 가서 그 밤나무를 보였더니 노승은 또 수요가 과연 맞는가 하고 하나하나 세어 보자고 하면서 원수와 같이 나무를 세게 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스물 서른 마흔...... 백 이백 삼백 사백 이렇게 세어서 구백 아흔 아홉까지는 수가 틀림없이 맞았으나 천번째 되는 한 나무가 마침 소(牛)를 매었던 까닭으로 소에게 촉상(觸傷)이 되어 말라 죽고 수에 차지 못하였다. 그 노승은 돌연 변색을 하고 원수를 돌아보며 책망을 하되 당신같은 정직한 사람도 거짓말을 하여 천명(天命)을 거역하려느냐 하고 아이를 또 급히 내놓으라고 하니 그 때에는 아무리 대담한 원수라도 용기가 없어져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였다. 그런 던 차에 이상하게도 별안간에 어떤 나무 하나가 말을 하며 『나도 밤나무』 라며 나서서 천주를 채우니 노승도 그제서는 어찌 할 수 없었던지 크게 소리를 한번 지르더니 다시 큰 호랑이로 화해서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율곡 선생은 그 화를 면하고 잘 자라서 유명한 대학자가 되었는데 고향에는 지금도 밤나무와 비슷한 『나도 밤나무』란 나무가 있는데 그때에 그 나무가 이율곡 선생을 살려냈기 때문에 일명을 활인수(活人樹)라고 하고, 동리 명칭도 율곡리로 하였으며 선생의 호도 율곡(栗谷)이라 호칭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39) 매창매화도 및 옥산국화도첩 梅窓梅花圖-玉山菊花圖帖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매창과 옥산 남매의 매화도와 국화도를 장첩한 것.지정번호 : 강원기념물 제12호 지정연도 : 1971년 12월 16일 소장 : 오죽헌 율곡기념관 소재지 : 강원 강릉시 죽헌동 201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매창매화도 26.5cm×30cm, 옥산국화도 25cm×35cm 분류 : 회화류 이 도첩은 이들 남매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희귀한 유물인데 후손 이장희가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던 것을 매화도와 국화도로 따로 장첩(裝帖)하여 오죽헌의 율곡기념관에 보관하였다. 매창의 매화도는 세로 30cm, 가로26.5cm의 종이에 그린 묵화이고 옥산의 국화도는 가로 25cm, 세로 35cm 크기의 종이에 그린 수묵화(水墨畵)이다. 그 밖에도 율곡기념관에는 《옥산초서병풍》(강원도유형문화재 13)도 소장되어 있는데 옥산이 15살 때 초서(草書)로 쓴 귀거래사로 뛰어난 필치가 돋보인다. 원래 17첩짜리 서첩(書帖)으로 전하던 것을 9폭짜리 병풍으로 만들었다.
40) 옥산시고(玉山詩稿) 이우(李瑀) 著. 1冊(37板). 木版本. 한국문집총간 53집.이우(1542-1609)의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玉山),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헌(文憲). 이이(李珥)의 아우.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름. 시(詩)․서(書)․화(畵)․금(琴)에 모두 능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리움. 문집구성 저본은 증손 동명(東溟)이 수집․편차하여 1680년에 간행한 초간본(初刊本)임. 대부분 저자의 시(詩)이고 문(文)과 부록(附錄)이 약간편이 첨부되어 있음.
41) 덕수(德水) 이(李)씨 소개
시조는 이돈수((李敦守)로 고려조에 중랑장을 지냈다."신유보" 세녹편을 보면,고려 고종5년 거란이 침입했을때 조충을 서 북면원사로하여 이를 막을때,그는 장군이 되어 거란군 을 격파,뒤미쳐 온 경상도안찰사 이적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돈수를 시조로 세계를 잇기는 "울곡가전세계"에서 비롯되어 "택당수초종보"에 의해 확종되었고,덕수가 관향이된 것은 시조가 덕수현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주요 세거지로는 율곡 이이선생이 계시던 경기도 파주 율곡리로 자운서원과 화석정 그리고 율곡 이이를 비롯한 많은 선조들의 산소가 산재해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이 황해도 관찰사로 재임시 황해도 해주 고산면 석담에서 오래 기거 하시면서 고산 구곡가등 여러 저서를 남기셨으며 이때 율곡 이이 선생이 조카 임호공(죽곡의 장자)을 해주 벽성군 고산면에서 수학, 이주하면서 덕수이씨의 집성촌을 이루었다.(죽곡파 집성촌) 이충무공을 모신 겨레의 성역 현충사가 있는 아산은 덕수 이씨 일문이 4백여 년을 지켜온 터밭이기도 하다. 충무공은 1545년 서울 간천동에서 태어난 뒤 8살때 외가 가 있던 이 마을로 이사와 여기서 자랐고,그의 후손들이 마을을 지켜 이씨 마을이 됐다. 원래 이곳엔 전주이씨가 많았으나 충무공 사후에 조정에서 많은 농토를 내려 한때 는 덕수이씨의 땅을 밟지 않고는 온양 일대를 지나지 못 했다고 한다.덕수는 경기도 개풍군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덕물현인데(또는 인물현), 신라 경덕왕때 이름을 고쳐 덕수현으로 고쳤다. 고려조 현종9년 고성부의 영현이 되었다가 문종16년에 개성부에 속하였고 조선조 태조7년에는 풍덕에 예속시켰다 .개성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71.6KM되며 행정구역은 개풍군 중면 덕수리이다. 시조 이돈수(李敦守)는 고려 중엽 신호위중랑장의 벼슬을 지냈다. 그의 증손인 이윤온은 봉익대부, 밀직사 판도판서,의정승감춘추관사를 지냈고 덕수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경기도 개성 근교 덕수현에 터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수이씨가 특히 두각을 나타낸 것은 조선시대의 중엽으로 조선조에 모두 1백여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으며 특히 중종~영조대 3백 년간이 가장 융성한 시기다. 율곡선생은 문(文)에서 이순신은 무(武) 에서 조선시대 5백년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師任堂) 은 한국 여인상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 이씨조선중 7명의 정승과 5명의 대제학을 배출 하였으며 특히 율곡 이이선생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한 공신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이, 이안눌, 이식은 조선조의 3문장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이행, 이이, 이우는 3명필로 알려져 있다.
총 36개의 계파로 이루어 졌다 역사상 이름을 남긴 인물을 보면 이이(선조조.대제학) 이식(인조조.대제학), 이단하(숙종조.대제학.좌의정),이병모(정조조.영의정),이유중(선조조.대사헌.청백리), 이안눌(인조조.예조판서.청백리),이겸빈(영조조.대사간.청백리)등 화려하다. 이들이 덕수 이씨의 문(文)을 대표하는 인맥이라면 무(武) 에서는 충무공을 비롯, 이완(인조조.의주부윤),이봉상(영조조.훈련대장),이인수(순조조.훈련대장),이유수(순조조.훈련대장,이승권(철종조.어영대장),이원 희(고종조.훈련대장), 이용희(고종조.훈련대장),이규섭( 고종조.좌영사)등 한말까지맥이 이어진다. 특히 당대의 문장가로는 율곡 이이 선생, 동악 이안눌, 택당 이식선생을 들 수 있으며 명필가로는 용제공 이행(중종조. 좌의정), 율곡선생, 그리고 율곡선생의 동생인 옥산공을 들 수 있다.
42) 매학정 梅鶴亭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 예강리에 있는 경승지. 소재지 : 경북 구미시 고아면 예강리 257-2 면적 : 3,332㎡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매학정은 조선시대 명필 황기로(黃耆老)가 1533년(중종 28) 건립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본래 그의 조부 황필의 휴양지인 것을, 주변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학정이라 하였다. 후에 사위인 이우(李瑀)가 소유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강가에 빈 터만 남아 있었는데, 1564년(효종 5) 옥산의 증손이 현재의 자리에 새 정자를 중건하였다. 1862년(철종 13년) 다시 화재를 당하여 중건하였으며 1970년 전면 중수하였다. 황기로는 중종․명종 때의 명필로 본관은 덕산(德山)이다.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 별좌를 지냈으나 더 이상의 벼슬을 사양하고 서예에 정진하였다. 특히 초서에 능하였으며, 중국에서도 인정받아 해동초성(海東草聖)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43) 황기로 黃耆老 조선시대의 명필.본관 덕산(德山). 자 태수(食戒). 호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은 별좌(別坐)를 지냈다. 만년에 낙동강의 서쪽 보천산(寶泉山) 위에 정자를 짓고 고산정(孤山亭) 또는 매학정이라 이름을 지어 그곳에서 필묵(筆墨)과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필법이 뛰어났고 특히 초서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불렸으며 충주(忠州)의 승지 이번(李蕃)의 비문을 썼다. 저서에 《고산집(孤山集)》이 있다
금오산 외성과 케이블카 승강장 중간지점의 북편 낮은 절벽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고 하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할 만한 큰 글자로, 그 뜻은 금오산의 깊고 그윽한 절경이란 뜻이니 선산의 대망(大網)출신으로 덕산(德山) 사람인 경주부윤(慶州府尹) 상정 황필(橡亭 黃筆)의 손자이며 진사(進士) 황옥(黃沃)의 아들로 이름은 기로(耆老)요 호는 고산(孤山)이다. 그는 일찌기 진사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서예에 정진하여 초서(草書)에 특히 능했으니 모제 김안국(慕薺 金安國)과 중국에 들어갈 제 그의 솜씨가 뛰어나 이구동성으로 "왕휘지 이후 일인자"라 하여 해동초성(海東草聖)이라 극찬하고 서로가 글 한 점씩 얻기를 원했다 한다. 그는 슬하에 아들이 없고 여식 하나만 있어 덕수인(德水人) 율곡(栗谷) 선생의 아우인 옥산 이우(玉山 李瑀)를 여서(女壻)로 맞아 선산 강정리(江亭里)의 고산아래 보천탄(寶泉탄)에 정자를 지어 매학정(梅鶴亭)이라 하고 매화(梅花)와 학을 기르면서 옹서(翁壻)가 같이 즐겼으며 금기시서(琴碁詩書)가 능하여 세상에서는 사절(四絶)이라 하고 옹서간에 서로 詩로서 화답하고 보천탄을 굽어 보며 소일하면서 지냈다. 고산선생은 "두줄기 눈물이 낙강에 드리우니 先考께서도 이 강변에 거니셨으리. 외로운 섬 유정의 현판에는 말하지 마라. 들난 곳 아름다움을엔 고깃배만 떠 있어. 가신 어버이 글 차마 못 읽을래라 " (衰淚雙垂洛水前 先君曾到此江邊 莫君孤島幽亭扁 非爲名區美勝齊 樹悲風無靜日 滿江明月有漁船 爺過忍讀爺仙試)라고 읊으니 옥산이 댓꾸(對句)하기를 "그대 내집이 어디냐고 물었지. 산 등진 강 앞에 싸리문이라네. 시시로 구름끼어 사장을 덮으니. 싸리문은 볼 수 없고 구름만 보일 뿐" (君問我家何處在 依山臨水庵荊問 有時雲顚沙場路 不見荊問只見雲)이라고 새소리, 바람소리, 구름소리 물굽이 등 자연을 두고 노래하며 한 세상을 보냈다. 여기 금오산에 음각(陰刻)된 글씨는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히 있으나 세월의 무심함이런가 풍마우세(風磨雨洗)로 마모되어 판독조차 어려우니 보는 이로 하여금 안스러움을 짓게 한다.
44) 옥산서병 玉山書屛 이옥산(李玉山)이 어린시절에 초서로 쓴 병풍.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17매로 된 글씨 첩이었던 것을 9폭의 병풍으로 고쳐 꾸몄다. 그중 13매는 42㎝이고 나머지 4매는 34㎝로 길이는 다르지만 너비는 모두 24㎝로 같다. 이옥산이 어렸을 때의 작품으로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씨체를 닮았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초서로 쓴 것이다. 병풍 말미에는 1965년 민태식이 자신의 소유였던 이 병풍을 강릉시에 주면서 본인의 발문을 1폭 붙였다
45) 구천서원(龜川書院) 의성군 구천면 위성2리 (고체비 마을안) 1721년(景宗1-辛丑)에 세워진 이 서원은 1868년(高宗5-戊辰)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서 뜯어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구천서원 육선생매판소(龜川書院六先生埋版所) 라는 작은 비석만이 남아있다. 이 서원의 명칭을 따서 구천면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구천서원에 모셔 내려오던 여섯분의 선현은 다음과 같다. 貞薺 박의중(朴宜中) 밀양인 文敬公直提學 栗亭 박서생(朴瑞生) 병산인 大司憲 注村 김효정(金孝貞) 선산인 이조판서 文貞公 槐亭 정휘(鄭輝) 영일인 學諭 玉山 이우(李瑀) 덕수인 枝村 장용한(張龍翰) 인동인 義城郡誌에서
46) 면적 71.05km2. 인구 1만 6,393(1999). 10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1989년천현면(泉峴面)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중심지인 법원리의 이름을 따서 법원읍이 되었다. 북쪽으로 적성면(積城面), 동쪽으로 양주군 광적면(廣積面), 남쪽으로 광탄면(廣灘面), 서쪽으로 문산읍 ․파평면(坡平面)에 접한다. 대체로 낮은 산지를 이루며, 노고산(老姑山:401m) ․금병산(錦屛山:293m) ․파평산(坡平山:496m)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평야의 발달이 미약한 밭농사지대로, 삼방리(三防里)에 있는 연풍(延豊)저수지에서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주요농산물로 쌀 ․밀 ․조 등을 생산하며 포도 ․참외 등 과일 재배도 활발하다. 사방으로 지방도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재】 자운서원(紫雲書院:지방기념물 45), 자운서원 묘정비(廟庭碑:지방유형문화재 77), 신사임당묘(申師任堂墓:지방기념물 14), 이이묘(李珥墓:지방기념물 15) 등이 있다. 율곡선생은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파주의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47)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조선의 제15대 왕(재위 1608~1623) 휘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恭嬪) 김씨의 소생.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기 때문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 의(俎)가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도 적통론(嫡統論)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정권(戚臣政權)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유영경은 주살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유영경의 세자교체기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李山海)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다가 오히려 대북파의 책동으로 임해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 ․능창대군(綾昌大君) 전(佺)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廢庶人)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1624년 서인 이귀(李貴) ․김류 ․최명길(崔鳴吉) ․김자점(金自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받들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단행하여 이이첨 ․정인홍은 죽이고, 광해군은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인조 19)에 죽었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내치(內治)로는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성지와 병기를 수리, 호패제(號牌制)를 실시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국경 방비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1619년 후금의 누루하치가 심양지방을 공격하여 명(明)나라의 출병요구가 있을 때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景瑞)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이 패주하자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여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는 등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
48) 숙종 肅宗 [1661~1720] 조선 제19대 왕(재위 1674~1720).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아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즉위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완성하고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하였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나 당시 예론(禮論)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왕은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출생한 왕자(景宗)의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다. 서인들이 이를 반대하자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을 유배하고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으며, 왕비 인현왕후를 폐위, 희빈(禧嬪)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그러나 인현왕후 폐위를 후회하던 왕은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을 민암(閔耈) 등이 타도하려고 하자 1694년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켜 폐비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 무고죄(誣告罪)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기간은 국내적으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로 선조 말 이후 계속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보았다.또 주전(鑄餞)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 ․자성(慈城)의 2진(鎭)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며, 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하였다. 또 재위기간에 《선원록(璿源錄)》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이 간행되었고,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명릉(明陵)이다.
49) 김장생 金長生 [1548~1631] 조선 중기의 정치가 ․예학(禮學) 사상가. 본관 광산.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시호 문원(文元). 선조 때 서인(西人)의 중진인 계휘(繼輝)의 아들. 효종 때의 예학사상가인 집(集)의 아버지.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 11)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란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明)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난 이후인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 ․남양(南陽) ․양근(楊根) ․안성 ․익산 ․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한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에 연루되어 처벌의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인목대비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속에서 더 이상의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은거하면서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의 양 주역인 김류(金찐)와 이귀(李貴)에 의해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추천, 장령(掌令) ․사업(司業) 등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어 동지중추부사 ․행호군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정식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것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 ․최명길(崔鳴吉) 등과는 물론 인조와도 심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사친의 추존을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인조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1630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임명되는 등 인조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원종의 추숭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그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장유(張維) ․이후원(李厚源) ․신민일(申敏一)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고, 죽은 뒤에 《사계유고(沙溪有故)》가 간행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에 제향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50) 박세채 朴世采 [1631~1695]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본관 반남(潘南).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 ․남계(南溪). 시호 문순(文純). 교리(校理) 의(零)의 아들. 원두추(元斗樞)의 사위. 김상헌(金尙憲)의 문인. 현석은 그가태어난 한양의 한 지명에서, 남계는 그가 만년에 기거한 파주(坡州)의 시내 이름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성균관유생 시절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 효종의 꾸지람을 받자 과거를 포기하였다. 주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과 학문적 교유관계를 가졌으며, 1659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나자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었으며,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집의(執義) ․동부승지 등에 등용되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자 윤증(尹拯) ․최석정(崔錫鼎) ․남구만(南九萬) 등과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좌의정에 올랐다. 소론의 힘으로 좌의정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ꡐ시비명변(是非明辨) 후의 탕평론(蕩平論)ꡑ과 ꡐ벽이단(闢異端)ꡑ을 강조하는 노론의 정치 ․학문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과 초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소론이지만, 죽은 뒤에 김간(金幹) ․김구(金構) 등 문인 대부분이 노론으로 이탈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선조대에 이이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모범으로 한 것으로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 ․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성리학 이론에 밝았으며, 예학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에 《남계집》이 있다.
51) 고종 高宗 [1852~1919] 초휘(初諱) 재황(載晃). 아명(兒名) 명복(命福). 초자(初字) 명부(明夫). 자 성림(聖臨). 호 주연(珠淵).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 민씨(閔氏).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민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민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 ․민겸호(閔謙鎬) ․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고종은 민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 ․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 ․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 ․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 ․미, 한 ․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 ․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 ․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洪範十四條)>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遼東領有]를 포기,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 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李範晋) ․이완용(李完用)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비(閔妃)를 시해,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종두(種痘) ․우체사무 ․단발령 ․양력사용 ․도형폐지(徒刑廢止) 등은 이 해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 ․정병하(鄭秉夏) ․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 ․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체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52)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1820~1898]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18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載晃)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53) 자운서원묘정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는 자운서원의 내삼문 밖 우측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비의 하단은 4개의 두꺼운 판석으로 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는데 높이 77㎝의 비좌에는 윗면에 복련문(覆蓮文)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文)과 괴운문(怪雲文)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谷雲)김수증(金壽增)이 썼다. 비의 상단에는 김수항(金壽恒)이 쓴 「紫雲書院 廟庭碑」라는 전액(머리글)이 쓰여져 있으며 비문 끝의 "崇禎五十六年癸亥"(숭정56년계해)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1683년 숙종 9)임을 알 수 있다.
54) 자운산 깊숙히 들어가면 율곡의 부모인 신사임당과 이원수공의 묘소를 비롯하여 한가계의 묘가 모여있다. 이렇게 한 집안의 묘가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은 성리학의 주자가례(走者家例)의 영향으로 고려 말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까지 친족 공동묘가 형성되었다 한다. 이이 선생의 묘소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다소 소박하게 되어있는데 돌아가실 때는 장례치를 비용이 없어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율곡기념관 옆으로 문성문(文成門)을 지나면 율곡 선생의 가족묘가 모두 13기의 묘가 있는데 정비된 곳에는 5기의 묘만 볼 수 있고 나머지 묘는 숲 속에 있어 잘 볼 수는 없다. 특이한 점은 선생의 묘가 역장묘라는 것인데 위에서 두 번째가 선생의 묘이고 그 아래가 신사임당 「율곡선생 묘」의 묘이다. 자식의 묘가 부모의 묘보다 위쪽에 있는 형태를 역장묘라 하는데 조선시대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형태로 아마 율곡 선생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선생의 묘 위쪽에 있는 묘는 첫 번째 부인인 노씨의 묘인데 원래 부부는 합장묘 형식을 취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연이 있다. 율곡 선생이 죽고 부인 노씨는 임진왜란을 맞게 되어 남편의 묘를 지키기 위해 몸종 둘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왜병들을 만나자 몸종과 함께 자결을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세 사람의 뼈만 남아 있으니 어느 것이 노씨의 뼈인지 구분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율곡 선생과 합장을 하지 못하고 따로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율곡선생 일가의 역장 묘역도를 살펴보면 제일 윗쪽 율곡선생의 부인 노씨묘 -그아래 율곡선생묘소-그 아래 율곡선생 맏형부부 이선과 곽씨합장묘-그 아래 율곡선생 부모 신사임당, 이원수공합장묘-그 아래 율곡선생의 맏아들 이경의 묘등 5기가 상하로 나란히 있고, 동쪽편에 율곡선생 부인 노씨묘와 같은 위치에 율곡선생 큰누님 매창의 시부모 조건과 이씨합장묘- 그 아래(율곡선생 묘소 약간 아래쪽) 율곡선생의 누님 매창과 매부 조대남의 쌍분묘-그 아래 동쪽으로 비껴서 매창의 둘째아들 조영의 묘-그 아래 율곡의 8대손 이욱의 묘, 서쪽편에는 율곡선생과 같은 높이에 율곡선생의 둘째 매부 윤섭의묘-그아래 율곡선생 5대손 이제의 부인 김씨묘-율곡선생의 장손 이제와 부인 정씨 쌍분묘-그 아래 약간 비껴서 율곡선생 둘째부인 김씨묘등 총13기이다.
55) 이이선생 신도비(神道碑) 향토유적 6호로 자운서원 좌측입구에 세워져있는 신도비는 선생의 死後 47년이 되는 인조(仁組) 9년(1631) 4월에 건립, 비문은 이항복이 짓고 신익성이 썼다. 재질은 대리석 석재에 전 후면에 각자했고 앞면에 몇 군데의 탄흔이 있다. 신도비는 율곡이이 선생의 일대기와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56) 반 구 정 경기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12호인 반구정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명상인 방촌 황희(1363~1452)정승이 갈매기를 벗삼아 만년을 보낸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하였다. 문산에서 서북방향으로 약 4㎞ 떨어진 임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반구정은 임진강의 푸른 물이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송림이 울창하여 예로부터 백구가 많이 날아들었다고 하며 지금도 많은 철새가 찾아드는 곳으로 사진작가와 조류학자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반구정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는데 이는 1915년 현재의 앙지대 자리에 있던 반구정(-1982년 8월19일 경기도 지정 문화재 제12호로 지정)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육각정을 지어 앙지대라 한 것으로 6.25당시 소실된 것을 1967년 재건한 것이다. 이 외에도 황의 선생의 동상과 영당이 있으며, 선생의 기념관이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반구정 옆에 있는 방촌 영당은 1452년 89세의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나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이 영당을 짓고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조 유학자 허목은 <반구정기>에서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 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 되면, 기러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20리에 바다가 있다"라고, 반구정에서 본 풍광을 묘사하였다.반구정에서 내려보면 그 아래로 임진강이 굽이 흐르는 것을볼 수 있다. 세상이 탁할수록 맑은 사람들의 삶은 그리운 것이어서 청렴의 상징처럼 익어버린 황희의 그 자취 어린 반구정 풍경마저 실컷 우아하게 기억된다.
57) 황희 선생의 묘소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1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생은 1363년(공민왕 12년)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여 90세인 1452년(문종 2년) 별세했다. 자는 구부 초명은 수로,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 본관은 장수이다. 고려말기부터 조선전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고 조선 건국 후 책봉된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정계에 포진한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실력자로 부상됐다. 세종 연간에는 영의정이 되어 왕을 도와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삶을 통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묘역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원모재 앞 언덕에 신도비가 있는데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졌으며 신숙주가 짓고 안침이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며 옆에 1945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58) 파 산 서 원 1983년 9월 문화재 자료 10호로 지정된 파산서원은 파평면 늘노리에 위치한 조선중기 서원으로 조선말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됐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이 서원은 조선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1493~1564)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1535~1598), 아우 절효공 성수종 (1495~1579) 및 휴암 백인걸(1497~1579)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선조원년(1568) 율곡 이이, 휴암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효종 원년(1650) 사액을 받았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그 뒤 다시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타 1966년 서원 본전인 사당만 복원하였다.
사당 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돌리고 정면 중앙에 솟을 삼문을 두었다. 사당은 이벌대의 기단 위에 전돌을 깔고 원형의 초석과 원기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으로전면칸은 퇴칸으로 개방되어 있고 각 칸에는 2분합의 띠살문을 달아 놓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이루고 있다.기둥머리에는 보방향으로 2단의 촛가지를 결구한 이익공의 공포형식을 이루고 있다.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짜여져 있다. 이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 등은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며 입구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59) 허준 선생 묘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9 에 위치한 허준선생의 묘는 1992년 6월 경기도 기념물 128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의 허준(1546~1615) 선생은 동양의 최대 의학서적인 '동의보감'을 썼다. 선생의 본관은 양천, 자는 청원, 호는 구암이다.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의 서자로 김포에서 출생하여 당대의 명의인 유의태 의 문하에서 의학을 배웠다. 선조7년(1574) 내의원 취재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혜민서 봉사를 거 쳐 전의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때 어의로서 왕을 의주까지 모셨으며 1604년 충근정량호 성공신 3등이 되었고 1606년 양평군에 봉해지며 숭록대부에 가자 되어 의인으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원년 (1609)에 다시 복직되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등이 전한다. 광해군 2년(1610) 16년의 연구 끝에 이루어진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청나라 등지 에서도 간행 보급되어 조선의학 내지 동양의학의 성전이 되었다. 선생은 우리나라가 낳은 대표적인 명의․의학자로서 한의학 중흥의 거봉이자 동양의 의성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별세 후 숭록대부에 추록되었다. 그 동안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 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되었다. 묘역은 약 50평의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김씨의 묘로 추정된다. 이들 두 묘 위에 허준선생의 생모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한기 더 있다.묘소에는 묘비, 문인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 쪽으로 파손되어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원비의 마모된 비문가운데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선생의 묘인 것이 확인되었다.
60) 윤관장군 능. 광탄면 분수리에 위치한 사적 제323호 윤관장군묘는 고려 예종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의 묘로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봉분정면에 상석이 놓여있으며 왼쪽에 묘비가 서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장군의 영정이 봉안돼있는 여충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윤관(?~1111)은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의 아들이다.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동현, 시호는 문숙이다. 고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 대원수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 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윤관은 문무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돌아가자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다. 고려 중기에 윤집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숙종 때 추밀원 지사 , 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1095년 윤관은 임의와 함께 사신으로 요나라에 가서 숙종이 왕위에 올랐음을 알리고 돌아왔고, 3년 뒤에는 조규와 함께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마찬가지로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윤관은 1104년(숙종9)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이 되어 여진족의 정벌에 나섰다. 이때 여진족 가운데 새롭게 일어난 완안부족이 크게 힘을 길러 고려 땅인 함흥 부근까지 쳐들어 왔다. 숙종은 여진족을 정벌하고자 임간을 시켜 물리치게 했으나 고려군은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어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 그러나 윤관이 이끄는 고려군도 여진족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고려군은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진족은 말을 탄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려군 보다 기동력이 빨랐던 것이다. 윤관은 이 일을 교훈 삼아 숙종에게 건의하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군대를 만들어 고려군을 빠르고 강한 기병 부대로 길렀다. 1107년(예종3) 여진족이 다시 국경을 침략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윤관은 원수로 임명되어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별무반을 포함하여 군사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섰다. 윤관은 새로 훈련시킨 별무반과 뛰어난 전술로 여진족을 물리쳐 135개의 마을을 점령하여 영토를 개척했다. 이어 1108년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진, 통태진, 진양진 등 아홉 곳에 9성을 쌓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두만강 건너에 고려 정계비를 세워 국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그 뒤로 여러 차례 침략해 왔고 자신들의 생활의 터전인 9성을 돌려 주면 다시는 침략을 하지 않겠다고 간청해 왔다. 이에 고려는 여진족의 간청과 9성이 너무 멀어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9성을 돌려 주었다. 여진족에게 9성을 되돌려 주자 윤관은 여진족 정벌에 실패했다는 추궁을 받아 벼슬을 박탈당했다. 또한 이익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다 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탄핵을 받아, 개경으로 돌아와 왕에게 보고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윤관을 아낀 예종은 재상과 신하들의 탄핵을 물리치고 1110년 윤관에게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라는 벼슬을 다시 내렸다. 하지만 윤관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인 파평(경기도 파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111년 세상을 떠났다
61) 공.순 영릉 위치는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조선조 제8대 예종의 비인 장순왕후 제9대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 제21대 영조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일찍 별세한 진종과 그의 비효순왕후를 모신 세 능을 가리켜 "공순영릉이라 한다.공릉은 장순왕후(1445~1461년)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세조 6년(1460년)에 세자빈으로책봉되어 인성대군을 낳은 뒤 17세로 승하했고, 성종 3년에 왕후로 추존 되었다. 이곳 공순영릉에는 조선조 초기, 중기, 말기의 능이 모여 있어 석물과 능제도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다. 순릉은 공혜왕후(1456~1474년)의 능이다. 공혜왕후 역시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세조 13년(1467년)에 가례를 올리고 성종이 즉위하자 비로 책봉되었으며, 성종 5년(1474년) 18세로 소생없이 승하하였다. 영릉은 진종(1719~1728년)과 그 비 효순왕후(1715~1751년)의 능이다. 통일로의 초입에 자리잡은 사적 제205호인 공순영릉은 어딘가 슬픈 내력과 애처로운 사연들이 깃들인 곳이어서, 왕실에서도 각별히 관리했다고 한다. 세간에서도 안쓰런 마음이 앞서 예부터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자욱한 관목 숲 사이로 조촐한 봉분과 재실 등, 정숙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 크고 엄숙함 보다는 정숙한 능원의 분위기가 더 짙다. 길에서 불과 800m, 잠시 들러 세 릉을 다 돌아보아도 1시간이면 족하다. 이어지는 길의 흐름도 공릉과 순릉, 영릉 순으로 알맞게 되어 있고, 순릉으로 오르는 길엔 맑은 실개천이 흘러 내리고 약수터 가 한 곳 있다. 물줄기가 사철 마르지 않아 항시 맑은 물소리를 숲 속에 안겨준다.
62) 율곡기념관 1986년 11월19일 교원연수원의 개관에 즈음하여 문화공보부 장관의 허가로 강릉 오죽헌에 소장되어있는 유품과 개인소장품을 복제(複製)한 것으로 진품에 거의 손색이 없으며 유품에 기록된 원문 내용을 전문가의 힘을 빌어 다시 정시하고 해석을 붙여 놓았다. 율곡선생 유품은 격몽요결서문, 시문, 벼루등 15점16점이고 전시됐고, 신사임당의유품 포도도,초충도,초서산수도,병풍,자수병풍등18점 총59점외에도 매창(율곡의 큰누나)유품: 매화도,묵화첨등 3종7점, 옥산(율곡의 둘째누나)유품 초서병풍, 매화 병풍, 국화도 묵화첨등 5종27점 등 총 43종 111점이 복사 소장돼있다.
63) 율곡문화재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8월 에 제향을 올리고,파주시민 화합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파주시의 향토문화축제인 율곡문화제가 매년 가을에 개최 되어지고 있다. 이 행사기간동안에는 율곡선생 추향 제례를 비롯하여 문화행사, 경축행사, 공연예술행사, 전시행사등이 다채롭게 펼쳐져 시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진수를 한껏 느낄 수 있다.
64) 이율곡설화(李栗谷說話)
조선 선조때의 명신 이이(李珥)에 관한 설화이다. 율곡의 설화는 율곡의 탄생담, 임진왜란을 예언한 방화정이야기, 퇴계와 대좌한 이야기 등이 전한다. 이 설화는 경기도․강원도 일대에서 널리 전승된다.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화석정이라 하고 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마루를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의 어가가 몽진차 임진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궃고 밤이 되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이때 대신 중 한 사람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율곡은 퇴계와 대좌한 일이 있는데 퇴계는 나이의 고하를 불문하고 제자들에게 절을 하도록 시켰다. 제자들이 불평을 하자 퇴계는 율곡이 동방의 대성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밖에 귀신을 퇴치하여 신부를 구한 이야기 등이 전하여지나 이는 이인설화가 율곡에게 부회된 것으로 본다. 율곡설화에는 율곡이 국난을 예견하고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힘쓴 큰 인물이라는 것이 부각되어 있다.
화석정(花石亭) 유래에 얽힌 설화
파평면 율곡리 산 100번지에 있는 화석정은 수많은 사연이 있는 곳으로 옛날 한양과 송도를 거쳐 신의주로 가는 국도변 임진나루터 길목 우뚝 솟은 기암절벽에 자리잡고 있는데 고려말 대유(大儒)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의 유지(遺址)로서 야은 선생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이라 하였다. 이조가 개국되자 1400년(정종 2) 길재선생은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명목으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화석정터에서 후배를 양성하면서 교하향교 훈도를 지냈다. 그러나 수차 조정에 출사하라는 성화로 경북 금오산에 은거 학문을 연구하여 후배 양성에만 전념 세월을 보내던 중 1419년(세종 1) 67세로 별세하니 수많은 문인들이 선생의 얼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웠는데 세종대왕은 그의 충절에 탄복 금오서원(金烏書院)으로 사액하고 충렬공이라 시호를 내리셨다 한다. 그 후 폐허된 자리에 율곡선생의 5대조이신 강평공 이명신(李明晨)이 서기 1443(세종 25년)에 정자를 창건하고 양원 이숙함(楊原李淑緘)이 화석정으로 이름을 지었다 하며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으로부터 수축한 후 율곡선생께서 손수 새로 터를 닦고 중수한 유서깊은 정자이다. 선생은 국사의 여가와 퇴관 후 여생을 보내면서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중국 사신들이 자주 찾아 금시청유(昑詩淸遊) 하였다 한다. 정자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정하에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주야로 항선(航船)이 오르내리며 밤에는 어화(고기잡는 등불)로서 호화 찬란하였으며 당대 여류가인 운초(雲楚)라는 가수는 송경을 지날 때, 온종일 꾀꼬리는 울고 이원성은 고려를 통곡하네(盡日黃鶯啼宛是哭高麗)라는 시조를 읊으며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읊었던 것과 같이 이곳의 물소리는 또한 말할 수 없는 선경이다. 그러나 유서깊은 명승으로 알려진 화석정은 우리민족의 비극인 선조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득이 선조대왕께서는 의주로 파천하게 되어 4월 29일밤 어두운 침침한 임진나루 절벽에 당도하니 마침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져 뒤쫓는 왜적 때문에 빨리 강을 건너가야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난감하기 이를 때 없어 중신들과 의논 끝에 임진나루 옆에 있는 순청(巡廳)에 불을 질러 도강키로 하고 불을 지르니 워낙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라 별로 시원치 않아 할 수 없이 호종하던 이항복이 화석정에 올라가 이에 불을 지르니 화광이 충천하여 무난히 배가 건너갔다 한다. 이 화석정은 율곡선생이 이럴줄 미리 알고 정자에 있을 때 들기름을 제자들에게 수시로 한 종지씩 가져오라 하여 매일같이 기둥, 도리, 석가래 등에 반질반질하게 먹이어 두었었다 하며 또한 백사 이항복도 이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소실된 것을 율곡의 증손 이후지와 이후방이 재건하였으며 6․25사변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66년에 국회의원 신윤창의 주선으로 일부 정부보조와 각지 유림들의 정성으로 새로 복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화석정(花石亭)이란 현판을 걸게 되었다. 따라서 서기 1973년 군비 보조로 유림들과 주위 환경을 정화하고 1974년 9월 26일 지방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으며 1980년 파주시 예산으로 보수와 환경정리를 새로 하고 자주 정화를 하고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수시로 줄을 이어 찾아오고 있다. 정내에는 많은 시액(詩額)이 있었으나 그중 유명한 것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이율곡 8세 작시로서 백세현판이라고도 전해지며 우계 성혼(牛溪成渾)과 손목(孫穆)이 92세때 근서한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서거정, 이숙함, 이의석, 이의무, 권람, 정철, 오억령, 송시열, 박세채 등이 화석정에서 시조를 읊었다 한다.
65) 성수침(成守琛) 1493(성종 24)∼1564(명종 19). 조선 중종·명종 때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이때부터 과업(科業)을 폐하고 《대학》과 《논어》 등 경서공부에 전념하였다.1541년 유일(遺逸)로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牛溪)에 은거하였다.1552년(명종7)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산현감(禮山縣監)·토산현감·적성현감(積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1564년 사지(司紙)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하였으며, 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미두(米豆)와 역부(役夫)를 지급하여주고 사헌부집의에 추증하였다.
조선 초기에 성리학의 토착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사상으로 나타났거니와 이들은 대의명분과 요순(堯舜)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자,은일(隱逸)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썼는데 〈방참판유령묘갈 方參判有寧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