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소개 Ⅱ
(2)1974-2024년, 개원 50주년 맞는
L. A. 관음사
덕광德光 김형근(金詗 根) (본지 발행인)
미주에 한인이민자들이 몰려들어 한인사회를 형성하던 초기인 1974년에 미주에서는 시카고, 로스 엔젤레스, 뉴욕시 등 한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에 한국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시간순으로 보면 시카고 불타사,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뉴욕 원각사이다. 50년 전에 건립된 이 사찰들은 이제 그 지역의 대표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미주에서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사는 로스 엔젤레스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던 관음사는 2006년 도안스님 입적 후 후임 주지가 없어서 이제는 로스엔젤레스 불교계에서 그 존재감이 거의 없어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 3개 사찰의 간략한 연혁과 사진을 3번에 걸쳐 소개한다. 지난 호에는 뉴욕원각사를 소개했고, 이번은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이다.
1974-2024,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미주한국불교 대표 사찰이었던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1974년-2023년
창립 당시 상황
당시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시절이었다. 1972년 4월부터는 이미 대한항공이 오늘 날처럼 직항이 아니고, 서울-도쿄-호놀룰루-로스 엔젤레스로 이어지는 일본과 하와이를 거쳐 로스 엔젤레스로 오는 노선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도 지금도 미국에서는 로스 엔젤레스가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1972년 12월 30일 카멜 삼보사 개원식에 운허, 구산 스님을 모시고 젊은 정달 스님은 개원식 마치고, 숭산스님이 있던 프로비덴스 선원에도 잠시 있었다. 그러던 중 달마사 주지로 있던 한계정 스님이 프로비덴스를 방문하였는데, 방문을 마치고 함께 로스 엔젤레스 달마사로 갔다. 정달스님은 달마사에 적을 두고 주중에는 일을 하고, 일요일에는 달마사 주지 한계정 스님을 도와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누군가 일을 한다고 이민국에 고발하는 바람에 끌려갔으나 신도들의 도움으로 나오게 하루밤 지내고, 나오게 되었으며 달마사에서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정달 스님은 1974년 3월에 로스 엔젤레스에서 관음사를 개원하였다. 이 개원식에는 최동수, 이천용 거사 등 많은 사람들의 열성적인 도움이 있었다. 안창호 선생 아들인 필립 안과 월남계열의 미국인 스님인 마이클 해론 변호사 등도 와서 축사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호응에 힘입어 순항하던 관음사는 개원 1년이 지난 1975년 5월에 주지 정달스님이 승복을 벗고 스님생활을 정리하고 , 재가 신자로 포교를 하겠다고 신문에 광고를 하였다.
이런 상황을 맞이하여 전임 주지였던 정달스님은 한국에서 알던 당시 조계종 총무원 재정국장이던 도안스님을 관음사 신도들에게 추천하여 새로운 주지로 도안스님은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로 오게 되었다.
1975년 11월 16일 L.A. 관음사 새 주지에
도안스님 취임과 폭풍 성장
6개월 후인 1975년 11월에 관음사 2대 주지로 온 도안스님은 이후 관음사를 이끌고 하루가 달라지는 폭풍 성장을 하였다. 시기적으로 당시에 이민을 막 온 사람들이 사찰을 많이 찾기도 하였지만 도안스님은 근면, 성실하고 부지런하였다. 그런 것이 사찰 발전으로 나타났다.
도안스님 주지 취임 6개월 후인 1976년 4월 29일 관음사는 단독주택을 구입하여 확장 이전하였다. 집 가격 6만 8천 달러. 다운페이 2만 5천달러. 주소는 451 5. Serrano Ave.
이것이 가능한 것은 50년 전이지만 당시에는 주택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50년이 흐른 2024년 현재 미국 부동산 가격은 너무 많이 올랐다. 이것은 미국사회의 큰 사회문제이다.
도안스님이 미국에 도착한 1975년 11월 이후 약 10년이 지난 시기인 1986년 12월 관음사는 현재의 큰 건물로 확장이전을 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 한국불교계 뿐만 아니라 로스 엔젤레스 전체 불교계에서도 가장 큰 건물이었다. 이렇게 큰 건물은 관음사 발전과 도안스님의 행보를 넓히는 원천이 되었다. 켈리포니아를 방문한 달라이 라마도 관음사를 방문하였으며, 국제행사도 관음사에서 할 수 있었다. 큰 건물로 이사를 하기 전에 비하여 큰 건물로 이사 후에는 들어가는 비용은 10배가 늘어났으나 그에 비례하여 헌금액수도 불어났다고 도안스님은 필자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도안스님은 문화와 교육에 초점을 두고 일찍부터 전시회와 다양한 학술세미나 개최, 합창단 운영, 라디오와 TV 방송, 신문 등 언론을 통한 포교, 불교대학을 일찍부터 꾸준하게 운영하였다. 도안스님은 어린이 포교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고, 참여불교를 지향하면서 신도들의 이민생활을 돕는 봉사단체 운영과 남북불교 교류와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매우
열심히 하였다. 도안스님이 영어는 잘하지 못하였지만 America Buddhist Congress 참여하였고, 스리랑카, 태국, 중국 등 타민족과 국제연대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도안스님 주지 시절 한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스님들이 관음사를 방문하여 설법도 하고, 행사도 하였다. 그리하여 도안스님 시절 관음사는 큰 건물에 걸맞게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하였다. 이로 활동과 역할로 인해 도안스님은 숭산스님, 법안스님, 대원스님등과 더불어 전 미주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평가를 받았고, 관음사는 로스 엔젤레스에서
뿐만 아니라 전 미주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2006년 도안스님의 입적 후 관음사는 큰 혼란에 빠졌고 로스 엔젤레스 한국불교계도 구심점을 잃었다. 도안스님은 입적 전에 후임자를 정하기 위해 한국에서 범어사 출신으로 젊은 광원스님을 초청해 오기도 하고, 여러 스님들을 오게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후임자를 정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그 후보자들이 도안스님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안스님 입적 후에는 관음사 이사들이나 신도들의 추천으로 범휴스님, 하와이 무랑사 도현스님 등 많은 스님등이 후임 주지로 취임하였다. 대표적으로 범휴스님은 2007년 5월에 주지 취임식도 성대하게 하고 의욕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범휴스님의 포교방
향과 기존 신도들과 맞지 않아서 도중에 자진 하차 하였다.
이렇게 도안스님을 이어갈 뚜렷한 후임 주지 스님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주지 스님이 올 때마다 내부 갈등도 많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신도들이 빠져 나갔다. 도안스님 입적 후 18년이 흐르는 동안 이제 관음사는 행사도 없고, 불교인들이 기억 속에서 사
라져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 빨리 정상화되기를 바란다.
아래는 도안스님 주지 시절 관음사에서 한 것 중에 몇 가지를 골랐다.
● 1979년 3월 19일 L.A. 관음사 KBC방송망을 통해 미주 첫 불교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1시간 방송하고 저녁에는 재방송으로 2시간 방송하였다. 이 방송을 약 3년간 지속되었다.
● 1980년 5월 22일 L.A. 관음사 부처님 오신 날 기념 학술쎄미나를 능가대선사, 박성배 교수, 김하태 박사 연사로 하여 한국문화원 강당에서 개최. 주제 종교의 사회 참여,
● 1984년 8월 L.A. 관음사 사회복지 비영리법인 한미 불교봉사회 설립.
● 1986년 12월 21일 L.A 관음사 4265W. 3rd St. 현 관음사 자리로 확장이전 함.
● 1991년 4월1일부터 19일까지 도안스님과 법타스님이 북한불교계 시찰하고 돌아 옴.
● 1997년 9월21일 L.A. 관음사는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동산반야불교대학 학장인 김재일 법사와 협정을 맺고 2년 과정의 '조계종 동산불교통신대학 L.A.분교 개교식'이 있었다.
● 1999년 5월 30일 : L.A.관음사는 한미불교TV방송“을 채널 43 케이블 TV를 통하여 오전 10시부터 30분간 방송, 이후 1년 후인 2000 5월부터는 1시간으로 시간을 늘림.
● 2000년 3월 5일 L.A.관음사에서는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999년 조계종 포교사 시험에 합격한 20명의 동산불교대학 출신들이 조계종 포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