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이호윤
오래된 꿈처럼 박제된 하루가 있다. 퇴근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저녁은커녕 화장실 갈 생각조차 못 할 만큼 바빴던, 쏜살같이 날아가 버린 하루였다. 버스에서 내려 텅 빈 길을 걸어 대문도 없는 마당에 들어선다. 아래층 형님네 현관 앞 불은 꺼진 채 깊고 어두운 적막만이 흐르고 있다. 작달막한 키의 영산홍 담장 안 2층 철제 계단을 조심스레 한 발짝씩 올라간다. 무거운 내 몸뚱이보다 더 육중한 철문 앞에 마주 서고 나서야 천천히 가방 속을 뒤져 열쇠를 찾아 쥔다. 구멍이 어디더라. 컴컴한 내 그림자가 살짝 몸을 비틀어 무심한 달을 흘깃 쳐다본다. 달빛이 쓰윽 구멍을 비추어주면 비로소 열리는 문. 달은 줄곧 나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너도 이제 그만 집에 가지 그러니.
집안은 너무나 조용해 숨소리 하나 없다. 아직도 서성대던 달이 거실 커튼 사이로 기웃거린다. 그렇지. 너도 가 봐야 기다리는 이 하나 없는 신세인 게야. 거실 한편에 가방을 내려놓고 딸아이 방문을 살그머니 열어보았다.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보물 같은 아이.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 잠든 아이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아래층 형님네서 온갖 귀염을 받으면서도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오늘처럼 퇴근이 늦은 날엔 사랑스러운 얼굴도 안쓰럽게만 보인다. 가만히 머리를 쓸어주고 나와 거실 불을 켜면 전혀 다른 세상이다. 장난감이며 책들로 어질러진 바닥과 싱크대의 더러운 그릇들. 세탁실에 쌓여있을 빨랫감이나 걷어들이지 못한 건조대 위 옷가지들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 출근했던 아침의 분주함이 그대로 멈춰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사실 가방 속엔 검토해야 할 서류뭉치가 두툼하다. 문득 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꿈을 꾸었다. 열쇠를 꽂기도 전에, 아니 계단을 다 올라서기도 전에 살며시 열리는 문. 아내다. 그녀가 얼굴을 내밀며 환하게 미소 짓는다. 가방을 받아든 그녀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이다. 힘들었나 보네. 식탁 위에 차려진 간단한 요깃거리도 따뜻한 눈길로 위로한다. 조심스레 열어본 방문 틈새로 본 곤히 잠든 아이의 옅은 미소도 평화롭다. 말끔히 정돈된 거실과 주방이 피곤한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것이 꿈이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뿐더러 꿈을 자작하고 있었다.
‘내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피로에 절은 외로운 밤이면 아내 생각이 간절했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곤 했다. 몸살이 났던 어느 밤엔 아내가 재빨리 나를 침대로 밀어 넣고 간호해 주는 상상도 했다. 이따끔씩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을 재기도 하고 팔다리를 주무르며 좀 더 일찍 퇴근하지 그랬냐고 잔소리도 하겠지. 혼자서 약 상자를 뒤질 필요도 없이 내게 따뜻한 물컵과 약을 손에 쥐여줄 거야. 물론 데운 물을 넣은 핫팩을 내 품 속에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겠지. 아침엔 보드랍고 담백한 흰죽을 쑤어 놓고 병원에 전화해 예약도 해주고 말이야. 상상만으로도 나른해지는데 풀어진 실타래처럼 그녀와의 장면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펼쳐졌다.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졸고 있는 한가로운 내 모습. 하아. 정말 아내가 있더라면. 상냥한 눈으로 이따금씩 ‘아, 그랬어?’ 하며 내 하루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고단함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어디선가 개가 컹컹 짖는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벌떡 일어나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청소를 시작한다. 식탁과 싱크대를 오가며 설거지도 하고 냉장고를 뒤져 간단한 간식도 만들어둔다. 소파에 앉아 건조대에서 걷어온 빨래를 개켜 옷장에 넣어두고 나면 비로소 남편이 올 시간이다. 나보다 더 늦은 시각까지 일하는 그이. 먼저 집에 들어가라는-그래봐야 한두 시간이지만- 그의 말은 어서 집에 가서 쉬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나’라는 아내가 있지 않나. 그에게만큼은 쾌적하고 아늑한 안식처로 돌아와 쉬게 하고 싶었다. 나는 가지지 못했지만 남편은 그 행복을 누리기를 바랐다.
시간을 날아오르면서 문득 저 아래의 보잘것없고 미숙한 나를 발견하곤 했다. 오랫동안 허기와 갈증을 느끼며 결핍에 괴로워했던 모습들. 가지지 못한 것, 가질 수 없는 그 무엇들을 놓아버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것들, 주고 싶은 타자他者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졌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줄 수 있게 되어서야 겨우 부모님의 사랑에도 결핍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더 좋은 것은 그 모든 결핍이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돌려받지 못하는 사랑, 우정, 신의 같은 것들조차도. 사랑하는 그 자체로 행복이란 걸 다행히 나도 알게 되었다. 내일도 나는 남편에게 상냥한 아내를, 딸에게는 다정한 엄마를 선물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망설임 없이 두터운 우정을, 첫눈에 반한 이에겐 오해의 두려움 없이 잔뜩 호의를 퍼부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아내’를 소망하지 않는다. 소망이 없는 이 평온함이 더없이 고마울 뿐이다.
첫댓글 '내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제목부터 발상이 신선합니다.
내가 남편의 입장이 되어 아내에게 간호를 받는 상상이 기발해요.
현실에서 남편이
'나'라는 아내에게 쾌적하고 아늑한 안식처로 돌아와 쉬게하고 싶은 마음이 따뜻하네요. .
사랑하는 그 자체가 행복이란 걸 알게 된 시화 님 글에서 한 수 배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하는 주부의 고충과 외로움을 잘 드러낸 작품입니다.
나도 한 번 쓰고 싶습니다.
<나에게 남편이 있다면>
해 드리고 싶은 일들이 참 많다는 것을 선생님 글을 토대로 생각했습니다.